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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가 회귀함-254화 (254/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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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찰

눈을 끔벅거리던 케틸 공작이 이내 말을 이었다.

“신경써주는 마음은 고맙지만...”

“공작님께서 유죄로 넘어가시면 저랑 샤를로트 둘 다 남아서 장벽을 지켜 드리지요. 그토록 원하시던 계약서에 서명도 해 드릴 테니 안심하십쇼.”

“...무죄가 되면 어떻게 할 건가.”

호기심이 슬픔을 밀어냈는지 공작은 눈가를 슥슥 문지르며 물었다.

역시 마족만 수십 년 넘게 지켜본 강인한 심성의 소유자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도 이어지는 말을 듣고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글쎄요, 저는 별다른 게 없는데...아까 말씀하신 따님이라도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뭐어?!”

당사자인 케틸 공작은 물론 듣고 있던 레벤까지 화들짝 놀랐다.

“농담치고는 상당히 괴악하구만 그래. 나쁜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는 걸 아니 망정이지, 정말 그랬으면 당장 결투를 신청했을 걸세.”

케틸 공작은 머쓱한 듯 웃어보였다.

“그래도 덕분에 힘이 좀 나는구만. 고맙지만 소냐는 내 소유가 아니니 그 내기는 받아들일 수 없어. 마음만 감사히 받겠네.”

“그럼 케틸 공작님, 만약 무죄가 되면 제가 시키는 대로 해 주시겠습니까?”

“시키는 대로?”

고개를 갸웃하는 케틸 공작을 향해 발린이 말을 이었다.

“별 거 아닙니다. 그저 황제폐하와 신료들이 시찰을 마치고 돌아가실 때 같이 따라가시면 됩니다. 국경지대까지만요. 그럼 그 사이 저는 공작님의 스카웃 제안에서도 벗어나 느긋하게 둘러볼 수 있을 테니까요.”

“이런이런, 그렇게 내가 따라붙는 게 귀찮았나?”

비틀어 말했을 뿐 사실상 그만 좀 권유하라는 뜻이다.

그 말뜻을 알아챈 케틸 공작이 민망한 듯 머리를 긁었다.

“국경지대까지라...그게 다인가?”

“더 이상 가시면 의심을 사지 않겠습니까? 공작님도 대장벽을 계속 지휘하셔야 하고요.”

“그야 그렇지.”

아무리 방비가 탄탄하고 전진요새가 있다 한들 머리가 없으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

실제 역사에서도 그런 경우가 부지기수이니 충분히 설득이 되었다.

케틸 공작은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좋아, 그 내기 받아들이지. 이상하게도 자네가 이겼으면 하는 내기긴 하지만...어느 쪽이든 손해는 아니니. 그럼 나는 이만 가 보겠네. 이러다간 정말 늦겠어.”

말을 마친 공작이 나갔다.

래트로스 후작이 지적한 사항들을 대대적으로 고치기 위해선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것이다.

뒤편의 도시나 마족의 신체 부위를 유통한 건 어쩔 수 없으나, 이왕 거름당한 건 최대한 치우고 황제를 맞이하려는 계획이었다.

“발린 공답지 않게 의외네요? 저나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실 땐 매일 거래,거래 그러시더니.”

등 뒤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던 레벤이 물어왔다.

“편히 좀 쉬려고 그런다. 왜.”

발린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으나 못내 의심을 피할 수는 없었다.

“피이, 저한텐 솔직하게 말해줘도 되지 않아요?”

“고해성사라도 하라는 거야?”

“그것도 좋네요. 고해성사. 저도 신관이니까.”

“됐네!”

눈앞에 당사자가 떡하니 있는데 말하라는 건 눈 가리고 아웅이나 다름없었다.

목소리를 높인 발린은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냥 도와주려는 거야. 케틸 공작은 대장벽을 잘 관리하고 있으니까. 그 사람이 파면되면 문제가 일어날 게 뻔하잖아?”

“...정말 그게 끝이예요?”

“그럼!”

발린은 짐짓 강하게 말하며 헛기침을 했다.

아일란을 시켜 돌아오는 길에 뱀파이어들을 매복시켰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사실 감추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긴 했으나, 막상 말하자니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럼 아까 소냐를 달라고 한 것도 농담 맞죠?”

“어?”

겨우 납득시켰나 싶은 순간 갑자기 레벤이 의외의 질문을 던졌다.

고개를 끄덕이던 발린이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반은 농담이지만 반은 진담인데.”

“으으음.”

레벤은 잠시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역시 발린 공도 남자라는 거예요?”

“그런 의미인 줄 알았다면 천만의 말씀이야.”

소냐의 경지는 현재 소드마스터 최상급에 이르렀다.

본래 가지고 있던 천성도 뛰어난 데다 황제선발대전과 그 후의 경험이 어우러진 덕택이다.

