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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레논의 안배
드래곤 하트!
그 가치는 마법사가 될 때부터 누누히 들어왔다.
대장장이들이 망설이는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선 이미 정해 둔 쓰임새가 있었다.
그렇기에 발린은 망설임없이 실-레논의 가죽을 벗겼다.
드득! 드드득!
살점이 찢기는 거북한 소리가 울려퍼질 때마다 검은 가죽이 꿈틀거렸다.
마치 옷을 벗기든 가죽을 몸으로부터 벗겨내는 것이다.
쉽다 생각할지 모르나, 실상 엄청난 고난이도의 작업이었다.
가죽을 벗기는 데도 기술이 필요하다.
괜히 무두장이라는 직업이 있고, 그게 전문직인 게 아니었다.
“이거 간단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어려운데..?”
전생에서는 속살이 상할 염려 없이 작업할 수 있어 편했다.
하지만 이번 생은 그마저도 쓸모있는 상황. 자연히 칼질이 조심스러워질밖에 없었다.
이대로라면 두어 달은 가죽 벗기는 데 써야 할 상황.
여기서 의외의 조력자가 힘을 보였다.
“이거 내가 한 번 해보겠다냐! 나 많이 해봐서 이런 거 잘 한다냐!”
눈을 빛낸 소냐가 그대로 실-레논의 시체에 달려들었다.
처음 픽 웃던 발린도 시간이 지날수록 입을 다물었다.
소냐가 합류한 순간부터 작업이 엄청난 속도로 진행된 것이다.
수많은 마족을 잡고, 해체해 본 경험이 빛을 발했다.
“좋아, 레벤, 속살에 있는 어둠의 마나를 정화해 줘.”
“알았어요.”
말을 마친 레벤이 곧장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기온 자체가 낮아서 그런지 피가 튀는 일은 없었다.
파삭! 바각바각!
얼어붙은 살점이 신성력이 통할 때마다 괴상한 소리를 내었다.
아마 저 작업이 끝나기까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리리라.
“엘리아, 하나도 빼놓지 말고 잘 보고 있...아니다. 지금은 우선 밖에 나가서 눈 좀 붙여. 소냐한테 데려다 달라고 하면 금방 마을로 보내 줄 테니까.”
지금 쉬어 둬야 아티팩트 작업 때 맨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엘리아도 그 점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둘, 아니. 셋이 남자 발린은 실-레논을 한쪽 구석으로 데려갔다.
-내 동족의 부탁만 아니었으면 네 녀석이랑 이렇게 얼굴 맞댈 일 따위 절대 없었을 텐데.
“아티팩트 속에 영혼이 들어가도 과연 그 태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스산한 발린의 협박에도 실-레논은 코웃음만 쳤다.
썩어도 준치라고, 그도 드래곤은 드래곤이었다.
동족,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동족을 건 협박엔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든 그는 변함없을 것이다.
-그래서 뭐냐. 설마 나더러 아티팩트를 만드는 걸 도와달라는 질문은 아니겠지? 인간.
“그런 건 아니고, 질문 몇 개에 대답을 좀 해줬으면 하는데. 네 동족의 생사에 관련된 질문에 대해서.
-......
잠시 침묵하던 실-레논은 이내 풉하고 웃으며 물었다.
-나더러 마왕군에 대한 정보를 팔라는 거냐?
“마왕군이라기보다는 마왕에 대해서.”
-헛소리하지 마라! 거기에 관해서는 볼 일 없다. 인간.
매몰차게 거절하는 실-레논.
하지만 발린은 포기하지 않고 들러붙었다.
“어차피 내게 시체를 제공한 시점에서 이미 배신한 건 맞잖아? 나도 마지막 드래곤이 죽는 건 바라지 않아. 그래서 마왕에 대한 걸 알 필요가 있는 거고.”
-나를 묶을 수 있는 건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 인간.
“별달리 큰 것도 아니야. 그저 마왕의 봉인이 어떤 식으로 이뤄져있는지만 알려주면 돼. 이 정도야 큰맘먹고 말해줄 수도 있잖아? 드래곤의 봉인이니 드래곤이면서 마왕군 삼공작이기까지 한 네가 모르는 것도 아닐 테고.”
-알고 있다. 그래. 알고 있지. 허나 네 녀석에게는 말하지 않는다.
의미없는 실랑이가 계속 이어지는 사이 발린도 점점 지쳐만 갔다.
실-레논의 뜻은 생각보다 완고했다.
효율을 중시해야 하는 발린의 입장에서는 열불이 터지는 일이었다.
“제길할. 카투아도 마왕의 봉인에 대해서는 잘 모를 텐데. 이래서야 네놈을 보고 잘 됐다 생각하던 게 물거품이잖아!”
-카투아? 어떤 현자에게 찾아갔는진 모르겠지만 거기에 대해서 아는 건 나와 자-쿨카뿐이다. 헛수고하지 않는 게 좋아.
“현자가 아니다. 녀석은 드래곤들의 묘지를 지키는 가디언이야.”
