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 천재-1화 (1/153)

1권

회귀 2년 차 대학원생 김태풍

1995년 3월 2일.

이른 아침, 김태풍은 눈을 번쩍 뜬다.

어느덧 석사과정 2년 차, 만약 학기제로 표기한다면 이제 석사과정 3학기가 오늘부터 시작되는 셈이다.

오늘 무척 활기찬 아침이다.

기지개를 켜는 그는 먼저 옆 침대부터 확인한다.

‘역시 아직 안 왔어.’

새벽 6시.

김태풍은 무척 일찍 일어난 터라, 룸메이트의 귀가를 아직 보지 못하고 있다.

밤을 꼬박 새우며 늘 밤마다 실험을 하고 있는 룸메이트.

녀석은 앞으로 2시간 뒤, 아마도 학생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난 뒤에 기숙사로 돌아와, 그대로 저 침대에 뻗고 말 것이다.

‘이 학교는 참 힘들긴 힘든 곳이야. 학생들이 낮이고 밤이고 다들 실험한다고 정신이 없으니까 말이야. 근데 밤에 실험을 하면, 실험이 더 잘 되려나?’

밤에 실험을 하고 한낮 동안에는 신나게 잠만 자는 룸메이트. 그는 김태풍과 같은 학년으로 현재 석사과정(대학원 석사과정) 2년 차다.

전공 분야는 화학 전공인 김태풍과는 완전히 다른, 전자 공학을 전공하고 있었고.

현재 이곳 한국연구기술원에서 자체 제작 중인 인공위성 2호 개발에 관여하고 있는 학생 연구원이기도 하다.

*한국연구기술원: 이공계 특화 대학 및 대학원으로 몇몇 대학원을 모델로 하고 있음.

그런 그는 아마 현재 시각인 아침 6시쯤이 되면 실험을 대충 마무리하고, 이제 기숙사로 돌아올 준비를 천천히 하고 있을 것이다.

‘흠. 그러고 보면 나도 한때 룸메이트처럼 야간 실험을 엄청 많이 했는데. 뭐, 그 부작용이 좀 심하긴 했지. 살만 뒤룩뒤룩 쪘으니까.’

그러고 보면 야간 실험을 할 때, 대략 새벽 1시 정도가 되면 그렇게 야식이 당기게 된다. 그 유혹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걸 못 참게 되면, 누구나 꿀돼지행을 피할 수가 없다. 야식을 먹고 운동도 안 하고, 그런 생활만 반복하다 보니 살만 그대로 찌는 것이다. 그래서 야간에 실험을 하는 대학원생들은 주로 살집들이 대단하다.

*야간 실험: 이공계 대학원생들의 경우, 실험 종류에 따라 야간에도 실험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기도 하며, 때로는 지도교수의 묵인하에 야간에 집중 실험을 진행하기도 함. 물론 이런 야간 실험은 일부 과학기술 특화 대학원에 주로 해당되는 부분임.

피식 웃는 김태풍.

이미 자신의 룸메이트도 꿀돼지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

점점 두 볼에 살이 포동포동 붙고 있는 녀석.

누구든 야식으로 기름진 치킨에 족발에 보쌈을 시켜, 마구마구 먹다 보면 살이 뒤룩뒤룩 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휴! 어쨌든 오늘은 드디어 일찍 일어났으니까, 이 아침을 일찍 시작해야겠어.’

어느덧 회귀 2년 차.

그리고 새 학기를 맞이하고 있는 김태풍의 마음가짐은 조금 더 달라진 상태다.

우선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그는 좀 더 자신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들을 앞으로 채워나갈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바로 운동 부분.

물론 아직 젊어서 며칠 밤을 꼬박 새울 수 있을 정도로 그런 체력은 충분하지만.

그러나 운동 능력만큼은 확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특히, 제대로 운동을 하지 않아, 물렁물렁해진 팔다리 근육들.

물론, 실험실에서 화학 실험을 진행할 때야 이런 근육들이 특별히 필요가 없다.

꼼꼼하게 초자(유리 비커 등을 일컫는 말) 세척 작업을 거친 뒤, 초자 반응기를 물샐 틈 없이 세팅하고.

또한 혹시 모를 방해 요소만 확실하게 제거한다면, 완벽에 가까운 화학 반응을 돌릴 수가 있다.

이때, 화학실험을 위해 후드 주변에서만 계속 맴돌다 보니, 자신의 팔다리 근육이 특별히 필요한 것도 아니다.

*후드: 화학 유해가스를 챔버 내의 천장 위쪽으로 빨아낼 수가 있어 그 공간 내에서 위험한 화학 실험을 수행할 수가 있음.

하지만 지금 김태풍이 생각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미래다.

실험실에만 처박혀 사는 암담한 연구원의 모습이 아니라.

근사하게 사업을 진행하기도 하는, 그런 벤처 사업가다운 모습.

투자자들, 바이어들의 호감까지 끌 수 있는.

