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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벽 탐방
대장벽에 대해서는 전생의 때부터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인류와 마족 간의 경계선! 카딤 제국의 최정예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장소!
동시에 세계 최강의 요새로 말이다.
무려 천 년간 마족들을 막아낸 인류의 요새!
비중이 어찌나 컸던지 대장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나오자 각국 왕성은 순식간에 패닉에 빠졌었다.
‘그 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리네. 도망가는 놈 천지에 심지어는 항복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소리까지 나오고.’
전생의 경험을 떠올린 발린이 한숨을 내쉬며 대장벽을 바라보았다.
거의 오십 미터는 될 법한 높이의 성벽은 천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굳건했다.
왠지 그 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날뛴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이 정도의 요새가 뚫렸다는 건 곧 적들이 그만큼 강력하다는 것이니 말이다.
“대장벽은 처음 보시오? 고개가 빙빙 돌아가는 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예에...처음인데, 정말 위용 하나만큼은 끝내주는군요.”
발린은 그렇게 말하며 입을 벌렸다.
지금 그가 느끼는 감탄은 절대 연기 따위가 아니었다.
그게 통한 듯 레인저들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럼 당연하지. 이 장벽이 누가 지키는 장벽인데!”
“온 세상을 지키는 방패요. 이 정도는 되어야 그 위용이 살지. 어디 내지 성들처럼 비리비리해서 쓰겠나!”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해대는 레인저들! 가만히 뒀다간 해가 지도록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비탈길에 설치된 도르래를 써서 내려갈 때도. 성벽 뒤의 잘 정비된 길을 이동할 때도 자랑은 계속됐다.
결국 참다 못한 사일런스 마법을 쓰려는 순간이었다.
“아저씨들! 아저씨들! 오늘은 뭐 좋은 거 없어요?”
“아자씨! 요기요기!”
놀랍게도 그들에게 다가온 건 열 살도 안 되어보이는 어린아이들이었다.
이곳이 어딘지를 감안한다면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거 미안하구나. 오늘은 길을 잃은 사람 한 명밖에 없단다. 향미료 풀은 내일 조금 더 찾아보마.”
“히이잉...”
실망한 아이 주변으로 다른 아이들이 어미닭을 좇는 병아리처럼 모여들었다.
레인저들이 아이를 달래는 사이 발린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장벽 반대편으로 멀찍이서 수많은 가옥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케틸 공작이 대장벽에서 별개의 나라 같은 걸 만들었다더니, 그게 사실이었나 보군.’
이해못할 바는 아니었다. 이 정도의 시설과 전력을 유지하려면 보급되는 군량만으로는 부족할 게 뻔했다.
이것은 케틸 공작이, 그리고 그 전임 사령관들이 내놓은 나름대로의 해결책이었다.
거기에 대해서 굳이 태클을 걸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저희 어디로 가는 겁니까?”
“아, 중앙사령부로 가고 있소. 일반적인 절차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걸음을 옮기던 발린의 물음에 레인저들은 그렇게 대답했다.
아마 신체검사라도 하려나 보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어느새 사령부로 보이는 건물에 도착했다.
사령부는 사방을 성벽으로 둘러싼 요새로서, 맨 위엔 온갖 장치들이 올라가 있었다.
장벽 자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거대한 요새다.
“그나저나 방금 한 말이 확실히 맞소? 속성은 물이고 경지는 5클래스라고?”
“아직 부족합니다.”
발린은 짐짓 겸손을 떨며 말했다.
예전엔 불의 마법사라 했으니 이번에는 물의 마법사로 꾸민 것이다.
실제 그의 경지를 알면 여기 모두가 놀라 자빠질 터.
그런 소란은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알았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말을 마친 레인저들이 먼저 사령부 안으로 들어갔다.
5분쯤 기다렸을까, 그들이 다시 나와 이 편을 향해 손짓했다.
“들어오시오. 바로 담당관 어른이 오실 거요.”
“담당관?”
길을 잃어 온 마법사에게 담당관이라니, 의외로 대우가 꽤나 좋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발린에게 막 나타난 담당관이란 자는 이렇게 말했다.
“미안하군. 미안해. 원랜 좀 더 빨리 올 수 있었는데, 모처럼만에 검술에 흥이 붙어서 말이야. 지금 보니 그건 반가운 손님이 올 거란 징조로구만. 안 그런가? 으하하하!”
“...당신은.”
담당관이란 자는 꽤나 땅딸막한 체구에 텁수룩한 수염을 지니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인간이라기보단 드워프를 연상시키는 체형.
