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0 / 0264 ----------------------------------------------
대장벽 탐방
목소리를 높인 것은 보자마자 고릴라를 연상시키는 한 청년이었다.
중갑옷을 입은 걸로 보아 제국군 기사인 것 같은데, 우선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여기 고기 파이랑 상추 샐러드 하나씩.”
“예이.”
요리를 시킨 발린은 고릴라 근처의 빈 식탁에 앉았다.
그동안 고릴라는 마주 앉은 사람들을 향해 계속해서 울분을 토해내고 있었다.
“망할 놈들! 우리가 제 놈들을 위해 얼마나 죽을 땀을 빼는데, 뭐? 영웅 발린 공이 삼공작을 치는 동안 뭘 했냐고? 마족 잡았다! 썅것들아! 젠장할!”
“진정해. 이제 와서 뭘 새삼스럽게. 자자, 한잔 쭉 마셔.”
맞은편의 다른 기사가 술대접을 건넨다. 그러나 그건 화를 가라앉히기는커녕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다.
“뭘 새삼스레라고? 젠장할! 제 놈들도 보급품 없으면 금방 나가리나는 걸 아니까 그러는데 말야! 그러다 정말 우리가 마족들한테 나가리나봐야 정신 차릴걸!”
탕!
대접이 탁자와 부딪히며 쩍 하고 금이 갔다. 내용물이 비어 있어 망정이지, 하마터면 좋지 않은 꼴을 볼 뻔했다.
발린이 숨을 죽이는 사이 고릴라가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술대접이 아닌 술병째였다.
“크으!”
화가 어지간히 쌓였는지 고릴라는 이내 불콰하게 취해 술과 음식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른 기사들이 모여 떠드는 덕분에 발린은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대장벽이 황도 쪽 귀족들이랑 융화되지 않은 건 알고 있었지만...그래도 이건 좀 심한걸?’
대략적인 정황을 들은 발린의 총평!
그 정도로 이 곳과 중심부 귀족들간의 갈등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가장 겉으로 대두되는 건 역시 보급 문제다.
마족들의 공격은 갈수록 거세지는데 이에 반해 중앙의 지원은 점점 열악해져 간다는 것이다.
난민을 정착시키고 마족들의 신체 부위를 팔아 버텨왔으나, 그것도 슬슬 한계가 찾아오고 있었다.
더욱 억울한 건 바로 중앙에서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밀리지 않기 위해 마을을 짓고 시체를 팔았더니, 그것을 불순한 움직임이라고 수군대는 것이다.
덕분에 케틸 공작은 물론, 여기 있는 제국군은 마족 고기나 먹어대는 야만인으로 찍혔다고 한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천 년 동안 아무 문제없이 잘 지켜 왔으니 이제 당연하게 여기는 거야.’
발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도 전생의 경험만 아니었으면 이 장벽이 결코 뚫릴 리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정말로 바보같은 짓이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백조도 물 속에서는 사력을 다해 발을 젓는다.
한데 겉모습만 보고 문제없는 걸로 착각해 더욱 혹사시킨다?
언젠간 반드시 그 폐해가 한꺼번에 터져나온다.
천 년 동안 평화에 익숙해진 카딤 제국의 대다수는 모르는 사실이었다.
“그 발린이란 놈도 똑같아! 누구는 뼈 빠지게 고생해도 아무도 안 알아주는데, 그 녀석은 황도에서 마족 좀 잡았다고 뭐? 영웅? 최강의 마법사? 웃기지 말라 그래! 그 녀석이 전쟁을 겪었어? 숙영을 한 번 해봤어!”
“옳소! 놈 때문에 욕 먹는 게 더 심해졌어! 쓰벌!”
사그라드나 했던 분기가 발린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다시 타올랐다.
꽤나 쌓인 게 많았던 듯 그 화력은 아까의 두 배, 혹은 그 이상이었다.
“들어보면 맨날 발린이 어쨌느니, 너희들은 그동안 뭐 했냐느니...아예 옆으로 돌아가는 걸 뭐 어쩌란 말이야! 우리가 신이야! 지금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아야지!”
“크하하하! 녀석은 마족 백 마리 정도만 보면 오줌을 질질 지릴걸? 하기야 전쟁을 겪어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아까는 그래도 참으라는 여론이 꽤나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가 한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발린이란 놈이 설친 것 때문에 자기들이 덤으로 욕먹게 됐다고 말이다.
사방에서 제 이름이 들리는 동안 당사자인 발린은 오로지 식사에만 열중했다.
결국 이들의 분노는 발린을 향한 게 아니었다. 그는 단지 기폭제일 뿐.
실제로는 자기들의 공로를 무시하고, 심지어는 폄하하기까지 하는 중앙 귀족들이 그 대상인 것이다.
발린도 그 사실을 알기에 화를 내지 않았다. 여기서 그래봤자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머릿속에 생기는 건 새로운 고민이다.