이른바 아주 정장이 잘 어울리는 늘씬한 자태를 지닌 자신의 모습.

그런 모습들을 그는 막연히 꿈꾸고 있는 것이다.

‘흠. 그것만이 아니지. 나중에 연애라도 하려면, 내 몸부터 튼튼해야 하지 않을까? 건강한 사람이 더 멋질 테니까.’

지난 삶에서 49살까지 모태솔로이자 독신남이었던 가련한 김태풍.

그러나 회귀 2년 차인 김태풍은 이제 그런 쪽까지 욕심을 내고 있었다.

사실, 그런 욕심을 내기 전에, 실험에만 찌든 자신부터가 확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떠올린 방법은 바로 운동을 하는 것.

‘앞으로 할 일이 더 많아질 테니까, 이런 운동도 틈틈이 해 두는 게 나을 거야.’

그래서 그는 얼른 운동복을 갈아입은 뒤, 운동화까지 신고 있다.

그리고 훌쩍훌쩍 제 자리에서 뛰어 보기도 하는 김태풍.

그러나 생각보다 몸이 제대로 반응하지 않고 있다.

한 20번 정도 뛰고 나서, 금세 헉헉거리고 있는 모습.

현재, 팔팔한 24살의 나이이긴 하지만, 그의 체력은 흡사 40살 아저씨의 것보다 더 못할 지경이다.

왜냐하면, 그는 평생 운동을 해 본 적이 없다.

과학고를 다닐 때도 운동을 해 본 적이 없었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비슷했다.

그리고 작년 봄, 49살의 나이에 느닷없이 회귀를 하고, 또 23살의 자신으로 돌아왔을 때도 마찬가지다.

평생 운동과 담을 쌓아온 것이다.

그래서 그의 귀여운(김태풍의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뱃살은 평생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셈이다.

‘흠. 그래도 열심히 하면, 나도 식스팩 같은 거, 만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씩 웃는 김태풍.

사람은 꿈을 꿔야 발전이 있고, 또 뭔가를 이룰 수 있는 법이다.

아랫배에 차곡차곡 식스팩이 박히는 모습들을 한번 떠올려 본 김태풍.

그리고 속으로 힘차게 외친다.

‘그래. 으싸! 으싸! 한번 해 보자고!’

김태풍은 곧장 기숙사 밖으로 달려나갔고, 넓은 학교 내 건물들 사이를 힘차게 달리기 시작한다.

아마 이 학교에서 학부생을 제외하고는 조깅을 하는 유일한 인간이 될지도 모르는 김태풍.

연구 중심 학교에서 조깅이라는 게 쉽지 않은 일이지만.

김태풍은 남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서 힘차게 달리고 있다.

이때, 눈 아래로 다크서클이 축 늘어진 대학원생들이 야간 실험을 마치고 귀가하다가.

그런 김태풍을 발견하고는 신기한 동물을 쳐다보듯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기도 한다.

그러나 김태풍은 계속 달리고 있었고.

어느덧 저 멀리, 빨갛게 빛을 내며 세상을 밝히는 태양의 환한 모습을 보게 되자.

저절로 그의 얼굴에도 태양만큼 따사한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다.

*   *   *

아침 8시 30분.

아침 일찍, 랩에 출근한 김태풍은 첫 조깅으로 몸이 무척 고단해져 미칠 지경이었다.

*출근: 이공계 대학원생들은 보통 회사원같이 랩에 출근 혹은 퇴근한다는 표현을 쓰고 있음. 랩 자체가 단순 교육 외에도 전문 연구를 병행하다 보니 쓰는 표현임.

그렇지만 의욕을 불사르며 평소와 다름없이 곧바로 실험 준비 작업을 착착 진행하고 있다.

화학 전공 대학원생으로서 늘 있는 일상이나 다름없는 김태풍의 일과.

그의 일과는 오늘도 변함없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가장 먼저 그는 초자부터 깨끗하게 세척했다. 항상 사용 전에 다시 세척하는 것은 김태풍만의 룰이다. 이미 씻었던 것을 사용 전 다시 한번 세척하는 것이다. 완벽한 화학반응을 위한 것인데, 그러지 않고 대충 아무 초자나 쓰는 학생들과 다른 김태풍의 습관이었다.

그 일을 마친 뒤, 초자들을 건조기 오븐에 차례대로 집어넣고 있다.

그리고 그 초자들이 다 마를 때까지 기다리며.

그는 앞으로 진행할 실험방법들을 꼼꼼히 챙겨 보기도 한다.

화학 구조식을 다시금 확인해 보고.

또한, 반응기에 집어넣을 화학 시약들의 양도 다시금 꼼꼼하게 확인해 본다.

특히, 반응물질들의 몰(mole) 비율과 용매, 온도, 압력 등의 반응 조건들도 다시금 점검하는 김태풍.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한 뒤.

마치 수술실의 의사가 집도하기 전에 수술 장갑을 끼듯.

실험용 라텍스 장갑을 끼던 그는 갑자기 정색하며 고개를 돌리고 만다.

