부자가 되는 길은 그렇게 어려울까?
그러니까 작년 봄이다.
1994년 봄.
꽃샘추위가 한창 기승부리던 그때.
49살이던 김태풍은 회귀를 했다.
49살에서 23살로.
정확하게는 26년을 거슬러 돌아온 것이다.
사실, 회귀 전, 김태풍의 인생은 어떻게 보면 화려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또 어떻게 보면 숨이 턱턱 막히는 고구마 같은 인생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과고 졸업, 과학 특성화 대학 학부 졸업, 그리고 석사 학위, 또한 박사학위 취득.
남들의 눈에는 정말 엘리트다운 코스만을 밟아왔던 김태풍.
그는 남들이 다 가는 군대도 가지 않았고.
병역특례요원, 즉 전문연구요원으로 군 복무를 마무리했다.
국내 최고 그룹, 일성그룹 종합기술연구원에 다니면서.
일성제약의 큰 기둥이 될 거라는 수많은 찬사를 받곤 했다.
“태풍아. 너는 직업도 좋고 학벌도 다 좋은데, 왜 그렇게 여자를 못 만나?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이 녀석아.”
유일한 김태풍의 단점.
그렇게 잘난 모습인데도 장가를 못 가고 49살까지 총각이었던 김태풍.
그래서 매번 그의 부모님들은 그에게 그런 잔소리들을 쉴 새 없이 늘어놓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김태풍은 자신이 진행하고 있는 연구 자체가 너무나도 좋았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된다면, 그 사람의 앞날은 갈수록 더 잘 된다고 한다.
그래서 더 많은 노력을 쏟아낼 수 있는 것이고.
그 결과, 얻어진 열매는 더 달콤할 수밖에 없다.
물론 김태풍도 달콤한 열매를 맛보았다.
그가 합성한 신약 후보 물질.
그것이 미국 임상시험의 무대에 진입했던 것이다.
연구자로서 평생 하기도 힘든 그런 일을 그는 해낸 것이다.
일성그룹 ‘올해의 연구자 대상’을 비롯하여 한때 국내외 학회에서 여러 가지 상들까지 휩쓸었던 김태풍.
그의 인생이 그렇게 반짝 꽃을 피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중간에 작은 구멍 같은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사실, 신약 개발 과정이란 게 보통 힘든 게 아니지 않은가.
수많은 역경을 뚫어내야 하고.
그때마다 김태풍 같은 연구자들은 산적한 여러 문제 해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리고 실제, 김태풍도 적극적으로 모든 일에 임했다.
“사장님. 갑자기 긴급 보고를 드리게 됐지만, 이건 정말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국내 임상 환자들의 데이터를 다시금 검토하다가 저희 내부적으로 발견한 문제인데, 아무래도 면역계통의 부작용이 의외로 심각할 것 같습니다. 장기 복용시 나타날 수 있는 문제라 저희 선에서 미리 확인이 안 된 부분입니다.”
“뭐? 부작용이라고?”
“네. 하버드의대 알렉산더 포거티 교수에게도 질의한 결과, 그분의 의견도 저희 의견과 비슷했습니다.”
“음. 그래서?”
“제 생각에는 신약 IS795043의 화학 구조를 일부 변형시킨다면, 특정 화학 그룹이 제거되면서 그런 부작용이 감소될 가능성이 큽니다.”
“음.”
“또한, 좀 더 개량된 합성 과정을 통해서 아마 지금보다 더 나은 신약 후보 물질을 도출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저한테 몇 달의 시간을 더 주신다면…….”
“이봐!! 김태풍 씨!!”
“아? 네? 사장님?”
“그래서 그걸 중단하자고?”
“아, 그게…… 네! 사장님! 안타깝지만, 미국 쪽 임상을 잠깐 중단하는 게…….”
김태풍은 일성그룹 종합기술원 원장이자 사장 직책을 가진 그에게 그런 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나 결국 그 의견은 묵살당하고 만다.
“나는 그 의견을 절대 받아들일 수가 없네!”
“네?”
“이미 국내 임상 결과, 큰 문제가 없었다고 했잖아!”
“사장님, 그건…….”
“조용히 해 봐! 한국대 의대 박 교수, 장 교수, 그 사람들이 다 그렇게 발표했어! 내가 모를 줄 알아?”
“아.”
“이봐! 그 정도 부작용은 환자라면 감내해야 할 수준이 아닌가? 당신도 알다시피, 미국 쪽 임상시험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힘든 줄 몰라? 그걸 이대로 철수하자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사장님. 하지만 혹시 나중에…….”
“이봐! 그냥 입 닥치고 가만히 있어! 우리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자네는 그냥 신경 꺼!”
그리고 3년 뒤, 결국 미국 임상 3상 시험 실패. 임상시험 중단.
더 나아가 미국인 환자들의 집단 소송 사건까지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신약을 장기 복용했던 국내 환자들까지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임상시험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지금껏 참고 있던 그들 역시 법적 대응을 시작한 것이다.
그 파문은 너무 컸다.
‘내가 진짜 바보였어. 그때 무조건 내 의견을 굽히지 않는 건데. 그렇게 의견을 접는 게 아니었어. 차라리 그때 임상 1상 때, 내 의견을 고집했더라면…….’
그나마 그 임상시험으로 사망자가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막대한 추가 비용을 회사에서 떠안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결국, 그런 일이 터지면서 김태풍은 신경쇠약증에 시달렸고, 밤마다 수면제를 먹지 않고서는 잠을 잘 수가 없게 되었다.
특히, 권고사직을 당하기 전까지, 김태풍은 근 1년간 미친 듯이 관련 자료들을 파헤쳤고, 온갖 논문들과 각종 FDA 보고서들까지 섭렵하며 문제 요인을 밝혀냈다.
하지만 이미 틀어진 일이다.
그리고 사직 결정이 떨어진 며칠 전.
회사에서는 갑자기 괴상한 뉴스 보도까지 해 버렸다.
-……참으로 답답한 소식입니다. 저번 일성제약의 IS795043 임상 실패 원인이 밝혀졌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해당 물질을 합성한 연구원의 도덕적 해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특히, 이 임상시험 연구의 핵심 관계자인 김 모 연구원은 신약 약물의 부작용에 대한 정보를 이미 갖고 있으면서도 이를 조작 혹은 묵인한 것으로 판단되어, 현재 일성제약 측에서는 형사고소를 추진하고자…….
순 우라질 놈의 회사.
모든 책임을 김태풍에게 잠시 넘겨, 국민적 공분을 피해가려는 술책을 쓴 것이다.
그 술책을 쓴 곳이 바로 다름이 아니라 국내 최고의 그룹, 일성그룹이었다.
물론, 법적 판단은 그다음 일이라, 우선은 여론의 눈을 피해가려는 사기성 술책을 쓴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김태풍은 실직을 하게 된 거고.
그렇게 힘없이 회사 주차장으로 걸어가던 중.
하필 그는 날벼락같이 하늘에서 떨어진 번개를 맞은 것이다.
‘뭐, 그 덕분에 하늘이 도와 회귀를 했으니까, 그 더러운 꼴을 안 봐서 참 다행이란 말이야.’
그런 지난 일들이 그렇게 문득문득 떠올라, 갑자기 씩 웃는 김태풍.
한편, 김태풍의 앞 책상 쪽에는…….
증권회사 모 담당자가 먼저 온 고객과 상담을 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는 모습이다.
그 일이 끝날 때까지.
그래서 잠시 소파에 앉아 대기하고 있는 김태풍.
그 와중에 무료한 탓인지.
김태풍은 자신의 지난 일들이 계속 새록새록 떠오르고 있다.
그러고 보면, 아마 회귀 직전, 그 주차장에서 자신은 이렇게 욕을 했었다.
