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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다인 영지에서의 휴식
발린이 일어난 것은 더 이상 참지 못한 몸이 물을 간절히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욕탕에서 너무 오래 자다보니 몸에 열이 오른 것이다.
마나 호흡으로 금방 페이스를 되찾긴 했으나, 하마터면 위험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아으으음. 잘 잤다.”
그럼에도 발린은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위험한 상황이긴 했으나, 그 정도나 잔 덕에 피로가 말끔히 풀린 것도 사실이었다.
과연 마나스팟 온천이라 자랑할 만한 효능이다.
발린은 충분히 만족한 상태로 다른 사람들에게 향했다.
“목욕은 잘 했어? 내가 너무 늦게까지 안 나온 것 같은데.”
“발린이 푹 쉬는 동안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잘 놀았어요.”
“잘 했다냐. 응응.”
“그냥...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셋 모두 말을 얼버무렸다.
무언가 여자들만의 이야기를 했겠거니 싶었다.
‘그런 건 가만히 내버려두는 게 미덕이지.’
발린은 그렇게 여탕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그 날 바르던에 대한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한다.
덕분에 엘리아가 더 이상 금을 안 만들어도 되는 건 다행이었다.
다음 날 솔다인 영지를 출발한 발린은 속도를 내어 수도로 돌아갔다.
갑작스럽게 엘리아가 실종된 지 11일째.
루비 타워는 그야말로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분위기였다.
중요 업무가 모조리 지연된 건 물론, 인력들을 움직이느라 내부 상태도 엉망이었다.
편지가 있고 중견 간부들이 유능했기 망정이지, 자칫하면 탑 전체가 무너질 뻔했던 상황.
엘리아와 발린은 돌아오자마자 그 일의 수습부터 해야 했다.
“이거 소름돋을 정도로 많은데. 레-호트 이후로 이렇게 긴장한 건 오랜만이야.”
이것이 방을 가득 채운 서류를 보며 발린이 내놓은 감상평이었다.
원래는 바로 카딤 제국으로 출발하려 했으나, 우선은 이것부터 어떻게든 해야 할 것 같았다.
“다 스승님의 위업 덕분이죠. 귀족들의 러브콜부터 계약과 마법사 파견 건까지. 그동안 제가 이런 거 처리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다고요.”
더욱 놀라운 건 서류를 본 엘리아의 태도였다.
그녀는 생각보다 덜 쌓였다는 듯 자신만만히 업무를 시작했다.
일 년 전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의 성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방 안을 채운 서류는 아무리 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지쳐가던 둘을 보다못한 레벤이 서류 전쟁에 원군으로 참전했다.
“어디 저도 좀 보여 주세요. 저도 대신관이니까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거예요.”
레벤은 대신관으로서의 경험을 백분 살려 발린의 부담을 크게 덜어주었다.
한편 할 일이 없던 소냐는 실-레논에게 배웠던 무술을 열심히 연마했다.
“히얏! 얍! 챠아앗!! - ”
실-레논의 손을 타긴 했으나 본래는 고대 영웅들의 주력 무투술이다.
소냐가 레벤 못지않게 재능이 있다 한들 하루이틀로는 택도 없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이 오히려 그녀의 호승심에 불을 붙였다.
“이 자세를 이렇게...그리고 여기서 발 스탭을 한번 더 꼬아서...하!”
타라라락!!
잔뜩 비틀렸던 다리가 일제히 풀리며 수십 번의 타격을 전달한다.
그 때마다 빈 허공에서 공기 터지는 폭음이 연신 터져나왔다.
기술 하나를 더 습득한 소냐는 활짝 미소지은 뒤, 다음 기술 연마에 몰두했다.
나머지 셋이 열심히 일하는데 자기만 놀 수는 없었다.
“...허.”
“이봐! 자꾸 눈 돌아가지 마! 징계가 무섭지 않나?!”
