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04 고래 싸움 =========================
두웅.
둥.
북 수천 개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울려퍼지고 있었다.
인간과 이종족을 막론하고 모두가 그 소리에 몸을 곧추세웠다.
자그마한 고블린부터 커다란 오우거나 미노타우로스 등도 곳곳에서 모습을 보였다.
이들 모두가 노스트라 제국의 깃발 아래 뭉친 전사들이다.
그 수는 무려 백만을 넘었다. 제국 전역에서 끌어모은 인원이니 그럴 만도 했다.
더욱 무서운 건 그 중 태반이 전투에 익숙하다는 사실.
북방의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자들이다. 싸움에 약하다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다들 모였군.”
“예. 황태자 저하.”
모습을 드러낸 슈바인 앞에서 수하들이 일제히 몸을 굽혔다.
슈바인은 검푸른 갑옷으로 무장한 채 검을 들고 있었다.
황도에서도 갖춘 적 없던 완전무장이다.
“으음.”
마음을 편히 먹으려 해도 절로 온 몸이 긴장된다.
기반 자체를 끌어 움직이는 일생일대의 도박이니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슈바인은 몸 안에서 움직이는 황금혈의 감촉을 음미했다. 익숙한 충만감에 불안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긴장을 다 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수하들이 들어왔다.
제각기 갑옷과 창칼로 무장한 기사들이다.
하나같이 준수한 미남미녀들이나, 그 속은 수백 년간 살아온 요물들이었다.
노스트라 제국의 유래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슈바인은 그들에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폐하께서는 안쪽에서...오늘의 출정식은 슈바인 황테자 저하께 맡긴다고 하였습니다. 주인님.”
황제는 그 날의 싸움 이후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누구도 알 수 없었으나, 추측으로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 같았다.
아마 강력한 상대를 만나 싸운 덕택일 것이다. 슈바인도 수 달 전 그 흔적을 확인했었다.
처음 그것을 본 슈바인은 바로 의식을 잃을 뻔했다.
요새는 물론 주변 산지까지 생긴 크레이터는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몇 달이 지난 지금도 그것만 생각하면 헛숨이 나온다.
그 정도의 힘을 냈다는 건 둘째치고, 이를 막아낸 황제의 능력도 한계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새삼 아일란의 증폭 능력이 그리워졌다. 그것이 있다면 이렇게 고심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고개를 내저은 슈바인이 입을 열었다.
“하긴 그 정도로 격렬하게 싸웠다니 그러실 만도 하겠지. 알았다. 군의 열병 준비는 어떤가.”
“1군단부터 15군단까지, 총 148만 7206명의 제국군이 도열했습니다. 형태는 횡진으로서, 그대로 서리대평원 전체를 통해 진군할 계획입니다.”
“알겠다. 준비하지.”
명을 받든 수하들이 먼저 움직였다.
그 뒤를 따르자 엄청난 양의 군세가 눈에 들어왔다.
지평선을 채우고, 그 뒤로 채우는 병사의 물결!
저들 모두가 노스트라 제국의 군대다. 자신들을 위해 남쪽의 인간들, 그리고 마왕군을 밀어붙일 피의 군대다.
이를 보자마자 방금 전까지 있던 불안이 씻은 듯 사라졌다.
“오오!!”
“황태자 저하시다!!”
“와아아아!!”
슈바인의 등장에 노스트라 제국군이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북소리도 마찬가지로 한 층 더 격렬해졌다.
둥. 둥.
“들으라! 나의 신민들이여. 제국의 신민들이여!”
낮은 목소리로 시작된 슈바인의 연설은 모두에게 퍼져나갔다.
미리 마나석과 통신구슬을 배치해 둔 덕분에 모든 병사가 그걸 들을 수 있었다.
연설의 내용은 점점 힘을 더해 갔다.
그것은 생활의 깊은 곳에 이른 추위와 혹한을, 그리고 삶의 의지를 자극했다.
병사들에게서 열기가 하나둘씩 피어올랐다. 슈바인은 그 폭발의 방향을 남쪽으로 돌렸다.
더 이상은 어떤 말을 해도 상관없었다. 나머지는 눈앞에서 흥분한 이 백오십만의 병력이 전부 말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가 - 라!!!”
연설의 마지막, 슈바인은 명령을 내리려 했다.
탁.
그 뒷편으로 황제가 걸어나왔다.
황금혈을 받아 금발인 계승자들과 달리, 황제는 회색빛의 머리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그 마석인가.”
“...!!”
놀라 굳은 슈바인에게서 마나석을 빼앗은 황제가 입을 열었다.
“진군하라. 제국의 전사들이여.”
작디작은 한 마디였으나, 거기엔 막강한 힘이 들어 있었다.