‘아무래도 대장벽의 군사들을 온존시키긴 어려울 것 같은데...이렇게 반감이 심한데 후퇴 명령을 내려봤자 듣지도 않을 테고. 나중에 싸울 때도 두고두고 문제로 남겠지.’
전생의 세계에서 이들은 최후의 한 명까지 여기서 맞서 싸우다 전멸한다.
그렇기에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이들은 더이상 충성스러운 제국의 방패가 아니었다.
푸대접과 천대에 지쳐, 금방이라도 칼을 돌릴 준비가 된 늑대였다.
***
“하아.”
식사를 마친 뒤 돌아온 영원묘에서 명상을 하던 발린.
그는 계속해서 떠오르는 고민거리에 이내 진저리치며 자세를 풀었다.
-요사이 고민이 많은가 보군, 안 그런가?
지켜보고 있던 카투아가 궁금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자신은 직접 나갈 수 없으니 발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어려운 일이야.”
발린은 머릿속으로 아까 전의 불편한 식사를 떠올렸다.
식당에서 일제히 발린을 성토하던 사람들은 얼마 후 옹호파와 비판파로 의견이 나뉘었다.
애시당초 흥분해 있었던 사람들이다. 거기서 서로 갈라지기까지 하니 그 다음은 뻔했다.
말다툼은 점점 격해졌고, 끝내는 주먹다짐 직전까지 나아갔다.
마침 식사를 다 마친 참이라 나왔다만, 아마 안에선 틀림없이 한바탕 싸움이 일어났을 것이다.
‘마음같아서는 당장 에블린과 미나르바 백작에게 말하고 싶지만...’
만약 그 둘이 이 사실을 안다면 절대 가만히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에블린이 즉위하며 기치로 내걸은 게 민생의 안정, 그리고 모두의 화합이다.
그걸 정면으로 어긴 귀족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자비없는 법의 철퇴로 다스릴 게 분명했다.
하지만 발린이 확인한 바에 의하면 그건 오히려 악수가 될 수 있었다.
단순 매로 다스리기엔 둘 사이의 간격이 너무 깊었다. 어느 한 편을 들면 다른 쪽이 터져나올 것이다.
진퇴양난 중의 진퇴양난! 둘 모두 필요한 전력이니만큼 어느 한 쪽을 버릴 수는 없었다.
‘결국 답은 중앙귀족들 스스로 편견을 버리는 건데...’
명분은 대장벽 측에 있었다. 뭐니뭐니해도 그들은 천 년 동안 마왕군을 철통같이 막아 왔으니 말이다.
그들에게 더 이상 의무를 지울 순 없다. 자연히 공략해야 할 쪽은 중앙 귀족이 되었다.
‘실-레논의 시체도 찾아야 하고, 아티팩트 제작에다가 이 문제까지...할 일이 태산 같군.’
발린은 저도 모르게 양손을 머리로 옮겼다.
아마 카투아가 말리지 않았으면 그대로 한 움큼 쥐어뜯었을지도 몰랐다.
“진정하자, 진정.”
한숨을 내쉬며 목걸이에 마나를 불어넣자 익숙한 상태창들이 떴다.
상태창을 보고 분석하는 건 요사이 발린이 기분을 가라앉히는 방법 중 하나였다.
밤하늘 별처럼 떠오르는 수많은 능력들. 그 중 변화가 있는 것만 나열하자면 이러했다.
[고유 능력]
[등급 : 레전드]
[레벨 : 3]
[제목 : 만류의 검(검법)]
[내용 : 균형이 되는 솔다인 검법을 기반으로, 전생에 경험했던 수많은 전투경험을 녹여넣은 특별한 검법.
수많은 영웅들의 영향이 엿보이나,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검왕 팔리아스의 흔적이다.]
[성취도 : 80/100%(레벨3)]
[일반 능력]
[등급 : 매직]
[레벨 : 4]
[제목 : 잠행]
[내용 : 기척을 죽이고 남에게 들키지 않게 움직입니다.]
[성취도 : 8/100%]
[일반 능력]
[등급 : 유니크]
[레벨 : 1]
[제목 : 방위 인식]
[내용 : 주변의 모든 범위를 형체로서 감지 가능합니다.]
[성취도 : 54/100%]
[일반 능력]
[등급 : 레전드]
[레벨 : 1]
[제목 : 아케인 매직]
[내용 : 에테르를 이용한 비전 마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클래스 : 2클래스]
[성취도 : 4/100%]
[사용가능한 마법의 종류]
(1클래스)
아케인 샷 : 에테르로 만든 구체로 상대를 타격합니다.
아케인 라이트 : 에테르로 만든 구체를 이용해 주변 시야를 밝힙니다. 은신 마법, 영체, 허상까지 모두 판별할 수 있습니다.