수련을 감독하던 3성(星)마법사가 1성 마법사들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5성으로 나눠진 계급 중 3성이라면 루비 타워 안에서도 꽤나 간부급인 셈.
허나 검을 휘두르던 1성 마법사들은 남몰래 투덜거렸다.
‘교관님도 계속 흘끔거리시면서 뭘. 안 그래?’
‘시끄러워. 말걸지 말아봐. 눈 좀 호강하게. 우리 탑에 여마법사도 꽤 있긴 하지만 저런 미녀는 단연코 절대 없었단 말이야.’
그들의 시선은 연신 소냐의 몸을 훑었다.
발린이 걸어준 환상 마법 덕에 묘인족의 귀와 꼬리는 완벽히 감춰진 상태.
자연히 탑의 마법사들에게 소냐는 평범한 미녀로만 보였다.
“...쩝.”
“끄응...”
자신 때문에 마법사들이 안달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소냐는 열심히 무술 연마에 몰두했다.
그렇게 시간이 사흘 정도 흐르자 서류 전쟁의 결말이 나타났다.
결과는 발린과 엘리아의 완벽한 승리! 서류 문건들은 모조리 결재되어 문서 보관소로 향해야 했다.
당초 일주일은 걸릴 줄 알았던 일이 사흘만에 끝났다.
지원군으로 참전한 레벤이 큰 도움을 발휘한 덕택이었다.
발린은 레벤에게 대가를 이야기했으나, 레벤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그냥 도운 거니까 딱히 대가는 안 바래요. 어차피 받은 아티팩트들만으로도 분에 넘치는걸요.”
말을 마친 레벤은 태연히 장갑과 스타킹, 각반 등을 내보였다.
블랙 드래곤의 가죽을 강화해 만든 방어구들은 하나같이 범상찮은 기운을 뿜고 있었다.
“잘 쓸게요. 어둠의 마나가 깃들어있단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그게 훨씬 더 강력하다니까요.”
“바깥에 드러났다면 모를까, 굳이 지금 정화할 필요는 없지. 혹시 불편하면 그것들은 전투시에만 써도 되고.”
레벤은 신관이니만큼 가죽에 깃든 어둠의 마나가 불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어둠의 마나는 아티팩트의 강도를 눈에 띄게 강화시켜주는 결정적인 요소다.
겨우 불편함 정도로 포기하기엔 너무 메리트가 컸다.
발린은 레벤뿐 아니라 소냐와 엘리아에게도 이 사실을 말해두었다.
비단 그들만이 아니라 앞으로 실-레논표 아티팩트의 모든 소유자에게 해 줄 말이었다.
그렇게 업무를 마친 발린은 황도로 출발했다.
하루빨리 영원묘로 들어가야 했다.
스팟.
국경 간 장거리 텔레포트를 이용하니 기간이 엄청나게 단축되었다.
거기다 지금은 온 힘을 다해 속도를 내고 있는 시점.
그 속도는 거의 번개를 방불케 했다.
한창 움직이던 도중 발린은 대장벽에 대한 소문 한 가지를 접했다.
대장벽에서 출발한 황제 행렬이 뱀파이어 무리에게 습격을 당했다는 이야기였다.
“...역시.”
자세한 내용을 들은 발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계획대로 케틸 공작은 성공적으로 뱀파이어들을 몰아낸 것 같았다.
온 몸이 피를 뒤집어쓸 정도의 처절함은 덤이다.
덕분에 중앙귀족들의 반감은 이제 완전히 없어졌다고 한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에게 이를 드러내는 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다.
아무리 중앙귀족들이 속에 능구렁이를 품고 있대도 그 정도로 철면피는 아니었던 것이다.
“잘됐다냐! 만세다냐!”
국경지역의 어느 여관.
이야기를 듣던 소냐는 기쁨에 펄쩍펄쩍 뛰었다.
케틸 공작은 그녀에게 있어 아버지 같은 존재다.
