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99 낮과 밤의 봉사활동 =========================
득의양양하게 눈을 빛내는 것도 잠깐이다.
예상을 확신으로 바꾸기 위해선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었다.
발린은 그 길로 카딤 제국 황도로 향했다.
뱀파이어의 일에 대해선 뱀파이어에게 묻는 게 확실했으니 당연지사였다.
황궁으로 들어간 발린은 레벤을 보자마자 입을 열었다.
“레벤. 아일란은 어디 있어?”
“아일란이요? 아마 지금쯤 황도 북서쪽 대신전에서...네. 신관 일을 배우고 있을 거예요.”
“...뭐?”
상상을 초월한 답변에 발린의 두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만약 말을 한 게 레벤이 아니었다면 농담으로 여겼을 것이다.
표정을 확인한 레벤이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도 웃긴 건 마찬가지라고요.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듣자하니 레벤에게 권속으로 묶인 후 아예 야심은 모조리 버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발린이 고개젓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거 완전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의 피를 먹는 거 아냐. 어둠의 마나가 있을 테니 신성력을 쓰지도 못할 거고. 남의 피를 빠는 짓도 못 할 텐데.”
“어찌보면 대단한 거 같아요. 그게 아무나 되는 건 아니니까.”
레벤의 의견에 발린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 녀석은 혼자 서지 못하는 것뿐이지. 어느 시대나, 어딜 가나 그런 놈은 꼭 있어. 절대 혼자서는 서지 못하고 주변에 붙어 사는 기생충같은 녀석들이.”
좋게 말하면 보호색이나, 사실상 자존감 자체가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꽤나 독한 일침이었다. 일말의 칭찬도 없는 것까지 하면 더욱 그랬다.
이것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부드러워진 모습이었다.
막 사로잡았을 때는 당장 죽이거나 생체 실험재료로 쓸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그게 이정도까지 바뀐 건 나름대로 괄목할 변화라고 할 수 있었다.
“여하간 아일란은 지금 대신전에 있는 게 맞지? 저번엔 교황청에 있더니만.”
“교황청 본청은 신성력으로 가득해서 진작 빼 뒀어요. 지금은 황도에 있는 대신전 중 북서편 대신전 소속 신전에 있을 거예요.”
“그래? 알겠어. 가르쳐줘서 고맙다.”
발린은 말을 마치자마자 그 쪽으로 움직이려 했다.
시간이 걸린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니 단숨에 남은 의문을 처리하고 싶었다.
“잠깐만요. 저도 같이 가요.”
“뭐?”
막 돌아서던 발린의 신형이 휘청거렸다. 레벤이 옷자락을 붙잡은 탓이다.
“너 오늘도 회의같은 거 해야 하지 않아? 당장 위쪽으로 올라갈 필요는 없다고 해도...”
발린은 난감한 기색을 보이며 물었다. 허나 레벤은 자신의 주장을 굽힐 기색이 없었다.
“그동안 열심히 말했으니 하루쯤은 휴가 좀 내죠. 뭐. 레이안 님께서도 그 정도는 봐주실 거예요. 게다가 발린 공이 폭주하면 그걸 말릴 건 저밖에 없잖아요?”
“폭주?”
“만나자마자 아일란 양을 죽여버릴 것 같아서요. 그건 그 분이 한번 더 검은 음모를 꾸밀 때 하셔도 충분해요.”
“흐음.”
하기야 지금껏 발린이 해 온 행적부터 그래왔다.
지나온 길을 모조리 마족의 피로 물들였으니 레벤이 이러는 것도 납득이 갔다.
하지만 그녀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다.
발린은 마왕과 황제를 막는 걸 최우선으로 여긴다.
그러니 뽑아낼 이득이 남은 마족에게 손을 댈 리 없었다.
“정말 별 문제 없다면 따라와. 다만 그 대신관 정복은 갈아입고. 남의 눈에 너무 띈단 말이야.”
“고마워요! 발린!”
승낙을 받은 레벤이 활짝 웃어 보였다.
오랜만의 휴가에 기분이 좋은 게 틀림없었다.
발린은 레벤이 준비를 마치자마자 황도 서쪽으로 향했다.
선발대전 당시 경기장으로 가는 방향이라 길을 잃는다던가 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불편한 게 있다면 레벤이 필요이상으로 붙어있다는 것 정도다.
“그 정도의 경지를 이루었으면서도 날씨에 영향받는다니, 무의 경지도 별 거 아니군.”
“레이안 님께서도 차가운 건 차갑다 말씀하시는걸요. 뭐. 어떤 존재든 그럴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 그래.”
발린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황도는 넓은 만큼 곳곳에 비치된 신전도 많았다.
그걸 관리하는 곳이 각 방향의 중심에 있는 대신전이다.
