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95 낮과 밤의 봉사활동 =========================
라덴과 이야기를 마친 발린은 성대한 배웅을 받으며 성을 떠났다.
다음에 그가 향한 곳은 다름아닌 파이오니어 왕국의 수도, 카디날 성이었다.
“어, 오빠가 무슨 일이야? 말만 무성하게 들려오더니 이제야 온 거야?”
“그래, 오랜만에 시간 좀 냈다.”
오랜만에 보는 가족에게 밀리아는 짐짓 삐진 척을 해 보였다.
하지만 걱정하는 모습만큼은 감출 수 없었다.
발린은 그걸 눈치채고 가볍게 웃으며 밀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처음엔 반항하던 밀리아였으나, 이내 고개를 숙인 채 손길을 받아들였다.
분위기가 편해진 다음은 소소한 이야기가 오갔다.
대표적으로는 밀리아의 생활이나 발린의 일상에 대한 게 주된 내용이었다.
“그래, 요즘 생활은 어때? 잘 지내고 있어?”
“별 거 없어. 그냥 일어나서 무투술 수련도 하고...그림도 그리고...오빠 덕분에 하고 싶은 건 뭐든지 할 수 있거든.”
“그래? 그거 다행이다.”
“이거 알아? 저번에 나 가르쳐 주신 무관 관장님께서 나 이거 계속 하면 익스퍼트 상급을 노려볼 수 있을지도 모른대!”
오랜만의 만남에 밀리아는 정신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까 전 삐져 있던 모습은 어느새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보아하니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네. 덕분에 나도 한시름 덜었다.”
발린은 미소를 띈 얼굴로 말했다.
그동안 마왕군을 막느라 가족에게 얼굴 한 번 못 비춘 게 늘 마음 한구석에 걸려 있었다.
아예 못 본 건 아니지만 이렇게 긴 시간을 가진 건 처음.
그래도 잘 커 줬다니 다행이었다.
회귀 전 전생에서 그들은 오크들에게 죽을 운명이었다.
원래의 미래대로라면 영지를 관리하는 라덴도, 이렇게 웃는 밀리아도 없는 셈이다.
‘...많이 바뀌었겠지. 전생의 미래와.’
과거가 바뀌고, 죽을 사람들이 죽지 않았다.
아마 그런 건 이번 한 번만이 아닐 것이다.
발린이 움직인 행적마다 그 흔적이 남아있을 터.
그 생각을 하니 문득 온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생각해보면 이것 때문에 내가 알던 사람들이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겠군. 제자 놈들도, 그리고 과거의 동료들도...’
미래가 바뀌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어쩌면 본의아니게 수많은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오빠?”
“...”
심각해진 발린의 표정에 밀리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발린의 표정은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참다 못한 밀리아가 목에 조르기를 걸기 전까지는 말이다.
“켁!”
“오랜만에 만났는데 여기서도 그러기야!? 이 나쁜 오빠얏!!”
말을 마친 밀리아가 더 힘을 주었다.
제 딴에는 열을 다하는 것이다. 허나 발린이 보기엔 귀엽기만 했다.
애시당초 경지의 차이가 너무 나니 하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고고. 그래그래. 내가 미안하다.”
“으랴아앗~!!”
발린은 일부러 고통스러운 신음성을 내며 연기했다.
가족을 만나러 일부러 수련까지 제치고 왔다.
한데 정작 만나자 눈앞에서 다른 생각을 하다니!
기술을 풀지 않는 건 그런 자신에 대한 충고였다.
수 분이 지난 뒤 밀리아도 기술을 풀었다.
이제야 한숨 돌릴 수 있겠구나. 발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 순간이었다.
“자, 그럼 이제 따라와.”
“따라오라고? 어딜?”
“어디든간에!”
말을 마친 밀리아가 그대로 뒷문을 향했다.
발린은 일부러 등 뒤의 기척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다.
방문 앞까지 몰려온 엄청난 손님의 인파.
밀리아가 나가는 것도 그들 때문이리라.
둘은 수도의 거리로 나왔다.
별다른 치장도 없는 탓에 누구도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물론 발린에게 시선이 약간 몰리긴 했다.
온 몸을 검정색 일색으로 깔맞춤한 마법사는 흔치 않으니 말이다.
“아 참! 오빠 옷 좀 맞춰. 온 세상에 이름이 자자하다면서 입는 건...하아.”
앞서 걷던 밀리아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정색이니 그럴 만도 했다.
투덜대는 밀리아 앞에서 발린은 실실 웃어 보였다.