그가 잘 됐다니 제자,혹은 딸로서 기뻐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네. 축하해, 소냐.”
발린은 아무렇지도 않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누구도 그가 모든 일을 뒤에서 지시했다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다.
이런저런 얘길 들으며 가다 보니 금방 황도에 도착했다.
발린은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아티팩트를 챙겨 영원묘로 향했다.
안드로포스와 팔리아스가 여기 있긴 했으나, 지금은 인사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
-꽤나 오랜만에 보는구나. 인간. 이루려던 바는 다 이뤘느냐?
“그런 셈이지. 이런저런 일들이 있긴 했지만.”
거의 한달 반 가까이 보는 얼굴에 카투아는 씩 웃으며 물었다.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그 사이 뭘 했는지 발린은 부쩍 성장해 있었다.
무슨 일을 겪었는지 궁금했으나, 지금은 그것보다 급한 게 있었다.
스르르.
가볍게 거인의 형체를 만든 카투아가 입을 열었다.
-이런저런 일들이라, 무슨 일을 겪었는지 꽤나 궁금하구나. 허나 그 전에 이것부터 물어봐야겠지. 나를 여기서 내보내주겠단 약속은 어떻게 되었느냐?
분명 발린은 카투아에게 바깥세상의 몸을 주겠다 약속했었다.
그 대가로 얻은 게 포스 서치. 발린이 실-레논을 찾을 때 더없이 유용하게 쓴 마법이었다.
-약속대로 힘을 주었으니 이제 네 차례일 터. 그 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느냐.
말은 이렇게 하지만, 카투아도 벌써 그게 해결됐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단지 아예 잊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 말을 꺼냈을 뿐이고 말이다.
하지만 발린은 그 말을 듣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포대에서 흩어지는 가루를 본 카투아가 눈을 부릅떴다.
-그건!? 설마 그것이 네가 선택한 내 몸의 재료인가?
“맞아. 보물고에서 빼낸 에테르 결정 가루. 이것이라면 네 혼을 전부 담고도 부숴지지 않을 골렘을 만들 수 있을 테니까.”
에테르 결정이라면 충분히 자신을 담을 수 있다.
거기다 듣자하니 중심이 될 마나석도 이미 구한 듯 싶었다.
원래대로라면 주문서가 필요하겠으나, 이번엔 카투아가 들어가야 하니 딱히 그게 필요하지는 않았다.
허나 그렇다고는 해도 벌써 재료를 다 구할 줄이야!
발린의 능력 앞에서 그는 정령임에도 불구하고 현기증을 느꼈다.
한편 발린은 미리 가져온 아티팩트들을 전부 꺼냈다.
보아하니 아예 이 곳에서 제작을 진행하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부터 그 약속을 지키려고 해. 바깥에서 만들면 데리고 올 수 없으니, 아예 여기서 골렘을 만들 거야.”
하기야 영원묘는 영혼마저도 출입이 힘든 곳.
기존의 방식으로 골렘을 조종해 들어가려다 영혼이 빠져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 있었다.
대업이 허무하게 끝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이다.
아티팩트를 하나하나 살피던 카투아의 눈이 일순 번득였다.
-보물고의 아티팩트들과 아닌 것...그건 무엇이냐.
그가 반응한 것은 바로 실-레논의 드래곤하트였다.
카투아는 드래곤들의 묘를 관리하는 가디언, 당연히 드래곤의 시체를 보면 민감해질밖에 없었다.
-보물고에 있던 드래곤하트 두 개 중 어느 것도 아니군. 레벤 님의 것과 비슷하지만 그건 레벤 님의 게 아니야. 도대체 누구의 드래곤하트냐. 대답 여하에 따라서는 더 이상의 어떤 협조도 거절하겠다.
“이건 실-레논의 것이야. 마족 삼공작 중 하나로서 있던 드래곤의 드래곤하트지.
발린의 솔직한 대답에 카투아의 언성이 한층 더 높아졌다.