“에라이! 이 거지 같은 세상아! 니네들끼리 잘 처먹고 잘 살아라! 내가 다신 여길 쳐다도 안 본다! 쌍놈의 사장! 쌍놈의 회장! 임원들한테 재떨이나 던지고, 콧김이나 뿜으며, 잘도 살아라! 존나 잘 먹고 잘살아라!!”
긴 세월을 바쳐 공헌한 회사에서 그런 식으로 쫓겨나게 된 거라, 그땐 그렇게 악한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 김태풍 씨. 죄송합니다. 먼저 온 손님이 너무 길게 이야기를 하시는 바람에……. 아! 이제 이쪽으로 오셔서 앉으시죠.”
직원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김태풍에게 손짓했고.
드디어 자신의 차례가 된 김태풍은 그 증권회사 직원 앞으로 가서 의자에 앉는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머릿속에 미리 정리해 둔 내용들을 주르르 읊고 있다.
“미국 회사 세 군데 주식을 매수했으면 합니다. 각 회사 이름들은…….”
과거, 학자적 호기심 때문에 논문과 특허를 공부하는 데 수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김태풍.
그런데 그 와중에 단순 취미 삼아 들어갔다가, 아주 호된 맛을 봤던 주식 투자.
그때 주식 투자가 왕창 망했기 때문에, 그래도 지금의 김태풍에겐 큰 도움이 되는 게 사실이다.
그 덕분에 관련 지식이 쌓인 것이다.
“네. 종목 선택이 아주 구체적이시군요? 공부를 많이 하셨나 봅니다? 이렇게 투자 종목들을 정확하게 찍어 오셨고…… 근데 현재 개인의 법적 해외 투자 한도가 1억 원인 것은 잘 알고 계시죠?”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방금 말씀하신 대로, 버텍슨, 웹플릭스, 알란포스. 이 세 군데 회사 주식을 매수하는데 2천만 원, 2천 2백만 원, 2천 3백만 원. 이렇게 투자하면 되겠습니까? 뭐, 환율 때문에 정확한 계산을 제가 다시 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해 주십시오.”
“근데 해외주식 매수 건이라 좀 수수료가 센데, 그건 아시죠?”
“네.”
“그럼 여기 서류들마다 도장을 찍어주시겠습니까?”
이미 투자 종목들을 정하고 온 터라,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진행이 된다.
이제 김태풍은 총 6천 5백만 원을 미국 IT 기업들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이 6천 5백만 원의 투자금은 김태풍이 각기 다른 곳에서 마련한 돈이다.
6천 5백만 원 중의 4천만 원은, 김태풍이 이전 생과 동일하게 일성그룹 장학재단 산학장학생으로 뽑혀서 얻게 된 돈이다.
먼저, 작년에 1년 치 2천만 원 장학금을 지급받았고.
그리고 올해 3월 2일 자로 2천만 원을 더 지급받아, 총 4천만 원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나중에 일성그룹에 취업하지 않으면, 이 4천만 원은 일성장학재단에 그냥 돌려주면 끝이다.
물론, 김태풍은 일성그룹에 다시는 취업할 생각이 없다. 다만 4천만 원을 투자를 위한 종잣돈으로만 삼는 셈이다.
한편, 나머지 2천 5백만 원은, 작년에 과외 아르바이트 등으로 모은 돈을 국내 주식 투자에 집중한 끝에 운 좋게 돈이 그렇게 불어난 것이다.
“네. 그럼 이대로 주식 매수 주문을 넣도록 하겠습니다. 현지에서 매수 체결이 되면 그때 제가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짧게 일을 마친 김태풍은 곧바로 증권회사를 나왔다.
그리고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하고 있는 김태풍.
그러나 이번에는 택시를 잡는 대신에.
학교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얼른 버스정류장 쪽으로 뛰어가고 있다.
어쨌든 6천 5백만 원 투자는 끝이 났다.
앞으로 1년 뒤.
그는 그 결과를 지켜볼 생각이다.
‘뭐, 잘 되겠지. 분명 버텍슨, 웹플릭스, 알란포스, 이 회사 중에서 한 군데 회사는 무려 50배나 올랐으니까. 근데 나머지는 10배? 20배? 뭐, 기억이 잘 안 나서 분산 투자를 한 거니까, 뭐든 나쁘지 않은 결과가 나오겠지.’
김태풍은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그것만 해도,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불과 몇 초 앞도 모르는 상태에서 주식 투자를 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자신이 주식을 사는 순간, 이상하게도 그 주가가 떨어지는 것은 너무나도 흔한 일상의 모습이 아닐까.
한편, 주가가 무섭게 치고 올라가고 있어 허겁지겁 주식을 매수해 놓고 보면, 그게 바로 상투인 것.
그런 상투를 잡고서 무섭게 낙하하고 마는 수많은 사람.
그런데 김태풍은 미래가치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남들과 달리.
그는 그나마 달달한 투자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 * *
“태풍아. 그 소식 들었어?”
“뭐?”
3월 중순. 여전히 랩(실험실) 바깥은 꽃샘추위로 한파가 몰아치고 있는데.
그러나 랩은 학교 차원에서 틀어주는 온풍난방 덕분에 후끈하다.
가벼운 옷차림에 실험 가운을 입고서 분석용 샘플 제조에 한창이던 김태풍.
그는 자신에게 말을 거는 배진수를 쳐다보며 잠시 행동을 멈춘다.
“무슨 소식?”
“강신혜 박사님이 그러시던데, 오늘 오후에 랩으로 외부 손님이 오신다던데?”
“외부 손님? 누구?”
“너 깜짝 놀랄걸. 하버드대 교수님이라고 하셨어.”
“어? 하버드대에서?”
하버드대라는 말이 나오자 바로 약빨이 생긴다.
그만큼 학교 지명도가 높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김태풍.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던가.
그러나 기억이 아리송하다.
‘근데 하버드대에서 대체 누가 온다는 걸까?’
호기심이 잠시 생겼지만, 하던 일이 있다 보니 이내 생각을 접은 김태풍.
우선 방금 하고 있던 샘플 준비부터 마무리한 뒤.
분석용 샘플들을 들고서 곧장 공동기기실로 가려고 하던 김태풍.
그런데 그때…….
때마침 강민수 선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야! 다들 내 말 잘 들어!”
무슨 공지사항이라도 있나?
“방금 전,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신데…….”
뭐? 교수님?
“오늘 오후 4시에 긴급 랩미팅을 하기로 했어.”
뭐? 긴급 랩미팅이라고?
김태풍은 정색하며 귀를 더 기울인다.
“개인당 발표시간은 딱 5분. 이때 컨셉 소개와 주요 데이터만 준비해. 외부 손님 앞에서 발표할 거니까, 무조건 콘셉트 이해 쪽에 초점을 맞춰.”
그렇게 외치고 있는 강민수.
어쨌든 그의 말을 다 들은 터라 김태풍은 곧장 랩을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그런 김태풍을 바로 발견한 강민수가 눈을 반짝이더니 말을 걸어온다.
“야. 김태풍.”
“네?”
김태풍이 고개를 돌리자, 바로 말을 잇는 강민수.
“너, 작년에 네이처지에 투고한 그 논문 결과 있지?”
“아. 왜요?”
“아까 교수님 말씀이 넌 그걸 발표하라고 하던데.”
“그래요? 네. 그렇게 할게요.”
“준비 잘해라.”
“네. 아! 잠깐만요. 선배님. 근데 외부 손님은 대체 누구예요?”
김태풍이 묻자, 등을 돌리려던 강민수는 멈칫한 뒤, 좀 더 길게 설명을 한다.
“나도 대충 들었는데, 하버드대에 계시는 데릭 호킨스 교수님이라고 들었어. 우리 교수님 후배라고 하고. 근데 그분이 하버드대에서 테뉴어(종신 교수)를 받은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더라고. 뭐,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늘 천재 소리를 듣는 사람이라고 하고.”