그 중에서도 가장 웃긴 건 땀으로 반들거리는 민머리다.
하지만 발린은 웃을 수 없었다. 그의 온 몸에서 느껴지는 기세를 본능적으로 몸이 감지한 탓이다.
“소개가 늦었군. 나는 케틸이라 하네. 다들 케틸 공작이라고 불러서 본명을 이걸로 바꿔 버렸어. 그러니 훨씬 편하지 뭔가! 으핫핫핫!”
‘역시...!!’
말을 마친 케틸 공작이 껄껄 웃었다.
예상했던 대로의 정체이나, 그렇기에 발린의 머릿속은 오히려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대관절 길 잃은 마법사의 조사에 총사령관이 직접 나올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케틸 공작이 입을 열었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게나. 그 나이에 5클래스 마법사의 경지면 내가 직접 나와 확인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야 그럴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내가 직접 나오면 이렇게 제안도 할 수 있고.”
말을 마친 케틸 공작이 허리춤에서 종이 십수 장을 꺼냈다.
‘뭐지?’
호기심에 고갤 내밀던 발린의 눈이 커졌다.
십수 장 모두가 계약서였다. 일 년 계약부터 30년 혹은 그 이상의 장기 근속 계약서까지 온갖 게 다 있었다.
“자, 원하는 대로 서명하시게. 가장 신선한 마족 재료를 무한정으로! 누구보다도 빠르게 공급받을 수 있는 초특급 프리패스 계약서일세!”
자신만만하게 제 가슴을 툭툭 치는 케틸 공작.
발린은 그 앞에서 딱 잘라 말했다.
“사양하겠습니다.”
휘이이잉 -.
분명 사방이 밀폐된 실내이건만, 이상하게도 바람 소리가 둘 사이를 지나갔다.
“그, 그 뿐만 아닐세! 자네는 마법사이니만큼 휘하 병사들도 많이 붙여줄 거야! 말만 하면 청소, 밥, 빨래에 밤시중까지도 들 수 있는 친구들이...”
“절대 싫습니다.”
앞서의 답변보다 훨씬 차가운 거절! 허나 케틸 공작은 도무지 포기할 줄 몰랐다.
“하하, 물론 밤시중은 농담이었네. 자, 이건 어떤가, 앞서 말한 것들에다 훌륭한 삼층 대저택! 거기다 황실에 말해서 제국 자작의 위까지도 내 힘써 봄세! 이 정도면 완전 신분역전 아닌가! 크...잘만 하면 백작, 후작까지도 될 수 있다고!”
실랑이는 삼십여 분 넘게 이어지고서야 소강상태에 들었다.
시간은 얼마 안 흘렀다지만, 발린은 어째선지 온 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마치 어딘가에 묶인 쇠심줄을 붙들고 당기는 것 같았다.
‘누가 소냐 스승 아니랄까 봐...! 소냐랑 레벤을 합쳐놓으면 딱 이 사람이겠네!’
그래도 어떻게든 떨쳐내긴 한 것 같았다. 백 번이 넘게 제안을 거절했더니 이런 답변이 나온 것이다.
“정 뜻이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고향이 파이오니어 왕국이랬나? 그 곳은 가까우니 다음 달 즈음에 왕복하는 상단이 올 걸세.”
시무룩한 채 말하는 케틸 공작에게 발린은 입맛을 다신 뒤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매달리시는 겁니까? 그것도 당신 같은 사람이.”
케틸 공작은 십 년 전만 해도 대륙의 소드마스터 중 1순위를 다투는 초인이다.
아무리 발린이 지금 말한 경지가 대단하더라도 그가 직접 나설 만한 급은 절대 아니었다.
발린의 물음은 그에 대한 해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야 내가 직접 나서는 게 조금 더 성공확률이 높지 않겠나, 쓸데없이 윗사람의 허락을 구한답시고 절차가 지연되지도 않을 테고. 그런 것 때문에 자네같은 인재를 놓칠 순 없으니 말이야.”
“그렇게까지 저를 고평가하시는 이유가 혹시 있습니까?”
케틸 공작은 잠시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5클래스의 마법사라며? 그 정도면 충분하지. 내가 몸 좀 움직이고 고개 좀 숙여 자네를 영입하고, 그 덕에 죽어야 할 병사가 안 죽게 된다면 당연히 내가 움직여야지. 안 그런가?”