언제 옆으로 왔을까. 소리도 없이 나타난 실험실 동기 배진수. 그 녀석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있다.

“야. 김태풍. 너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지금 당장 교수님 방에 가 봐. 방금 복도에서 교수님을 만났는데, 너더러 지금 당장 교수실로 오라고 했어.”

“어? 지금?”

“야! 빨리 가 봐. 지금 당장 오라고 했다니까!”

배진수가 목소리를 높이자, 김태풍의 동작은 저절로 빨라졌다.

할 수 없이 실험 일정을 뒤로 미룰 수밖에 없는 김태풍은 먼저 장갑부터 벗는다.

그리고 곧장 실험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고.

실험실 근처에 있는 지도교수 박한식 교수의 교수실 앞에 섰다.

가볍게 노크를 한 뒤 문을 열자, 바로 눈이 마주치는 박한식 교수.

이때, 박한식 교수는 다급하게 손짓을 한다.

“어서 와. 거기 어서 앉게.”

“아, 네. 교수님.”

김태풍이 자신의 책상 앞쪽 의자에 앉자.

박한식 교수는 책상 한쪽 수북이 쌓인 논문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김태풍에게 내민다.

“자! 이걸 먼저, 자세히 좀 보게.”

그렇게 말하면서 표정이 금방 이상해지고 있는 박한식 교수.

이상한 느낌이 들어, 다시금 그를 쳐다보는데.

조금 전 다급했던 모습과는 달리.

박한식 교수는 눈꼬리가 한없이 치솟은 채,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깐깐한 학자이자 학생들에게는 너무나도 엄격한 박한식 교수.

그가 저렇게 눈꼬리가 올라갈 정도로 웃는 경우는 정말 흔치 않은 일이 아닐까.어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그렇게 생각하며, 그가 건넨 서류를 조심스레 살펴보던 김태풍은 이내 두 눈이 저절로 커지고 만다.

‘아! 맙소사! 이건?’

지금 박한식 교수가 건넨 서류는 평범한 서류가 아니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작년 12월.

자신이 네이처지에 투고했던 그 논문 원고(manuscript)에 대한 심사평들이 아닌가.

‘그게 벌써 왔다고?’

놀라는 김태풍.

“먼저 꼼꼼하게 잘 살펴봐. 나도 이렇게 빨리 1차 결과를 본 건 처음이네. 그만큼 자네 연구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목소리에 힘이 듬뿍 실린 박한식 교수.

그의 목소리는 무척 밝았다.

사실, 김태풍은 작년 12월, 첫 영어 논문을 작성했고 그걸 네이처지에 투고했다.

그런데 예상보다 더 빠르게 1차 심사 결과가 날아온 것이다.

보통, 심사 기간이 최대 1년, 보통 3개월~6개월 정도 걸리는 것에 비하면, 너무 빠른 결과였다.

그런데 그런 결과를 이미 봤을 박한식 교수.

그가 저렇듯 웃고 있다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설마, 혹시?

그 순간, 김태풍은 뭔가를 감지하고서, 빠르게 동공을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김태풍의 두 눈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뭐? 탈락(reject)이 아니라, 수정(minor revision) 결정이라고?’

김태풍이 놀란 눈을 하고서 고개를 들자, 요란하게 웃기 시작하는 박한식 교수.

맙소사!

네이처지에 투고한 자신의 논문 원고(manuscript)가 심사위원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것이다.

보통 수정 없이 바로 게재 허가(accept)를 받는 경우는 이런 최상위권 저널에서는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수정(minor revision) 결정이라는 것은 논문 게재 전초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총 5명의 심사위원이 무척 호의적인 평가를 했다는 말이다.

보통 5명 심사위원이 ‘이거, 괜찮네.’ 이렇게 평가하는 게 뭐가 어려울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심사위원들은 해당 저널이 네이처지라는 어마어마한 저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저들의 눈높이 역시 하늘을 찌를 듯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호평을 받는 일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힘든 일이다.

흔하디흔한 저널이 아니었다.

학계에서도 엄청난 지명도를 가지고 있는 네이처지.

그런 곳에서 그런 평가를 얻어낸 것이다.

“하하하! 오늘 아침에 이걸 보고서 난 숨이 막히는 줄 알았네. 자네도 보면 알겠지만, 수정할 부분들이 좀 많긴 해. 하지만 이 정도는 뭐, 약과지. 아마 단 한 명이라도 거절 의사를 표시했다면, 그냥 탈락했을 테니까. 하지만 우린 통과했어. 그리고 앞으로 이 논문은 기필코 게재될 거야. 그리고 두고 보라지! 곧 대한민국 학계는 발칵 뒤집어질 테니까. 국내 순수 논문으로 네이처지에 게재되는 것은 정말 희귀한 경우가 아닌가!”

그렇게 말한 뒤.

곧 ‘으하하핫핫!!’ 하며 큰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웃고 있는 박한식 교수.