“아, 네.”
약간의 정보를 얻은 김태풍은 우선 샘플 분석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곧장 공동기기실로 들어간 김태풍은 여러 기기를 이용해서 샘플 분석을 진행했고.
그 일을 마친 뒤,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학교 전산망을 통해, 하버드대 데릭 호킨스 교수에 대한 이력을 조회해 봤다.
‘음. 역시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만하네.’
데릭 호킨스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그의 논문들.
총 게재논문 숫자가 300건을 넘어설 정도로 대단하기도 했지만, 질적 수준도 어마어마하다.
사이언스, 네이처 등에 발표된 그의 논문 숫자는 이미 10건을 넘어선 상태다.
평생 과학자들이 단 1건도 사이언스, 네이처에 발표하기가 힘든 상황인데도, 그는 무려 10건이 넘게 논문을 게재한 것이다.
또한, 각종 국제 학회에서 수많은 상을 수상했으며.
SCI급 여러 저널의 부편집장 혹은 편집장으로 활약하고 있는 이른바 학계의 실세 교수였다.
특히, 가장 놀라운 것은 네이처지의 편집위원(editorial board member)으로 선임된 상태였다.
‘음. 이 정도는 하니까 하버드대에서 테뉴어를 받았나 보네.’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이라는 베스트셀러 책과 영화 등으로 이미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미국 하버드대.
이곳에서는 수많은 교수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와 강의를 하고 있는데.
이들 교수 중에서 종신계약, 즉 테뉴어를 받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종신계약: 교수는 종신계약 심사를 통과해야만 정년까지 근무가 보장되는데(한국 대학의 경우), 정년 제도가 없는 미국에서는 테뉴어를 받게 되면 평생 교수 직위를 유지할 수 있음. 물론 노쇠하거나 연구 활동이 약해지면, 미국 교수는 70살 혹은 80살 정도에 스스로 은퇴하기도 함.
특히, 하버드대에서 이런 테뉴어 심사를 통과하는 교수는, 교수 10명당 대략 1명 혹은 2명 정도.
지독하게 힘든 칼날 같은 테뉴어 심사 때문에, 하버드대는 교수 경력 중 그냥 거쳐 가는 대학이라는 말이 교수들 사이에서 나오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테뉴어 심사에서 탈락한 교수들은 바로 짐을 싼 뒤, 다른 학교 교수 직종으로 옮겨가는 게 태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놀라운 점은, 설령 하버드대에서 잘린다고 해도, 교수들은 다른 대학에서 극진한 환영을 받으며 그 대학교수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만큼 하버드대 교수들의 수준이 높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하버드대에서 테뉴어를 받았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그 교수의 실력이 이미 세계적인 수준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거나 다름없다.
‘그래. 어쨌든 대단한 학자인 건 사실인데.’
그런 대단한 학자가 왜 이곳을 방문하는 걸까? 단순한 방문?
호기심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김태풍.
그리고 그사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어느덧 오후 2시쯤 되었을까.
갑자기 복도 쪽에서 요란한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잠시 뒤, 누군가 큰 인기척을 내며 랩으로 들어오고 있다.
곧이어 들려오는 유창한 영어 발음.
‘……어? 이건 우리 교수님 목소리인데?’
그렇다.
지금 박한식 교수는 이 랩에 대해서 무언가 설명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자.
자기 자리에서 발표 자료를 만지고 있던 학생들은 깜짝 놀라며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다.
김태풍 역시 호기심이 생겨 거길 쳐다보자.
거기에는 아주 호리호리한 40대 후반의 백인 남자가 웃으며, 박한식 교수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첫눈에 그가 하버드대 데릭 호킨스 교수라는 걸 인지한 김태풍.
‘음. 근데 얼굴이 꼭 유태인 같이 생겼는데?’
유태인 특유의 이목구비를 가진 데릭 호킨스 교수.
곱슬곱슬한 머리에 나이답지 않게 반짝반짝하는 눈을 보니.
역시 평범한 사람 같게 보이지는 않는다.
“아! 마침 저기 있었네!”
그리고 그때 갑자기 박한식 교수의 손끝이 김태풍 쪽으로 향한다.
“하하! 데릭! 저 친구가 바로 내가 말한 그 김태풍이라는 학생이네. 이봐! 김태풍! 어서 와서 인사하게. 하버드대의 데릭 호킨스 교수야.”
박한식 교수는 즉시 손짓했고, 김태풍은 얼른 다가가 인사를 한다.
이때, 데릭 호킨스 교수는 그런 김태풍을 유심히 쳐다보다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아! 킴! 당신이 바로 그 논문 원고(manuscript)의 주인공이었군요? 반갑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김태풍과 힘껏 악수를 하던 그는 갑자기 다른 말도 툭 던진다.
“근데 거기 수소 결합을 좀 더 약화시키려면, 그쪽 반응 위치를 좀 더 손 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건 어떻게 생각합니까?”
“네?”
“카테콜(catechol) 구조를 도입한 건 아주 재밌었어요. 하지만 그건 좀 너무 강한 편이죠. 차라리 좀 더 약한 결합을 유도한다면, 단순한 재결합 쪽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접착제 개발로 이어질 수가 있는 것 같은데, 우선 반응 조건을 좀 바꿔서…….”
그리고 그때부터 갑자기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색다른 관점의 이야기들.
김태풍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짓게 된다. 갑자기 서론도 없이 주르르 이어지는 그의 말 때문에 바로 이해하기가 힘들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박한식 교수가 그의 말을 끊어내고 있다.
“이봐! 잠깐만, 데릭! 그 이야긴 좀 있다가 하지. 나중에 랩미팅 끝나고, 다시 이야기를 하자고. 지금 일정이 바쁘다고. 곧바로 총장님도 뵈러 가야 한단 말이야.”
그렇게 박한식 교수가 제지를 하자, 씩 웃는 데릭 호킨스 교수.
그러나 많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바로 말을 한다.
“그럼 나중에 이 친구와 따로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이 친구와 같이 저녁을 먹을 수 있습니까?”
“아? 김태풍과 같이? 근데 저녁엔 학과 교수들과 함께 식사하기로 했는데…… 음. 이걸 어쩌나? 아! 그럼 차라리 내일 조찬을 같이 하는 게 어떨까?”
“네! 좋습니다. 전 만족합니다.”
자신의 동의도 없이 덜컥 조찬(아침) 약속이 잡히고 있다.
그래도 뒤늦게 박한식 교수는 김태풍을 쳐다보며 묻는다.
“괜찮지? 내일 아침 식사?”
“아? 네. 네. 교수님. 괜찮습니다.”
그렇게 약속을 잡자, 웃으며 물러서는 데릭 호킨스 교수.
그렇게 짧은 대화가 끝났고…….
그들은 이제 랩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런 짧은 랩 투어가 바로 끝나자.
그들은 곧 어디론가 사라진다.
아마도 이 학교 총장님을 만나러 가는 모양이다.
그리고 오후 3시.
랩미팅을 어느덧 1시간 앞둔 시각.
“어땠어? 호킨스 교수님을 만나보니 어땠어?”
데릭 호킨스 교수와의 인사를 마친 뒤, 도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한참 논문 공부를 하고 있던 김태풍.
특히, 데릭 호킨스 교수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그의 논문들을 주르르 펼쳐 놓고서 정신없이 읽어보고 있었는데.
그때, 강신혜 박사가 김태풍의 자리로 다가와 그렇게 묻고 있다.
“아. 방금 여길 오셨다가 가셨는데, 뭐 괜찮으신 분 같던데요.”
“그치. 인상 좋지?”
그렇게 묻고 있는 강신혜 박사.