카리스마나 사기 진작이라기보다는 언령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효과가 잘 들었다. 병사들은 제각기 미친 듯 소리지르며 움직였다.
“쿠워어어어어!!!”
선두에선 권속이 된 대형 몬스터들이 움직였다. 수천 기가 넘는 거수들이 움직이니 마치 성벽 자체가 밀려오는 것 같았다.
쿵쿵쿵쿵!
몬스터들의 발움직임에 지축이 진동했다. 그 뒤로는 말을 탄 기사단, 그리고 라이칸스로프나 켄타우로스 같은 인외종들이 따랐다.
네 발로 움직이는 자들의 뒤엔 백만이 넘는 보병이 병장기를 움켜쥐고 뒤따랐다.
인간도 있고, 몬스터도 섞여 있다. 키나 형태는 들쑥날쑥하나 그 기세만큼은 무섭도록 살벌했다.
이 대열의 최후미엔 수없이 많은 마법사들과 궁수들이 있었다.
제국 전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끌어모은 인원들이다.
무려 삼만 명 가량이나 되는 마법사 군단.
다이아몬드 타워 전원이 나서도 이는 막지 못할 게 틀림없었다.
슈바인은 그들을 총지휘하며 움직였다. 백만이 넘는 병사들인 만큼 극히 어려운 일.
하지만 황제의 한 마디에 제국군은 놀랄 만큼 강인해졌다.
덕분에 이 인원들이 한꺼번에 움직임에도 소요 하나 일어나지 않았다.
“케르르륵!!”
“끼이이!!”
제국군이 진격해 오자 서리대평원의 몬스터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악의 험지라는 말에 걸맞게 거센 저항이 있었다.
하지만 3대 험지란 명성도 땅을 밀어붙일 듯 들어오는 공세 앞에선 어쩔 수 없었다.
“구어어어어어!!”
“캬아아아악!!”
수백만 군세가 걸음을 옮기는 소리는 평원 전체를 뒤흔들었다.
서리대평원 맞은편의 카딤 제국군 진영까지 그 목소리는 똑똑히 들려왔다.
***
“노스트라 제국이 침공해 왔다고?!”
“드디어 오는가...!”
제국의 북방 방어선이 오랜만에 시끄러웠다.
노스트라 제국군의 진격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정보는 확실한가?”
“그야...”
“하긴, 물을 필요도 없겠군.”
병사들을 다그치던 장군이 이내 북쪽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굳이 첩자를 다그칠 것도 없었다. 급격히 가까워지는 함성소리만으로도 충분했다.
“하, 전방에서는 지금쯤 한창 뜨겁겠군.”
“그렇겠지요.”
근처의 다른 병사들도 이에 동의했다.
그들의 앞으로는 몇 개의 방어선이 주욱 펼쳐져 있었다.
안개가 걷힌 뒤 근방의 몬스터들을 몰아내고 세운 방어선이다.
건설 기간이 짧긴 하나, 수많은 인력이 들어간 만큼 꽤나 많은 출혈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여하간 놈들이 움직인 이상 최소한 여기까지는 오겠지. 그 전에 어서 이 소식을 윗분들께 전달해라!”
“예!”
장군의 명에 병사들은 온 힘을 다해 움직였다.
덕분에 노스트라 제국의 진군소식은 금방 황궁까지 전달되었다.
황궁에 있던 발린 일행에게도 소식이 들려오는 건 금방이었다.
“기어이 오는군.”
발린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안색을 굳혔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수없이 수련해 왔다.
이제는 그 힘을 마음껏 드러낼 차례다.
“폐하께서 급히 부르십니다. 발린 공. 레벤 대신관님.”
“교황청의 다른 전력은 뭘 하고 있지?”
발린의 물음에 달려온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특별히 다른 반응은 없습니다. 다만 부상자의 치유와 이교도의 개종을 위해 일부 성기사와 신관들을 움직였습니다.”
“...그 정도라면야.”
레이안 교단이 카딤 제국의 행사에 진작 끼었다면 제국은 이미 온 세계를 통일했을 것이다.
세속의 전쟁에서는 어디까지나 중립! 그것이 레이안 교단의 모토였다.
이번에는 적이 노스트라 제국, 즉 교단의 손이 없는 이단이라 약간이나마 군세가 움직였다.
이것도 교황이 상당한 반발을 무릅쓰고 움직인 것이다.
여하간 노스트라 제국이 움직였으니 이 쪽도 패를 꺼내들 때가 왔다.
발린은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준비하고 움직인다고 전하도록.”
“예.”
명을 받든 기사가 뒤로 물러났다.
“백오십만이면...상상이 안 되네요.”