물론 김태풍은 박한식 교수의 면전이라 소리내어 웃을 수는 없었지만.

지금 하늘로 붕 날아오를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과학자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아니 이공계 학생이라면.

누구나 꿈에 그리고, 또 누구나 상상하고 싶은 네이처 논문 출판.

그런 논문을 자신이 갖게 되는 상황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건 회귀 전에도 이루지 못한 쾌거가 아닌가.

1995년 3월, 아직 겨울의 한파가 다 사라지지 않은 3월의 새 학기.

이제 새 학기를 시작하고 있는 회귀 2년 차의 김태풍은 진정으로 더 큰 비상을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아주 환해진 모습으로 박한식 교수의 방에서 나오고 있다.

“아싸!”

그리고 조용히 고함을 지르고 있는 김태풍.

그는 오늘 너무나도 기분이 좋아서,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   *   *

이날, 김태풍은 정말 정신없이 실험을 했고, 또 논문교정 작업도 진행했다.

이른바 네이처에 출판을 하는 것은 과학자의 인생에서 크나큰 전기를 맞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은 미래에도 마찬가지다.

특히, 1995년 현재, 아직 국제 논문 편수도 부족하고 논문의 질적 수준도 무척 부족한 국내 학계.

순수하게 국내에서 진행된 연구로 네이처지 게재에 확정된다면, 국내 학계 전체에 센세이션을 일으킬 대사건으로 기록될 것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박한식 교수가 저렇듯 요란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다.

일례로, 네이처 논문에 자신의 이름이 공저자로만 실려도 10년간 자랑할 거리가 생긴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그냥 이름만 실리는 게 아니다.

김태풍은 제1 저자이고, 박한식 교수는 교신저자이다.

이 한 번의 도약이 그냥 높이 뛰어오르는 것만이 아니다.

마치 저 하늘 높은 곳까지 그냥 솟구쳐 오르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근데 너 왜 그렇게 실실 웃고 있어?”

“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계속 웃고 있던 김태풍.

그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린다.

실험실 동기 안성훈. 그는 김태풍의 모습이 이상했는지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묻고 있다.

“아, 아냐. 아무것도 아냐.”

석사과정 2년 차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학생 데스크들.

김태풍은 가장 안쪽 구석진 곳에 앉아 있는데.

그의 책상 앞에는 전공 서적들을 꽂아 둔 긴 책장이 높게 세팅되어 있다.

누군가 김태풍의 옆으로 바짝 다가오지 않고서는 그가 뭘 하고 있는지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 좋은 자리를 선점하고 있는 김태풍은 안성훈의 등장에 얼른 마우스를 움직여 보지만.

눈치가 빠른 안성훈은 김태풍의 컴퓨터를 유심히 쳐다보다가, 이내 눈을 반짝이고 있다.

“야. 그건 또 무슨 manuscript(논문 원고)야?”

“아, 이거?”

한참 네이처 논문 원고 수정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던 김태풍.

그리고 자신의 컴퓨터 화면에 그 파일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사실, 네이처 심사 결과에 대해서 아직 동기들한테 말하지 않고 있던 김태풍은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연다.

“별거 아니고, 이건 작년에 투고했던 manuscript와 같은 거야. 그냥 좀 부족한 부분들이 많이 있는 것 같아서 미리 문장들을 좀 고쳐두려고.”

“어? 그 문장들을 지금 왜 고쳐? 이미 투고도 끝난 거잖아? 그리고 심사 코멘트가 오려면 아직 멀었잖아?”

“아. 그거야 뭐.”

“김태풍. 네 연구가 좋긴 하지만, 논문 출판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잖아. 형들도 그러던데, 변수가 정말 많다던데? 쌤통 많은 리뷰어(심사위원)한테 걸리면, 그날로 네이처는 날아간다던데? 그러니까 괜히 벌써 기대하지 마. 나중에 너 마음만 아파진다.”

혹시 모를 안 좋을 상황을 대비해서 안성훈은 김태풍을 배려하며 말을 하고 있다.

동기를 걱정해 주는 녀석의 마음은 참 고마운데.

하지만 김태풍은 선뜻 심사 결과에 대해서 입을 열지는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직 출판 확정이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수정 요구만 받은 상태.

물론 출판 확정으로 직행할 것 같이, 분위기가 아주 좋아 보이긴 한다.

그러나 이런 수정 요구 단계에서 게재 탈락이 되는 경우도 종종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설레발을 칠 필요는 아직 없는 것이다.

나중에 출판 확정을 받고 난 뒤에 이야기해도 충분할 테니까.

“근데 수상하단 말이야.”

역시 감이 좋은 안성훈.

무언가 이상한 냄새(?)를 맡은 녀석.

그는 동공을 이리저리 굴리고 또 코를 여기저기 킁킁거리다가.

더는 뭔가를 찾지 못하자.

결국,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그리고 잠시 뒤, 다시 나타난 안성훈.