-뭐야?! 그게 무슨 소리냐! 위대하신 분께서 어찌...아무리 상대가 마왕이라 하여도...이럴 수가!
드래곤이 타락해 마족의 군주가 되다니!
영원묘의 수호 정령인 카투아의 가치관에서 그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슬픈 일이지. 마왕의 힘이 너무나도 강력했으니 말이야.”
-마왕이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긴 하지만...설마 실제로...
패닉에 빠진 카투아의 목소리에서 힘이 빠졌다.
타락한 드래곤의 드래곤하트라면 엄연히 그것은 발린의 전리품이다.
당연히 소유권도 발린에게 있는 게 맞았다.
양도를 통해 전해받으면 된다 하지만, 카투아는 발린에게 내 줄 만한 게 더 이상 없었다.
“혹시 이 드래곤 때문에 그래?”
그 때 발린이 무언가를 말했다.
정확히 카투아의 정곡을 찌르는 한마디였다.
고오오오.
순간 영원묘 전체의 빛이 일렁였다.
-그 드래곤하트는...
“내 소유물이지.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그게 맞잖아?”
-그, 그렇다. 나는 네게 많은 걸 대가로 내놓았고, 더 이상은 줄 게 없다. 허나 나는 내 책무를 다해야 한다. 인간 연자여. 부탁한다. 그 드래곤하트...내게...'
고개를 푹 숙인 카투아가 쭈뼛거리며 부탁을 꺼냈다.
드래곤하트를 생으로 내준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
허나 그 제안을 들은 발린은 화를 내지도, 고민하지도 않았다.
막 결정 가루를 펴던 발린의 입에서는 대신 의문 하나가 새어나왔다.
“왜 네가 가진 게 없어? 하나 남아 있잖아.”
그 말에 카투아는 놀란 눈으로 자신을 훑어보았다.
우선 드래곤의 지식인 아케인 매직과 에테르는 당연히 사명을 받은 발린의 것이다.
그 외에 자신이 가진 건 흡수의 힘과 시공간 저항력, 그리고 술법의 응용과 각 보물고의 위치. 영원묘의 관리 권한 정도.
모두 가지고는 있지만 팔 수는 없는 것이다.
-무엇이 남아 있단 말인가. 연자여.
하지만 드래곤의 시체를 묘에 안치하는 건 카투아의 의무.
그것을 외면하는 건 소환될 때부터 박힌 각인 때문에 절대 불가능했다.
하지만 발린은 그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야 아직 너 자신이 남아 있잖아. 만약 네가 원한다면 널 받고 거래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
천만뜻밖의 말에 카투아는 일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사이 발린은 카투아 몰래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은 그야말로 노예매매 상인의 그것 그 자체였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의 세 편째이자 마지막 편입니다.
이번 작품후기까지 따라와주신 독자 여러분, 정말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쉬는 에피소드가 끝나고, 이제 새로운 전개들로 들어갑니다.
아마 이제부터 완결까지 숨막히게 달려가겠지요.
사실 독자분들께 고백할 게 있는데, 공지에도 올릴 것이지만 오늘 조아라에 프리미엄 전환 관련해 일대일 문의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작품은 이 속도라면 2월말, 혹은 3월초에 완결이 날 것 같거든요.
그러니 프리미엄 전환기간인 90일을 위해서라도 미리 대비를 해 둬야겠지요.
여하튼 그런 의미에서 전환 관해서 오늘, 2월 8일 새벽에 문의를 넣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답변이 오는지에 따라 바로 90일 카운트다운이 들어갈 수도 있고, 아닐 수가 있네요.
걱정 마십시요. 독자님들. 완결까지는 노블에서 있을 수 있습니다. 안심하시고 대현자가 회귀함을 읽어주십시요.
말이 길어졌네요. 그럼 저는 이만 내일 연재를 위해 쉬러 가 보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고, 가시기 전에 추천 하나씩만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