“네가 이게 뭔 옷인지 알면 함부로 말 못할걸?”
확실히 실용성에 신경쓰다 보니 비쥬얼이 안 좋은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모자와 로브, 신발 등의 진정한 가치는 어떤 옷을 대어도 견줄 수 없었다.
하나씩만 분리해 놔도 각각 최상위급의 S급 아티팩트다.
밀리아가 말하는 화려한 옷들을 산처럼 쌓아도 신발 한 짝도 살 수 없을 것이다.
‘막상 이런 말 들으니 재미있는걸?’
“정말이지, 이런 오빠 때문에 엘리아랑 레벤 언니는...”
무어라 말을 잇던 밀리아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은 죄가 있으니 발린은 반박도 못하고 입맛만 다셨다.
그러던 도중 문득 말끝 한 마디가 걸렸다.
‘엘리아...? 엘리아가 왜?’
엘리아와 자신이 분명 끈끈한 관계인 건 사실이다.
스승과 제자라는 건 그만큼 단단한 것이니 말이다.
게다가 절대 배신하지 않도록 마나의 계약까지 걸어 두었다.
지금 엘리아는 발린이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것과 밤을 보내는 건 엄연히 별개의 일이다.
발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밀리아, 아무래도 네가 오해한 것 같은데. 엘리아와 나는...”
“아, 찾았다! 오빠. 마침 잘 됐다. 잠자코 따라와.”
하던 말이 끊긴 발린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려 했다.
그러나 밀리아의 손길이 발린을 잡아챈 순간, 그것도 포기해야 했다.
밀리아가 발린을 끌고 들어간 곳.
그 곳은 수도의 유명 부띠끄로써, 수많은 귀족들의 의상과 장식을 책임지는 곳이었다.
***
“안녕히 가시와요.”
“고마워요. 덕분에 이제야 좀 선하네요.”
종소리와 함께 일남일녀가 거리로 나섰다.
멀어지는 그들을 향해 부띠끄 안의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부띠끄의 점원들은 물론, 여주인마저 함께였다.
처음 둘이 들어올 땐 이렇지 않았다.
간단한 옷차림의 소녀와 검정색 일색의 마법사 한 명.
손님이라기보다는 강도나 사기꾼에 가까운 차림이니 당연했다.
허나 그들의 태도는 발린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180도 바뀌었다.
육신이 재구성되면서 바뀐 외모가 드러난 순간, 부띠끄의 여주인은 느꼈다.
자신이 수십 년에 한 번 있을 완벽한 모델을 찾았다는 걸 말이다.
“책임지고 세련되게 바꿔주세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머진 맡길게요.”
“물론이지요! 제가 손해보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대답하는 여주인의 눈은 열의로 가득했다.
허나 밀리아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짤랑.
탁상 위로 놓이는 금화에 발린은 커다랗게 눈을 떴다.
하지만 작정하고 온 밀리아 앞에서는 발린도 어쩔 방도가 없었다.
작업이 끝나자, 밀리아는 무려 10골드나 되는 거금을 대가로 건넸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고위 귀족가에 출장이라도 가야 얻을 돈이다.
후한 보상에 최고의 모델까지! 부띠끄의 모두가 감사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니까 내가 혼자 할 수 있다니깐.”
거리로 나온 발린은 못내 드는 불편함에 투덜댔다.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겠지. 오빠는 이런 것도 좀 배워야 해. 봐봐, 제대로 꾸미니 빛이 넘처나네. 엄청 변했어. 오빠.”
옆에서 걷던 밀리아가 이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부띠끄의 사람들이 준비한 옷은 보랏빛 코트와 흰 프릴 셔츠.
남들의 눈에 뜨이진 않으나, 고고한 위엄이 자연스레 깃드는 옷차림이었다.
붉은 계통을 넣지 않은 건 굳이 사람을 강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모자와 로브로 가려져있던 용모 자체가 어떤 색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게다가 제대로 치장까지 했으니 그 위력은 더욱 배가되었다.
“어머어머. 저 사람 누구래?”
“뿅 가겠다. 얘!”
지나다니던 평민 여자들이 찬탄을 내뱉었다.
심지어는 마차나 말에 탄 귀족가 영애들마저 눈을 못 뗄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본인인 발린은 불편하기만 했다.
“밀리아 네가 아니었다면 절대 안 했을 거다.”
“글쎄...그러면서 파티 때는 잘도 입었잖아?”
“앞으로도 생각해 보마.”
