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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찰
처음 둘의 모습을 보자마자 일순 고개가 절로 갸웃거렸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래트로스 후작은 밖으로 나가려 하고 케틸 공작은 그걸 막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발린은 축지법을 멈춘 뒤 인파 사이를 헤치며 움직였다.
성문 근처에 도달하자 비로소 소리가 제대로 들리기 시작했다.
“놓으십시요. 공작님! 전진요새? 거기가 위험하다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 내 당장 가서 퇴거명령을 내릴 것이니!”
“그것만은 안 되오. 정말로 안 되오.”
전진요새라는 말을 엿들은 발린의 눈이 번득였다.
짐작이 맞다면 지금 래트로스 후작은 케틸 공작의 전진요새로 가려 하고 있었다.
“그 곳은 위험하다고 말했잖습니까! 담당관! 제발 한 번만 고려해 주시오!”
“위험하다고요? 하하, 어디가 말입니까? 설마 당신이 몰래 빼돌린 물자들이 없는 빈 창고가 위험한 건 아니겠지요.”
“아니, 그건 정말로 전투중에...!!”
항변하는 케틸 공작에게 래트로스 후작은 씨익 웃으며 손에 쥔 문서를 흔들어 보였다.
“이 장부엔 분명 곡물 천 포대와 창 삼천 자루, 화살 십만 발이 한달 전 그 쪽으로 나와 있는데, 내 직접 그 모습을 봐야겠습니다. 마족의 땅에 성채를 세우다니, 그게 말이 되는 행동이요?”
“정 갈 거면 차라리 내가 기사단을 이끌고 따라가겠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담당관. 그러지 마십시요.”
“외딴 장소에서는 오히려 당신이 마족들보다 더 무섭지요. 길잡이나 두엇 붙여 주십시요. 무력은 이들이 담당할 테니.”
말을 마친 래트로스 후작이 손짓했다. 명을 받은 뒤편의 기사들이 일제히 창을 들어 흔들었다.
“차하!”
“와아아아!!”
그들의 갑옷과 무기에는 마나선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최소한 세 개 이상의 아티팩트를 장비한 게 틀림없었다.
주변에 몰린 사람들이 조용해진 가운데 래트로스 후작이 입을 열었다..
“제게는 믿음직스러운 수하들이 있습니다. 내 기사단 중에서도 특별히 뽑은 오십 명의 기사들이지요. 익스퍼트 최상급이 두 명, 익스퍼트 상급이 열 명이나 되는. 게다가 아티팩트까지 든든히 갖췄어요. 이 정도면 마족들이 얼마가 오든 두렵지 않습니다. 자, 이제 문을 여시지요. 그 전진요새에 가서 이 장부가 맞는지 확인할 것이니.”
듣고 있던 발린은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얼마 전 사냥에 참가했을 때 케틸 공작이 뽑은 기사들은 전원 익스퍼트 상급과 최상급이었다.
그만한 실력자들도 마족들의 공세를 버텨내기 힘들어했다. 저 정도의 기사들로는 나간 지 세 시간도 못 되어 전멸할 게 틀림없었다.
‘이런.’
발린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기껏 래스트로 후작을 없애려 황도에 갔다 왔더니 알아서 죽어준다고 난리를 피다니.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내버려두고 싶으나, 그는 마족이 아니라 뱀파이어들에게 죽어야 했다.
‘케틸 공작의 관할영역에서 죽게 놔둘 순 없지.’
만약 래트로스 후작이 마족에게 죽는다면 중앙귀족들은 이때다 하고 난리칠 것이다.
설령 황제라 해도 케틸 공작을 보호해줄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일단 이 곳을 떠난 뒤 없애면 그 말도 설득력을 잃는다.
오는 길에서 죽어버리면 책임을 지우려고 해도 건덕지가 없게 되는 것이다.
“아, 그리고 혹시 이 중에 인바르라는 마법사, 그리고 샤를로트라는 여신관이 있습니까? 그 둘이라면 안심하고 길잡이를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요. 부탁드리겠습니다. 공작님.”
“그들은 아직 외부인인지라...”
말끝을 흐리는 케틸 공작에게 래스트로 후작은 입꼬리를 올리며 질문했다.
“그럼 케틸 공작님은 설마 그런 중요한 행사에 군 소속이 아닌 외부인을 끌어들였다는 겁니까? 내 미리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인바르는 파이오니어 왕국 마법사요. 신관인 샤를로트와는 달리 빼도박도 못하는 외국인이지. 이건 어떻게 설명하실 건지?”
“용병입니다. 후작님.”
막 후작이 꼬투리를 잡은 순간 결국 참지 못한 발린이 입을 열었다.
그 편으로 몸을 돌린 후작의 눈에 첫날 본 청년이 보였다.
‘마침 잘 됐군. 저들이라면 전진요새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겠지.’
대장벽의 군인도 아니고, 경험도 있으니 그야말로 완벽한 길잡이다.
