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6 / 0264 ----------------------------------------------
드래곤의 마법
바로 그 날 저녁식사를 마친 후였다. 웬 시종이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발린 공, 폐하께서 긴히 할 말이 있다고 부르십니다.”
‘그거다!!’
발린은 눈을 번득였다.
그것이 아니고서야 정무가 끝난 이 시간에 자신을 부를 리 없었다.
눈앞의 시종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정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으로 따라오십시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발린은 가볍게 침을 삼키며 따라갔다.
아일란이야 미리 레벤에게 맡겨 두었으니 걱정 없었다.
죽을 듯 경기를 일으켰다지만 뭐 어떤가, 그녀는 그럴 만한 악업을 저질렀다.
역시나 시종은 빈 대전으로 그를 안내했다. 대전엔 에블린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폐하, 발린 공을 데려왔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들어가 보세요.”
시종을 보낸 에블린이 발린을 향해 말했다.
“이 시간에 불러서 죄송해요.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여기는 항상 차 있어서...”
“아닙니다. 알 것 같군요.”
발린은 손을 내저으며 에블린의 모습을 한 차례 훑었다.
황제의 정복을 입은 에블린은 이제 그럭저럭 근엄한 분위기가 나오고 있었다.
처음 만날 때를 생각하면 놀랄 만한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럼 소개할게요. 이 쪽은 제가 소개받은 마법의 관리자 분, 대대로 황궁에 소속되어 이 유적의 관리법을 전수받으셨다고 해요.”
“폐하, 말은 낮춰 주십시요. 이러다 소인 심장떨려 죽겠습니다요. 아직 대도 잇지 못했는데 그럴 순 없습니다요.”
순간 대전의 뒤편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오며 말했다.
발린은 그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앗 소리를 냈다.
나타난 관리자는 다름아닌 선발대전 내내 진행을 맡았던 광대였던 것이다.
“헤헤, 놀랐습니까요? 나으리.”
“평범한 광대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여기서 다시 볼 줄은 예상 못했군.”
오러블레이드나 각종 마법을 해설하는 것부터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 때는 단지 위트있는 기사나 마법사를 분장시킨 거라 생각했다.
이렇게 다시 볼 줄은 정말로 예상외였다.
“밤은 길고 갈 곳은 많으니,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시려면 서두르는 게 좋겠습지요. 폐하, 옥좌에서 조금 거리를.”
광대는 둘이 멀어진 걸 확인하자 옥좌와 그 주변을 이리저리 만졌다.
일 분 정도 기다리니 드르륵거리는 소리가 나며 옥좌가 빗겨나왔다.
“와아.”
“이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저도 실제로 여길 가 보는 건 처음이군요.”
감탄을 터뜨린 에블린에게 광대가 말했다.
이마를 쓸어내리는 폼이 본인도 꽤나 긴장한 것 같았다.
하기야 천 년 동안 개봉된 적이 없는 곳이니 경험이 있는 게 이상했다.
‘물론 나는 알고 있지만.’
발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광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안쪽은 역시 만약을 대비한 비상 탈출구가 이어져 있었다.
걷는 동안 광대는 무언가를 열심히 되뇌이며 복도를 살폈다.
“22...23...24...비틀림 장식이 네 번째...”
그 말을 듣던 발린은 문득 복도 주변을 살폈다.
아무래도 무언가 가이드라인이 있어 그것으로 마법이 감춰진 곳을 찾는 것 같았다.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지만, 그걸 굳이 말해줄 이유는 없겠지.’
한참 그렇게 가던 도중, 갑자기 광대의 걸음이 딱 멈췄다.
“어?”
“어어?!”
“헉!”
세 명의 비명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눈 앞에는 한쪽 벽이 무너진 복도가 있었다.
그 너머로 보이는 건 다름아닌 술통! 일전 발린이 먼저 탐사할 때 뚫은 임시 통로였다.
발린이 내지른 비명의 뉘앙스가 다른 두 명과 약간 다른 것도 그래서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아, 안 돼. 이렇게 되어 있으면 의미를 해독할 수가 없는데.”
자리에 멈춘 에블린의 외침에 광대는 털썩 주저앉았다.
연신 조각들을 맞춰보려 노력했지만, 아무리 해 봐도 중과부적이었다.
“폐, 폐하. 이건...저, 그...”
“...복도에 표식이 계속 새겨져 있었나 보군요? 그렇죠?”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광대는 그대로 고개를 푹 숙였다.