-드래곤들의 묘...? 묘지...
묘지라는 말을 듣자 실-레논의 영혼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잠깐만, 이 녀석 설마...?’
고개숙인 발린의 눈동자에 빛이 스쳐지나갔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이것이라면 녀석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묘지. 네 녀석을 없앤 후 수많은 드래곤들이 같이 안장된 묘지를 확인했다. 그 곳을 지키는 가디언이 카투아야. 레벤 덕에 나도 어느 정도 안면이 있게 되었지.”
약간 사실을 비꼬긴 했으나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가 카투아와 안면이 있는 건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게 있었다니, 처음 듣는 얘기로군.
“왜, 들어가고 싶나? 네가 한 짓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애시당초 들어가고 싶지도 않아. 필요없으니 그 얘기는 그만해라.
말은 그렇게 하지만 눈에 띄게 동요한 모습의 실-레논.
발린은 천천히 영원묘에 대한 이야기로 실-레논을 충동질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실-레논이 협조하겠다 말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순간이었다.
-정말 그것만 말해주면 내 시신을 영원묘에 안치해주는 거겠지?
“쓸 건 쓰고, 남은 부분만.”
시체를 전부 다 영원묘에 안치시키는 건 물론 말도 안 되는 짓이다.
하지만 발린이 말한 것은 정화가 불가능한 뼈의 대부분과 살점의 일부다.
그 정도라면 기꺼이 내어줄 수 있었다.
어차피 가지고 있어봤자 어둠의 마나 때문에 쓰지도 못할 물건들이다.
마왕군이나 불운한 인간이 그걸 손에 넣느니 차라리 영원묘에 안치하는 게 백배천배는 나았다.
이야기를 마친 발린은 미리 레벤에게 그 사실을 말해 두었다.
“그거야 발린 뜻대로 해도 상관없는데, 카투아는 발린만큼 어둠의 마나를 싫어하잖아요. 마족도 그렇고. 그런데 어둠의 마나로 가득한 실-레논의 뼈를 받아줄까요?”
지극히 타당한 의문이다. 하지만 발린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괜찮아, 카투아에게 있어 드래곤은 무엇을 받아들였다 한들 드래곤이니까. 어둠의 마나야 그 곳에서 천천히 빼면 되고. 아마 엄청나게 좋아할걸?”
그렇게 빚을 지우면 차후 카투아와 이야기할 때 한결 편해진다.
무언가를 시키거나, 혹은 받아낼 수도 있고 말이다.
약간은 위험한 도박이었으나, 발린은 카투아가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정화는 어떻게 됐어?”
“어지간한 부분은 순조로이 진행되고 있어요. 심장과 그 근처는 다른 에너지가 가득해서 굳이 안 해도 상관없고, 뼈는...”
“뼈는 가슴팍 부위의 뼈, 그리고 정말 중요한 곳 몇 부분만 정화해서 떼내 쓴다. 전부 정화하려면 족히 이십 년은 넘게 걸릴걸?”
“정말이지, 이 빚은 나중에 꼭 받아낼 거예요.”
투덜거리는 레벤에게 발린은 픽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아티팩트를 하나 더 만들어줄까 싶었는데, 역시 다른 걸 찾아봐야 할까나?”
“지, 직접 만든 선물...”
뭔가 핀트가 어긋난 것 같긴 하지만, 어쨌거나 레벤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이로써 작업 준비는 완료되었다.
발린은 대장장이의 반지와 마도장갑을 준비한 뒤 엘리아를 불렀다.
***
그 뒤 일 주일 가량 발린은 최소한의 생존만 챙기며 시체 해부에 몰두했다.
해부란 말을 쓴 것은 시체를 조각내며 그 몸을 철저히 연구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드래곤의 시체!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은 아무리 생각해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래야 발린이죠. 이젠 뭐 익숙해요.”
정화 작업을 맡던 레벤은 삼십 년은 된 마누라 같은 표정으로 그리 말했다.
물론 그 레벤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물러날 리 없었다.
“대신 나가서 같이 봉사활동하자고 한 거 꼭 지키세요! 꼭이예요!”
“...쩝.”
교황청의 이름을 걸고 하는 구호봉사활동.
몇 번을 되뇌어도 소름이 돋는 단어였다.
그걸 직접 하게 되었으니, 발린에게 있어선 엄청나게 큰 부담이었다.
그래도 작업의 과정에 있어서 어려운 점은 없었다.
실-레논의 조언하에 일부를 정화하면, 그 부분을 발린이 뜯어 아티팩트를 만든다.
가끔 엘리아도 옆에 끼어서 보조했는데, 그 때마다 상태창이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걸 볼 수 있었다.
“똑똑히 봐둬. 세상에서 단 한 번밖에 볼 수 없는 작업이니까.”
“네! 스승님!”
엘리아는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열의를 불태웠다.
발린에 대한 존경심 이전에 마법사로써의 본능이었다.
한편 소냐는 실-레논과 둘이서 이야기를 나눴다.
“이, 이렇게 하는 거다냐...?”