이 실험실의 포닥(박사후 연구원)인 그녀는 데릭 호킨스 교수에 대해 뭔가를 아는 표정이다.
그래서 눈치 빠른 김태풍은 바로 그녀에게 물어본다.
“인상도 좋고 아주 똑똑해 보이시던데, 혹시 그 교수님에 대해서 잘 아세요?”
그러자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는 강신혜 박사.
“뭐, 알다마다! 내가 스탠퍼드대 박사과정을 밟을 때, 세미나 강연을 하러, 여러 번 학교에 오셨거든. 그때 지도교수님 덕분에 식사도 여러 번 같이 해 봤고.”
“아. 그럼 그분은 어떤 분이시죠?”
“먼저 호킨스 교수님이 유태인이라는 건 알고 있지?”
“아.”
유태인?
정말 유태인이었어?
김태풍의 눈이 약간 커진다.
* * *
역시 그는 유태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런 대단한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는 걸까.
사실, 세계 금융계에서 유태인들의 파워는 실로 엄청나기도 하지만, 이런 학계에서도 유태인들의 저력은 결코 무시할 수가 없다.
그들은 아주 뛰어난 천재적 능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잦았고.
그런 그들의 존재감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보통 단일 민족이라는 점에서, 한국인이 유태인만큼 뛰어나다고 평가를 하기도 하지만.
우습게도 그건 보편화된 세계적 평가는 아니었다.
아직 세계적으로 보면, 유태인의 저력을 넘어서는 단일 민족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들은 어릴 적부터 독창적인 교육법을 써 가며, 이미 영재 교육, 천재 교육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상황이고.
그 결과,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들을 배출하고 있다.
그리고 데릭 호킨스 교수도 그런 유태인인 것이다.
“저 사람은 천재야! 천재! 마치 너처럼 말이야.”
그런데 그때, 갑작스러운 강신혜 박사의 언급에 김태풍은 흠칫 놀라고 만다.
뭐? 자신처럼 그가 천재라고?
‘뭐? 내가 천재라고?’
당황해하는 김태풍.
“암튼, 호킨스 교수님이 너한테 아주 관심이 많은 것 같더라. 특히, 박 교수님이 아까 나한테 살짝 귀띔을 하시던데, 네 네이처 논문을 심사한 심사위원 중의 한 명이라고, 그렇게 말씀도 하시더라.”
그런데 그 말에 김태풍은 눈이 약간 더 커지고 만다. 저 호킨스 교수가 심사위원들 중의 한 명이었다고?
그 의미를 분석하듯 김태풍은 미간을 좀 오므렸다가 이내 활짝 폈고, 곧 피식 웃고 만다.
그래서 아까 그가 그런 말들을 했었나 보다.
자신을 당황하게 만든 무척 세세한 언급들.
‘역시 그랬구나.’
그러고 보면, 이 학계는 참 좁다.
하필 그 논문의 심사위원이 박한식 교수와 큰 친분이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뭐,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 게 바로 학계 인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박한식 교수의 인맥이 어쩌면 자신의 논문 심사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는 상황.
일례로 이런 경우들도 많다.
하물며 미국 국가 연구비 심사 때에도, 이런 류의 인맥이 무언가 힘을 쓰게 되면.
국가 연구비 지급 대상자가 갑자기 A에서 B라는 교수로 대상자가 바뀌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한국으로 옮겨 오면 더 극악해진다.
이른바 더 극악하게 인맥의 힘이 작용하고 있는 한국 사회.
그래서 속된 말로, 학계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교수는 아무리 훌륭한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해도 절대 큰 연구비를 따낼 수가 없다.
물론 작은 연구비라도 귀해서, 수많은 교수들은 이런저런 학회에 미친 듯이 돌아다니며.
국가 연구비 심사를 주도하고 있는 교수들에게 알랑방귀를 뀌며 굽신거리는 것이다.
이게 다 연구비를 따내기 위한 목적이 아닌가.
특히, 이런 국가 연구비 수혜 심사에서 각 영역별 심사위원들을 정하거나 추천할 수 있는 권한, 즉, 심사위원 지정 권한을 가진 일부 교수들한테는 그 알랑방귀 정도가 더 심할 수밖에 없다.
때로는 그들 일부 교수들끼리 따로 모임을 만들어 작당해서 자기끼리 돌아가면서 주요 연구비를 먹기도 하고.
또한, 자기 인맥들에게만 그 연구비를 뿌리기도 한다.
지독하게 썩은 연구비 심사의 현 모습이 아닐까.
이게 알음알음으로 진행되다 보니…….
과학계 외부로는 절대 드러나지도 않고, 절대 걸리지도 않는다.
학계 외부인들은 절대 모르는, 부패 한국의 적나라한 현 모습이다.
미국은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그럼에도 역시 이런 인맥으로 인해 연구비 수혜자가 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다.
거기다가 논문 심사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음. 그럼 제가 혹시 호킨스 교수의 각별한 도움을 받은 걸까요?”
표정이 좀 굳은 김태풍이 그렇게 묻자, 강신혜 박사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젓는다.
“아니. 절대 그러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호킨스 교수는 절대 만만한 사람이 아니거든.”
“네?”
“네 연구가 괜찮으니까 호감을 드러내는 거지, 아마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바로 탈락(reject) 결정을 했을 거야. 그는 보기와 다르게, 박 교수님만큼이나 엄청나게 깐깐한 사람이야. 그리고 논문 심사 리뷰어(심사위원) 정보는 외부에 절대 드러나지 않으니까, 어쨌든 자기 주관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거잖아.”
김태풍이 네이처지로부터 받은 논문 수정 결정에 대해 박한식 교수로부터 직접 들어서 알고 있는 강신혜 박사.
그런 그녀가 그런 대답을 하자, 김태풍은 일정 부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러나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시 묻는다.
“그래도 약간의 도움은 있었겠죠?”
“뭐 그거야…… 하하. 그래. 박 교수님과 그가 잘 아는 사이라서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겠지. 내 생각에는 말이야. 적어도 한국 논문이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정상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된 거, 그게 바로 박 교수님의 인맥이 작용한 거 아닐까?”
그러니까 이런 최상위권 저널에서는 공정한 평가를 받는 것도 학계 인맥의 힘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녀의 그 언급에 김태풍은 비로소 확실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실제로 학계에 명성이 없는 교수는 아무리 훌륭한 연구결과를 내고, 그 결과를 모아서 좋은 논문에 투고를 해봐도, 정당한 심사과정조차 얻지 못하고 곧바로 게재 거절 통보가 가는 경우가 아주 흔하다.
특히, 한국에서 나오는 논문들에 대해서 색안경을 끼는 경우들이 아주 많았고.
한국 논문들을 아주 하찮게 여기는 외국 학자들이 더 많은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논문 이야기보다도 더 중요한 게…… 나중에 호킨스 교수님하고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기면, 그때 정신 차리고 잘해 봐.”
“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아까 두 분 교수님들의 대화를 잠깐 들었는데…… 네 논문에서 아이디어를 다시 뽑아내서 뭔가 다른 일을 진행하려는 것 같더라고.”
뭐? 새로운 아이디어?
“물론 네 논문과 관련된 특허는 아마 미국 듀폰사에 기술이전 하기로 결정된 거 맞지? 하지만 또 다른 식으로 아이디어를 뽑아내서 새로운 일을 벌일 수도 있잖아?”
아? 그런 일이 또 있었나?
그렇다면 호킨스 교수가 잠깐 언급한 새로운 접착제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인가.
“혹시 네가 알지 모르겠지만, 저 호킨스 교수님은 학계에서 명망이 높지만, 비즈니스적으로도 엄청난 사람이거든.”
비즈니스?
저절로 김태풍의 눈이 커진다.
한편, 좋은 힌트를 남긴 강신혜 박사가 돌아간 뒤, 김태풍의 생각은 점점 더 깊어져가고 있다.
