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9 / 0264 ----------------------------------------------
드래곤의 마법
처음 그 말을 들은 발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장소의 실제 바깥이 궁금한 건 맞지만, 문제는 이 가디언이 무슨 속셈으로 이런 말을 하느냐였다.
“그렇다만.”
-그렇다면 바깥 세계의 원하는 곳을 말하라. 그 곳으로 통하는 출구를 열어주도록 하지.
카투아의 대답에 발린은 깜짝 놀랐다.
원하는 장소로 통하는 출구를 열어 준다.
그 말뜻은 즉 이 곳을 통해 황궁이 아닌 세계의 어느 공간으로나 갈 수 있다는 뜻과 같았다.
당황하는 표정을 본 카투아는 무심히 말을 이었다.
-그렇게 놀랄 것 없다. 네가 상위 권능의 인정을 받았고, 다시 마왕을 없앤다는 사명에 충실하는 한, 나는 이곳 영원묘의 관리자로서 너를 도울 의무가 있다. 이것도 그 중 하나일 뿐.
“단순히 공간왜곡을 해제하는 게 아니었어? 세계의 어느 곳으로든간에 연결해줄 수 있다고?”
-그렇다.
가볍게 긍정한 카투아가 설명을 보충했다.
-말했다시피 이 공간은 위대하신 분들의 권능으로 왜곡된 공간. 하늘에도 땅에도 속하지 않았으니 하늘이든 땅이든 갈 수 있다. 네가 원하는 곳이 설령 하늘 밖의 공허이더라도 마찬가지.
“어디든지 갈 수 있다라...”
발린은 꿀꺽 침을 삼켰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황궁을 통해 이 세상 어디로든지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혹시 바깥으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건? 그건 무조건 이 마법진을 이용해야 하나?”
-입구는 그대로 열어두도록 하지. 용무를 마치고 나왔던 곳으로 돌아오면 될 것이다.
카투아의 말에 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다차원공간이지, 사실상 이것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초장거리 텔레포트나 다름없었다.
‘파이오니어 왕국과 황궁을 오갈 수도 있고, 마음만 먹으면 노스트라 제국이나 남쪽 마왕의 땅으로도 갈 수 있다 이건가...!’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 것인데, 너 외의 다른 인간은 이 곳에 들어올 수 없다는 걸 명심해두도록 하라. 너는 본래 가진 바 힘이 있고, 게다가 상위 권능이 너를 보호하기 때문에 버틸 수 있다만, 다른 사람은 이 곳에 출입하는 것만으로도 이 힘에 짓눌려 터질 테니 말이다.
“...하긴 그렇겠지.”
처음 이 곳에 들어왔을 때 느낀 힘을 생각하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카투아가 처음 모습을 드러낼 때 느꼈던 강대한 압력!
에테르를 이용해 막지 않았더라면 소드마스터라 하더라도 짓눌려 죽었을 것이다.
괜히 선택받은 자만이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럼 이 곳을 이용해 군병을 워프시키려는 계획은 역시 취소하는 게 낫겠군.’
발린은 머릿속으로 떠올랐던 계획 하나를 지웠다.
자신만만하게 들여보낸 십만 병력이 피떡이 되게 둘 순 없었다.
“잠깐만, 그럼 이 곳의 압력을 버틸 수 있는 사람은 데려와도 된다는 건가?”
-상관없다. 너도 이 곳의 중요성은 알고 있을 테니. 네가 데려오는 사람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 아닌가. 그 정도면 됐다.
“그렇단 말이지.”
다행히 생각보단 쓸 거리가 훨씬 많을 것 같았다. 발린은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그럼 내가 갈 곳을 말할 테니 거기의 입구를 열어 줘. 내가 갈 곳은...”
장소를 들은 카투아는 거한으로 변해 곤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설마 그 곳도 알고 있었단 말이냐? 거긴...
“알아, 뭔진 모르겠지만 엄청난 양의 아티팩트가 보관되어 있던데.”
그가 말한 곳은 교황이 말했던 유적이다. 전생의 세계에서 요긴하게 쓴 아티팩트들이 가득 있는 만큼 안 꺼내들 수 없었다.
-네 이놈! 그 곳을 함부로 개방할 수는 없다! 거기는 위대하신 분들의 보물을 보관하는 장소! 그 보물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는 알고 있는 게냐!?
발린의 대답에 카투아의 언성이 높아졌다.
