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94 낮과 밤의 봉사활동 =========================
근래 이 년간 세상 곳곳에선 연일 큰일이 벌어졌다.
파이오니어 왕국은 물론, 카딤 제국과 노스트라 제국, 서방의 여섯 왕국 모두가 그랬다.
그 중에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고루고루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단 한 명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발린 테오도르!
그 한 명의 소식에 온 세상이 수군거렸다.
하지만 이 성채만큼은 거기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하기야 그도 그럴 게 이 곳은 발린 소유의 성이다.
사방을 휩쓰는 태풍도 정작 눈에 가면 조용하다.
그건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일어나셨습니까. 주인님.”
“오오, 그래.”
아침 7시 30분, 저택의 모든 시종과 하녀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절도있는 태도 어디에서도 흠잡을 곳은 보이지 않았다.
허나 정작 주인이란 사람은 전혀 그걸 보고있지 않았다.
탁탁.
“주, 주인님!”
보다못한 집사들이 다가와 말렸다. 허나 주인이라 불린 중년인은 손을 내저으며 청소에 열중했다.
“아닐세. 늘 하던 일이라 지금도 하는 것뿐이야. 혹여 방해가 되는가?”
“그, 그건 아닙니다만...주인님께서 어찌 감히!”
“아니라면 됐네. 내 아들놈 때문에 이런 큰 성에 사는데 아무것도 안 하기까지 할 수는 없지 않겠나?”
말을 마친 중년인에게 집사들은 어쩔 줄 몰라했다.
중년인의 정체는 바로 라덴. 지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발린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인사 다 했으면 어서 돕게나. 얼른 일을 끝내야 자네들도 좀 쉬지 않겠나.”
“예. 주인님.”
발린의 아버지라면 이제 한 나라의 국왕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이 앞장서서 청소에 나선다.
다른 사람들로서는 게으름을 피울래야 피울 수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라덴은 제 직무에도 전혀 소홀함없이 임했다.
지금껏 라블랑 성이 온갖 이익단체에게 나눠지지 않은 것.
어느 정도는 발린의 명성도 있었으나, 그 근간엔 역시 라덴과 그가 고용한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오늘 식사는 꽤나 화려하군.”
“날이 추우니만큼 따뜻하고 몸을 보해줄 것들로만 준비했습니다.”
자리에 앉은 라덴은 맛있게 요리를 비웠다.
그래봤자 메인 메뉴는 빵과 곡물죽, 그리고 다섯 가지 정도의 반찬이었다.
통나무 오두막집에 살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가짓수다.
허나 다른 귀족들의 경우에 비교해 보면 굉장히 검소한 상이었다.
손님이 오지 않는 이상 라덴은 항상 이렇게 식사를 했다.
본인 입장에서는 이것도 성찬이었으나, 실은 이게 검소하다고 칭찬이 자자하게 된 주 원인이었다.
“음...역시!”
맛있게 식사를 마친 라덴이 주머니를 뒤졌다.
딸그락.
집사들을 부른 라덴은 그에게 금 조각들을 주며 말했다.
“여기 이 조각들은 요리사들에게 갖다 주게. 오늘 식사는 특별히 맛있었어.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그리고 나머지는 자네들 걸세. 자네들도 잘 부탁하네.”
“예! 주인님!”
자신도 그러던 시절이 있었기에, 라덴은 절대 그들을 경시하지 않았다.
당장 말 한 마디에서도 따뜻한 성의가 절절이 느껴졌다.
이를 느끼지 못할 집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90도로 몸을 굽혔다.
아침식사를 마친 후로 본격적인 정무가 밀어닥쳤다.
집무실로 돌아온 라덴은 눈코 뜰 새 없이 밀어닥치는 서류를 처리했다.
물론 전문적인 업무를 처리할 참모들을 고용한 건 사실이다.
허나 그 최종적인 결정권자는 언제나 라덴 본인이었다.
때문에 여간 힘이 든 게 아니다. 하지만 라덴은 절대 문서 한 건을 소홀히하지 않았다.
펄럭. 펄럭.
정신없이 업무에 몰두하니 어느새 꽤나 시간이 지나 있었다.
“으음.”
자리에서 일어난 라덴이 문을 열자, 거기엔 쭈뼛거리는 하녀가 있었다.
“무슨 일인가?”
“저어, 그게...손님이...”
하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 뒷모습을 보던 라덴에게서 호기심이 솟아났다.
눈앞의 하녀는 평소 라덴에게 전혀 기죽지 않고 생활해 왔다.