호킨스 교수? 그리고 비즈니스?
과거에는 자신과 인연이 전혀 없었던 호킨스 교수.
만난 적도 없었고, 자신이 그렇게 주목하지도 않았다.
사실, 학계에는 정말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고.
그래서 김태풍은 모든 사람들을 다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는 법이다.
아마도 자신은 계속 신약 쪽에만 집중하다 보니.
호킨스 교수의 이름을 언젠가 들었을 테지만, 그냥 흘려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김태풍은 지금 정신을 바짝 차리며, 호킨스 교수의 이력을 다시 조회하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무언가 좋은 기회가 올 것 같다는 느낌이 확 들기 때문이다.
* * *
잠시 후, 열린 랩미팅 시간.
이때, 김태풍은 스스로 치유가 가능한 새로운 형태의 고분자 소재에 대한 간단한 컨셉 이야기와 주요 분석 데이터에 대한 발표를, 데릭 호킨스 교수의 앞에서 진행했다.
“……이런 고분자합성 경로에 따라 얻어진 이 고분자 소재는 side group에 카테콜(catechol)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이 구조는 특정 환경에 노출되면, 보호 작용기인 실란(silane) 부분이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즉, 자유로워진 카테콜 구조 간에 수소 결합이 형성되게 되면서, 잘려나간 단면끼리 붙을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이 컨셉 그림의 이쪽 부분을 보시면, 좀 더 쉽게 이해가 될 겁니다. 특히 이 분석 데이터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수소결합: 통상적으로 H, O, N 등의 화학원소들끼리 상호 간에 붙으려는 인력을 이야기함. 응용 예로, DNA는 두 쌍의 유전자 정보가 꼬여있는 이중 나선 구조인데, 두 쌍의 유전자 정보는 수소결합에 의해 헬릭스 구조를 형성함.
슬라이드 발표 실력도 대단하지만, 아주 유창하게 영어 발표를 하고 있는 김태풍.
그러고 보면, 이 고분자 소재에 대한 첫 발표는 작년 12월 젊은 과학자(young scientist) 심포지엄 때였다.
당시 김태풍은 석사과정 1년 차 신분임에도 박한식 교수의 지시에 따라 학회장에서 직접 구두발표를 하게 되었다.
그때 어찌나 김태풍의 쇼맨십이 좋았던지, 김태풍은 엄청난 스포트라이트까지 받으며, 스타덤에 올라서기도 했다.
또한, 당시 심포지엄에 특별 연사로 참석 중이었던, 미국 듀폰사의 소재 부문 연구소장 제퍼슨 칼 리.
김태풍은 그의 강렬한 관심을 받은 바 있다.
그리고 그런 인연 덕분에.
올 초 2월.
미국 델라웨어주 월밍턴에 위치한 미국 듀폰 본사 중앙연구소에 초대를 받았던 김태풍.
당시 그곳 실무진들과 더불어 이 소재에 대한 기술이전 협상까지 진행하게 되었다.
그때 동행했던 박한식 교수.
그가 다행히 2백만 달러 기술이전료에 동의하면서.
현재 이 소재 기술에 대한 기술이전 처리가.
학교와 듀폰사 간에 한창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하하. 당신의 영어 발음은 상당히 듣기 좋군요. 물론 박 교수님의 ‘z’ 발음은 아직도 상당히 이상한데, 다행히 그 제자는 그 발음도 아주 능숙하군요.”
김태풍의 발표에 귀를 기울였던 데릭 호킨스 교수.
그는 농담으로 그렇게 이야기를 했고.
이때 박한식 교수는 씩 웃으며 대꾸한다.
“데릭! 나는 미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당신이야 그런 발음이 문제가 없겠지만, 나는 겨우 박사학위를 하면서 영어를 배웠다는 걸 몰라?”
“하하! 그렇다고 그게 excuse(변명)가 될 수는 없죠. 그런 변명은 DMV(Department of Motor Vehicles) officer한테는 전혀 통하지도 않은데?”
“뭐?”
“예전에 그 ‘z’ 발음 때문에 운전면허를 못 딸 뻔한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아? 운전면허? 그거? 하하하! 그건 정말 옛날 일인데. 그 색맹검사 때문에 내가 진짜 힘들었지. 그림에서 보이는 글자가 하필 ‘z’잖아. ‘r’ 그리고 ‘f’까지. 유학 생활 초창기라서 진짜 힘들었어. 하마터면 색맹 판정이 날 뻔했다니까.”
그렇게 말하며 유쾌하게 웃고 있는 박한식 교수.
아주 딱딱하고 살벌한 보통의 랩미팅 분위기와 지금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박한식 교수는 비록 그가 자신의 후배이긴 해도 국제적으로 영향력이 대단한 호킨스 교수의 비위를 제법 잘 맞춰주는 모습이다.
한껏 웃으며 그를 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근데 호킨스 교수님이랑 우리 교수님이 진짜 친한가 봐?”
“그러니까 미국 운전면허증 따러 갈 때도 같이 갔겠지.”
“이야 진짜 보통 우정이 아닌 것 같은데?”
그들이 듣지 못하게 아주 조용히 수군거리고 있는 학생들.
그리고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로 파악하건대.
박 교수가 막 미국 대학의 박사과정에 입학했을 때, 그 랩 발런티어(volunteer)로 참여하고 있었던 학부생 데릭 호킨스는 박 교수의 미국 생활 초창기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모양이었다.
“하하. 박 교수님.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제가 궁금한 게 몇 가지가 있는데, 그걸 지금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데릭 호킨스는 이내 웃음을 거뒀고, 조금 날카로워진 눈으로 김태풍 쪽을 응시하기 시작한다.
그 바람에 김태풍은 약간 긴장했지만, 그럼에도 겉으로는 전혀 안 그런 척하며 그의 질문을 기다렸다.
“김태풍. 대답 잘하게.”
“네. 교수님.”
그리고 드디어 데릭 호킨스의 질문이 시작되고 있다.
“음. 먼저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보면, 폴리우레탄(polyurethane: PU) 구조 역시 강력한 수소 결합이 가능합니다. PU 구조체의 화학 구조를 다변화시킨다면, 이런 구조 역시 다양한 형태의 자가 치유 능력이 실현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런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데릭 호킨스의 질문에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김태풍.
그는 차분하게 입을 연다.
“뭐, 말씀하신 대로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PU는 고분자의 분자량에 따라 다양한 물성 제어가 가능하고, 또한 고강도 재료로도 활용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특정 조건에서만 자가 치유 능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것은 좀 더 다른 의미가 아닐까요? 다시 말해서 실험자가 그 조건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다는 의미와도 같습니다.”
“음. 좀 더 설명을 부탁합니다.”
“네. 예를 들어, 찢어진 단면을 실험자가 붙이고 싶다고 결정할 때, 그걸 붙일 수 있다는 것. 즉, 자유롭게 그 여부를 결정하고 또 실행할 수 있다는 것. 이게 바로 상당히 매력적인 옵션이라고 볼 수 있는 겁니다. 결국, 이런 옵션을 넣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해서…… 결국 PU 역시 저희 소재와 비슷한 경로의 화학 구조 변형이 필요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호킨스 교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김태풍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뒤에 그는 곧장 뭔가를 이야기하려고 했으나, 아직 할 말이 더 남은 김태풍이 더 빠르게 말을 이어 나가고 있다.
“물론, 특정 분자량을 가졌을 때, 저 PU가 생체적합성이 뛰어나다는 점은 아주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뭐, 초기 인공심장 개발 당시, 면역 활성 억제 및 혈전 방지를 위해 PU를 인공심장 표면에 코팅했던 역사를 이쯤에서 다시 주목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호킨스 교수가 살짝 웃는다.
