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0 / 0264 ----------------------------------------------
황제의 방문
밤새도록 산에서 포스 서치를 시전한 발린으로서는 여러모로 억울한 일이었다.
“공작님, 제발...”
발린은 고개를 젓다가 말했다.
“그러고보니 공작님, 래트로스 후작에 관련된 사항은...”
“그래, 안 그래도 곧 그 건에 관해서 인원들을 소집한다더구나.”
말을 마친 케틸 공작이 버티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앞서 잘 넘겨왔다 한들 이 건에서 문제가 생기면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되는 셈이다.
전후상황이 어찌됐던간에 황제의 명을 받은 고위 귀족의 죽음은 굉장히 큰 사건.
그 책임을 완전히 피하지 않는 이상 경질은 피할 수 없었다.
“회의 자체가 고위 관료들만 있는 자리에서 진행되는만큼 자네와 샤를로트 양은 참석할 수 없을 듯 하네. 내기의 결과는 아무래도 그 때 봐야 하겠군.”
말을 마친 케틸 공작이 멋적은 듯 뒷머리를 긁었다.
긁어봤자 목 근처에 테처럼 남은 머리카락 가닥이었지만 말이다.
“고위 관료들만이요?”
“그래, 폐하께 듣기로는 그 때 발린 공과 레벤 대신관도 같이 참석한다 하더군. 얼마 전에 일이 있어서 이제야 따라온다고.”
발린이라는 이름은 이미 카딤 제국은 물론 전 세계에 잘 알려져 있었다.
아티팩트의 새 역사를 쓴 건 물론, 삼황자로 위장한 뱀파이어를 걷어낸 게 그 시작.
황도에 와서 최강의 마법사가 된 것에서 교황청을 도와 레-호트를 무찌른 것까지.
이 영웅담을 능가하려면 부활한 마왕이라도 잡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게다가 같이 오는 건 대신관 레벤! 발린의 명성에는 약간 뒤지는 감이 있으나, 실력으로 따진다면 발린 이상일 수도 있는 거물이다.
당장 그녀가 교황청을 대표한다는 걸 생각해봐도 둘 다 엄청난 인물이었다. 그들이 회의에 참석한다니 케틸 공작으로서는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긴장하고 계셨군요.”
발린은 푸석한 얼굴 위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떠올랐다.
그 모습이 마음을 한층 더 움직인 탓일까, 케틸 공작은 살짝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그래도 자네들이 대장벽에 있는 한은 문제없을 것 같네. 어째서인지 인바르, 자네가 여기 온 후로 여러모로 행운이 뒤따른단 말이지. 마족 사냥 때도 그렇고, 어제와 오늘도 마찬가지. 하하. 덕분에 지금도 사실 그렇게 걱정되진 않는다네.”
“마음 편히 가지십시요. 공작님께서는 무죄일 겁니다.”
“그래야 내기에서 이길 테니 말인가? 아마 그 조건이...돌아갈 때 국경도시까지 따라가라는 거였지. 안 그런가?”
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경호용이시니 무기랑 갑옷까지 최상의 상태로 챙기셔서요. 언제 누가 오든 곧바로 싸울 수 있게.”
“물론 그렇게 할 거긴 하네만, 어째 외부인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불안해지는 것도 사실이네 그려.”
고개를 갸웃한 케틸 공작이 이내 몸을 돌렸다.
“여하간 내기의 내용은 잘 알겠네. 그럼 나는 걱정하지 말고 둘이서 잘 쉬고 있게나. 혹여 내가 황도로 끌려간다면 자네들은 내 부관에게 가면 될 걸세. 녀석도 인재를 아끼는 건 매한가지니 잘 될 거야.”
자신이 쇠사슬을 찰 위기임에도 스카웃부터 걱정하는 공작이었다.
마법사가 지식에 욕심내는 것과 비슷할 정도의 열의!
직접 느껴보니 그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열정인지 알 수 있었다.
공작이 사라지자 레벤이 옆에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그 회의에서 말하는 거군요. 사실 여러모로 욕하기도 했고 칭찬도 했던 그 발린과 레벤은 진작부터 여기서 같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고.”
정곡을 찌르는 상황 예측에 발린의 등골이 절로 서늘해졌다.
“마음같아서는 아예 숨기고 떠나거나, 갈 때 슬쩍 말해주는 게 최상의 선택이긴 한데, 그러기엔 이번 안건이 너무 중대사라서.”
“하긴 그래요.”
백 명이 넘는 중앙 귀족이 여기까지 온 이유부터가 그것이다.
거기서 직접 참가해서 의사를 말하지 않으면 케틸 공작이 죄를 덮어쓰는 상황이 나올 수 있었다.
“아, 참. 레벤. 나 뭐 하나만 좀 해줘.”