다른 대도시도 동, 서, 남 북.으로 있는 곳은 흔하다.
허나 황도의 경우엔 거기에 네 방향을 더해 북서, 북동, 남동, 남서에도 대신전이 있다는 게 특징이었다.
북서편 대신전에 도착한 둘은 곧바로 아일란의 소재를 파악했다.
아일란은 이 곳 관할 신전 중 6번 신전에 있었다.
황도가 워낙 넓은 만큼 각 구역마다 신전이 하나씩 있었는데, 이 곳도 그 중 하나인 셈이다.
6번 신전을 본 발린이 입을 열었다.
“의외로군. 신전은 대개 백색 돌로 커다랗게 만드는 줄 알았더니, 이런 저택도 쓰나?”
“그런 말은 실례예요. 레이안 님께서는 장소에 관계없이 너의 행실을 평하라고 했어요.”
울타리 안으로 가자 정신없이 뛰어노는 아이들 수십 명이 보였다.
발린은 대번 눈살을 찌푸렸다.
혼란과 불안정이 사방에 가득했다. 마법사로서 가장 싫어하는 상황 중 하나였다.
“와! 이쁜 누나다!”
“인상 나쁜 아저씨도 있어!”
발린을 본 아이들이 우르르 이 편으로 몰려들다가 멈칫했다.
지금 발린은 온 몸을 검은 마법사 로브로 감싼 상태였다.
아무리 레벤이 밝게 빛난다고는 하나 선뜻 다가가기는 어려웠다.
“누추한 곳이지만 어서 들어오...앗.”
아이들에게 끌려온 금발여인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좋아 보이네?”
“...이쪽으로.”
발린은 첫눈에 들어오는 아일란의 모습에 픽 웃었다.
발치까지 내려오는 흰 치마와 예복은 영락없는 레이안 교단의 신관복이다.
에이블 공작가에서 늘어져 있던 모습과는 천지차이였다.
레벤이 아이들과 놀아주는 사이, 발린은 아일란과 안쪽 방에서 독대했다.
“설마하니 네년이 신관복을...설마 이러면 내가 죄를 뉘우쳤으니 괜찮다. 하고 봐 준다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이 곳의 복장이니 입는 것 뿐이예요.”
말을 마친 아일란이 고개를 숙였다.
보아하니 완전히 이 곳 생활에 적응한 모양이었다.
더 있어봤자 할 것도 없기에 발린은 곧장 본론을 꺼내놓았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너희 뱀파이어들의 피 말인데, 아티팩트의 표면에만 닿아도 항시 거기에 마나를 불어넣을 수 있지?”
“예. 물론 가능해요. 인간은 그게 불가능할 테지만, 저 같은 뱀파이어들은 피 속에 흐르는 마나의 밀도가 말도 못하게 높으니까요.”
“그럼 그 피를 통해 마나를 상시 무언가에 불어넣는 것도 가능하고?”
“그건...”
아일란은 말을 잇지 못하고 망설였다.
아마 무슨 질문이 이런가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그 뒤에 깃든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말이다.
“지금 너를 없앨 생각은 없으니까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숨기는 게 없다면 그냥 갈 거거든.”
“...제 존재의의는 노스트라 제국이 무너질 때 없어지겠군요.”
“맞아. 잘 아네.”
발린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와서 선행을 한들 그의 잣대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마족은 전부 죽인다. 어둠의 마나의 해악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이 회귀한 후로부터 지금까지 이어 온 신조다.
이미 어둠의 마나가 어떤 결말을 불러오는지는 치 떨릴 만큼 겪었다.
이번 생의 세계만큼은 그 가능성을 절대로 남겨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비위도 좋군. 네가 모조리 부숴버리려고 했던 곳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다니.”
“그건...”
“역시 권속으로 묶여 있으니 그런 건가?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발버둥이라도 치는 거야?”
발린의 눈빛이 한층 더 매서워졌다.
우르릉. 우르릉.
보이지 않는 기세가 온 몸에서 피어났다.
이득 때문에 없애지 않는 것이지, 그것만 아니라면 당장 손을 쓰고 싶었다.
한 생 내내 쌓인 분노는 언제나 발린의 몸 속에서 일렁거렸다.
쉴 시간도 없이 수련에 매진한 원동력도 이것이었다.
허나 아일란은 겁을 먹으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전이었다면 당장 눈물부터 보였을 것이다.
겉모습도 그렇고, 그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아직은 죽을 수 없어요. 저는 제 죄값을...치러야 해요. 레벤 님께서 제게 기회를 주셨으니, 저는 그 몫을 치러야 해요. 그 다음엔 마음대로 하세요. 생체실험이든, 고문이든...하지만 지금은 안 돼요. 저 아이들이 커서 이 곳을 나가고, 당당한 사람으로서 사는 걸 보고 가게 해 주세요.”