후작은 반색하며 미리 확인한 청년의 이름을 읊었다.
“인바르입니다.”
“아, 그런가. 얼마 전 다녀온 사냥의 인원이 너와...”
“샤를로트예요.”
“그래, 너희 둘. 방금 전에 용병이라 들은 것 같은데, 그럼 돈을 받고 같이 움직인 건가?”
발린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몰래 따라붙어 지켜보려 했으나 이러면 그럴 것도 없었다.
“예.”
“그럼 한 번 더 부탁하지. 보상이라면 넘치도록 줄 테니 우리를 전진요새까지 안내하도록.”
“그러지요.”
발린은 가볍게 수긍한 뒤 준비할 시간을 달라 덧붙였다.
당장 따라서 움직일 수는 없으니 지극히 당연한 일. 후작은 부탁을 승낙한 후 잠시 말머리를 돌렸다.
덕분에 케틸 공작은 더 이상의 추궁을 피할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온 둘이 짐을 싸는 사이 케틸 공작이 찾아왔다.
“미안하네. 설마 이런 식으로 발목을 붙잡을 줄은...한 번 쓸어버렸다지만 놈들의 기세는 여전해. 혹시 무슨 일이 있거든 주저하지 말고 도망쳐오게나.”
진중히 조언하는 그의 표정은 딱딱히 굳어 있었다.
그도 래트로스 후작이 절벽을 향해 뛰어드는 꼴이란 걸 알고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지요. 제가 원해서 간 일인데.”
발린은 가볍게 대답해준 뒤 등짐을 챙겼다.
영원묘의 포탈은 미리 닫아두었으니 애먼 희생자가 생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시 들어가려면 황궁으로 가야 하지만 그 정도야 참을 수 있었다.
“허 참, 이젠 스카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걸 물어야 할 판이로군.”
몇 번이고 고갤 숙이던 케틸 공작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혹 돌아온다면 나만이 아는 휴양지를 가르쳐 주지. 남방대산맥 안쪽에 결계를 쳐 둬 몬스터의 침입을 막았는데, 이 곳이라면 마나도 충만하니 자네도 만족할 거야. 듣자하니 예전에 마나스팟을 찾는다고 했으니. 안 그런가?”
이건 또 뜻밖의 이야기였다.
결계에 감춰져 있는 지역이 있다면 그 곳은 당연히 눈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 실-레논이 죽었다면 지금까지의 조사가 말짱 헛게 되는 셈이다. 발린은 눈을 번쩍이며 말했다.
“그래주신다면 영광입니다.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살아 돌아온다면 말이죠.”
“그래, 살아 돌아온다면 내 반드시...하아.”
케틸 공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날이 창창한 둘을 사지로 보내는 게 못내 양심에 찔리는 모양이었다.
공작을 한번 더 위로한 발린과 레벤은 나란히 정찰대 행렬에 합류했다.
**
전진요새와 대장벽 사이의 실제적인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단순 거리상으로는 대략 120km 정도.
걸어서는 이틀에서 사흘, 전력으로 말을 달린다면 세네 시간만에도 갈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그건 아무 몬스터도 없을 때의 이야기다.
이 곳은 검은 대지, 마족과 어둠의 마나가 넘실거리는 땅이었다.
쉴새없이 달려드는 몬스터를 감안한다면, 이 길을 제시간에 주파한다는 건 무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특히 실력이 일천한 후작가의 기사들은 더욱 그랬다.
“크하아아악!!”
“티모 경! 으헉!”
땅 밑에서 튀어나온 촉수에 기사 한 명이 그대로 꼬치가 되었다.
또다시 마족의 습격이 시작된 것이다.
티모라 불린 기사를 도우려던 다른 기사가 날아드는 촉수를 막는다.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었다. 점차 호흡이 어지러워지던 다른 기사도 이내 촉수에 몸이 갈려나가야 했다.
“말도 안 되는...”
아비규환의 한복판에서 후작이 눈을 크게 뜬 채 중얼거렸다.
당당히 나올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깨져나갈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호위기사들의 창에는 썬더 오라나 파이어 오라가 인챈트되어 파괴력을 증폭시켰다.
그뿐이랴, 갑옷에는 수성에나 쓰는 배리어 마법을, 투구엔 감각 증폭을 걸어 실력을 더욱 늘렸다.
이 정도면 근위기사단을 제외하고 최고 수준의 아티팩트 무장이다.
아무 아티팩트도 없이 싸워온 대장벽 기사와는 당연히 급을 달리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게 불과 세 시간 전. 그리고 지금 후작은 눈앞에서 흩날리는 기사들의 육편을 보고 있었다.
“츄릅! 츄르릅!”
말과 기사를 합친 것만큼 큰 검은 도마뱀이 혀를 뻗어 기사들 사이를 훑었다.
하늘에서 날고 있던 하피들은 빈틈을 보일 때마다 기사들을 낚아올려 찢어발긴다.