“뭘요?”
레벤의 물음에 발린은 대답 대신 자기 얼굴을 가리켰다.
잠을 못 자서 눈 밑에 낀 다크서클은 물론, 전체적으로 푸석푸석한 얼굴 피부가 눈에 띄었다.
“이거, 네 신성력이면 금방 재생시킬 수 있지 않아?”
“그야...가능해요. 해 드려요?”
떨떠름한 표정의 레벤이 한번 더 물어 왔다.
지금까지 발린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신성력을 제 몸에 쓰는 걸 거부해 왔다.
그렇기에 지금의 부탁은 그녀로서도 이상한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해 줘. 중요한 자리잖아. 그런 곳에 이 꼴로 들어가면 말 자체의 무게가 달라져.”
“많이 바뀌셨네요. 예전이었다면 그래도 좋다 하실 거였으면서.”
“두려움을 극복하기로 했거든.”
내가 한 말인데 내가 못 지킬 수는 없으니까.
그 뒷말을 삼킨 발린은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의 삶에서 그는 평생동안 이 두려움을 버리지 못했다.
어제 그가 에블린에게 말한 것은 회귀를 겪으면서 얻은 깨달음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정말 간단한 건데, 그거 하나를 버리지 못하고.’
“여기 앉으면 되겠네요. 기왕 하는 거, 몸의 피곤까지 쫙 풀어 드릴게요.”
말을 마친 레벤이 발린을 성벽 계단참에 앉혔다.
마침 시찰이 끝난 지 얼마 안 됐기에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아마 휴게실 같은 곳에서 자축의 건배라도 한 잔 하고 있을 것이다.
“으음.”
발린은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이미 각오했다고는 하나, 막상 신성력을 받아들이려니 느낌이 쌔했다.
우우우웅.
그렇기에 레벤의 손가락이 얼굴에 닿은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린 것이기도 했다.
“에이, 설마 겁이라도 먹으신 거예요?”
“그냥 손가락이 차가워서 그래.”
“피 -. 다 보여요.”
레벤은 그렇게 말하고 천천히 얼굴을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손길이라면 근육이 약간 풀어지는 걸로 끝이겠으나, 거기엔 드래곤으로서 받은 신성력이 듬뿍 담겨 있었다.
손가락이 닿는 곳마다 긴장이 툭툭 풀린다.
동시에 실밥이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연이어 났다.
물론 발린의 귀에만 들리는 소리였다.
“으...으음.”
예전에 두 번 받아봤다고는 하나, 막상 의식을 차린 상태에서 이러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평생동안 싫어하던 음식의 새로운 맛을 보는 기분?
‘생각보다 나쁜 느낌은 아니군. 이것도.’
발린은 손에 몸을 맡긴 채 긴장을 풀었다.
그 순간,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파직!
유리잔에 금이 가는 듯한 작은 소음. 허나 발린에게 있어서는 천지개벽의 벼락보다 훨씬 더 커다랗게 다가왔다.
‘어?’
발린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스아아아.
몸 안에 잠들어있던 수많은 마나가 일제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무영창을 통해 마나를 다루는 데 익숙해지자, 이제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레 표면으로 나오는 것이다.
“무슨 일 있어요?”
“어. 그게...”
발린은 잠깐 레벤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이 소리는 아마 자신에게만 들려온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뭐야, 일부러 놀래키려고 한 건 아니죠?”
“...눈치도 빠르게.”
일부러 그런 척 장단을 맞추자 그럭저럭 넘어가는 분위기가 되었다.
다시 안마가 재개된 사이 발린은 조심스레 제 몸 안의 마나를 움직여 보았다.
그리고 곧 엄청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럴 수가!’
***
장벽 시찰을 마친 얼마 후, 사령부의 심처에 수십여 명의 사람들이 들어섰다.
총원은 대략 삼십여 명 가량, 그들 하나하나가 카딤 제국과 대장벽의 고위급 인사들이었다.
“다들 왔나요?”
“바프멧 후작 외 스물세 명. 전원 착석했습니다.”
“케틸 공작 외 네 명. 전원 착석했습니다.”
마른 후작이라 이름밝힌 염소상 중년인이 중앙귀족들의 착석을 알렸다.
그건 케틸 공작도 마찬가지. 귀족 29명에다 에블린 1명을 더하면 딱 30명이 되는 셈이다.
“한데 저 빈 의자 두 개는...”
“발린 공과 레벤 대신관의 몫이예요. 교황청 측의 의견도 어느 정도는 들어봐야 하지 않겠어요?”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폐하.”
귀족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발린과 레벤이라면 충분히 이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있었다.
“우선은 의제를 먼저 꺼내도록 하죠. 두 사람도 미리 제게 말해 뒀어요. 먼저 의견을 꺼내고 있으면 중간에 참석하겠다고.”