온 몸에서 진한 좌절감이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천 년 동안 대대로 물려받은 비밀이 막상 제대로 쓰이지 못했다. 저 정도 반응은 약과였다.
한편 발린은 잠깐 생각했다.
이대로 그냥 내려갈지, 아니면 광대를 도울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는 유적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어차피 관문도 최종관문 하나만 남은 상태, 에블린도 옆에 있겠다. 원한다면 곧바로 내려가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대신 마나를 움직였다.
스스슥.
무너진 벽이 들리고 다시금 맞춰졌다. 놀란 눈을 한 광대에게 발린이 간단하게 물었다.
“공용 마법이 잘 먹혔군요. 이 정도면 진행이 가능한가, 광대?”
“...”
벽은 어느새 거의 멀쩡히 복귀되어 있었다. 금간 자국만 아니면 그대로였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광대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금 표식들을 되짚기 시작했다.
한 번 탄력을 받자 금방 진도가 흘렀다. 조금 더 가다보니 예전에 확인했던 곳이 보였다.
“...여기, 여깁니다! 이 곳이 봉인지입니다. 폐하.”
“드래곤의 마법이 깃든...”
에블린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걸음이 멎은 곳은 발린이 예전에 열었던 복도의 비밀 샛길.
다행히 이 곳의 입구는 일전에 확실하게 봉해 두었다.
“그럼, 여긴 어떻게 열죠?”
“폐하의 피를 한 방울, 여기 색이 다른 벽돌에 묻히시면 됩니다.”
광대가 그렇게 말한 순간, 발린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내가 열지.”
“네? 하지만 발린 공!”
“전 괜찮은...”
둘 모두 깜짝 놀라 발린을 말렸다.
하지만 발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나를 움직였다.
어차피 이 곳을 지키는 함정,아티팩트는 일전에 전부 부숴 버렸다.
남은 건 마지막의 봉인문 뿐, 그렇다면 굳이 절차를 지켜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그그긍!
한 번 해 봤던 일인지라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단번에 문이 열리자 에블린이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우와아...”
“이, 이거 문제되는 거 아닙니까? 분명 전승에 따르면 허락받지 않고 문을 연 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묻는 광대에게 발린은 한 차례 손짓을 해 보였다.
팟. 팟. 팟.
라이트 마법이 켜지며 보이는 미궁 안은 부숴진 함정과 골렘들로 가득했다.
“이 정도면 굳이 피를 써서 열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내 말 맞지?”
“가디언이랑 트랩이...전부 부숴져 있다니, 이렇다면 얘기가 달라지지요. 예. 괜찮습니다. 물론.”
광대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히 보니 입술을 우물대고 있다.
발린은 호기심에 그 쪽으로 귓가를 가져다 댔다. 천 년이나 지났으니 어쩔 수 있는 일이다라는 말이 들렸다.
‘막상 들으니 왠지 미안해지는걸?’
왠지 모를 멋쩍은 느낌에 발린은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부숴진 트랩 사이를 지나다보니 마지막 봉인문이 보였다.
꿀꺽.
모두가 침을 삼키는 가운데, 에블린이 조심스레 손목을 걷었다.
“후우, 그럼 갈게요.”
말을 마친 그녀는 스스로 칼을 대었다. 황제의 몸에 상처를 내면 역적죄로 취급될 테니 어쩔 수 없었다.
피가 튄 문이 금방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그긍!
기다렸다는 듯 열리는 문, 그 너머엔 깔끔한 육각형 모양의 홀이 있었다.
발린은 맨 앞에서 들어가 주변을 살폈다. 기둥과 벽, 천장엔 옛날에 그렸을 벽화가 가득했다.
단순히 역사를 설명해둔 것 같은데, 기존에 알던 내용에서 그다지 달라진 건 없었다.
숨겨진 고유 능력이라도 있을까 눈을 빛냈으나 몇 번을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한 장식인가...?’
한창 방 안을 둘러보던 발린의 시선이 바닥에 고정됐다.
일전에 문 너머로 느꼈던 텔레포트 마법진! 아마 진짜 드래곤의 마법이 있을 곳으로 이동시켜줄 그것이었다.
정가운데에 놓인 마법진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밀함을 본 발린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건...흉내조차도 낼 수 없겠군.’
엘리아가 자신의 능력을 극한까지 연마하면 이런 느낌일 것이다.
새삼 드래곤들이 얼마나 강대했는지 느껴졌다.