둘은 주거니받거니하며 수도를 거닐었다.
아무 날도 아니었지만 사람들로 넘치는 건 어디나 똑같았다.
“...좋구나.”
길을 걷던 발린이 문득 픽 웃었다.
회귀 전의 시간대에서 지금은 오크들이 이미 진격을 시작한 후다.
그 때 수도는 오크들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파이오니어 왕국은 그 후 쇠퇴의 길을 걸었다.
눈 앞에서 보니 그게 확실히 느껴졌다.
자신은 파멸을 막았다.
설령 그로 인해 미래에 태어날 인연이 사라졌다 해도, 그게 이 사람들의 죽음을 정당화시켜줄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오니까 좋지?”
“그래, 황도에서는 못 보던 경치구나.”
밀리아의 물음에 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흔들리던 마음이 다시 굳게 잡혔다.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러 온 건 역시 정답이었던 듯했다.
둘은 밤이 깊을 때까지 이곳저곳을 거닐었다.
그 걸음이 지친 것은 어느 작은 공원에 이르러서였다.
이미 밤이 깊었는지라 공원도 어둑어둑했다.
“조금 무섭다. 오빠.”
“그래? 그럼 이렇게 하면?”
말을 마친 발린은 슥 하고 손을 저었다. 그 끝으로 불의 정령 여럿이 소환되었다.
화르륵. 화륵.
소환된 정령의 빛이 공원 안을 밝혔다.
칠흙같던 어둠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잠시 앉자.”
“응.”
벤치에 앉은 뒤에도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거의 햇수로는 이 년 만의 만남이다. 할 이야기야 차고도 넘쳤다.
“한데 밀리아, 아까 전에 그 손님들은 역시?”
“맞아. 오빠 동생이란 것 때문에 사방에서 온갖 사람들이 몰려든단 말이야. 어떻게든 피해다니고는 있지만.”
말을 마친 밀리아가 활짝 웃었다.
역시 밀리아라고 해야 할까, 수많은 사람들의 추적 속에서도 웃음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자신의 고민도 해결되었으니, 이 참에 밀리아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래? 어떤 사람들이 왔는데?”
“말도 마. 별 온갖 잡다한 귀족들이 몰려들어서 내가 누구요. 내가 이런 사람이요. 하는데! 정말이지 그 사람들 때문에 골치아픈 것도 이젠...!”
발린은 우선 천천히 이야기를 들었다.
그 속에선 온갖 귀족들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유명인의 가족에게 청탁이 몰려드는 건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이건 역시 도가 심한 느낌이었다.
“그렇단 말이지...”
고개를 끄덕인 발린이 이내 눈을 빛냈다.
“그래. 그거면 되겠다. 잠시만 기다려.”
“그거?”
밀리아가 무어라 하려 했으나 이미 발린은 루비 타워로 간 뒤였다.
슥.
십여 초 뒤 나타나긴 했지만 말이다.
“노, 놀랐잖아! 오빠가 혼자 가는 줄 알고.”
“그럴 리가.”
가볍게 고갤 저은 발린은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자, 선물.”
“이게 뭐야? 무슨 비늘 같기도 하고. 도마뱀 가죽 같기도 한 게...”
내용물을 받은 밀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크기는 손수건 한 장 정도나 될까. 검은색으로 반짝거리는 게 꽤나 귀한 것 같아 보였다.
“앞으로 너한테 치근덕대는 사람이 있으면 이 손수건을 슬쩍 꺼내두도록 해. 내 장담컨대 어떤 귀족도 너한테 들러붙지 못할걸?”
“그래?...믿어도 되는 거겠지?”
“그럼.”
발린이 건넨 것은 다름아닌 실-레논의 가죽이었다.
소드마스터 최상급인 소냐도 두려움에 떠는 최강자의 흔적!
마스터의 경지도 못 이룬 귀족들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는 뻔했다.
“나중에 잃어버리지 않도록 마법을 걸어 줄 테니, 그 때까지는 간수 잘 하고 있으렴.”
“...고마워. 오빠.”
“고맙긴, 네가 잘 커줘서 고맙지.”
발린은 말을 마치고 밀리아를 와락 껴안았다.
전생에서 잊고 지냈던 혈육의 온기가 몸 안을 데웠다.
누구에게서도 찾지 못했던 행복이 천천히 녹아들었다.
입가 위로 행복한 웃음이 떠올랐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의 첫 번째 편입니다! 가시기 전에 추천 하나씩 부탁드립니다. 성실연재...의 원동력인 만큼 말이죠.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