게다가 아티팩트를 두 개나 받아 그 힘을 쓸 테니 추후 그만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랜드마스터 정도는 되어야 마왕한테 단숨에 골로 가지 않을 테니까...’

“아하하, 농담이예요. 농담. 그럼 역시 그 힘 때문에?”

“그거밖에 더 있겠어? 그래서 슬쩍 얘기를 꺼내 봤는데 내가 말을 잘못했나 봐.”

발린은 그렇게 말하고 피식 웃었다.

어차피 케틸 공작이 그렇게 나올 건 예상하고 있었다.

정말 소냐를 소중히 아낀다면 내기의 상품으로 걸 수 있을 리 없을 테니 말이다.

생각대로 공작은 당연히 거절했고, 대신 발린은 처음부터 노리던 이야기를 말해 수락시킨 것이다.

“그래도 소냐는 행복하겠네요. 자기를 그렇게 존중해주는 아버지도 있고.”

“아버지라...”

발린은 문득 라덴과 밀리아를 떠올렸다.

전생의 시절에는 마나에 생각이 쏠려 있어 가족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도 해 주지 못했다.

이번 현생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다만 마법에 대한 연구에서 마왕을 막는다는 사명으로 내용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의자에 앉아 생각하던 그는 착잡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나한테도 나를 저렇게 생각해주시는 아버지가 계시지. 피로 이어진 친아버지가.’

사명을 마친다면 그 다음은 발린도 한 명의 마법사일 뿐이다.

가족이 있고 사람들이 있는 마법사 말이다.

‘일이 끝나면 영지로 돌아가서 아버지랑 얘기를 나눠야겠다. 이야기야 적당히 각색해서 말씀드리면 되겠고...분명 재밌어하시겠지.’

홀로 마법의 진리에 몰두하는 것도 끌리는 미래다.

하지만 그건 전생의 빚이 없을 때의 이야기. 이번 생에서는 전생에서 못 다한 효까지 넘치도록 얹어 드려야 할 것이다.

그러기 전까지는 원하는 대로 살 수 없었다. 발린은 킥킥 웃었다.

‘분명 영지 관리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도 하시고. 시종 누구누구가 좋다거나 안 좋다거나 같은 얘기도 늘어놓으시겠지. 그러고 보니 늙었을 때 무릎이랑 허리가 아프던데, 그게 가문 대대로 내려온 성질이라면 아버지도 그러실 테고...’

정겨운 미래를 상상하던 발린의 얼굴이 일순 딱딱히 굳었다.

전생에서 돌아다니던 중 이셀린이 했던 말들을 떠올린 것이다.

명문 귀족가의 도련님으로 태어난 그는 가문을 이으라는 말에 시달려 나왔다가 휘말렸다고 했다.

그 때 그가 낸 흉내 중 결혼은 언제 하냐고 묻던 부모님의 모습이 왜 이제 떠오르는지.

‘잠깐만, 그럼 설마 나도 그런 소릴 들으려나...?’

만약 사명을 마친다면 분명 여러 귀족가에서 혼담 요청이 들어올 것이다.

그야 마왕을 무찌른 영웅 중의 한 명일 테니 말이다.

‘...그건 좀 곤란한데.’

생각만 해도 땀이 뻘뻘 나오는 상황. 발린은 애써 고개를 내젓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레벤과 눈이 마주쳤다.

“무슨 생각 하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발린은 고갤 휘휘 저어 혼담 생각을 지웠다.

아직 사명도 완수하지 못한 시점이다.

벌써부터 그 이후를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

래트로스 후작이 죽었다는 소식은 예상대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황제의 명을 받아 시찰하러 간 담당관이 시체로 돌아왔다.

이는 작게 보면 황제의 명령에 대한 소홀이요, 크게 보자면 역모의 일종이기도 했다.

중앙 귀족들은 이 점을 물고 들고일어섰다.

아직 자세한 전후사정은 모르지만, 후작이 죽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명분이 될 수 있었다.

거기다 중앙의 무력인 루덴스,에이블 공작가가 무너졌다는 점도 그 세를 뒷받침했다.

“폐하! 이는 케틸 공작의 중대한 반역행위옵니다! 대장벽의 군단이 반역을 저지른 것이오니, 제국 전역에서 군을 모아 유능한 장수를 뽑아 토벌령을 내려야 합니다!”

“현 상비군은 40만 가량이오나, 징집령을 내리면 능히 백만의 군사를 모을 수 있사옵니다. 백만의 군사라면 케틸 공작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한들 감당치 못할 것이니 부디 현명한 판단을 하시옵소서!”

하루가 멀다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귀족들 덕에 대전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하지만 에블린에게는 그들 말고도 든든한 지지층이 있었다.

“케틸 공작은 그럴 사람이 아니오. 내가 보증하지.”

“앗, 펜잔스 탑주!”

