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97 낮과 밤의 봉사활동 =========================
교황 요하네스 4세는 요사이 주가가 오른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세상이 요동치는 가운데 꾸준히 가치를 올린 한 명!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나, 더욱 대단한 건 그가 가지고 있던 핸디캡이었다.
한 번 무너진 교황청을 다시 일으키면서 그렇게 했다는 점.
이것이 요하네스 4세의 주가를 더욱 높게 올렸다.
자연히 대부분의 귀족들은 그와 티타임이라도 가지려 애썼다.
하지만 그 때마다 교황은 번번이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교황성하, 본 저택에서 오늘 밤 아버님 생신 연회가 있으니 부디 참석해주시면 감사하겠사옵니다.”
“허허, 미안합니다. 황제 폐하께서 본 노공을 너무 찾아 도저히 시간이 안 나는구료.”
전쟁 일정이 바쁘다는 말에 귀족들은 입을 다물었다.
자칫하다간 제국에 반하는 역적으로 몰릴 판이니 하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교황도 거절할 수 없는 약속이 있었다.
방금 레벤이 가지고 온 것도 그런 약속 중 하나였다.
“발린 공이?”
“예. 교황성하.”
고개를 끄덕이는 레벤 앞에서 교황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핏 들은 바에 의하면 발린은 지금 정신없이 바쁘다고 했다.
한데 지금 갑자기 자신을 찾는 이유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허허.”
가볍게 웃은 교황이 말문을 열었다.
“그래서 어떻게 답했는가.”
“해가 저물면 오라고 했습니다.”
“해가 저물면...알겠네. 채비하지.”
말을 마친 교황이 문득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한데 레벤 대신관, 그대가 그 말을 전달하는 이유는 무언가?”
“발린은 아무래도 직접 연관되는 걸 피하는 것 같아요.”
레벤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마 그 속엔 다른 이유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내가 직접 가는 것보다 화신으로 존경받는 레벤이 말하는 게 더 나을 거야.’
분명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발린은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단 걸 모르고 있었다.
“그런가? 하긴 몇 달 동안 얼굴도 안 비치다 갑자기 말하려니 그럴 만도 하겠군 그럼 이 참에 전해 주시게.”
뒷머리를 긁적인 교황이 이내 말을 이었다.
“오늘뿐 아니라 언제든지 먼저 와서 말을 전해도 된다고 말일세. 레벤 대신관, 그대 안의 레이안 님께서 보증하신 분인데 무얼 망설이겠는가.”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레벤은 그 말을 마치고 교황의 뒤를 따랐다.
하루가 길다고는 하나, 일이 더 많은 덕에 금세 지나갔다.
회의를 마친 교황은 곧바로 교황청으로 돌아왔다.
일정이 없다면 모를까, 약속이 잡혀 있으니 쉴 수는 없었다.
발린은 먼저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엔 넴로드 대신관이 함께였다.
“기다렸소?”
“별로 안 기다렸습니다. 여기 경치가 꽤나 좋아서요.”
피식 웃은 발린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셋이 앉은 장소는 교황청 후원의 정원 한 곳이다.
언덕 구릉지대 위에 있는 덕에 저녁이면 노을에 물든 황도와 교황청이 한눈에 들어왔다.
모두가 들어올 수 있는 곳이지만, 이 곳의 경치를 아는 사람은 몇 없었다.
“그나저나 놀랐소. 설마 이 곳에서 보자고 할 줄이야.”
“...마찬가지입니다. 발린 공.”
눈을 크게 뜬 교황에 이어 넴로드 대신관도 동의의 뜻을 표했다.
“예전에 우연히 이 부근을 둘러본 적이 있어서요. 그 때 참 경치가 좋다 생각해서 마침 불렀습니다.”
“허어, 레이안 님께서 이렇게 이 늙은이를 아끼실 줄이야. 덕분에 약속이라고 말해둔 채 농땡이를 피울 수 있어 여간 다행이 아닐 수 없소.”
가벼운 농담 덕에 처음 분위기는 그럭저럭 좋게 흘러갔다.
발린도 예전처럼 날카롭게 반응하지 않았다.
어찌됐건 레이안 신 덕분에 회귀도 했고, 기회도 얻었다.
아예 배신을 때린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닌데 굳이 으르렁댈 필요는 없었다.
“한데 우리 둘에게만 긴밀히 할 부탁이라니, 그게 도대체 무엇이오?”
먼저 교황이 질문을 던져 왔다. 주인으로서의 당연한 순서였다.
“...우선 첫 번째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시 수십 년 전에 들어갔던 영묘를 기억하십니까?”
“영묘? 아...”
“...생생히 기억나오. 지금도 가끔이면 꿈 속에서 나오고 있지.”
둘 모두 고개를 선명히 끄덕인다.
평생에 있어 전환점인 사건이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한데 그것은 왜...”
“실은 거기에 관해서 물어볼 게 있습니다.”
