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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필귀정?
“...”
검은 형체들은 갑자기 나타난 발린을 향해 시선을 모았다.
지금 주변을 감싸고 있던 결계는 레-호트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장막이다.
그걸 부수고도 지친 기색이 없다면, 최소한 소드마스터급 이상이란 말이 된다.
소드마스터는 한 나라에 한두명밖에 없는 초인.
황제선발대전 때문에 강자들이 몰렸다고는 하나 길거리에 치일 만큼 흔한 건 결코 아니었다.
“...”
형체들의 뒤에 있던 레-호트는 금방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타겟을 하나에서 둘로 바꾼 검은 형체들이 안개가 되어 접근해왔다.
이미 어둠에 먹힌 그들은 육신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검사들에게 있어선 최악의 적! 하지만 그들은 상대의 정체를 파악지 못하고 있었다.
“으, 은공...”
“우선은 쉬고 있으십시요. 그러게 누가 혼자 무리하라 했습니까?”
간단히 책망한 발린은 동시에 썬더 스톰의 마법을 불러냈다.
일전 슈리만 백작이 아티팩트로 만들어냈던 것보다 훨씬 강대한 출력이었다.
파지지직!!
에테르를 넣어 강화시킨 썬더 스톰은 단숨에 십여 기의 형체를 녹여 버렸다.
일반적인 썬더 스톰이라면 아무리 강해봤자 이 정도는 아니었다.
막강한 위력에 지켜보던 안드로포스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저 정도면 나의 검역과 비슷한 수준...! 어느새 그만큼 강해지셨단 말인가!’
물론 컨디션과 같은 여러가지 조건을 감안해야 하는 건 맞았다.
하지만 검은 형체들이 맥을 못 추는 걸 보면 그 강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 사이 발린은 여러가지 속성의 마법을 연계해 보았다.
어스 월로 벽을 만들고 플레임 스트라이크의 화력을 극대화시킨다거나, 스톤 스피어를 조각내어 분진폭발을 만든다거나 하는 식이다.
강한 힘이 필요한 건 맞으나, 어느 부분에 얼마나 적절한 대처를 하느냐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런만큼 이건 아무리 뭐라 해도 반드시 필요한 기술이었다.
비록 힘보다는 테크닉을 더 요구했으나, 그것이 갖춰진 이상 형체들에게 있어서는 지옥이 따로 없었다.
퍼엉! 펑! 카드드득!
터지고 으깨지는 소리가 연신 일었으나 발린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안드로포스의 귓가를 울리는 것은 터지고 뒤틀리는 갖가지 잡음!
온갖 방위에서 공격해 오던 형체들이 제각기 터져나가는 소리였다.
“...!!”
검은 눈동자가 일순 크게 뜨였다.
레-호트가 당황했음을 알려주는 표시다.
그가 발린의 능력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건...’
인형들을 조종하던 레-호트는 내심 격하게 놀랐다.
상대는 온갖 고위 마법을 캐스팅도 없이 만들어내고 있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지금 보기엔 그저 생각만으로 마법을 시전하는 것 같았다. 당장 다물린 입부터가 그 증거였다.
캐스팅은 마법사에게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자 한계! 하지만 눈앞의 마법사는 그것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마법사가 가진 본질적인 한계를 애초부터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보면 볼수록 경계심이 커질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미 성장도 할 만큼 했군...7클래스, 아니. 8클래스 이상의 수준인가?’
이런 녀석을 미리 싹을 밟아두거나 타락시키는 게 다크니스의 주된 임무였다.
한데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녀석은 자신들의 수하가 되지도 않았고, 노스트라 제국의 뱀파이어도 아니었다.
‘멍청한 녀석들, 이런 놈 하나 잘라두지도 못하고 모든 게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다고?’
레-호트는 혀를 차며 인형들을 조종했다.
이미 그릇은 엎어진 것, 기왕 이렇게 됐으니 정확한 수준이나 계량해 보려는 심산이었다.
파앗! 팟!
마음먹음과 동시에 날카롭게 날아드는 어둠의 칼날!
하나하나 대처하기엔 너무 빠르고 강했다.
대신 발린은 손 안에 에테르를 모았다.
드래곤하트 덕분에 에테르는 거의 무한정 얻어낼 수 있었다.
그 막강한 힘을 기반으로 만든 파도가 그림자를 결계째로 쓸어버렸다.