“야. 김태풍. 방금 문호 형한테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내일 점심때 최우식 선배가 온다는데?”

“응?”

“교수님 뵙고 나서 그 선배가 우리 점심을 사준대.”

“점심?”

“그래. 요 학교 밖, 중국집. 그러니까 그때 다 같이 나가자. 형들도 대부분 같이 가기로 했어.”

그렇게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김태풍은 계속 머리를 갸웃거리고 있다.

최우식 선배라고?

그가 대체 누구지?

작년 봄, 49살의 나이로 제약회사에서 잘린 뒤 회사 주차장으로 걸어가던 중, 돌연 번개를 맞고서 우여곡절(?) 끝에 회귀를 했던 김태풍.

그래서인지 익숙하지 않은 선배들은 바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결국, 안성훈에게 물어보기로 하는 김태풍.

“근데 최우식 선배가 누구지?”

“임마. 넌 그거도 기억 못 하냐?”

“미안. 나 기억이 안 나는데?”

“야! 작년 1월에 그 선배를 다 같이 봤잖아. 기억이 안 나?”

그리고 그 순간.

안성훈의 그 힌트에 이내 뇌가 재빠르게 회전하던 김태풍.

다행히 곧 기억이 되살아난 김태풍은 뒤늦게 눈을 반짝이고 있다.

‘아! 최우식 선배!’

그는 김태풍이 석사과정에 입학하기 전, 이미 실험실 석사과정을 졸업한 선배다.

어느덧 박사과정 2년 차가 된 최문호, 조현상, 배준희와 동기인 최우식.

그는 다른 동기들과 달리, 박사과정 진학을 포기하고 바로 산업체 연구소에 취업했다.

더는 공부하기도 싫고 이제 돈을 벌겠다며 실험실을 나간 것이다.

물론 그는 군 문제가 전혀 없는 군 면제자다.

이른바 신의 아들(군 면제자).

그래서 그는 특별한 문제 없이 곧바로 국내 최고의 제약회사에 취업할 수 있었는데.

그런데 그곳에서 뭔가 신통치 않은 일들이 생겨, 작년 여름에 그 회사에서 잘렸다고 한다.

그 뒤, 어느 회사에 다시 취업했다고 했는데.

더는 기억이 나지 않는 김태풍.

그리고 김태풍은 그 이상을 기억할 생각도 없어졌다.

이미 사회에 진출한 선배라, 이미 관심권에서 좀 멀어졌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아침 11시쯤, 깔끔한 정장 차림을 한 최우식 선배가 실험실에 나타났다.

한 손에 두툼한 선물 박스를 든 최우식.

눈이 약간 작은 그는 동기들과 후배들을 바라보며, 다소 많이 튀어나온 입으로 씩 웃고는.

곧장 박한식 교수의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대략 1시간쯤 뒤.

다시 실험실로 돌아온 최우식.

“야! 다들 나가자. 형들, 바로 나가죠. 오늘 무조건 제가 쏩니다! 하하! 탕수육, 깐풍기, 고추 잡채까지는 확실히 쏘니까, 바로 나갑시다.”

선배들, 동기들, 후배들에게도 힘껏 외치고 있는 최우식.

그런 최우식의 외침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다.

정말 모처럼 실험실 선배가 실험실을 방문한 거다.

어쩌면 이 실험실에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풍경일 듯.

왜냐하면, 대다수 졸업생은 지도교수인 박한식 교수에게 치를 떨며 실험실을 나가곤 한다.

그리고 그들 대다수는 다시는 이 학교에 이 실험실에 얼씬거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최우식은 나름 석사과정 동안 박한식 교수의 애정(?)을 듬뿍 받았기 때문인지.

박한식 교수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이렇게 무척 호쾌한 모습으로 오늘 실험실을 방문하게 된 모양이다.

그리고 그런 최우식의 외침에 모두 한자리에 모이고 있다.

김태풍은 자기 동기들인 배진수, 안성훈, 최기호와 더불어 그 대열에 합류했고.

이번에 새로 들어온 석사과정 1년 차 신입생들인 한진우, 최홍석, 유경원, 김경태도 냉큼 대열에 합류한다.

박사과정 1년 차 차경석, 최형수, 김창민.

박사과정 2년 차 최문호, 배준희.

박사과정 3년 차 홍병호, 장공석, 김창용.

박사과정 4년 차 강민수까지 합류하자, 어느새 인원이 총 17명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최우식 본인까지 포함한다면 총 18명.

이런 인원이 단체로 중국집에 들어가면, 그 식비가 꽤 나올 것이다.

“근데 현중이랑 현상이는?”

복도에서 사람들을 쓱 훑어보던 최우식은 자신의 동기인 최문호에게 불쑥 물어보았고.

최문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연다.

“야! 걔들 야간조(야간 실험을 하는 대학원생들에 대한 은어)잖아. 지금 한참 기숙사에서 자고 있을 거야.”

“와! 진짜냐? 아직도 야간조야?”