가지각색 방법으로 공격해오는 마족들 앞에서 오십 명의 기사는 순식간에 태반이 전멸했다.
“젠장, 이거 곤란한데.”
아이스 소드를 만들어 싸우던 발린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마족들의 습격은 거셌다. 제 실력을 낸다면야 간단하지만, 문제는 후작의 시선이었다.
“하앗!”
저만치서 기합을 내지른 레벤이 하피 한 마리를 걷어찼다.
대장벽의 신관들에게서 배운 무술이 잘 소화됐는지, 그녀의 품새는 한층 더 안정적이면서도 강력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배운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그런 고도의 술을 소화해내다니, 드래곤의 천재성은 알아줘야 해.’
“인바르!”
잠깐 생각에 잠긴 발린에게 다가온 레벤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안 돼. 제 실력을 낸다면 모를까...”
“역시 그런가?”
발린은 다시 한 번 주변을 훑었다.
이미 기사들의 방진은 무너져 있었다. 조금만 더 지체한다면 후작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피 냄새를 맡은 몬스터들이 더욱 많이 이리로 몰리고 있다는 점이다.
결정을 내린 발린이 천천히 래트로스 후작에게로 다가갔다.
한편 래트로스 후작은 파들파들 떨리는 눈으로 새로 나타난 몬스터들을 노려봤다.
“이, 이익! 말도 안 된다! 이런 데서 전진요새라니! 케틸 공작이 내게 거짓말을 한 것이야! 나를 매장시키려고 감히 이딴 짓거리를!!!”
내용을 들어보면 적반하장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몬스터들은 그걸 들어주는 대신 군침이 고인 혀를 날름거리기만 했다.
새 몬스터들이 나타나자 공격해오던 놈들이 일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먹이를 노리다 죽는 걸 경계한 탓이다.
그 광경을 보던 후작이 잠시 긴장을 푼 순간이었다.
쐐애액!
그의 옆구리로 날아든 하피 한 마리가 스쳐지나갔다.
만약 발린이 아이스볼트로 후작을 밀치지 않았다면 그대로 발톱에 걸려 하늘로 올라갔으리라.
“달려요!”
그대로 후작을 업은 발린은 돌아볼 것도 없이 축지법을 썼다.
본신의 힘을 드러낼 순 없으니 지금은 도망이 최선이었다.
기회만 보고 있던 레벤이 그 뒤를 따랐다. 생존자는 이들 셋! 나머지 인원들은 이미 말까지 시체가 되어야 했다.
간신히 몬스터들의 추적을 따돌린 발린은 물의 마나를 이용해 셋의 피를 씻어냈다.
“이제 피냄새를 맡고 오는 일은 없을 겁니다.”
“네놈들...네놈들도 한 패구나. 애시당초 나를 매장시키려는 수작질을...!!”
물에 적셔지자 정신을 차린 후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비싼 돈을 들여 키워낸 기사 50명이 모조리 전멸했다.
평상시였다면 냉철히 손해를 분석했겠으나, 지금은 그럴 여유마저 깨져 있었다.
분노는 자연스레 케틸 공작에게로 향했다. 후작은 으르렁대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 공작 놈이 역시 날을 드러낸 거야. 감히 담당 시찰관인 이 몸을 제거할 욕심을 품고...용서 못한다. 공작 작위는 물론, 목숨도 부지하지 못하게 해 주지. 거기 둘! 내 증인이 되어라, 그리한다면 솔직히 증언한 대가로 금을...컥!”
눈을 희번덕대던 후작의 목이 뒤로 꺾였다. 참다못한 발린이 결국 주먹으로 턱주가리를 날린 탓이다.
뒤로 날아간 후작이 말을 잇지 못하고 어버버거렸다.
감히 용병 따위가 자신에게 주먹질을 하다니! 믿을 수 없었다.
“이, 이이이이!! 가아미 펴미 요벼 주제헤!!”
이빨 몇 개가 떨어져나간 후작 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거기에 선 발린이 이를 갈아붙이며 말했다.
“미안한데 나란 용병은 성질이 좀 더러워서 네놈 떠드는 걸 못 봐주겠거든? 의뢰는 의뢰이니 전진요새까진 살려서 데리고 가 줄게. 근데 목숨만 살린단 거지, 그 외는 보장 못하겠다. 알겠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한 후작의 얼굴이 진흙색으로 변했다.
그 위로 평민 용병이 된 발린의 맨주먹이 부위를 가리지 않고 내리꽂혔다.
============================ 작품 후기 ============================
오늘 세 편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쓰는 데 힘들었고, 마음에 안 드는군요.
한쪽 팔에 근육통이 있어 집중이 안 되다 보니...
이번 작품 후기까지 따라오신 독자분들께는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걱정 마십시요 독자 여러분. 한잠 자면 나을 상처이니, 오늘 밤 사이다 공급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럼 예정대로 내일 뵙도록 하겠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