김태풍이 의공학 분야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워진 것이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이런 PU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자가 치유 소재를 개발할 수만 있다면, 그 응용범위가 분명 의공학 분야로 크게 확대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봅니다. 절대 나쁘지 않은 접근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순간 호킨스 교수의 입꼬리가 드디어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고 있다.
참을 수 없는 반응인 것이다.
김태풍의 저런 답변들은 단순히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수준이 결코 아니었다.
흔히, 교과서만 달달 외운 사람은, 답이 정해진 문제에 한해서 정확하게 답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학문적 분야에서는 어떤 문제에 대한 답들이 정확하게 설정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공부 잘하는 사람들도 실제 연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많이 허둥거리게 된다.
한국대 출신의 수재에서 순식간에 지방 삼류대 출신보다 못한 둔재로 떨어지는 경우가 그래서 실제로 엄청나게 많다.
왜냐하면, 가능한 모든 변수를 스스로 확인하고, 자신에게 딱 맞는 답을 스스로 찾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문제 해결 능력!
일례로 학교에서는 문제 해결 능력을 길러야 한다, 또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런 식의 말들을 곧잘 하지만.
실제로 그런 능력을 가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음. 정말 좋은 답변입니다. 그렇다면 저의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죠. 혹시 금속 종류를 사용해서 이쪽 소재에 적용한다면, 즉, 배위결합을 한번 이용해 보는 것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배위결합: 두 원자의 결합이 발생할 때(즉, 분자가 될 때), 한쪽 원자만 전자를 제공해서 다른 원자와 결합될 수 있는 원리. 다른 개념인 공유 결합은 각 원자들이 각각의 전자를 제공해서 두 원자들이 각 전자를 함께 공유하면서 결합이 발생함.
곧이어 다시 이어진 호킨스 교수의 질문.
그런데 이번 질문에는 뜻밖에도 배위결합을 언급하고 있다.
이 배위결합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학생들은 금세 미간을 찌푸렸고, 한편으로는 머릿속이 곧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호킨스 교수의 질문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건 박한식 교수도 비슷한 상황이다.
그러나 그런 그들과 다르게, 김태풍의 표정은 확실히 이상해지고 있다.
저절로 눈이 커지고 있었고.
자신도 모르게 짤막한 탄성마저 지르고 있는 김태풍.
그런 김태풍의 모습에 호킨스 교수의 입꼬리가 다시금 스르륵 올라가고 있다.
그리고 호킨스 교수는 흡사 신기한 물건을 보듯 김태풍을 쳐다보고 있는데.
김태풍은 약간 톤이 높아진 목소리로 대답한다.
“호킨스 교수님! 정말 최고의 아이디어입니다!!”
“아! 설마 제 의도를 이해했습니까?”
“네!”
“하하! 그럼 당신이라면, 어떤 금속을 제시할 수 있습니까?”
두 사람만이 이해하고 있는 질문과 답변들.
“저는 백금(platinum)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백금?”
“네. 우선, 백금을 사용한다면 인체 거부감이 좀 덜할 겁니다. 그리고 이런 백금류의 배위결합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면, 특히 실록산(siloxane) 계열과 백금의…….”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호킨스 교수가 요란하게 고함을 지른다.
“잠깐!! 거기서 멈춰요!!”
신나게 말을 하고 있던 김태풍은 어리둥절해 했고.
호킨스 교수는 양손을 좌우로 저으며 서둘러 말을 한다.
“하하. 당신은 정말 순수한 과학자이군요? 그런 핫 아이디어는 이런 공개된 곳에서 말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아.”
“그 이야기는 조용한 곳에서 다시 하도록 하죠?”
“아, 네.”
김태풍의 동의를 받자, 호킨스 교수는 고개를 돌려 박한식 교수를 쳐다본다.
“박 교수님. 하하하~ 당신은 정말 대단한 다이아몬드를 지니고 계셨군요?”
“뭐? 그게 무슨 말인가?”
“아, 죄송합니다. 그 이야기도 저랑 따로 하도록 하죠.”
그러고는 입을 닫는 호킨스 교수.
그러나 김태풍을 쳐다보고 있는 그의 두 눈은 불이 난 듯 더없이 강렬해지고 있다.
하지만 김태풍 역시 느낌이 묘해진 것은 마찬가지다.
학계에서 늘 천재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호킨스 교수.
김태풍은 조금 전에야 그 가능성이 기억이 난 거지만.
앞으로 20년 뒤, 30년 뒤에나 나오는 컨셉을 호킨스 교수는 이미 눈치챈 모양이었다.
미래 지식도 없는 호킨스 교수는 순전히 자신의 능력만으로 저 멀리, 더 먼 곳까지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김태풍은 더 놀랄 수밖에 없다.
‘그래. 뭐 어쨌든 이건 확실히 대박 연구 주제니까…… 그리고 비즈니스 가능성도 충분해.’
만약 이 연구가 궤도에 오르게 된다면, 앞으로 상처 봉합, 피부 재생, 재생 의학, 피부 미용, 인공 피부 제작 등 다양한 의공학 분야에 획기적인 진보를 이끌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는 김태풍.
그의 심장은 거칠게 뛰기 시작한다.
* * *
세상에 태어나 부자가 되는 길. 그건 대체 어떤 길일까?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평범한 부모님을 만난 김태풍.
부잣집 출신들과 다르게 김태풍은 무조건 맨손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빠르게 기회를 포착해야 하고.
또, 그런 걸 발견하면, 더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6천 5백만 원의 투자금, 이걸 미국 IT 주식에 투자한 것은 제법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자가 치유가 가능한 고분자 소재 기술을 미국 듀폰사에 기술이전하려는 것 역시 다시 얻기 힘든 기회랄 수 있다.
‘이것도 역시 흥미진진해. 백금 유래 새로운 인체 접착 기술이라? 음. 피부 보호와 재생을 위한 최고급 인공 피막 기술로 발전하게 된다면, 이건 완전히 새로운 세대의 의공학 기술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거야.’
실험실 학생들의 개별 발표들과 호킨스 교수의 짧은 코멘트들이 쉴 새 없이 이어지던 랩미팅.
그런 랩미팅이 어느덧 끝이 나자, 다시 랩으로 돌아온 김태풍.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자리에 앉자마자 오른쪽 턱을 괴며 묘한 생각들에 빠져들고 있다.
‘그럼 내일 아침 식사 때, 호킨스 교수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김태풍은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면, 과거에는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다.
랩에서 어떻게 하면 잘 버틸까.
또 어떻게 하면 잘 살아남아서 학위 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그저 그런 고민밖에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땐 갖은 고생 끝에 다행히 석사학위,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고.
그런 경력을 바탕으로 일성그룹 종합기술원에 입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회사에서 20년 넘게 근무하면서, 그렇게도 노력을 했지만.
사실상 그에게 남겨진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금박 코팅에 불과한 각종 상패들.
용인 지역에 위치한 조촐한 아파트 한 채.
대현그룹 마크가 찍힌 국산 중형 자동차 한 대.
뭐 예금으로는 5천만 원 정도가 있었다.
물론, 이 예금은 어쭙잖은 주식 투자로 홀라당 말아먹고 간신히 보존한 돈이었다.
‘뭐, 그래도 과거로 돌아오고 나니까 일이 잘 풀려서 너무 좋아. 거기다가, 우리 교수님의 또 다른 면모를 계속 볼 수 있어 더 좋고. 하하~ 우리 교수님 갈수록 매력 덩어리란 말이야.’
호킨스 교수와 ‘z’ 발음을 가지고서 티격태격 싸우고 있던 박한식 교수.
그런 박한식 교수의 모습이 다시금 생각이 나자, 입가에 훈훈한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는 김태풍.
지난 생애에 박한식 교수는 정말 어렵고 또 어려운 사람이었다. 김태풍의 눈에는 세상에 둘도 없는 악인 중의 악인.