“그리고 걔들은 그냥 버리고 가는 게 좋아. 혹시 무슨 사고를 칠지도 모르고.”

조현중, 조현상, 이른바 현현커플로 불리고 있는 괴이한(?) 대학원생들.

그 인간들은 아마 어젯밤에도 밤샘 실험을 한 뒤.

아마 오늘 아침 일찍 기숙사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쯤 깊은 꿈나라에서 헤매고 있을 녀석들.

“뭐, 그 녀석들은 그렇다고 치자. 그럼 철중이 형과 정식이 형은?”

“그 형들은 지금 많이 바쁘잖아. 졸업이 코앞이라서 말야. 아마 막바지 실험을 하려고 며칠 전부터 외부로 출장을 계속 가는 것 같던데.”

“아…….”

그렇다면 그 외 나머지 멤버들은 이번 식사에 모두 참여한다는 것이다.

물론 빠진 사람들도 있다.

포닥(박사후연구원) 박사들과 테크니션 연구원들.

그들은 그들끼리 늘 따로 식사를 하다 보니, 이번 식사 대열에서도 자연스레 빠진 것이다.

그들까지 챙길 생각은 없는 듯, 최우식은 곧장 앞장을 선다.

“그럼 모두 가죠. 근데 학교 앞, 사천 차이나, 아직 살아있죠?”

“야. 당연하지. 아직 멀쩡해. 미리 예약도 해 놨어.”

“오케이~! 고! 고!”

그렇게 단체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실험실 선후배들.

그런데 화학과 건물을 나오자마자, 그들은 각자 따로 움직인다.

다들 출퇴근용 자전거를 갖고 있는 터라, 대다수가 자전거 자물쇠를 풀고는 자전거에 오르는 모습이다.

반면 최우식은 동기들과 함께 걷기로 했는데.

그리고 잠시 후, 모두 학교 앞 중국집에 도착했다.

“야. 우식아. 근데 오늘 진짜 많이 시켜도 되지? 나, 오늘 아침밥도 못 먹었어.”

박사과정 3년 차 장공석.

대단한 대식가이자, 야식 킬러인 장공석.

장공석이 그렇게 외치자, 최우식은 약간 부담스러운 듯 안색이 좀 굳어졌다가, 그래도 억지로 웃으며 대꾸한다.

“형. 많이 시켜요. 이 가게에서 막 먹는다고 돈이 얼마나 나오겠어요? 그냥 팍팍 시켜요.”

“오오~ 케이! 너 진짜 오늘 멋지다! 회사 가더니, 이게 완전히 사람이 됐어. 하하하~ 야! 야! 아까 거기서 더 추가하자! 팔보채 두 그릇, 탕수육 대자로 두 개 더 추가시켜!”

정말 팍팍 시키고 있는 장공석. 지금 그는 더 체중이 불어난 모습인데, 얼굴이 그야말로 달덩이와 같다.

아무래도 그는 요즘 몸매 관리를 완전히 포기한 것 같다.

작년부터 늘 새벽 2시까지 실험을 한 뒤, 귀가를 하고 있는 장공석.

그러다 보니 밤늦게 날마다 야식을 먹는 것이다.

저렇게 먹다간 훗날 살을 빼는 게 쉽지 않을 텐데.

그런 장공석이 모두들 걱정스럽기도 하다.

잠시 후, 주문을 마치자, 오순도순 대화가 시작되고 있다.

“야. 근데 우식아. 너 또 회사를 옮겼다며?”

“네. 다니던 회사가 별로라서, 또 옮겼어요.”

“그런데 그렇게 몇 번이고 옮겨도 괜찮아?”

“그래서 아까 교수님과도 상담을 했는데…… 뭐 이번에 옮긴 회사는 괜찮아서, 앞으로 말뚝을 박으려고요.”

“이제 정착한다는 거냐? 근데 대체 어느 회사에 들어갔어?”

이들 중에서 가장 연차가 높은 박사과정 4년 차 강민수. 그가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면서 현재 회사에 대해 묻자, 최우식은 재빨리 답변한다.

“네. 이번에 들어간 회사는 제이씨 화장품 연구소요.”

“어? 화장품 연구소?”

다들 이상하게 쳐다보자, 최우식은 씩 웃는다.

“네. 다르게 생각해 보면, 우리가 꼭 화학회사, 제약회사 쪽으로만 갈 필요가 없잖아요? 화장품 개발 쪽이 제 생각엔 훨씬 더 낫다고 봐요. 제품도 더 빨리 출시가 되고, 그래서 성취감도 더 높아지고.”

“어? 그래? 그럼 잘된 거잖아?”

“네. 제 생각에는 그래요.”

최우식의 그 말에 다들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생각해 보면, 그의 선택은 나쁘지 않은 선택인 것 같다.

화장품 연구소도 따지고 보면 유사 계통이고.

제품 개발 회전율도 좀 더 높아, 자신이 개발한 제품이 시장에 나올 가능성이 더 커지게 된다.

