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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족 사냥
검은 대지는 대장벽과 남방대산맥 남쪽에 있는 마족의 땅을 칭하는 말이다.
그 넓이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예상하기로는 다들 카딤 제국과 똑같거나 약간 더 넓다고 했다.
정확히 측정해본 것은 아니었다. 그럴 기술도 없을 뿐더러 마족이 우글거리는 곳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다만 옛 문헌과 뱃사람들의 증언을 한데 모은 결과가 이것이었다.
카딤 제국의 땅이라면 현 세계의 4분지 1에서 3분지 1 사이.
노스트라 제국을 포함시켜도 5분의 1까지밖에 떨어지지 않는 크기다.
그만큼 넓은 땅이 마족들의 어둠에 의해 잠식된 것이다.
이들이 아무리 한 달 동안 훑어도 그 땅을 정화할 수는 없었다.
하물며 이번 사냥은 1주일밖에 되지 않는다. 총 시간이 4분의 1이하로 줄었으니 깊이 들어가는 건 바라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말들의 등에 쌓인 전리품은 상상을 초월했다.
발린은 감탄을 토해냈다.
“이게 다?”
“더 가져갈 수도 있었지만 하는 수 없지.”
앞서 가던 기사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의 말도 등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휘청대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평소 성과랑 비슷한 수준이다. 그렇게 말한 기사가 두툼한 포대를 슥 쓸어내렸다.
포대 안에는 온갖 마족의 시체 부위, 그리고 검은 대지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약초가 있었다.
저것들이 전부 보급품과 급여로 돌아온다. 하나하나를 귀중하게 다룰 수밖에 없었다.
“검은 대지도 생각보다 위험하진 않네요.”
마주 말을 몰던 발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일종의 반어법이었다.
겨우 일주일 동안이었으나 행렬은 그 동안 천 번에 가까운 전투를 치뤘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잠시라도 방심할 수 없었다. 긴장을 푼 순간 바로 마족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하면 전진요새로 움직이는 첫 날은 거의 애교 수준이었다.
“허어. 그러게나 말이다.”
말뜻을 알아들은 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답했다.
“그래도 너랑 샤를로트 덕분에 모두가 살 수 있었어. 정말 기적같은 일이야. 고맙다. 인바르.”
다른 때였다면 분명 사상자가 나왔을 격렬한 전투들이 연이어 이어졌다.
실제로 싸움을 겪으면서 부상자가 속출했고, 몇몇은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상태였다.
아무리 소드마스터 최상급의 케틸 공작이라도 상처는 치료할 수 없다.
그때 움직인 것이 발린과 레벤이었다.
발린이 물의 마나로 상처를 씻기고, 레벤이 그 자리에 신성력을 불어넣어 치료한다.
어지간한 절단상도 단숨에 치료하는 신성력 덕에 기사들은 죽지만 않으면 금방 완치될 수 있었다.
마침 약간의 운도 따라준 덕분에 결과는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전사자 0명! 부상자 0명! 그러면서도 얻은 전리품은 한 달치에 뒤지지 않는다.
행렬 전체가 기뻐할만도 했다.
“첫 날부터 주구장창 듣던 얘긴데요. 뭘.”
정작 그 성과의 주역인 발린은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일주일 동안 칭찬만 들어서인가. 어느새 날 서 있던 경계도 상당부분 누그러져 있었다.
“그래서, 돌아가면 정말 고향으로 갈 거냐?”
“네.”
발린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망설임이 약간 생기긴 했으나 다른 곳에서 할 일이 많은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이 쪽의 갈등도 해결해야 하는데...그건 장기적으로 봐도 되는 문제고.’
어차피 대장벽의 군세는 마왕군을 막기 위한 전력이다.
막을 마왕군이 사라진다면 자연스레 제국으로 돌아갈 테고, 그렇게 되면 중앙 귀족들 중 누구도 이들을 무시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결국 궁극적으로는 모두 마왕군과 이어져 있는 셈이다. 이를 깨달은 발린은 입 안에서 혀를 굴렸다.
어째선지 자신의 일은 모조리 마왕군과 엮여 있는 느낌이었다.
‘마왕을 쓰러뜨리면 그 다음엔 무엇을 해야 하나...’
마법사로서 할 일이야 많았다.
회귀를 통해 전생의 지식을 가져왔다고는 하나, 그 이상으로 새로운 길들을 발견한 덕분이다.