김태풍 스스로가 마왕 위의 마신이라고 칭할 정도로 그와 대면하는 것 자체가 항상 고역 중의 고역이었다.
매사에 모든 일들을 칼같이 처리하고.
단 한 치의 양보조차 없었고.
매번 트집만 일삼으며.
무시무시하게 사람을 힐난하기만 하는 그런 사람.
그러나 회귀한 뒤, 김태풍은 박한식 교수의 또 다른 면모들을 계속 발견하고 있다.
어쩌면, 그때와 지금의 김태풍 같으면서도 또 다른 모습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특히,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압권은, 미국 듀폰사와 관련된 기술이전료 배분 과정이었다.
지금도 김태풍의 뇌리에 남아 있는 박한식 교수의 그 말들.
“하하! 자네는 많이 겸손하군.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다들 눈빛이 달라질 텐데, 전혀 그렇지도 않고. 어쨌든 이 기술이 만약 듀폰으로 기술이전이 된다면, 뭐, 자네 몫으로 전체 기술이전료 중에 40%가량을 내가 꼭 보장해 주겠네.”
그리고 또 이어지던 그의 말.
“뭐, 자네 덕분에 내 몫으로 한 15% 정도가 오게 될 건데. 그리고 나머지는 학교에서 학교 지분 몫으로 가져갈 테고……. 그래서 말인데, 만약 자네가 원한다면, 내가 받게 될 15%도 자네한테 다시 돌려주겠네. 지금 이 자리에서, 자네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말해보게.”
“아닙니다. 교수님. 저는 40%만 해도 아주 충분합니다.”
“하하하! 자네는 역시 사회성까지 좋아. 그런데 방금 그건 그냥 내가 해 본 소리야. 나는 자네가 지금 (내 아이디어로) 연구하고 있는 그 신약 후보 물질, 그것만 해도 충분해. 그게 진짜 돈이 될 거니까. 그래서 이번에 운 좋게 기술이전까지 된다면, 그 기술이전료는 자네한테 몽땅 줄 테니까, 이번 일의 성과는 자네가 다 가져가. 대신에 내 아이디어로 진행하고 있는 현재 일에 대해선 나중에 학교 기준에 따라 이익 배분이 될 거네. 그 점은 자네도 꼭 양해해주게.”
그 소재 기술이 김태풍의 머리에서 나온 걸 확실히 인정하고 그렇게 말했던 박한식 교수.
그는 자신의 기여분이 없다고 생각해서 금전적 보상을 주장하지 않은 것이다.
보통 교수들에게서는 절대 기대할 수 없는, 아주 겸손한 일 처리.
그의 성격이 다소 꼰대 같긴 하지만, 그럼에도 정말 티끌 하나 없이 올바른 인물이었던 것이다.
결국, 기술이전료 2백만 달러 중의 총 55%, 그 지분을 김태풍이 가지는 거로 확정됐다.
최근 환율 기준으로 계산하게 되면, 원화로 대략 8억 7천만 원 정도나 되는 금액.
이 돈은 (기술이전 계약이 완료가 되면) 올여름 정도에 김태풍의 계좌에 입금될 예정이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김태풍은 자세를 바로 하며, 어깨를 쭉 편다. 그리고 자신의 턱을 요리조리 만지며 다시 생각에 빠져들고 있다.
‘음. 스톡옵션을 받은 것도 있으니까, 그러고 보면 나름대로 회귀 첫해를 정말 잘 보낸 거지.’
그런 생각대로, 김태풍은 작년 석사과정 1년 차를 보내면서 아주 중요한 수확을 하나 더 얻었다.
바로 신약 개발 벤처 기업 메드TX의 젊은 서정철 사장의 눈길을 끌며 그의 환심을 산 것.
다름이 아니라, 학부과정 때 동아리 활동을 같이했던 동기 서희선을 통해서 만나게 된 서정철 사장.
그는 김태풍이 자신에게 준 신약 샘플을 직접 테스트한 뒤, 깜짝 놀랐던 것이다.
“아, 이런 말을 하게 되어서 저로서도 참 난감하긴 한데…… 김 선생님이 저한테 샘플로 제공했던 그 신약 물질 말입니다.”
“아, 어땠습니까?”
“뭐, 저희 회사 연구소에서 자체 효능 분석을 실시한 결과, 신약으로서의 가치가 아주 월등한 것으로 확인이 됐습니다.”
메드TX의 자체 평가가 그런 식으로 나오게 되자, 곧 일사천리로 진행하게 된 기술 계약 협상.
“하하. 뭐, 좋습니다. 그럼 다음 단계 연구를 성심껏 도와주신다면, 저희 회사에서는 저번에 저한테 요구한 대로, 총 8만 주, 행사가 2,500원, 이 조건의 스톡옵션을 발행해드리죠.”
회귀 전까지 차곡차곡 쌓은 수많은 지식들과 그로 인해 파생된 자신만의 아이디어로 신물질 합성에도 비밀리에 성공했던 김태풍.
그리고 그 신약 후보 물질은 2형 당뇨병 치료에 큰 효과를 보였다.
또 다른 치료제인 엑세나타이드(Exenatide)와 유사한 생리적 기능을 갖고 있지만.
훨씬 더 화학구조가 단순하고, 또 분자량도 작은 신형 화학 물질.
이 신약 후보 물질에 대한 정보를 메드TX에 제공하기로 하면서.
김태풍은 성과연동형 스톡옵션을 받는 것뿐만이 아니라 적절한 로열티 계약까지 체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가장 큰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스톡옵션이다.
총 8만 주, 행사가 2,500원.
행사 날짜는 1997년 3월 7일로 지정이 된 스톡옵션.
‘이게 진짜 돈이 되는 알짜배기야.’
김태풍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행사 날짜에 맞춰 2억 원을 내고 주식을 받게 되면, 메드TX 8만 주가 자신의 것이 된다.
그런데 김태풍이 기억하고 있는 메드TX의 1997년 상반기 주가.
그건 무려 주당 17만 2천 원 정도나 된다.
단순 계산을 해도, 8만 주의 가치는 130억 원이 넘는 돈.
‘뭐, 현재는 가난해도 나중에는…….’
거기다가 호킨스 교수와 동업까지 하게 된다면, 또 얼마나 큰 횡재를 맛보게 될까.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던 김태풍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만다.
“야! 대체 뭐해? 왜 대답이 없냐고?”
“……?”
“도대체 지금 뭐 하냐고? 아까 전부터 내가 계속 불렀잖아?”
“어? 근데 너 언제 왔어?”
“나 방금 왔잖아! 실험실 문 앞에서 계속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아.”
얼마나 달콤한 생각에 빠져 있었던지.
동기 배진수가 그렇게 자신을 불렀는데도 그 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몰입을 했었나 보다.
“근데 무슨 일인데?”
“야. 지금 형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저녁 먹으러 안 가?”
“아.”
맞다. 그러고 보니까 중간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는데.
저녁 먹는 걸 깜빡하고 있었던 것이다.
벌떡 일어서는 김태풍.
“야. 빨리 가자.”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번엔 배진수가 좀 꾸물대고 있다.
“진수야. 안 가?”
“잠깐만. 그게, 나가기 전에 한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
“궁금한 거? 뭐?”
“아까 랩미팅 때.”
“랩미팅?”
“그 백금 이야기는 대체 뭐야?”
“뭐?”
“기호랑 성훈이랑 같이 모여서 계속 그 이야기를 해 봤는데…… 도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도저히 감이 안 와서.”
아마 그 이야기가 애매하게 끝나다 보니, 다들 그 이후의 아이디어가 무척 궁금했나 보다.
몹시 답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배진수를 보자, 김태풍은 씩 웃다가 이내 입을 연다.