“그러면, 작년에 네가 들어갔던 그 첫 회사 말이야. 거긴 대체 왜 나왔어?”

“아. 경성제약 말이죠?”

“그래. 거기 상당히 좋은 제약회사잖아?”

“좋은 회사면 뭐 해요? 형! 말도 마세요.”

“왜?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어?”

“저, 거기서 동물실험 관리하다가 순 바보 됐다니까요.”

“뭐? 그게 무슨 말인데?”

모두 의아해하며 최우식의 입만 쳐다본다.

다들 자세한 이야기까진 모르는 것이다.

“제가 청담동에 살잖아요.”

“……어?”

갑자기 생뚱맞은 대화 전환.

조금 전, 동물실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왜 청담동 이야기를 하는 걸까?

그런데 그때, 문득 어떤 기억 하나가 스르륵 생각이 나는 김태풍.

그러고 보면, 과거 기억 속에 최우식은 자신이 서울 청담동에 산다고 늘 떠벌렸던 게 기억이 난다.

원래 최우식은 경남 마산 출신.

그러나 그는 대학을 다니면서 사투리를 거의 다 고쳤고.

약간 억양이 이상해지긴 했지만, 얼추 비슷한 류의 서울 발음을 구사하고 있다.

“다들 제가 거기 왜 사는 줄 알죠?”

“응? 무슨 말이야? 우리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 맞다! 맞아! 제가 그 이야기까진 여기서 안 했군요. 형들! 그럼 잘 들어요. 여자란 말이죠.”

“어?”

“남자가 청담동 같은데 살아야 되게~ 관심을 가진다고요. 그러니까 저도 이제 좀 인기가 있다니까요.”

어? 이건 무슨 말인가?

갈수록 논리 비약이 심각하다.

난감한 최우식의 말에 모두 한 번씩 최우식을 쳐다보게 된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의 마지막 말을 다시금 떠올리며, 더 유심히 최우식의 얼굴을 쳐다본다.

사실, 이 학교 출신 대다수는 대체로 머리가 큰 편이다. 그리고 정말 공부를 잘하게 생긴 얼굴들이 참 많은 편이다.

그런데 그중에서 저 최우식은 군계일학.

정말 정말, 공부 잘할 것 같이 생긴 얼굴.

지금 그는 깨끗한 정장 차림을 하고 있지만.

툭 튀어나온 잇몸. 그리고 길쭉한 턱, 작은 눈, 그리 좋지 못한 피부까지.

최악의 것들을 모조리 다 가지고 있다.

그나마 키는 크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

“……나중에 다들 꼭 청담동으로 이사 오세요.”

“왜?”

“진짜, 몇 번을 말해야 해요? 제가 말했잖아요. 청담동에 사는 남자는 뭔가 있어 보인다니까요. 절 봐요! 제 얼굴이 뭔가 좀 다르지 않나요?”

뭐가 다르지?

똑같이 못생긴 최우식 선배.

모두들 아연실색하는데.

그런데 그때, 정말 놀라운 일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야!! 야!! 정말, 그 말 진짜냐!!”

대체 누가 저렇게 귀가 아플 정도로 고함을 지르지?

놀란 그들은 좌우를 살피다가, 눈이 동그래진다.

늘 미팅녀들한테 핵폭탄 취급을 당하고 있는, 뚱뚱한 장공석이다.

그가 지금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최우식에게 고함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아?? 공석이 형? 네! 당연하죠! 형 같은 사람은 무조건 청담동 주민이 돼야 해요!”

“야. 그러면 말이야. 혹시 네 주변에 여자들이 막막 붙어?”

“하하~ 잘 아시네. 저, 어제도 소개팅했어요.”

“우아와!”

“부럽죠? 사는 동네가 좋아서, 소개팅은 많이 해요. 하하하~!”

“야. 근데 거기 너무 비싸지 않아?”

“뭐가 비싸요? 전세 얼마 안 해요.”

“야. 그게 말이 되냐? 거기 전세가 싸다니?”

“저 빌라 살아요.”

“빌라?”

“뭐, 반지하이긴 하지만, 햇볕도 좀 들어오고.”

“햇볕? 그럼 몇 평인데?”

“14평.”

“에게게? 그거 너무 작은데?”

“형. 우리 같은 사람은 돈도 열심히 저금해야 한다니까요. 그리고 그깟 평수는 좀 작아도 저축하려면, 그런 데라도 꼭 살아야 하고요.”

“야! 그래도 뭔가 좀 구질구질하다?”

“참나! 형!! 소개팅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저 청담동에 살아요’ 이런 말을 하는 게 얼마나 먹히는데요?”

“뭐?”

“그 정도 말은 해야, 우리 같은 사람들도 나중에 장가도 갈 수 있다니까요.”

“야! 근데 듣다 보니까, 갑자기 성질난다. 뭐? 우리 같은 사람이라고?”

“우와아! 혀엉!! 대체 왜 그래요!! 여기 저보다 못생긴 사람은 딱 형뿐이잖아요!!”

