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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딤 연방제국의 새로운 황제
“폐, 폐하. 하지만 저 여인은...!”
순간 말이 턱 막혔던 펜잔스. 잠시 후 페이스를 되찾은 그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알아요. 묘인족이죠. 그게 뭐 문제되나요?”
“말이 되는 소리를...!!”
참지 못한 펜잔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중요인물이 모인 자리였으나 그에게 있어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눈앞에 있는 건 마족, 루덴스 공작가를 어지럽히고 교황청을 친 놈들과 같은 종족이었다.
그것이 문제없다고 하는 꼴이니 이러는 것도 당연했다.
“...정말이십니까?”
“네. 제가 보장해요. 소냐는 제가 믿는 제 친구예요. 그러니 교황성하, 그리고 넴로드 공. 두 분도 그녀를 제 친구처럼 대해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으르렁대던 펜잔스의 옆, 레벤은 직접 교황과 넴로드 대신관에게 동의를 구했다.
소냐는 선발대전 중간부터 합류하긴 했으나, 그녀의 결백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어둠의 마나도 없을 뿐더러, 결정적으로는 소냐가 들려준 그 썰이 영향을 끼쳤다.
만약 마족들과 진정 같은 편이라면 동료를 그렇게 맛깔나게 먹을 순 없을 테니 말이다.
상황을 지켜보던 펜잔스가 속으로 코웃음쳤다.
아무리 레벤이 믿어달래봤자 그녀는 대신관, 눈앞에 마족이란 증거가 떡하니 보이는데 그 말이 통할 리 없지 않은가!
“그, 그렇다면야...”
“...알겠습니다.”
다음 순간 나온 대답은 펜잔스의 기대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놀랍게도 교황과 넴로드 대신관이 레벤의 말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펜잔스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이미 레벤을 레이안 신의 화신이라 알고 있었다.
레이안이 직접 신원을 보증하는 사람!
설령 소냐가 마왕이라 해도 이 둘은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상황을 지켜보던 발린은 머릿속에 그렸던 모습 그대로에 역시나하고 생각했다.
한편 뒷사정을 모르는 펜잔스로서는 어처구니없어서 눈물이 다 나왔다.
당연히 자신의 편을 들어줘야 할 사람들이라 믿었는데 뒤통수를 맞은 셈.
그렇게 생각하니 순간 온 몸에 힘이 풀렸다. 펜잔스는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리며 의자에 앉았다.
“말도 안 되오. 아무리 어둠의 마나가 없어도 그렇지, 마족을 같은 편이라...”
“음...”
역시나 그 동안 같이 지냈던 사람들은 전부 소냐를 믿었다.
같이 지내고 어울리며 그녀가 마족과 관계없단 걸 자연히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걸 다른 사람에게 바라는 건 역시 무리다.
‘결국 천천히 적응시키는 수밖에 없나?’
발린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반응이 나올 건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런 건 그만큼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소냐를 아군으로 받아들이는 건 마왕군에 맞서기 전 반드시 해야 할 것중 하나다.
그것을 통해 케틸 공작, 나아가선 대장벽의 전사들과 보다 친밀하게 움직일 수 있으니 말이다.
이건 현실적인 이득이고, 그 이전에 도덕적인 면에서도 소냐는 받아들여져야 했다.
‘물론 마왕의 수하들은 온 힘을 다해서 찢어죽여야하는 건 맞지만, 어둠의 마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종족이 그렇단 것만으로 죽일 이유는 절대 없지.’
만약 그렇다면 그건 무고한 이를 죽이는 것이 된다.
마족에 대한 증오심은 응당 가져야 할 것이나, 그 때문에 과도한 학살을 벌이는 건 본말이 전도된 행동이었다.
‘우선은 당장 공격마법이 날아오지 않은 것만도 성공이군. 이제 천천히 어울려야...’
“하기야, 당신이라면 그럴 것 같았소.”
착잡한 마음을 감추던 발린은 이어지는 말에 두 눈을 크게 떴다.
분명 펜잔스의 목소리이긴 한데, 그 내용은 앞서 보인 반응과 정반대였던 것이다.
놀란 발린을 앞에 둔 채, 펜잔스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날이 서 있는 건 마찬가지였으나, 적어도 방금 전처럼 마법을 캐스팅하고 있는 건 아닌 듯 보였다.