“그렇게 복잡한 건 아니고 의외로 간단한 건데. 대신에 너만 먼저 알고 있어. 이를테면 이런 거야. 특정 혼합물을 미리 준비할 거고, 나중에 소량의 백금 분말을 넣는 거야. 그럼 백금을 중심으로 해서 배위결합이 가교 형태로 발생하게 돼. 그렇게 되면 순식간에 서로 다른 물질이 딱 붙어 버리게 될 거야.”
*가교: 두 개 이상의 화학 물질들이 특정 분자(여기서는 백금)를 매개로 연속적으로 서로 연결이 되는 복잡한 화학 결합 형태.
“뭐?”
“너도 예전에 봤겠지만, 내가 만든 고분자 소재는 절단된 단면들을 서로 붙일 때, 물에 살짝 담그는 전처리 과정이 필요했잖아? 하지만 이건 그냥 백금만 뿌려주면 돼. 마치 마법 가루와 같이 상호 접착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게 돼. 주목해야 할 것은 그냥 서로 붙이는 게 아니라, 대상체가 사람의 피부, 사람의 장기, 이런 쪽으로 응용이 가능해. 백금을 대체할 다른 금속류를 나중에 찾게 되면 응용성은 더 넓어지고 또 경제성까지 확보할 수 있을 거야.”
김태풍은 자세히 설명을 했지만…….
그러나 배진수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모습이다.
“그럼 하나만 더 묻자. 그 특정 혼합물은 대체 무슨 물질인데?”
그러나 이번에는 곧장 고개를 젓는 김태풍.
“야. 그건 며느리한테도 안 가르쳐준다는 시어머니의 요리 비법.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게 바로 특허권을 설정해야 할 가장 핵심 부분이거든. 그건 어쩔 수 없이 비공개. 미안.”
“야! 뭐야? 좀 알려주면 안 돼?”
배진수는 억지를 부리며 달려들지만.
김태풍은 요리조리 피해가며 실험실을 빠져나오고 있다.
* * *
“그럼 다 나왔지? 야. 그만 가자.”
작년 12월 박사학위 심사(defense)를 무사히 끝낸 뒤 박사학위를 받게 된 이전 랩짱 최상준. 그가 졸업하며 나가자, 비로소 새 랩짱이 된 박사과정 6년 차 박정식. 그는 그렇게 말하며 앞장을 서고 있다.
그의 말에 따라 랩원들은 일제히 움직이고 있는데, 이렇게 많은 인원이 한데 움직이는 것은 몇 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긴급 랩미팅 공지를 받자 기숙사에서 기어 나와, 간신히 랩미팅에 참석했던 조현상과 조현중.
이들 야간조마저 동행하게 되자, 랩원 21명 전체가 일제히 움직이게 된 것이다.
물론 이번에도 포닥(박사후연구원) 박사들과 테크니션 연구원들은 이 대열에서 빠졌다.
그들은 이미 퇴근했기 때문이다.
“으으~ 근데 왜 이렇게 춥냐? 해가 지니까 더 쌀쌀하네. 으으. 추워.”
단체로 모여서 기세 좋게 움직이던 랩원들. 최초의 의기양양하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하나같이 어깨를 사정없이 좁히고 있고.
추위에 바르르 떨며, 머리마저 팍 숙이고 걷고 있다.
추위에 패배한 모습들.
하지만 이런 모습들은 좀비처럼 나타나고 있는 다른 랩 학생들의 모습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그냥 자전거를 타고 갈걸. 괜히 걸어가는 바람에…… 야! 솔직히 말해서, 학생식당까지 너무 멀지 않아?”
이때, 누군가 볼멘 목소리로 말한다. 그러나 앞장서서 걷고 있는 랩짱 박정식이 들을까 봐 목소리를 슬쩍 낮추고 있다.
“조용히 해. 그냥 가자.”
“그래도 이건…… 야. 짜증 안 나?”
“바보. 이게 다 이유가 있어.”
“이유?”
“아까 형들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오늘 교수님이 일찍 퇴근하셨잖아?”
그렇다. 호킨스 교수 덕분에 모처럼 박한식 교수가 일찍 퇴근했다.
랩의 공식적인 휴일인 일요일을 제외하고, 박한식 교수는 늘 밤늦게까지 교수실을 지키는 거로 유명하다.
그래서 학생들은 늘 그의 존재감 때문에 랩에 있으면서도 괜스레 숨이 막히는 것이다. 시어머니 옆에서 일을 하고 있는 며느리처럼 말이다.
“교수님 안 계시는데,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회냐?”
“기회?”
“저녁 먹고, 노래방 가자더라.”
“우아~ 근데 어느 노래방?”
“학생회관 3층에 있는 거기.”
“아~ 거기?”
“거기서 소주랑 맥주랑 같이 마실 거 같던데.”
“……어?”
“너 거기서 술 안 마셔봤냐? 원래 몰래몰래 마시곤 하는데. 누가 지켜보는 것도 아니고.”
“음. 근데 술은 누가 사와? 그리고 안주는?”
“어?”
“야! 그러고 보니까 우리 몇몇은 자전거를 타고 왔어야 했네. 이거 어떡하냐?”
“잠깐! 동작 그만! 너네 좀 바보 아냐? 뭘 그렇게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냐?”
“당연하지 않냐? 이렇게 추운데, 걸어서 나가려면…….”
“이 바보들! 저기 저 애들 있잖아!”
“……어?”
“석사 1년 차 저 애들. 쟤들 시키면 되잖아!”
“아. 맞다. 쟤네들이 있었지.”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리다가, 이내 키득키득 웃기 시작하는 안성훈, 최기호, 배진수, 김태풍.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3월 중순이라.
석사과정 2년 차인 그들은 새로 들어온 석사과정 1년 차의 존재감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도 실험실 막내라는 근성이 남아 있던 그들. 작년까지만 해도 무조건 이런 잡일들을 도맡아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후배들이 랩에 들어온 상태.
“근데 걔들 잘하겠지?”
“당연히 잘하겠지. 밖에서 술 사서 오는 게 뭐가 대수냐?”
“근데 말이지. 우리가 작년에 맹세한 거 있잖아?”
“뭐? 무슨 맹세?”
“후배 들어오면, 우리는 안 부려먹기로. ”
“인마! 그런 맹세를 누가 기억한대? 군대 가면, 이등병들이 날마다 하는 맹세라더라. 고참되면 그냥 생까는 그런 맹세.”
“야. 최기호. 너 좀 너무한다?”
“몰라. 난 모른다니까. 난 무조건 그런 거 몰라. 그냥 배 째라고 해.”
“왜 또?”
“다시 말하지만, 내가 작년에 그 최상준(박사 졸업 선배) 그 인간 때문에 얼마나 죽을 것 같았는지 너흰 모를 거야. 저기 봐라. 저 1년 차 애들, 희희낙락하잖아. 쟤네들은 얼마나 편하냐? 난 평생 누구(최상준) 뒷담화 깔 거리가 확실히 있다니까.”
“야. 알았어. 그럼 태풍아. 너랑 내가 저 애들 좀 도와주자. 술을 몇 짝은 들고 와야 할 텐데, 쟤네들만 가선 힘들 거야.”
안성훈의 제안에 김태풍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그리고 그사이, 랩원들은 어느덧 학생 식당에 도착한다.
이때, 슬쩍 고개를 들어, 건물 위쪽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김태풍.
이미 일몰 시각이 지난 듯, 3월의 하늘은 이미 시커멓게 변해 있다.
“뭐 해? 안 가?”
그리고 그날 밤.
박한식 교수의 빠른 퇴근 덕분에, 실험실 랩원 전원은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또 술까지 마시며.
이게 바로 바쁜 생활 중에 한 번씩 찾아오는.
인생의 작은 즐거움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