그건 그녀뿐 아니라 저택의 모든 고용인이 마찬가지.
그런 평소의 반응을 생각해보면 지금 이건 여러모로 이상한 일이었다.
“왜 그러나, 내가 말했잖나. 뭘 하고 있든 찾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이야기하라고. 혹시 말못할 사정이라도 있는 겐가?”
“아, 아닙...”
“제가 일부러 기다려 달라고 말했습니다.”
하녀에게 다가가던 라덴의 등 뒤, 누군가의 목소리가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고개돌린 라덴의 얼굴이 당혹감에 젖어들었다.
눈앞의 얼굴은 분명 한눈에 들어오는 특징이 있었다.
십몇 년간 보아온 얼굴이니 당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맞다 확신하기엔 틀린 점이 너무 많았다.
당장 키와 신체비율부터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얼굴의 형이나 모양새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라덴은 결국 마음이 시키는 대로 말했다.
“...발린?”
“예. 맞습니다.”
라덴을 찾아온 손님, 발린은 그 말에 훗 하고 미소를 지었다.
***
“아까는 너인 줄 아예 몰라봤구나. 워낙 바뀌어서 처음 봤을 땐 카딤 제국이나 위쪽 왕국의 왕족이라도 되는 줄 알았단다.”
“저도 제 모습 봤을 때 그랬는걸요. 신경쓰지 마세요.”
발린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육신이 바뀐 지 수 개월이나 지났다.
자신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의 반응은 이제 익숙했다.
“식사는 했느냐? 조만간 시간인데, 만약 하고 오지 않았다면 오랜만에 같이 먹자꾸나.”
“그것도 괜찮겠네요. 그럼 그렇게 하죠 뭐.”
지금 발린에게 있어 시간은 금이나 다름없었다.
그걸 아낄 수 있으니 전혀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도 필요했고 말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발린에게 라덴은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저벅저벅.
둘은 어느덧 라블랑 성의 첨탑 망루에 와 있었다.
첨탑 망루는 이 성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도시의 풍경, 그리고 그 너머로 펼쳐진 자연경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여긴...”
“이 땅에서 가장 높은 곳이기도 하고...듣는 귀가 가장 없을 것이라 내가 확신하는 장소란다. 약간 춥긴 하지만 말이다.”
말을 마친 라덴이 허허 웃었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이상하게 바람이 없구나. 아마 하늘이 네가 올 걸 예상하고 미리 움직였나 보다.”
“설마요.”
발린은 가볍게 너스레를 떨었다.
이미 올라오면서 윈드 실드와 파이어 실드로 온도를 십몇 도나 올려두었다.
설사 난방을 최대로 튼 아래 접대실이라도 이 곳만큼 따뜻하진 않을 것이다.
“한데 아버지, 여긴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어쩐 일인진 이제 들어 봐야지. 안 그러냐?”
라덴의 말에 발린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분명 어떤 내색도 않았는데 기가 막히게 알아챈 것이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야 쉬운 일이지. 아무리 생긴 게 바뀌었대도 넌 내 아들이다. 십여 년을 같이 지냈는데 그걸 모르겠느냐.”
말을 마친 라덴 앞에서 발린은 게면쩍은 표정을 지었다.
어째 숨긴다고 했는데 벌써부터 고민이 있단 게 드러나 보인 모양이다.
‘이 정도면 레벤이 모를 리 없겠군. 아마 알고도 눈감아 준 거겠지.’
“후...역시 속일 수가 없군요.”
발린은 두 손을 들어 보인 뒤 자리에 앉았다.
첨탑 안엔 나무 의자와 탁자밖에 없었다.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기엔 굉장히 초라한 가구들이었다.
하지만 바깥의 경치가 있는 이상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럼 이제 이야기해보자꾸나. 이 세상을 진동시키는 내 아들이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그런 얼굴로 왔는지.”
“하아...실은...”
발린은 며칠 전 있었던 일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무엇 때문에 그 방에 들어갔고, 어쩌다 관계를 가지게 되었는지 전부 다!
아무리 그가 한 번의 생을 살아온 사람이라고는 하나, 이 점에선 라덴이 몇 수 위였다.
어쨌거나 그는 발린에 이어 밀리아까지 자식으로 가진 아버지였으니 말이다.
“오호, 그래? 네가 여자를 한 명 거꾸러뜨렸단 말이지! 푸하하하!!”
대화를 다 들은 라덴은 크게 웃어제꼈다.