근엄한 태도를 한 채 팔짱을 끼는 빛의 형체, 하지만 발린은 겁먹기는커녕 오히려 눈을 빛냈다.
“그러면 그 곳이 드래곤들의 보물을 보관하는 장소라 그거지?”
-그...그렇다. 인간이여. 네 말대로다. 그러니 더더욱 거기만큼은 열 수 없다. 위대하신 분들의 유산은 지켜져야 해. 그것이 하나라도 세상에 나오면 추후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 설령 마왕을 무찌르는 데 필요하더라도, 나는 그 후의 세상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군. 잘 이해했다.”
역시 정공법으로는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발린이 그 정도로 포기할 리 없었다.
“그럼 하는 수 없군. 유적을 보수해야 해서 그 곳으로 통하는 게이트를 열려고 했는데, 정 안된다면 어쩔 수 없지.”
-뭣?! 유적의 보수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예상했던 대로 카투아의 언성이 높아졌다. 유적이 파손됐다는 건 그로서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기야 천 년 동안 여기에만 있었고, 앞으로도 그래야 하니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발린은 그에게 여유로운 태도로 대답했다.
“실은 얼마 전 바깥에서 몇 가지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곳의 유적이 바깥에 드러나서 꽤나 많은 도굴꾼이 움직인다고 하더라고. 애시당초 흥미를 가진 게 그것 때문이기도 해서 말이야.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파손된 부분을 어떻게든 고쳐보려 했는데, 열어줄 수 없다니 아쉬운 일이네.”
-유적이 파손돼...? 그런 일이...어떻게 있을 수 있지?
카투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불안에 깃든 모습은 처음 발린이 봤을 때와 영 딴판이었다.
한참동안 고민하던 그에게 발린이 한 마디 했다.
“복구를 해 주려고 했는데,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 오랜만에 고향이라도 갈까 싶은데, 연결해줄수 있어?”
-...물론 가능하다. 네가 태어난 곳이 어디지?
카투아의 대답은 즉시 나왔으나, 역시 말끝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발린은 이제 주도권을 잡은 게 자신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남쪽이야. 남방대산맥 근처, 북쪽이라면 여유를 좀 내서 갔다왔겠는데, 거리가 원체 멀어야지.”
-......
카투아는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느껴지는 에테르의 파동은 그가 망설이고 있음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천 년 동안 있었던 정령이라고는 하나, 그를 속여먹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그동안 혼자 있었기에 언변을 키울 수 없었던 덕분이다.
“그럼, 남방대산맥에서 조금 더 올라간 곳으로. 좌표는...”
-...다오.
“뭐?”
발린은 일부러 못 들은 척 하며 귀를 쫑긋 세웠다.
다음 순간 카투아가 온 공동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크게 소리쳤다.
-도와다오! 그럼 네게 그만큼의 대가는 허용할 테니, 부디 보물고의 손상을 복구해 달란 말이다!
생각보다 빨리 나온 대답에 발린은 남몰래 씨익 웃었다.
원랜 며칠, 혹은 몇 주를 두고 천천히 이 거인을 압박하려 했다.
한데 말을 꺼낸지 고작 십 분도 안 되어 이렇게 나올 줄이야.
아무래도 자신이 이 정령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았다.
발린은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생각난 것을 물었다.
“대가를 허용한다는 건 무슨 뜻이야?”
-인간, 분명 흡수와 방출의 힘에 대해 아주 큰 관심을 보였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맞나?
카투아의 말대로였다. 흡수의 힘은 노스트라 제국의 황제, 마왕 양측을 상대로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단순히 마나를 흡수해 가져오는 것이라도 대단한 능력인데, 목걸이의 능력을 생각해보면 업그레이드의 가능성까지 있는 것이다.
혹시라도 그렇게 되면 고유 능력들까지 가져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강력한 고유 능력은 곧 마왕을 상대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랬지. 그걸 지금 바로 주려고?”
발린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드래곤의 마법은 명상을 통해 얻고 있다만, 흡수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카투아가 썼던 걸로 추측하자면 그 능력은 분명 언젠간 들어올 것이다.
하지만 기왕 강력한 능력이라면 빨리 얻는 게 나을 터였다. 발린이 욕심을 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래, 그 능력을 네게 부여해 주지, 원래 위대하신 분의 마법에는 흡수가 없다. 그분들은 완전무결하기에 남의 것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지. 그러니 이건 내가 특별히 주는 것이다. 유적의 마법을 보수해 준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흠...”