‘하기야 그렇게 강력했으니 어둠의 마나와 에테르가 불안정하게 얽혀 있었어도 삼공작 급이 될 수 있었겠지.’
“혹시 더 필요한 부분 있어요?”
등 뒤로 다가온 에블린이 가볍게 말을 꺼냈다.
포션으로 상처를 치료하기 전에 혹시나해서 물어본 것이리라.
마법진을 더 살피던 발린은 고개를 양옆으로 저었다.
이것은 마나만을 모아 발동시키는 텔레포트 마법진.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가동시킬 수 있었다.
“괜찮습니다. 황제폐하. 이것으로 계약은 끝난 셈이군요.”
“...그러네요.”
막상 관계가 끝난다 생각하니 에블린은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그동안 발린이 보여준 엄청난 실력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거기다 드래곤 마법까지 얻은 그가 얼마나 강해질지는 미지수.
마왕군이 강력하다고는 하나, 지금 눈앞에 보이는 사람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진 않았다.
하면, 그 다음엔 무엇을 할까?
에블린은 그 힘을 카딤 제국에 데려오고 싶었다.
그녀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닫았다. 이미 어필은 충분히 해놓은 상태다.
남은 것은 천천히 시간을 들여 움직이는 작업이었다.
정 안 되어도 나름 친분을 만들어둔 만큼, 최소한의 도움은 받을 수 있을 것이고 말이다.
“광대 씨.”
“예, 폐하.”
안내를 마친 광대가 고개를 푹 숙였다. 에블린은 허탈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어디 가서 빠지는 외모는 아니죠?”
“...!?”
갑자기 황제의 외모를 평가하게 된 광대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허나 그도 드래곤의 마법 봉인을 한평생 관리해 온 자다. 광대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황제 폐하. 걱정하지 마십시요. 아마 폐하가 평민이었더라도 웬만한 나라 왕비 정도는 손 한 번 흔들자마자 얻을 수 있었을 것입죠.”
“푸훗, 고마워요.”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에블린은 굉장한 미인이었다. 시원시원하게 뻗은 팔다리하며 나올 곳 나오고 들어갈 곳 들어간 몸매. 동그랗고 큰 벽안과 아름다운 금발까지 어디 하나 빠지는 곳 없었다.
그런만큼 광대의 말은 진심으로만 이루어진 평가가 맞았다. 에블린은 유머러스한 대답에 살포시 웃었다.
***
스팟.
어둠으로 가득 차 있던 공간에 갑자기 빛이 차올랐다.
번쩍이며 나타난 그것은 이내 한 사람을 뱉어냈다.
“우웃!”
나타난 사람은 신음성과 함께 손을 내저었다. 놀랍게도 그러자마자 반투명한 보호막이 그의 몸을 감쌌다.
캐스팅도, 아티팩트도 없었지만 자연스레 발동하는 마법!
세상에 그런 고유 능력을 가진 건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의 정체는 다름아닌 발린, 황궁 지하의 마법진을 통해 여기로 온 것이다.
“...하아. 하아.”
발린은 라이트 마법으로 주변을 밝히며 헐떡였다.
처음 올 때 무언가 공격이 올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주변은 거대한 어둠뿐이었다.
“...흠.”
발린은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
우선은 이 곳이 어딘지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그가 있는 바닥만큼은 더없이 잘 보였다.
바닥에 있는 건 텔레포트 마법진! 이것이 있다면 돌아가고 싶을 때 얼마든지 황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최소한 여기에 아예 갇혀버리거나 한 건 아닌 셈이다.
“...그렇더라도 이 어둠은 조금 그렇군.”
발린은 라이트로 만들어진 빛의 구체를 조종해서 멀리 보냈다.
둥실둥실 뜬 구체가 멀어지자 점차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오.”
장내가 드러날수록 발린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가 있던 곳은 놀랍게도 거대한 동굴 같은 곳으로서, 그 크기는 황궁과 비교해도 지지 않을 만큼 거대했다.
하지만 발린이 놀란 이유는 그게 아니다.
유적 전체에 걸쳐 엄청난 글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야말로 지식의 보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단하군. 이 정도라면 무엇이 있다 해도 믿겠어.”
사방이 지식으로 가득 차 있다. 마법사에겐 더없이 기분좋은 광경이다.
벽과 천장의 모든 문양이 빛을 낸 것은 그 때였다.
============================ 작품 후기 ============================
오늘의 첫 연재분입니다. 아마 2시, 6시 정도에 두번째. 세번째 연재분이 올라갈 것으로 예상됩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