당사자로서는 여러모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것이면 끝이지 무엇이 문제더냐.”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발린은 난감한 듯 따져 물었다.
당장 레벤의 지위와 종족은 드래곤이면서 동시에 대신관이다.
종족부터 다른 건 둘째치고, 직책부터가 서로 견원지간인 것이다.
게다가 직접 만날 때의 대화도 그렇다.
매일 만날 때마다 긴장해야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리고 레벤은 그 중 첫손가락에 꼽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과 결혼을 해서 평생을 살아간다고?
당사자로서는 굉장히 절망적인 얘기였다.
“당장 따져야 하는 게 최소한 다섯 가지는 있습니다. 게다가 수련도 해야 하는데, 아무리 그러려고 해도 그것 때문에 머리가 뒤숭숭해서...”
“뒤숭숭할 게 뭐가 있느냐. 나도 네 어미 만날 때 그런 거 생각 안 하고 만났다.”
라덴의 말에 발린은 그게 아니라 대답하려 했다.
단순한 사랑이면 모를까, 지금 이건 적어도 수십 가지 문제가 엮인 실타래였다.
아마 진짜 천재가 와도 여기에 얽힌 인과를 풀지 못할 만큼 복잡한 문제 말이다.
허나 다음 순간 이어진 말에 발린는 말문을 닫을밖에 없었다.
“간단히 생각하려무나. 뭐든간에 중요한 건 사랑이란다. 너와 그 아가씨가 그렇게 했다는 것은 서로 사랑한다는 더할나위없는 증거 아니냐. 그러면 다른 건 다 필요없다. 서로의 뜻이 맞으면 곧바로 가는 것. 그게 사랑이야. 내 때에도, 그리고 그 이전에도 사랑은 바뀌지 않았단다.”
라덴의 말에는 위엄도, 경륜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대신 직접 겪으면서 깨달은 경험.
그리고 자식을 생각하는 애정이 담뿍 들어가 있었다.
“주변상황에 휘말려 본질을 잊어버리면, 그 순간 너는 평생 후회하게 될 것이란다. 매일 그 순간을 떠올리면서 말이야. 다행히 이 아비는 그 때 잘 선택했고, 덕분에 에밀리가 죽었어도 너와 밀리아를 보며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단다. 그래, 내 말이 좀 도움이 되었느냐?”
“...예.”
본질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무를 수련해온 무인이나, 마법에 탐닉한 마법사나.
모두가 다같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었다.
‘중요한 건 주변상황도, 조건도 아니다. 내 일이니만큼 내가 내키는 대로...’
발린은 마음을 편하게 하고 독백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게 느껴졌다.
“뭐, 한가해지면 레벤이라는 아가씨도 데리고 오너라. 며느리 얼굴 정도야 한 번 봐 둬야지.”
“...그건...”
뒤이은 농담에 발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 모습에 껄껄 웃은 라덴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나저나 수많은 사람 중 그 아가씨를 선택한 이유가 혹시 있느냐? 너 정도면 오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섰을 텐데.”
“아...”
발린은 잠깐 입을 벌렸다.
확실히 수많은 귀족들이 자신들의 딸을 내민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청은 인정사정없이 무시당했다.
당장 마왕군과 뱀파이어들이 날뛰는 마당이다.
결혼이니 연애니 시시닥거릴 틈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냥 같이 싸울 수 있어서인 것 같아요.”
“뭐어? 우하하하!!”
대답을 들은 라덴이 다시금 웃었다.
“그래, 세상 모든 사랑엔 이유가 없지. 내가 실언을 했구나. 자, 이만 내려가자꾸나. 지금쯤 요리사들이 너를 위한 특식까지 말끔히 준비했을게다.”
“그거 참 기대되는 말이 아닐 수 없군요.”
발린은 아까보다 한결 나아진 미소를 띄고 움직였다.
탑을 내려가는 어깨는 실제로 한층 더 가벼워져 있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 번째 편이자 오늘의 마지막 편입니다. 이번 작품후기까지 따라와 주신 독자분들께 정말로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이 부분은 제가 쓰면서 몇 번 상황을 생각하다 보니 그만 늦어 버렸군요. 독자분들께 다시금 죄송합니다.
내일은 정해진 시간대로 연재할 것을 약속드리며,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 전생에 제자들은...아직 안 태어났어요...동료들도 마찬가지고...8ㅅ8
/제자들도, 동료들도 물론 아예 안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흘러가는 역사겠지요. 인과를 두려워하다 눈앞의 적을 막지 못하면 그것이야말로 우를 범하는 것이라...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