드래곤의 마법에 흡수의 고유 능력이 없다는 건 조금 충격이었다.
동시에 발린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야겠다고 확신했다.
그냥 드래곤의 마법만 얻고 갔다가는 평생토록 후회할 뻔했다.
에테르를 쓰는 아케인 매직도, 나중에 얻을 용언이나 시,공간의 제어 등도 물론 막강한 힘이다.
하지만 얻을 수 있는 걸 빼먹고 가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무기고를 보수하는 걸 도와주면 확실히 그 능력을 주는 건가?”
-그렇다. 에테르는 가장 본질적이고 막강한 힘. 다른 어떤 능력도 빨아들일 수 있으니.
“...”
확실히 에테르의 능력에 대해서는 반문할 생각이 없었다.
무기고의 파손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고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굳이 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막 대답하려던 발린의 눈길이 일순 카투아의 거체를 슥 훑었다.
“...잠깐만.”
그가 확인한 것은 머리 부분, 신성력의 흰 빛과 어둠의 마나의 검은빛이 반반씩 자리를 차지한 그 영역이었다.
“...그 힘은...”
-물론 어둠의 마나다. 설마 모르는 건 아니겠지.
대답을 들은 발린의 등골에서 일순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정말 만약의 가정이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자신은 지금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을 뻔했던 것이다.
“그것도 흡수의 권능으로 흡수한 결과인가?”
-흡수? 아, 이 어둠의 마나 말인가. 물론 아니다.
가볍게 부정하는 카투아, 안심했던 발린의 눈동자가 다음 말을 들은 순간 거세게 흔들렸다.
-하지만 흡수의 권능을 상대에게 쓴다면 어둠의 마나도 같이 딸려오는 건 사실이다. 흡수는 곧 상대방의 힘을 나에게로 가져오는 것. 그 힘의 근원이 어둠의 마나라면 어둠의 마나가 들어오겠지.
‘그럴 수가!!!’
달콤한 과일엔 독이 있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무턱대고 받았다가 그대로 대업을 망칠 뻔했다.
발린은 크게 숨을 한 번 몰아쉬었다. 덕분에 놀란 가슴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방금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수많은 일들을 겪으며 단련된 정신이 한순간 무너질 뻔했다.
만약 아무것도 모르고 저것을 받아 썼다 생각해 보라.
유용한 고유 능력을 가진 무언가에게 흡수를 사용하는 순간 발린은 끝장이었다.
‘어둠의 마나는 가장 악독하면서도 사이한 힘! 게다가 어지간한데 쓸 리 없으니 아마 그 상대는 자-쿨카나 거기에 맞먹는 고위 마족이었겠지...’
몸 안에 들어온 마나는 대번에 마나 서클들을 흐트러뜨릴 터.
설령 살아난다 하여도 발린 본인의 의지가 그걸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황제에게 대비한답시고 받아들이려다 레이안 신이 준 기회를 허사로 돌릴 뻔했다.
절대 안 된다. 그렇다면 흡수 능력은 하등의 쓸모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발린의 눈이 카투아를 향했다.
멀쩡한 눈. 순간 발린의 머릿속에 강렬한 경고등이 울려퍼졌다.
‘태연해야 해. 태연해야 해. 내가 당황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래야 계속 주도권을 쥘 수 있어.’
애써 경악을 숨긴 발린이 천천히 카투아를 살폈다.
다행히 그는 자신이 당황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어떤가. 네가 원한다면 지금 바로 흡수의 권능을 먼저 부여하겠다.
“...좋지. 흡수의 권능.”
발린은 얼핏 긍정하는 어조로 답한 뒤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게 맞지 않는 것 같아. 사람들이란 각자에게 맞는 게 있는데, 무분별하게 돼지처럼 먹는 건 내 취향이 아니니까. 나는 내가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 걸 좋아하지, 남의 것을 마구잡이로 먹어치우고 싶진 않거든.”
-그런가? 일전엔 그렇게 관심을 보이더니만. 막상 주겠다 하니 흥미가 식는 것인가. 인간이란 변화무쌍한 존재로구나.
“짧게 사니까. 아마도.”
발린은 가볍게 대답하며 화제를 넘겼다.
“여하간, 흡수의 능력은 내게 맞지 않는 것 같아. 대신 다른 걸 바라고 싶은데.”
-다른 것?
카투아의 몸이 한 차례 일렁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발린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더더욱 진해졌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의 첫 번째 편입니다. 가시는 길에 추천 하나만 주시면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