“당신이 어전회의에 올 줄이야...”

귀족들은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순간 말을 머뭇거렸다.

더 이상 최강의 마법사가 아니라고는 하나, 펜잔스는 아직 다이아몬드 타워의 탑주다.

제국에 유일한 마탑의 주인이 하는 말인만큼 어느 귀족도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에이블 공작가가 무너지고 루덴스 공작가가 휘청이는 지금은 더욱 그랬다.

“그 증거로 대장벽을 실제로 수십 년 동안 튼튼히 막아 오지 않았소. 이 몸이 지금은 최강의 마법사가 아니라고는 하나, 한 때 최강의 마법사였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오.”

일침을 가한 펜잔스가 에블린에게 몸을 숙이며 말했다.

“폐하. 이번 선발대전에 침입한 마족이 있다고는 하나, 그것 때문에 수십 년 간의 업적이 폄하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옵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저나 교황청도 마찬가지 신세가 되니, 부디 직접 확인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저도 마찬가지 생각이예요. 탑주. 케틸 공작이 일부러 담당관을 죽였다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말을 마친 에블린을 향해 시종 한 명이 무언가를 갖다 바쳤다.

레이안 신의 십자가가 찍힌 밀봉 편지다. 에블린은 그 내용을 확인하고 미소를 지었다.

“교황성하께서도 대장벽의 군세에 대해 과도한 의심은 삼가 달라는 청을 보내셨네요. 이래서야 제가 여러분들의 의견을 따르려고 해도 안 되겠는걸요?”

펜잔스에 이어 교황까지 케틸 공작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다.

다른 귀족들과 달리 그들은 대장벽 쪽이 무슨 수를 쓰든 그다지 신경쓸 이유가 없으니 당연한 조처였다.

실제로 케틸 공작이 성공적으로 마족들을 막아온 건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이쯤 되니 귀족들의 의견도 상당히 세가 꺾일밖에 없었다. 결국 최종적인 의견은 에블린의 아래로 각 귀족들이 모두 함께하는 시찰이 되었다.

소냐도 마침 그 편이 고향이니 아르낙스와 함께 행렬에 올랐다.

아직 귀족들은 묘인족에 익숙하지 않으니 아티팩트를 끼긴 했지만, 그것도 이제 거의 끝이었다.

“그런데 발린이랑 레벤은 어디 있는 걸까요? 소냐.”

“나도 모르겠...습니다냐. 에블린, 아니 폐하..니야옹.”

대답하던 소냐가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배배꼬았다.

백마 여덟 마리가 끄는 황제의 마차 안, 에블린과 소냐는 양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푸후훗! 너무 그러실 필요 없어요. 소냐 양은 제가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이니까. 이제 와서 존칭을 받으면 오히려 어색하다고요.”

“하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고 들었다냐. 안 그러면 스승님께 폐가 된다고...”

소냐는 시무룩한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귀족들에 의해 연일 오르내리는 게 케틸 공작에 대한 이야기다.

겉은 쾌활해도 꽤나 속으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걱정 마세요. 펜잔스 님도 교황성하도 괜찮다고 하셨잖아요? 저도 소냐의 스승님이라면 믿어요.”

“고맙다냐. 아니,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냐...아우우우.”

우물쭈물 대답하던 소냐가 얼굴이 홍당무가 된 양 손을 모았다.

20년 평생을 대장벽에서 자유분방하게 지내 온 그녀에게 이런 예법은 너무 어려웠던 것이다.

에블린은 그 모습을 혼내는 대신 깔깔 웃기만 했다.

“그러지 마시래두. 소냐는 제 친구라고요. 만약 아니었다면 진작 벌을 내렸을 거예요. 이렇게.”

말을 마친 에블린이 가볍게 소냐의 고양이귀를 잡아당겼다.

“꺅!”

화들짝 놀라 뿌리치는 소냐. 그녀는 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발린은 어디 갔길래 안 오는 거다냐. 레벤 대신관님도 그렇고. 거짓말쟁이다냐.”

“그러게요. 어디 간다 말씀도 없으셨는데...사랑의 도피라도 한 걸까요.”

에블린은 잠깐 머리에 그 모습을 그려보고선 이내 픽 웃었다.

“그럴 리가 없지만요.”

“하긴 발린은 레벤 대신관님 많이 싫어하는 것 같다냐. 맨날 붙기만 하면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냐.”

“아직 더 배우셔야겠네요. 소냐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소냐, 에블린은 피식 웃으며 한번 더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둘이 알 리 없었다. 실제 발린과 레벤이 둘이서 먼저 남쪽에 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작품 후기 ============================

두 번째 편까지는 제가 약속드렸지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작품 후기까지 오신 독자분들.

혹여 제가 내일 0시에 나타나더라도 놀라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많이 부족한 걸 알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틀린 부분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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