목걸이가 준 고유 능력들을 발전시키는 건 물론, 영원묘에서도 계속해서 수행을 더 할 수 있을지 몰랐다.
스스로의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
굳이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모든 무인이 바라마지않는 결말이다.
게다가 마왕군 세력의 뒤처리도 해야 했다.
모르긴 모르겠지만 마왕을 무찌른 뒤에도 문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공통의 적을 두고 한 데 모인 각국이 다시금 흩어질 테니 말이다.
서로를 모른다면 두려움 때문에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연합을 통해 서로를 알았으니, 그만큼 검을 휘두르는 데 망설임이 없어질 것이다.
이것을 막는 것도 발린의 일이었다. 이미 그냥 빠져나가기엔 그가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컸다.
‘어떻게 된 게 그 후의 일이 더 힘들 거 같지?’
왠지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느낌. 하지만 이것이 회귀에 대한 패널티라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었다.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자 대장벽의 모두가 깜짝 놀랐다.
우선 사상자는커녕 부상자도 없이 모두가 멀쩡하다는 것부터가 기적 같은 일이다.
거기다 일주일간의 사냥에서 얻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양의 전리품들까지!
“이게 무슨...”
환호라기보다 경악이 깃든 어조로 말하는 기사들.
그들에게 케틸 공작은 씨익 웃으며 답했다.
“바로 저 친구들 덕분이지. 저 둘 덕분에 사냥이 두 배는 더 쉬웠어! 자, 오늘은 조금 쉬고 내일부터 준비하도록 하지.”
공작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발린은 몰래 빠져나가려 했다.
사냥도 끝났겠다. 슬슬 빠져서 실-레논의 시신을 찾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케틸 공작에 의해 철저히 미연에 방지되었다.
테네스 후작 정도 수준의 인물이라면 모를까, 케틸 공작은 최상급의 소드마스터다.
레벤처럼 그랜드마스터가 되지 않는 이상은 별수없었다.
축하연은 사냥에 나선 기사단 인원들을 주축으로 소박하게 치뤄졌다.
우선 교구 신전에 가서 레이안 신에게 감사의 의식을 치르고, 그 다음 사령부에서 차려진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
물론 그 의식엔 사냥을 도와준 외부인, 발린과 레벤도 마찬가지로 참가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샤를로트 양도 다른 교구의 신전에 속해 있었겠지? 어느 교구에 속해 있었나?”
“물론 파이오니어 왕국의 신전이죠. 지방에 있어서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요.”
공작의 질문에 레벤은 당연한 것 아니냐며 대답했다.
발린과 레벤은 소꿉친구 사이라는 설정이었으니 고향도 비슷하게 맞춘 것이다.
하지만 대답을 들은 공작은 끄덕이는 대신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역시 그렇겠지. 그럼 미리 말해두겠네. 여기 신관들이 조금 특이할지도 몰라. 그래도 다들 알고보면 마음 따뜻한 사람들이니 너무 놀라진 말게나.”
“그런 말 들으니 더욱 궁금한걸요.”
대답하는 레벤의 옆에서 발린은 애써 눈앞만을 바라봤다.
하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은 어쩔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방금 말을 하던 케틸 공작이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기색이었기 때문이다.
‘케틸 공작은 나랑 레벤을 스카웃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으니, 지금 가는 신전에 그 목적에 안 좋은 무언가가 있는 셈이군.’
말을 타고 가던 발린의 고개가 그 순간 갸웃거렸다.
다른 데라면 몰라도 레이안 교단의 신전이다.
각 마탑처럼 서로 적대하는 것도 아닐 텐데, 무엇 때문에 공작이 저러는지 몇 번 생각해도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역시 환자들이 과도하게 몰려 있는 상태밖에 없으려나?’
발린은 머릿속으로 전생에서 봤던 치료소를 떠올렸다.
치료소래봤자 전쟁터 후방에 임시로 만들어 둔 진료소 같은 것이다.
침상은 부족하고, 병사나 기사들은 일 초마다 수십 명씩 실려온다.
신관들은 대부분 싸우러 나갔기에 남은 것은 견습신관 여럿과 정식신관 한 명뿐. 그들만으로는 24시간 일해도 환자들을 모두 치료할 수 없었다.
덕분에 발린의 기억 속에서 치료소나 신전은 늘 주변에 환자들이 가득한 것뿐이었다.