“그 말씀은...?”
“냐?”
고갤 푹 숙이고 있던 소냐는 물론, 원탁의 다른 인물들 모두가 펜잔스를 향했다.
비록 클로드와 발린에 밀려 퇴색되긴 했으나 그는 엄연히 다이아몬드 타워의 탑주.
행보 하나하나의 무게가 엄청난 거물인 만큼 주시할밖에 없었다.
허나 반응에 상관없이 펜잔스는 말을 이었다.
“돌이켜보면 당신은 등장할 때의 행보부터 범상찮았지. 수천 마리의 오크를 단신으로 몰아냈다고 했나? 그 때부터 시작해서 아티팩트를 제작하는 아티팩트, 일반인도 쓸 수 있는 아티팩트를 제작했다고도 하고, 거기다 노스트라 제국의 소드마스터 뱀파이어를 없앴지. 게다가 이 몸을 이기고, 교황청을 습격한 삼공작도 신관과 같이 처리했다고 들었소.”
잠깐 숨을 조절한 펜잔스가 발린을 보았다. 그 눈엔 더 이상 경계심이 담겨있지 않았다.
“그런 당신이 추천하는 것이라면야 적어도 사악한 의도를 가진 건 아닐 테지. 게다가 이 몸도 은혜를 입은 차. 이번엔 본인이 그대에게 은혜를 베풀 차례인 듯 하오.”
“...그럼? 어떻게 할 셈이죠?”
이야기를 듣던 에블린이 긴장을 풀며 입을 열었다.
“물론,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완전히 경계를 푼 건 아니지만. 그래도 무턱대고 마법을 쓰는 일은 없도록 하지요. 맹세합니다. 폐하.”
펜잔스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이걸로 원탁의 사람들은 모두 소냐를 받아들인 셈이 됐다.
이야기를 듣던 발린으로서는 기뻐해야 할 일이다.
일전에 펜잔스에게 베푼 은혜가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발린이 마탑에 간 것은 어디까지나 계륵인 아티팩트를 돌려주기 위한 목적.
펜잔스의 상태를 봐 준 것은 그저 단순한 선심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그 얘기를 들으니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그, 그건...”
“설마 이걸 전부 계산하고 포석을 깐 건 아니시겠죠. 발린 공. 본인은 정말이지 감탄했소이다. 이렇게 은혜를 입어 놓았으니 제가 뭐라 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요.”
말을 마친 펜잔스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젓는다.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해명할 수도 없었다. 발린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그렇지 소냐?”
“...그렇다냐. 스승님께서 이걸 같이 보셨으면 정말 좋아했을 거다냐.”
“하긴 그렇겠네.”
발린은 소냐의 반응에 피식 웃었다.
처음 군용 수정구를 빌려 연락했을 때 들었던 노호성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했다.
물론 신관과 마법사를 보내주겠다 하니 단숨에 태도가 바뀌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 사람, 진심으로 소냐를 걱정했었지. 진짜 아버지와 딸처럼 말이야.’
발린은 옆에서 헤헤 웃는 소냐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부모 없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름대로 바르게 컸고,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아왔다.
‘이제 시도때도 없이 침대로 파고들어오는 것만 막으면 완벽할 텐데.‘
문득 든 생각을 지운 발린은 펜잔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어려운 용단 감사드립니다. 제가 보증합니다. 소냐는 정말 아무 문제 없을 것이고, 장차 마왕군과 싸우는 데 누구보다 큰 전력 중 하나가 될 겁니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케틸 공작이 가르친 제자라니 안 그런 게 이상하지.”
펜잔스는 헛기침을 하며 등을 기댔다.
어조로 봐선 여전히 소냐에 대한 반감이 남아있긴 한 것 같았다.
그래도 뜻밖의 우연 덕에 모두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당초 수 년을 예상했던 게 단숨에 이루어지자 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소냐가 우물쭈물하며 말을 꺼낸 건 바로 그 때였다.
“그...정말 아니다냐. 나는 마족들 먹는 것도 좋아한다냐. 그러니까...”
“!!!”
말이 더 이어지려는 순간 발린은 사력을 다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소냐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챈 것이다. 읍읍거리는 그녀의 귀로 발린은 조심스레 귀엣말을 속삭였다.