-멍청한 고양이 놈. 꼬리에서 힘을 빼라! 그 정도 경지까지 올라서 그것도 못 하냐!
“히, 히끄흐으으으냐...”
이야기라기보다는 거의 일방적인 구박 하에서의 수련.
하지만 그러면서 실-레논이 가르치는 무술은 진짜배기였다.
그가 가르쳐주는 것은 무려 천 년 전 실전된 영웅들의 무예였던 것이다.
지켜보던 발린이 욕심이 생길 정도의 기예.
허나 말해봤자 퇴짜맞을 게 뻔하기에 하는 수 없이 침묵해야 했다.
그걸 제외하면 작업은 대체적으로 순조로웠다.
순조로운 걸 감안해서 한 달!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흐른 끝에 마침내 발린은 완성품 세 개를 늘어놓을 수 있었다.
“이건...?”
“다 됐다.”
발린은 벌건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그의 눈앞에는 손과 발에 끼는 크로우(claw), 팔다리 등을 보호하는 무투가용 의복 한 벌이 있었다.
물품을 지켜보던 발린은 하늘 위로 손을 내밀었다.
“뭐 해? 니 꺼 아니니 내놔.”
-흥. 잘도 만들었군. 알아서 해라.
공중에서 투덜거리던 실-레논이 살피고 있던 지팡이를 내려놓았다.
이 세 개가 일주일 간의 결과물이었다.
아직 가죽과 살이 꽤 남아있긴 했지만, 이것도 열심히 신경써서 만든 것이었다.
“우선 이 손발 크로우는 소냐 네 거. 아티팩트가 세 개인 만큼 잘 쓰도록 해.”
“...고맙다냐. 딱 어울린다냐!”
크로우를 받아든 소냐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드래곤 본으로 만든 크로우다. 네 개중 하나만 팔아도 왕국 하나와 거래될 귀물이었다.
“어둠의 마나가 스며있어 마나를 넣으면 검은색 오러블레이드가 나와. 공격력 하나만큼은 기존 오러블레이드보다 훨씬 강할 테니 잘 써.
말은 그렇게 했으나 저것의 기능은 그 뿐만이 아니다.
신성력을 같이 넣었기에 원하는 때 두 힘을 충돌시켜 엄청난 힘을 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언령의 권능을 일부 살려 베었다는 사실을 상대에게 각인시킬 수도 있었다.
”이름은...네가 정하고.”
“알았다냐. 이거 이름은 캐티로 할 거다냐!”
캐티라는 말을 듣자마자 풉 하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캐티는 새끼고양이를 귀엽게 부르는 말이다.
최소 왕국 네 개의 가치를 지닌 S급 아티팩트에게 붙이기엔 어폐가 있는 단어.
하지만 주인이 그렇게 정한 이상 하는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옷은 레벤 거. 사이즈는 성장할 때마다 자동으로 맞춰질 거고, 방어력 하나만큼은 확실히 보장할게. 실-레논이 그렇게 맞춰달라더라고.”
“고마워요. 발린. 이름은 가디언 기프트로 할게요.”
어찌나 감격받았는지 레벤은 얼굴까지 붉히며 고마워했다.
-내가 말했지. 내 동족에게 털끝만큼의 상처도 낼 수 없게 하라고.
공중에 떠 있던 실-레논이 큰 소리로 말했다.
저 녀석 때문에 원래 넣으려던 기능을 대폭 수정해야 했다.
발린은 쳇 소리를 낸 다음 지팡이를 챙겼다.
이건 알베르토 녀석에게 줄 다크 스태프다.
마찬가지로 흑마법과 언령을 이용한 권능이 담겨져 있어, 엄청난 가치를 지닌 S급 아티팩트였다.
이것이라면 사파이어 타워 전체를 자신에게 묶어둘 수 있으리라. 아마 발린이 죽은 뒤까지도 말이다.
-이제 가는 거냐?
“나중에 또 올걸? 아직 재료가 많이 남았고, 나도 만들 게 있어서.”
발린은 무심히 대답했다.
우선은 황도에 들러 영원묘를 재개통하는 게 첫 번째.
이 곳에는 그걸 통해서 와도 충분했다.
-인간 녀석! 약속을 지켜라! 어딜 도망가는 거냐!
“뭐?”
막 몸을 돌리려던 발린이 물었다.
느닷없이 약속이라니,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허나 실-레논의 다음 말을 듣는 순간 그는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네 녀석이 내 몸에 열중하느라 마왕의 봉인에 대해 듣지도 않고 가버리려 하지 않았느냐!
“그러고 보니...참.”
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실-레논에게 향했다.
분명 듣기로 했음에도 다른 데 열중하다 보니 잊어버린 듯했다.
-좋아, 따라와라. 마왕의 봉인에 대해서 내 아는 대로 가르쳐 주지.
말을 마친 실-레논의 눈이 번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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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두 번째 편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 번째 편은 아침에 올라갈 듯 합니다. 그럼 그 때도 호응 부탁드리며, 가시기 전에 추천 하나만 눌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