***
석양이 걸린 대장벽 뒤편의 모습은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멀리서 보면 그냥 평범한 시골 마을이라 해도 될 정도였다.
사령부 바깥으로 나온 발린은 눈에 보이는 정경에 감탄을 터뜨렸다.
“여기가 대장벽이라니, 믿겨지지 않는군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험지라고는 도저히...”
“케틸 공작님이랑 우리들이 각자 노력한 덕분이오. 보시오. 지금도 실시간으로 노력하고 있지 않소.”
레인저가 대답과 함께 아래편으로 손짓을 해 보였다.
그 편을 바라보니 분주히 움직이는 기사와 병사들이 눈에 띄었다.
“밤중엔 마족들이 올 수도 있으니 경계를 철저히 해야 하지. 당신은 외부인이니 아무래도 상관없소만.”
말을 마친 레인저는 가볍게 손짓했다.
“따라오시오. 숙소로 안내해드릴 테니.”
레인저들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숙소는 대략 열 평 정도 될 법한 방이었다.
꽤나 좁은 느낌이나 답답한 수준은 아니었고, 침구나 세탁류 등은 정갈한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발린은 여기서 푹 쉴 처지가 아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실-레논의 시체는 누구보다 우선적으로 찾아야 했다.
블링크로 나온 발린은 속도를 한껏 내어 처음 공간을 열었던 곳으로 향했다.
-늦었군. 금방 올 줄 알았는데.
발린이 게이트로 돌아온 것은 다음 날 새벽이었다.
그를 본 카투아는 이 말과 함께 공간을 닫았다.
“너도 내가 얼마나 속도를 냈는지 알면 놀랄걸?”
발린은 헐떡이며 숨을 골랐다.
대장벽에서 솔다인 남작령까지 그는 최대속도에서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다.
덕분에 걷는다면 일 주일은 걸릴 거리를 세 시간도 안 되어 주파했다.
그러나 아직 일이 남아 있었다. 발린은 카투아에게 대장벽의 좌표를 불러 준 뒤 그 쪽으로 움직였다.
남은 시간은 대략 다섯 시간 정도. 발린은 그걸 전부 남방대산맥을 뒤지는 데 썼다.
가까이 있는 산부터 천천히 찾다보니 어느새 날이 밝아왔다.
“일어나시게! 어서! 아침이 밝았어! 늦게 가면 맛있는 메뉴는 전부 남들이 먹어치울 게야!”
방문을 쿵쿵 두드린 건 놀랍게도 케틸 공작이었다.
아무래도 그는 아직 발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은 듯했다.
“어차피 상단 마차가 오려면 꽤나 시일이 걸리니, 그 동안 느긋하게 둘러보게나! 혹 마음이 바뀌면 언제라도 말하고!”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루비 타워의 부탑주, 현 황제의 출전자, 세계 최강의 마법사.
셋 모두 어제 들은 것보다 월등히 대단한 명예였다.
어제의 말이 아무리 마음에 와 닿았다고는 하나, 그가 여기에 남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날 발린은 대장벽의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단순 외부인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도제나 신참을 대하는 느낌이었다.
한 가지 특이한 건 병사들이 시설이나 기밀 등을 숨김없이 드러낸다는 점이다.
대장벽의 완벽함에 대한 자신감의 발로였다.
그리고 실제로 장벽의 수비는 그만큼 철저했다.
“자, 어떤가.”
“굉장히...대단하군요.”
칭찬을 바라는 듯한 케틸 공작 앞에서 발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이 곳의 수비는 그가 본 어느 곳보다도 뛰어났다.
만약 마왕이 오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많은 적을 맞이해도 승리했을 것이다. 그런 확신이 절로 들 정도였다.
“자, 그럼 나는 일이 바빠서 가 보겠네. 들어가지 말란 덴 가지 말고, 천천히 구경해 보게나.”
케틸 공작이 사라진 후 발린은 영원묘 안에서 마저 수련을 하다 정오에 맞춰 나왔다.
막 장벽 근처의 식당에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안에 있던 누군가가 사방을 향해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있는데 그 발린이란 말뼉다귀 같은 녀석이 황도에서 공을 세웠다는 게 말이 되냐고!”
============================ 작품 후기 ============================
오늘의 두 번째 편입니다. 세 번째 편을 올린 다음엔 아마 밤을 새서 설을 쇠어야 할 것 같은데...스케줄만 잘 분배하면 그다지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확신합니다. 헤헤.
그럼 조만간 마지막 편으로 뵙겠습니다! 가시기 전에 추천 하나씩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