“그러게.”
발린은 고개를 내젓고 움직였다.
그가 향한 곳은 황궁의 통신용 수정구 보관소였다.
파이오니어 왕국과 통하는 수정구를 집어들자 얼마 후 국왕의 모습이 나타났다.
“오오, 무슨 일인가. 발린 공.”
자국의 마법사를 외국에서 봄에도 국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발린이 가 있음으로서 그만큼의 이득이 왕국으로 들어오는 판이다.
아예 제국으로 거처를 이전한다면 모를까, 그 전엔 어디에 있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래서일까, 국왕이 그를 대하는 어조는 꽤나 가벼웠다.
하지만 이번에 발린이 가져온 소식은 꽤나 무거운 일이었다.
“노스트라 제국이 드디어 침공했습니다. 국왕폐하. 하여 소신은 카딤 제국의 편을 들어 이 전쟁에 참전하려 하옵니다.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으으음...! 역시 그런가!”
왕은 순식간에 안색을 굳혔다.
각국이 걱정하던 소용돌이가 드디어 터졌다는 생각이었다.
“하면 그걸 짐에게 말한다는 건 따로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안 그런가. 발린 공?”
“...예.”
발린은 부정하지 않았다.
자신 정도의 지위라면 결코 가볍게 움직일 수 없는 위치다.
혼자의 뜻이 혼자만의 뜻이 아니게 되는 위치!
지금 발린의 후광은 그 정도로 거대했다.
그가 카딤 제국을 돕는단 건 파이오니어 왕국도 마찬가지라는 의미였다.
그것이 지금 국왕이 고민하는 이유였다.
“아직 정보도 제대로 없고, 양측의 형세도 보지 못했잖은가! 공 혼자서 이렇게 나오니 당혹스럽기 짝이 없구만.”
어찌나 당황했는지 국왕의 말이 뚝뚝 끊기고 있었다.
발린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국왕폐하. 폐하께서도 이미 느끼고 있지 않으십니까. 삼황자 건 이후로 각 왕국들이 노스트라 제국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걸.”
“그렇긴 하네만...”
“아마 대다수가 중립이거나 카딤 제국을 지지할 겁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우리가...전후의 협상 테이블에서 열매의 가장 달콤한 부분을 먹을 수 있겠지요.”
전쟁은 파괴만을 불러일으킨다고는 하나, 승자에게 한해서 이는 틀린 말이다.
패배자가 가지고 있던 땅과 보물! 그것은 열매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발린은 일부러 세계의 평화라느니, 언데드의 멸절 같은 것 대신 이렇게 말했다.
전생의 경험을 통해 이게 훨씬 더 효과가 좋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건 또 구미가 당기는군. 허나 발린 공. 조심하게나. 자칫하다 지는 편을 들게 되면 그 후의 미래는...”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절대로.”
발린은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뱀파이어들이 다시 한 번 이기는 미래따윈 없을 것이다.
그런 미래를 막기 위해 여기 왔고, 그만큼 노력해서 힘을 쌓았다.
모든 게 끝났다 여길 때 주어진 새 기회다.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믿겠네. 발린 공. 자네는 오크들을 없앨 때도, 루비 타워와 왕도를 구할 때도 그랬으니까. 그 정도 수완이니 이기는 쪽과 지는 쪽은 당연히 확실히 여기고 있겠지.”
“감사합니다. 폐하.”
의외로 국왕은 쉽게 발린의 참전을 윤허했다.
아마 그 쪽에서도 어느 편에 설지 의견이 팽팽할 것이다.
발린의 카딤 제국 지원은 그 논쟁에 쐐기를 박을 터, 국왕 입장에서는 차라리 다행인 일이니 그럴 만도 했다.
연락을 마친 발린은 곧장 몇 곳에 연락을 취했다.
대략적으로는 사파이어 타워나 다이아몬드 타워 등이었다. 모두 발린이 미리 인맥을 쌓아놓은 장소들이었다.
“무슨 일로?”
“알려드릴 게 있어서 연락했습니다.”
그렇게 몇 번 수정구를 바꿔 말하자 금세 소식은 모두에게 퍼졌다.
발린과 파이오니어 왕국은 카딤 제국을 전면 지지한다!
이 메시지가 각국에 가져오는 파장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발린 공! 폐하께서 서둘러 오시라고...”
“다 끝났소. 이제 가지요.”
등 뒤의 목소리에 발린은 지체없이 다리를 움직였다.
============================ 작품 후기 ============================
오늘의 첫 번째 연재분입니다.
완결이 다가와서 그런가, 글 쓰는 게 급격히 힘들어지네요.
그래도 독자분들이 계시니, 끝까지 달려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