현생의 시간이 길어지며 어느 정도 나아지긴 했지만, 생각이 그 편으로 흘러가니 자연스레 다시 떠올랐다.
‘전생의 신전들만큼은 아니겠지만 이 곳도 대장벽이니 분명 그런 게 있겠지.’
발린은 미리 숨을 들이마셨다. 적나라한 살덩이와 피는 이미 익숙해졌으나, 여기선 그 이상의 것들을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샤를로트.”
“응?”
발린이 부르자 앞서 가던 레벤은 금방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왼뺨을 한 손으로 가린 채였다.
무어라 말하고 싶은 마음이 치밀어올랐으나, 지금은 그보다 우선할 게 있었다.
“마음 굳게 먹어. 생각보다 더 끔찍한 걸 볼 수도 있으니까.”
전쟁터의 참상은 직접 보지 않으면 절대 생생히 느낄 수 없다.
아무리 많은 마족을 없애 왔어도 마찬가지. 방금의 말에는 그 깨달음이 전부 담겨 있었다.
“...응.”
잠시 눈을 깜박이던 레벤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지한 어조로 말하는 발린에게서 무게감이 느껴졌다.
둘이 말을 나누는 사이 행렬의 선두 부분이 대장벽의 신전에 도착했다.
대장벽 교구 신전은 다른 곳에 비해 세 배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직사각형 건물이었다.
크지만 화려한 장식은 일절 없는, 철저히 실용적인 모습.
흘긋 둘러보던 레벤이 감탄했다.
“여기는 건물이 엄청 크네요? 교황청도 이렇게 크진 않은 것 같은데.”
“교황청? 교황청에 가본 적 있나?”
케틸 공작의 물음에 레벤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부분이었으나 공작은 의외로 별 말 하지 않았다.
하기야 그녀 정도의 신관이라면 교황청에서 안 부른 게 더 이상했다.
아마 교황청에서 서임을 한 번 받고 자유 신관으로서 돌아다니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한 케틸 공작이 다시금 경고했다.
“아까 말했긴 하지만 한번 더 충고하겠네. 이 곳은 조금 특이하니까 너무...”
“오셨습니까. 공작님. 사냥에서 승리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신전 안에서 나온 사람이 케틸 공작에게 인사를 건넸다.
대략적인 모습은 평범한 곱슬머리의 중년남자다, 얼굴만 보면 황실 도서관 사서라도 될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아래를 본 발린은 경악에 휩싸였다. 그건 레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늘도 자네 근육은 지치지 않았군 그래, 한데 벌써부터 땀을 내면 어떡하나.”
“준비운동입니다. 공작님.”
대답을 마친 곱슬머리 남자는 놀랍게도 상반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도 신관이라는 듯 흰 바지를 입긴 했는데, 땀과 먼지에 푹 절은 탓에 오히려 더욱 외설스럽게 보였다.
“꺅.”
레벤은 짧은 한 마디로 감상을 표현했다.
격투가나 용병들도 저렇게 파격적인 모습으로 돌아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던 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피와 고름이 가득한 신전, 산 채로 썩어가는 사람들을 예상했던 그에게 이 정도는 놀랄 것도 아니었다.
‘하기야 일이 많고, 신성력 치료도 많이 해야 하니 자연스레 체력이 붙을 수밖에 없었겠지.’
레이안 신은 늘 신도들의 몸이 상처입지 않는 선에서 신성력을 내린다.
그렇기에 신성력의 경지를 높이기 위해선 개인의 수련이 필수적인 것이다.
이 곳 교구의 신관들은 그 점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당연히 그 반동으로 체력이 붙을 테고, 그것으로 더 많은 부상자를 치료해 왔을 터.
저 근육도 분명 그 행위의 결과물일 것이다. 전혀 부끄러워하거나 놀랄 만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어떤 메달보다 더 아름다운 훈장 같은 것이리라.
“들어오시죠. 연회가 준비되는 중이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곱슬머리 신관이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 뒤를 따라 사냥 행렬이 천천히 신전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의 첫 편입니다.
그나저나 던전앤파이터 여프리스트 일러스트를 우연히 접하게 되었는데, 그게 정말로 레벤과 비슷하게 생겼더군요.
졸지에 대량의 캐릭터 그림을 사용하게 될 수도...흠흠!
농담입니다. 성실연재를 하겠사오니 가기 전에 추천 하나 주시고 가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