발린은 그걸 시작으로 운을 뗐다. 전투의 이야기가 나오자 교황과 넴로드는 숨을 죽이고 들었다.
물론 황제와 직접 싸웠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단지 어떤 마족이 아티팩트로 괴이한 술수를 부렸다고 말했을 뿐이다.
이야기를 마친 발린은 이러한 현상을 나타내는 아티팩트를 본 적 있느냐고 물었다.
“인기척 없이 위치를 이동하는?”
“어렵군요. 글쎄...지금은 특별히 생각나는 게 없소이다.”
아쉽게도 교황과 넴로드 모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역시 겉으로 보이는 효과만으로 능력을 파악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일반 아티팩트도 그럴진대 하물며 보물고의 S급 아티팩트래서야!
“다른 흔적은 또 없나? 예를 들면 무언가...그걸 사용한 사용자의 흔적 말일세.”
“글쎄요...아. 강력한 기술을 네 번 연속으로 사용한 건 본 것 같습니다. 똑같이가 아니라, 약간의 시차를 둬서요.”
발린은 앞서 대장장이들에게 말했던 것을 또 한 번 털어놓았다.
혹여 이들이라면 다른 단서를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네 번 연속이라...필살기라고 해야 할까, 가장 강력한 수를 네 번 연속?”
“역시 그건 좀 힘들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교황성하.”
넴로드 대신관의 물음에 교황도 가볍게 수긍하며 말했다.
“확실히 그래. 자네의 필살기인 성법 천공광주도 기껏해야 두 번, 신관들의 지원이 있다 해도 세 번이 한계잖나.”
“그렇긴 합니다만...세상엔 언제나 예외라는 게 있는 법이기도 하고, 필살기가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어렵군. 어려워.”
결국 둘에게서도 딱히 정답이라 할 건 나오지 않았다.
기대하던 발린으로서는 상당히 실망스러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미안하오. 이번 일에 대해서는 도움이 못 되겠구려.”
“아닙니다. 보이는 현상만으로 효과가 무엇인지 알아달라는 게 힘든 일이죠.”
전같았으면 이걸 빌미삼아 두고두고 교황청을 비난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생의 시간을 겪으면서 발린은 더 이상 그러지 않게 되었다.
결정적인 것은 대장벽에서 느낀 깨달음이었다.
신성력에 대한 것, 그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는 깨달음!
그 이후 레이안 신의 힘에 딱히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몸을 던지고 신성력에 맡기는 수련 따위 절대 안 했을 것이다.
“그럼 두 번째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두 번째?”
“그러시오. 첫 번째라 하였으니 그 다음도 있다는 뜻이겠지.”
목소리를 높인 넴로드 대신관과 달리, 교황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과연 경륜이 쌓였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발린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두 번째는 부탁입니다. 그것도 교황청과 교단 전체에게 하는, 굉장히 어려운 부탁이지요.”
“흐음...?”
“말씀해 보십시요.”
발린은 심호흡을 한 뒤 저자세로 나갔다.
부탁 자체가 굉장히 무리한 것이니만큼 어쩔 수 없었다.
이 모습에 교황과 넴로드, 두 신관의 눈에 호기심이 감돌았다.
도대체 무슨 부탁이기에 이 발린이 이토록 저자세로 나온단 말인가?!
그 의문은 발린이 입을 연 순간 깨끗이 풀려나갔다.
“제 두 번째 본론이자 부탁은 이겁니다. 교황청은 물론, 각 대신전의 성기사, 신관들을 이용해 각국의 고강한 무인, 마법사들을 호위해 주십시요.”
***
“어째 레벤 대신관님한테 미안하게 됐다냐...”
“미안하긴요. 제가 그러고 싶어서 데려온 건데요. 한 판 더 할까요?”
뒷머릴 긁적이는 소냐 앞에서 레벤이 두 손을 털어 보였다.
방금 전까지 싸운 걸 증명하듯, 주변엔 이미 온갖 흔적이 가득했다.
“한, 한판 더?”
일순 움찔하는 소냐 앞에서 레벤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 모습은 소냐 한정으로 마치 사신을 방불케 했다.
“이이, 이번에도 지면 이백구십구 번째로 지는 거다냐.”
“힘내세요. 이번엔 분명 이기실 거예요.”
“좋다냐! 이번 판은 반드시...!!”
으르렁댄 소냐가 몸을 일으켰다.
하루종일 썼음에도 다시금 피어오르는 녹색 오라!
그 앞에서 레벤도 웃으며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쾅! 콰쾅!
기세좋게 부딪힌 둘의 신형이 어지러이 움직였다.
미리 주변사람을 물렸기에 둘만의 대련이 될 수 있었다.
한창 아우러지던 신형이 이내 마지막 공세를 취했다.
“인피니티 제로 크로우!”
“일점권!!”
소냐는 속도에, 레벤은 힘에!
두 절대고수가 쏟아낸 절기가 가운데 지점에서 부딪혔다.