“열심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듣고 있던 한 중년 귀족이 입을 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너도나도 거기에 말을 맞췄다.
만약 발린이 실제 능력이 있고, 명성도 갖추지 못했다면 이 말 대신 거만하다는 핀잔이 들어갔을 것이다.
“그럼 제가 먼저 상황을 정리할게요. 래트로스 후작은 담당관으로서 보름 전 이 곳에 도착했고, 약 이틀간 임무를 수행하다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이 진술이 맞나 조사하기 위해 왔고요. 다들 이의 없으시지요?”
“그렇습니다. 폐하.”
“맞습니다.”
여기까지는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다. 양 측 모두 별반 이의 없이 의제를 수긍했다.
“그럼 이제 그 자세한 경위를 듣고 싶은데요. 케틸 공작님. 말씀하세요.”
에블린은 능숙하게 케틸 공작을 콕 집어 말하라고 시켰다.
이렇게 하면 다른 귀족들이 끼어들 틈이 없어진다. 노리고 했다면 참으로 날카로운 안목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케틸 공작은 천천히 자신이 겪은 일들을 말했다.
첫 날 겪은 모욕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전부 솔직하게 말이다.
직접 말하는 입장이니만큼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었으나, 공작의 말 어디에도 그런 티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귀족 여러분들의 발언 차례예요. 여러분들이 보고 느낀 상황은 어떻죠?”
공작의 말이 끝나자 에블린은 기다렸다는 듯 귀족들 편을 지목했다.
당연히 귀족들은 케틸 공작이 고의로 사건을 왜곡했다는 입장을 지켰다.
그래도 어제와 오늘 지켜보면서 느낀 게 있는지, 처음보다는 꽤나 많이 기세가 누그러져 있었다.
이대로라면 케틸 공작이 무죄방면될 확률은 대략 7:3, 잘 쳐 줬을 때 6:4였다.
‘폐하는 공식적으로 누구 편을 들어선 안 됩니다. 케틸 공작이 유능한 신하이고, 그를 지켜야 하는 건 저나 폐하나 잘 알고 계시지요. 그 몫은 제가 할 테니 내일의 폐하는 중재자로서 있으십시요. 그렇지 않으면 이번엔 중앙귀족들이 역으로 불만을 가질 테니까요. 기껏 사그라든 불만을 다시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어제 그녀를 붙잡은 발린이 힘주어 했던 말의 내용이다.
문득 그것을 머릿속에 떠올린 에블린은 살짝 눈을 감았다.
마음같아서는 당장 귀족들을 다물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그래서 참고 또 참았다. 머리에 열이 뻗치는 것도, 입이 근질근질한 것도 모두 꾹꾹 내리눌렀다.
그 사이 귀족들의 공세는 서서히 날카로워져갔다.
케틸 공작이 아무리 사실을 이야기한들 그걸 증명할 증거가 없으니 하는 수 없었다.
남들이 말리는데 혼자서 나가고, 그 후로 연락이 끊긴 래트로스 후작.
대장벽에 대해 별다른 감정이 없더라도 음모론이 무럭무럭 생각날 만한 환경이었다.
막 귀족들의 공세가 절정에 다다를 무렵이었다. 갑자기 사령부 회의장의 정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게 누구냐! 무슨 일이야?”
입구 근처 귀족들의 소리에 문 너머는 이렇게 답했다.
“예! 발린 공과 레벤 대신관님께서 회의장에 도착하셨다고...래트로스 후작의 사인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오느라 늦었다 합니다.”
“...음?”
귀족들이 놀라는 와중 케틸 공작의 눈초리에 의문이 스쳐지나갔다.
문 밖을 지키는 기사는 자신의 직속 수하. 당연히 오랜 기간을 같이 지내오며 목소리 정도는 익혀 두고 있었다.
한데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는 영락없이 당황한 기색이었다.
일전에 생일축하를 위해 깜짝 파티를 열어줄 때 딱 한 번 들었던 적 있는. 그 때의 목소리.
케틸 공작은 슬며시 허리춤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여차하면 곧장 나서 적을 베어야 했다. 온 몸의 마나가 오러가 되어 넘실넘실 일어나기 시작했다.
“들여보내세요.”
“예, 폐하. 문을 열어라!”
허나 공작은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문이 열린 순간 놀란 건 그도 문 밖의 기사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의 두 번째 편입니다.
에블린도 물론 발린 좋아해요. 다만 발린이 키스나 애정표현 같은 거 싫어하니까 골탕 좀 먹어보라고 한 거지요. 설마 진짜로 할 줄은 몰랐다고 합니다. 네.
마지막 세 편, 아침에 올리겠습니다! 그럼, 한숨 주무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