‘그건 말 안해도 돼. 정말 괜찮아! 나머지는 천천히 풀어갈 수 있으니까!’
“읍읍!”
입이 막힌 소냐가 거세게 발버둥을 쳤다.
타탁!
격한 소리와 함께 단숨에 팔을 걷어낸 그녀가 소리쳤다.
“왜 말을 못하게 하는 거다냐! 저번에 발린도, 에블린도 이 말을 하니 다 믿어주지 않았다냐!”
“하하...”
그제서야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챈 에블린이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듣고 구토까지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했다.
하지만 그 상세한 내용은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
비밀을 공유한 둘이 서로를 바라보며 멋적게 웃었다.
그게 실수였다.
“잠깐만, 발린 공.”
가만히 셋을 지켜보던 펜잔스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돌아본 발린에게 그는 천만뜻밖의 제안을 해 왔다.
“어디 한 번 말하게 둬 보지요. 공과 폐하가 같이 들은 말이라니 갑자기 호기심이 이는군요.”
“아니, 그건...”
발린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혈색이 빠져나갔다.
그야 지금 막고 있는 말을 듣는다면 소냐가 아군이란 건 확실해질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발린은 펜잔스가 최소 사흘 동안은 음식을 제대로 입에 못 댈 것이라 확신했다.
“두 분만이서 한 이야기요? 그게 뭔데요?”
“본 교황도 꽤나 궁금하구려. 도대체 무엇을 들었기에 발린 공 같은 인물이 단숨에 그 의심을 철회했는지 말이오.”
“...”
설상가상으로 듣고 있던 다른 사람들까지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다.
심지어는 아티팩트를 이용해 원거리서 참석했던 엘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발린 부탑주, 저도 부탁드릴게요. 무슨 이야긴지 꼭 듣고 싶네요.”
엘리아는 어째서인지 다급함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로 부탁해 왔다.
만약 안 된다고 하면 직접 와서라도 들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망설이던 발린은 결국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단 저와 에블린 황제폐하는 안 들어도 되겠지요? 이미 한 번 들었으니까...두 번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저도 동감이예요.”
에블린이 옆에서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들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공감대였다.
결국 둘을 제외한 나머지는 소냐의 말을 듣기로 했고, 발린과 에블린은 잠시 뒤로 물러나 있기로 했다.
얼마 후, 둘은 일그러지는 다른 인원들의 표정을 실시간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
“허억, 헉. 헉.”
“으으음...”
소냐의 증명 시간이 끝나고 나머지 인원들은 모조리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근엄했던 펜잔스는 마치 마나 폭주라도 겪은 마냥 낯빛이 창백했고, 교황과 넴로드는 연신 기도문을 읊조렸다.
발린은 씁쓸한 표정으로 손목에 찬 아티팩트를 내려다보았다.
원래는 화면이 뜨고 엘리아가 보여야 했으나, 지금 아티팩트는 빛이 완전히 꺼져 있었다.
이야기를 듣던 엘리아가 그대로 의식을 잃고 넘어가버린 것이다.
사용자의 의식이 사라졌으니 당연히 아티팩트 작동도 멈췄다.
아마 엘리아에게는 두고두고 트라우마로 남을 것이다.
“그러게 진작 말할 때 듣지.”
가볍게 혀를 찬 발린은 남은 사람들의 반응을 마저 살폈다.
“...어?”
그러던 도중 그는 레벤의 표정이 멀쩡한 것을 발견했다.
역시 일전에 받아들인 에테르가 균형을 완전히 맞춘 건 아닌 것 같았다.
‘조만간 몸 안의 신성력과 마나를 한 번 더 검사해봐야겠군. 혹여 부작용 같은 건 없는지 확인해봐야 할 테니...’
고개를 끄덕이던 도중 발린은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레벤의 입술 부분이 아까보다 훨씬 더 새빨갰던 것이다.
마치 침이라도 흘리다 만 것처럼 말이다.
‘...설마?’
발린은 혹시나하는 마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생각한 게 맞다면 역시 레벤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이번 편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의 두 번째 편입니다.
다음 편은 6~7시 사이에 올라올 예정입니다. 그 때 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