“뭐어? 아씨! 이게!!”

반전이다.

갑자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는 장공석.

“형!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이세요. 그래야 발전이 있죠.”

“아이씨이!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너보다는…….”

“형! 저는 지금 청담동 산다니까요! 뭐가 똑같아요?”

“어휴. 아이씨이.”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대화.

어느 순간, 다들 멍하니 지켜보기만 한다.

끼리끼리 논다고.

정말 끼리끼리 어울리는 대화다.

정말 남자가 청담동 빌라에 살아야 장가를 갈 수 있다는 최우식의 말이 과연 맞는 말인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지만.

그러나 최우식은 무척 자존감 있게 말하고 있다.

그러다가 다시 돌아온 회사 이야기.

“그럼 거기서 왜 잘린 건데?”

“아. 그 회사가 흠~ 경기도에 있잖아요.”

“그렇지. 경성제약 연구소가 경기도에 있지.”

“작년 여름 휴가 때, 거기서 좀 문제가 생겼어요.”

“문제?”

“네. 제가 휴가 중간에 잠깐 회사에 나갔어야 했는데, 제가 사는 데랑 좀 멀어서 안 가봤거든요.”

“어? 이상하네? 여름 휴가가 되면, 그냥 쉬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형. 연구원이 뭐 그런 게 있나요?”

“음. 그래서?”

“신약 전임상(동물시험) 연구에 작은 돼지를 실험용으로 쓰는 중이었는데. 뭐, 제가 신입이라고 그 돼지 관리를 맡고 있었어요.”

“그래서?”

“하필 그 여름 휴가 때 소개팅이 여러 개나 잡혀 있어서, 저도 뭐 그때 깜빡했죠.”

“뭘 깜빡한 건데?”

“물 주는 거하고, 사료 주는 거.”

응??

뭐라고??

“젠장! 대충 그림이 눈앞에서 그려지죠? 여름 휴가 마치고 돌아와 보니까, 돼지들이 삐쩍 말라서 다 폐사했다고 하더라고요.”

“……?”

“그래서 연구소가 난리가 났죠.”

“설마 중요한 돼지들이었어?”

“네. 정말 어렵사리 관리하던 무균돼지들이었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

“뭐, 그 때문에 시말서를 수십 장이나 쓰고, 연구소장님한테 불려가 엄청나게 깨지고……. 그런데 제일 압권은, 회사 오너가 임원 회의하다가 연구소장님 머리에 재떨이를 던졌다고 하더라고요.”

“뭐??”

“물론 소장님은 용케 재떨이를 피해내긴 했죠. 하지만, 그날 저는 또 불려가서 뒤지게 깨졌다니까요.”

“휴! 정말 힘들었겠다?”

“그게 뭐 한두 번도 아니고 날마다 그러니까, 제가 견딜 수가 있어야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사 식당에서 설렁탕을 먹다가 또 지랄을 하길래, 제가 갖고 있던 사표를 그냥 소장님 면전에 던지고 나왔다니까요. 카아~ 그때 얼마나 기분이 시원하든지~ 하하하~!”

그러면서 요란하게 웃고 있는 최우식.

그러나 최우식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다들 멍해진 모습들이다.

뭐, 저런 미친놈을 다 봤나? 그런 눈빛들.

실험 돼지들을 말려 죽이면서도 무조건 장가갈 욕망으로 청담동에만 산다는 저 이상한 인간.

모두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들을 했지만…….

누구도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는다.

선배들도 마찬가지고, 그의 동기들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이 식사의 물주는 바로 저 인간, 최우식이기 때문이다.

당장 눈앞의 이익(탕수육, 팔보채)이 있는데.

뭐, 적당히 비굴할 줄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야. 그냥 조용히 밥이나 먹자.”

“그래요. 형.”

“크윽. 진짜 대단하지 않냐? 저게 바로 최우식이야.”

한편, 최우식 선배가 사준 점심을 그렇게 떠들썩하게 먹은 뒤, 김태풍은 실험실 선후배들과 어울려 실험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2시간 남짓 실험을 빠듯하게 진행했다.

그리고 그 일까지 마친 뒤.

김태풍은 부랴부랴 실험실을 나오고 있다.

‘휴! 벌써 3시네. 약속 시각에 늦진 않겠지?’

서둘러 택시까지 잡아타고 김태풍이 향하고 있는 곳은 시내에 있는 증권회사다.

김태풍은 자신의 계좌에 저축되어 있는 돈으로 이제 좀 더 거창한 투자를 진행할 생각이다.

벼르고 벼른 끝에 드디어 시작하려는 것은 미국 IT 기업들에 대한 투자.

즉, 1995년의 물 좋은 시기에 미국 주식 투자를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런 해외 투자를 하기 위해서는 증권회사의 중개가 필수.

물론 며칠 전, 해외증권투자 전용계좌를 개설해 둔 터라, 이제 본격적으로 미국 회사 주식 매수를 시작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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