“저 아이들?”
“...고아예요. 그 중엔 제가 아무렇지도 않게 없앤 사람들의 아이도 있지요.”
무슨 말인지 깨달은 발린이 입을 열었다.
“에이블 공작가의 식객과 피고용인의 아이들...인가?”
아일란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그 말이 맞다면 적어도 그녀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노력한다는 뜻이었다.
그것 하나만큼은 가상했다. 발린은 피식 웃고 물었다.
“그런 짓을 한다고 네 죄가 없던 일이 된다고 생각해? 네가 그들을 전부 죽인 건 변하지 않아. 네가...”
말이 격해지자 발린은 순간 크게 심호흡을 했다.
자칫하다 전생의 패악을 입에 담을 뻔했다.
“...결과가 좋은 것이면 다 좋다는 말이 있지. 그래, 맞는 말이야. 그러니 일단 지금은 물러가겠어. 노스트라 제국이 무너진 그 때 이야기하도록 하자.”
발린은 소나기처럼 말을 마친 뒤 자리를 떴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더 있다간 아일란에게 바로 살수를 쓸 것 같았으니 말이다.
“레벤, 일 다 봤어. 가자.”
“벌써요? 알겠어요. 얘들아, 누나 이만 가 볼게.”
“네에에? 저 아저씨 때문에 그래요?”
“가지 마요오!! - ”
양떼처럼 모여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레벤에게 매달렸다.
개중 몇몇은 발린에게 나뭇가지나 장난감 등을 들이대기도 했다.
어째 마왕이 된 듯한 기분에 발린은 픽 웃고 말았다.
“미안해. 다음에 꼭 올게. 응? 오늘은 바빠서...”
“아니, 괜찮아. 레벤. 조금 더 있자.”
“네?”
고갤 돌린 레벤의 얼굴이 기쁨으로 빛났다.
이제껏 몰랐는데, 지금 보니 아이들 돌보기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지금 바로 떼어내면 진짜 나도 마왕이라 불릴 거 아냐.’
어차피 영원묘에 가서도 한동안은 파훼법을 고민해야 한다.
생각은 어디서 해도 똑같다. 영원묘든 여기든 지능에 영향이 있는 건 아니니 말이다.
‘이번에는 레벤에게 빚을 지운 셈 칠까. 애들한테 마왕으로 오해당하는 것도 그렇고.’
“나는 생각 좀 하고 있을 테니까. 해가 지면 돌아가지 뭐.”
“...고마워요.”
레벤은 고개를 푹 숙인 뒤 다시 아이들과 어울렸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폼이 마치 매혹 마법이라도 건 듯했다.
피식 웃은 발린은 곧 한적한 그늘에 자릴 펴고 앉았다.
아티팩트의 효과에 대해서도 알았으니 이제 대처법을 생각할 때다.
지금부터는 무작정 강한 힘 대신, 적절한 공략법이 필요했다.
그날 저녁, 발린과 레벤은 나란히 고아원을 등졌다.
등 뒤로는 아이들의 배웅이 이어졌다.
“좋았나 보네?”
“네! 다들 하나같이 귀여워서...소냐나 엘리아 같기도 하고. 아, 엘리아도 다음번엔 데려와요. 에블린 폐하는 힘들지만...”
레벤은 신난 듯 연신 재잘거렸다. 발린은 가볍게 한숨을 쉰 뒤 촌철살인의 일침을 가했다.
“그렇게 아이가 좋으면 나중도 안심이야. 좋은 어머니가 될 테니까.”
“!!!!!!”
레벤은 교황청에 돌아갈 때까지 단 한 마디도 잇지 못했다.
고개를 푹 숙이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소냐의 299패에 대한 복수는 대신 해 줬다고 해도 될 것 같았다.
그 시각, 파이오니어 왕국의 수도.
“크...끄으...”
최후까지 저항하던 성기사가 쓰러졌다.
그 앞으로 걸어나온 인영이 눈앞의 문을 걷어찼다.
쿠당탕!
드러난 방에서는 역한 냄새가 풍겼다. 그 가운데엔 웬 중년인이 누워 있었다.
검은 인영은 세 쌍의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안녕하신가. 테네스 후작.”
“히, 히익!”
인영의 모습을 본 중년인이 기겁하며 물러섰다.
허나 인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소개를 했다.
“실례하지. 내 이름은 자-쿨카. 대장벽 남쪽에서 어둠의 군단을 이끌며, 마왕님께서 임명하신 공작의 좌를 가지고 있다네.”
============================ 작품 후기 ============================
오늘의 두 번째 편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시기 전 추천 하나만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데 하루에 선작이 8건이 날아갈 줄이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