아케인 아머 : 에테르로 몸을 둘러 갑옷을 만듭니다.
아케인 서몬 : 에테르를 이용해 정령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아케인 프로텍트 : 에테르의 보호장을 쳐 상대방의 공격을 한 번 막을 수 있습니다.
(2클래스)
아케인 볼트 : 에테르로 만든 작은 화살이 상대를 향해 쏘아집니다.
아케인 실드 : 에테르의 보호막을 만들어 그 한계치까지 상대방의 공격을 막을 수 있습니다.
상태창을 훑어본 발린은 이내 흐뭇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우선 눈여겨볼 것은 만류의 검. 그것은 이미 3레벨의 후반대까지 이르러 있었다.
비록 지금은 정체되어 있으나, 그랜드마스터가 둘이나 있으니 조만간 다음 단계에 들어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편 잠행은 되는 대로 쓴 덕에 4레벨에 이르렀다. 2레벨 초반밖에 안 되는 추적과는 많은 차이를 벌린 지 오래다.
얼마 전 깨달은 유니크급 일반 능력인 방위 인식도 꽤나 성취도가 붙었다.
하지만 역시 특기할 것은 역시 2클래스에 오른 아케인 매직이었다.
기존의 마법과 이름은 비슷하나, 그 위력과 효용은 천지차이인 아케인 매직.
이건 전생에서 9클래스 마법을 개척할 때도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경지다.
정말이지, 일만 바쁘지 않았다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두했을 것이다.
“꾸준히 경지가 올라 줘서 다행인가...”
-성장이 멈추지 않는다니 축하할 일이로구나. 한데, 아까 고민하던 건 무슨 일인가.
“고민? 아. 그거...”
발린은 잠깐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그가 대답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어차피 카투아는 이 곳에 갇힌 정령. 남에게 이야기가 누설될 염려가 없다는 이럴 때 더없이 편리했다.
“조금 설명이 길어질 것 같은데. 실은...”
우선은 간단한 배경지식을 설명한 발린이 이내 대략적인 정황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카투아는 눈을 끔벅이며 대꾸했다.
-그렇군, 인간들 간의 갈등인가. 위대하신 분들께서 보신다면 코웃음치실 일이로다.
“그러게, 세상 사람들이 다 드래곤처럼 강하고 현명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마왕이 준동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발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결국 중요한 건 둘 사이에 공감대를 만드는 일이로군.
카투아의 혼잣말에 발린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지금껏 그가 해온 건 상대방을 속이고 함정으로 밀어넣는 귀계뿐.
공감대 형성이나 타협과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기에 이번 일을 어려워하고 있었는데, 카투아가 단번에 정확한 답을 제시해 준 셈이다.
“공감대?”
-그렇다. 공통의 적이든, 공통의 관심사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동질감. 서로를 이해하게 되면 아무리 인간들이라도 무엇이 옳은 길인진 금방 눈치채게 되겠지. 네가 느끼듯이 말이다.
“...그래. 공감대인가.”
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들으면 뜬구름 잡는 말이나, 좀 더 보니 속임수나 계략과 유사한 면이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이내 퉁명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결국 그 구체적인 내용이 없으니 별 소용이 없는데?”
-그것을 무엇으로 할 지는 인간, 네가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나도 알아.”
카투아의 말대로다. 이건 자신들의 문제지, 수호 정령의 문제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발린, 그 해답은 전혀 의외의 곳에서 나왔다.
“취임 기념으로 대장벽에 시찰을 갈까 하는데, 같이 가실 거죠?”
에블린의 가벼운 제안. 그 말을 들은 발린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아쉬운 표정을 짓는 에블린, 그녀는 알지 못했다. 설마 발린이 미리 그 쪽에서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말이다.
============================ 작품 후기 ============================
오늘의 세 번째 편이자 마지막 편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작품 후기까지 따라오신 독자분들. 덕분에 설날임에도 열심히 쓸 수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완결이 가깝다고 하니 슬퍼하는 독자분들 반응에 절로 기분이 들뜨는군요.
이 정도 분량까지 재미있게 봐 주셨다는 의미니까요.
정말이지, 은혜가 하늘에 닿습니다. 복 받을 거예요.
실은 제가 300~350화 사이를 완결로 잡고 있는데, 아시다시피 그 정도는 한 달이면...뭐, 그렇습니다.
검은 스타킹...에 대한 의견도 보이는군요.
물론 저도 검은 스타킹 좋아합니다. 정말이예요.
외전에 관해선 생각해둔 게 조금 있습니다. 재미있을지는 모르겠네요. 그걸 연출하는 입장으로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여하간, 여러분들. 설 연휴 잘 보내시기 바라며, 저는 2시간정도 잠을 자러 가보겠습니다.
내일 작품후기에서도 만나뵐 수 있길 바라며. 좋은 하루 되세요!
추천...가시기 전에 하나만 눌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