콰드드드득!! 투쾅!
주변 건물 전체가 일순 격렬히 흔들렸다.
얼마 전에 만든 건물이기에 신관들의 불안은 하늘을 찔렀다.
“레이안 신이시여, 부디 긍휼히 여기사 당신께서 거할 곳이 무너지지 않게 하옵시고...”
다행히 신관들의 기도는 제대로 먹힌 것 같았다.
무너질 듯하던 건물들이 기어이 버텨냈으니 말이다.
“하아. 하아.”
“...이백구십구패다냐...”
충격이 걷히는 사이로 소냐의 한탄이 들려왔다.
기어이 레벤이 한 번 더 소냐를 이겨버린 것이다.
지금은 둘이 경지를 맞춘 만큼 그랜드마스터 대 소드마스터라는 변명도 통하지 않았다.
“너무한다냐. 싸우면 싸울수록 벽이 더 높아지는 것 같다냐.”
“소냐도 충분히 성장하고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레벤의 위로는 진심이었다. 실제 소냐도 싸우면 싸울수록 눈에 띄게 강해지고 있었다.
다만 레벤이 그보다 더 강해진단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어디...시간이 좀 남는데, 마지막 한 판만 더. 어때요? 아직 발린 공도 안 왔으니까요.”
“히이...!!”
소냐는 그 말을 듣자마자 기겁해 물러섰다. 삼백연패만큼은 죽어도 하기 싫었다.
이대로라면 삼백연패를 할 기세였으나, 다행히 그 순간 구원자가 나타났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아주 교황청 전체가 쿵쿵 울리더만.”
투덜대며 나타난 발린은 눈앞의 광경에 입을 쩍 벌렸다.
한눈에 봐도 오러가 안 닿은 곳이 없었다. 하루종일 대련에 대련을 거듭하지 않고서야 이런 건 불가능했다.
“발린! 발리이이이인 - !!”
구원자를 알아본 소냐가 재빨리 발린의 등 뒤로 숨었다.
방금 전까지 나뒹군 탓에 체향이 훅 풍겼다. 발린은 손을 튕겨 물의 정령들을 소환했다.
“깨끗이 닦아 줘, 습기도 없애 주고.”
스아아아.
정령들이 움직이자 먼지와 땀 모두 금세 씻겨나갔다.
일을 마친 발린은 즉시 정령을 돌려보냈다.
“그만 괴롭혀라. 레벤. 이러다 소냐 울겠다.”
“괴롭히다뇨! 저는 그저 선의로 대련한 것뿐이라고요.”
레벤이 볼을 부풀리며 말했으나 이미 모든 상황이 소냐가 옳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발린은 풉하고 웃은 뒤 레벤과 소냐 둘의 머리를 같이 쓰다듬었다.
“알았어. 알았어. 둘 다 잘했어. 다음번엔 안드로포스 공이랑 소냐를 2:1로...”
“그건 싫다냐! 일대일로 할 거다냐!”
이번엔 소냐 쪽에서 반발이 나왔다. 발린은 한번 더 크게 웃어젖혔다.
“그래서 얘기는 어떻게 됐어요...? 잘 됐어요?”
“음, 그럭저럭.”
“그럭저럭이라뇨?”
레벤의 얼굴에 궁금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건 같이 있던 소냐도 마찬가지였다.
“교황청이랑 뭐 했다냐? 발린은 마법사인데...교황청 싫어하는 줄 알았다냐.”
“딱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싫어하지도 않지.”
“그래서 어떻게 된 거예요? 무슨 얘길 한 것인지도 저만 못 듣고. 교황성하께 나중에 물어보기 전에 말해요.”
“일단은 들어가서 얘기하자. 뭐, 그 전에 성공이냐 실패냐를 따지면...그래. 굳이 말하자면 절반의 성공이라 해야 하겠지.”
고민하던 발린은 이내 아까의 회담을 절반의 성공이라 정의내렸다.
그렇게 말한 발린의 머릿속에 아까의 일이 다시금 떠올랐다.
============================ 작품 후기 ============================
오늘의 세 편째 연재이자, 마지막 연재분이기도 합니다.
이번 작품후기까지 따라와 주신 독자 여러분, 정말로. 정말로 깊이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완결까지 힘을 얻고 갈 수가 있어요.
그나저나 슬슬 종막을 향해 가는터라 연재의 허들이 점점 높아지는군요.
이제는 정말 열심히 하는 것 뿐이야...! 제가 부숴지느냐, 작품이 완결나느냐. 응원해 주세요 독자님들.
독자님들께서 먹이를 주는 쪽의 늑대가 이길 테니 말예요.
참, 그리고 프리미엄 관련해서 자세한 일정을 공지로 올릴 예정입니다. 추후 공지를 확인해주시면 되시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내일 연재를 위해 들어가 보겠습니다.
가시기 전에 추천 하나씩 부탁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