[에테르 블래스트!]
전생의 자신도 겉만 핥던 비전 마법. 그 때는 알아가면서도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달랐다. 회귀를 통해 얻은 깨달음이 뒷받침되는 이상 그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노력 여하에 따라 스스로 발전해나갈 수 있는 현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완성된 에테르의 파도가 해일처럼 검은 칼날들을 휩쓸었다.
콰콰콰콰!
신기하게도 그것은 발린의 의도에 따라 움직였다. 오로지 어둠의 힘만을 걷어내고 거리나 건물 등등엔 어떠한 피해도 입히지 않은 것이다.
“...크, 크아아아악!!!”
수십 구의 형체가 한번에 쓸려나가자 조종하던 레-호트가 비명을 내질렀다.
본체가 아니라 꼭두각시를 통해 느끼는 것임에도 순간적으로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다.
새삼 실-레논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그들이 서로를 적대한 건 하루이틀이 아니지만, 이번 경우엔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빛의 파도가 가시자 남은 인형들은 채 여섯 구도 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마저도 거의 다 부숴져가는 중, 더 이상 전투력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크...크크...”
쓰러진 인형이 허탈함 반, 분노 반을 담아 웃었다.
실로 막강한 힘이었다. 이대로라면 추후 전력을 다해 맞부딪혔다 해도 쉽게는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말이다. 레-호트의 킬킬거리는 웃음이 좀 더 커졌다.
순간 의문을 느낀 발린이 입을 열었다.
“뭐가 그리 웃기지?”
“이제 곧...절망을 느껴야 할 네놈들의 표정이 상상되어서 말이야.
“절망?”
발린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일전에 본 전갈에 따르면 이들은 안드로포스를 집중적으로 노리고 있었다.
실제로 방금 본 수십 기의 형체들을 생각하면 그 분석에 어느정도 신빙성이 더해진다.
전생의 세계에서 레-호트가 다루던 형체의 수를 본 만큼 이건 확실했다.
‘하지만 이만큼의 전력을 투입해서 하던 공격이 방금 실패했을 텐데, 그럼 도대체 무엇을 노리는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발린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왜 절망을 느껴야 하는 거지? 설마 장차 세계를 덮쳐 올 어둠 때문이라거나 하는 구닥다리 멘트를 내뱉으며 도망치려는 건 아니겠지?”
“...크, 크하하하하!!!”
어처구니없는 도발에 레-호트가 그대로 웃어젖혔다.
유치한 내용이었으나 속을 제대로 긁긴 한 것 같았다.
“그래, 말해 주마. 어째서 네놈들이 절망을 느껴야 하는지! 어차피 알아봤자 이미 바꿀 수는 없을 터, 이미...나는 중추에 와 있으니까...!”
말을 마친 레-호트의 인형이 킬킬거렸다. 다음 순간 발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중추라 말할 정도라면 그 장소는 크고 중요한 곳이다.
황도에 그런 곳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없었다. 하지만 그 중 가장 타격이 큰 곳이 어딘지는 금방 생각할 수 있었다.
‘황궁!!’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황궁은 레-호트에게 있어 잔칫상이나 다름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순간 발린은 고개를 저었다. 황궁엔 교황을 비롯한 고위 신관들이 우글거린다.
그들의 앞에서 대놓고 움직인다면 단숨에 잿가루 신세가 될 것이다.
‘설마 그 위험마저 무릅쓰고 움직인 건가!? 레벤이 있으니 큰 문제는 없지만, 혹시나 문제가 생길지 몰라!’
대비가 충분치 못했다. 그 생각에 낯빛이 창백해지는 발린의 모습에 레-호트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래, 이제야 이해했나. 어리석은 것. 마음껏 후회해라. 수십 구의 인형! 결계! 그동안 안드로포스에게 보냈던 수많은 전력들! 이 모든 게 단지 미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무리 빨리 움직인다고 해도 너무 늦었다. 레-호트 자신은 이미 교황청에 침입해 있었다.
“오늘, 내가 드래곤의 힘을 얻는 날. 교황청은 어둠에 잠길 것이다. 너희 모두가 그림자를 두려워하다 여기서 죽고, 이 세상 전부가 오늘의 일을 눈물짓다 죽어갈 것이다!”
말을 마친 레호트의 인형이 광소했다. 거의 다 바스라져서 형체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나 그 웃음소리만큼은 여전히 악의가 살아 있었다.
“드래곤의 힘...?”
낯빛을 굳히고 있던 발린이 순간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말하는 것의 의미를 어느 정도 알아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받아들이자니 의아한 면이 있었다.
숨겨진 음모를 듣는다면 당연히 경계해야 했으나, 지금 그의 표정은 마치 우물 안 개구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레-호트는 발린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그렇다. 교황청 지하에서 재미있는 걸 하고 있더군. 그것만 있으면 이 황도도! 제국도! 전부 마왕님과 나의 것이다! 하하하하!! 나는 마왕님의 오른팔이 되어, 온 세상을 어둠으로 물들일 것이다!”
전형적인 패턴이지만 그렇기에 그만큼 무시무시한 말이다.
하지만 발린은 바로 움직이는 대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네 본체는 지금쯤 교황청의...”
“그래, 맞아. 교황청 지하의 성법진을 드디어 무력화시켰거든.”
말을 마친 레-호트는 시야를 본체로 돌렸다.
그의 가장 강력한 인형, 본체를 담은 그것들은 지금 교황청 지하의 대공동에 있었다.
츠파팟. 파직.
막대한 양의 신성력을 쓴 성법진이었으나, 애시당초 공격이나 방어를 위한 게 아니니 뚫리는 것도 금방이었다.
신성력이 아무리 어둠의 힘에게 극상성이라고는 하나, 일정량 이상의 차이가 나면 역으로 가장 잘 무너지는 힘이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 강림한 레-호트의 본체는 그 이상의 힘을 가진 몇 안 되는 존재였다.
“드디어...”
여기까지 들어오는 데 막대한 힘을 썼다. 하지만 레-호트는 그것을 손해라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 황도의 지하에 있을 때부터 구상한 계획이 완벽하게 먹혀들었다. 중간의 모든 것은 이 순간을 위한 투자였다.
‘강대한 신성력과, 그 안에서 느껴지는 활성화된 드래곤하트의 힘! 인간이라면 모를까, 내 감각을 피할 수는 없지.’
드래곤하트가 지하에 있다는 걸 느낀 레-호트는 그 순간부터 엄청난 계획에 착수했다.
수없이 많은 인형들을 안드로포스에게 던졌고, 그들은 미끼 역할에 더없이 충실했다.
이제 남은 건 일전에 느꼈던 드래곤하트의 취식, 그리고 그 힘을 기반으로 황도의 모든 생명을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드는 것이었다.
“보고 느껴라, 인간 마법사! 이제 이 몸이 얼마나 강해지는지...!”
자신만만하게 외치는 레-호트의 인형 앞에서 발린은 손에 든 걸 꺼내 보였다.
마침 그의 본체도 성법진 중앙의 수조 앞에 다다랐다.
“이제 이것만 내 손에 넣으면, 나는 실-레논도. 자-쿨카도 넘보지 못한 절대권좌에 앉는다. 오직 나만이 마왕님의 옆에서...!”
득의양양한 채 말하던 레-호트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분명 드래곤하트는 보이는데, 그 장소가 어째선지 두 곳으로 겹쳐져 보였다.
“...뭐야.”
어둠으로 물들어 깨져가는 성법진 속에서 레-호트의 당혹한 음성이 울려퍼졌다.
그 말을 한 것은 발린을 마주하고 있던 형체도 똑같았다.
두 개의 시야가 겹쳐져서인가, 왠지 모르게 두 곳 모두에 그것이 있는 것 같아 보인 것이다.
“이게...어떻게...”
“네가 찾는다는 게, 혹시 이거냐?”
발린은 형체의 앞에 환히 빛나는 백색 보석을 내밀었다.
형체, 레-호트는 조용히 손을 내밀어 흔들었다. 바스라지는 손이 빈 공간을 훑었다.
수조로 뻗은 본체의 손은 빈 핏물을 훑고, 발린을 향해 뻗은 손은 움직이다가 그대로 잿가루가 된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어떻게 된 일이긴, 미안하지만 네가 찾는 건 여기에 있는 거지.”
발린은 말을 마친 후 피식 웃었다.
한순간에 계획의 첫단추부터 산산조각난 레-호트의 얼굴이 이루 말할 수 없는 표정으로 변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편, 다다음 편도 예정된 시간에 올라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 참, 추천은 사랑입니다. 저도 얼마 전에야 반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