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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식
“예전에 온다 하던 일행 때문에...”
“아...! 그러도록 하라.”
대신 발린은 안드로포스의 핑계를 대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은 에블린이 금방 허락을 내렸다.
‘...벌써 가다니, 참 나쁜 사람이네. 그렇다고 잡을 수도 없고.’
에블린은 착잡한 미소를 지으며 가던 발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 그리고 약속했던 건 내일이나 모레 정도에 고하겠습니다. 폐하.”
“그, 그래.”
상념에 빠질 새도 없이 마지막 말을 덧붙이는 발린, 그래도 에블린은 내일을 생각하며 한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한편 황성을 빠져나가던 발린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부터 새로운 지위에 익숙해질 수는 없는 거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군.’
서로 원하는 게 있었다 해도 수 개월을 같이 있었던 동료다.
게다가 둘은 앞으로도 여러 번 만나야 할 사이.
이런 사소한 것이라도 걱정이 남는 게 당연했다.
‘지식이랑 화술, 언변. 명재상까지 모든 게 있으니 크게 걱정은 안 되지만, 그러려면 우선 나부터 열심히 해야겠지.’
생각을 마친 발린이 옆에 따라오는 아일란에게 말했다.
“안드로포스의 수색은 어떻게 됐어? 권속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
“예, 그...그게. 별다른 기척은 없다고 해요. 쥐나 박쥐, 벌레들의 시야를 빌려 확인해도 마찬가지고요.”
“...그런가.”
발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일 가능성도 없진 않았으나, 지금의 아일란에게선 딱히 그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살기 위해 온 몸을 던지는 절박함.
발린도 가져본 적 있기에 잘 아는 그 느낌이 온 몸에서 묻어나왔으니 말이다.
“그럼 너는 어제의 그 방으로 가 있어. 나는 갈 곳이 있으니까.”
명령을 마친 발린이 순간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혹시 도망치려면 도망쳐도 돼. 하지만 그 즉시 나는 너를 추적할 테고, 만약 잡히면 너는 단순 실험재료가 아니게 될 줄 알아. 몸뿐만 아니라 영혼마저도 네가 저택 지하에 숨겨둔 구울보다 더 비참하게 만들어 줄 자신이 있으니, 그 길을 선택하고 싶다면 어디 도망쳐 봐.”
실-레논에게 했던 협박과 동일한 내용이다. 하지만 아일란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그, 그럼...알았어요. 알았으니 레벤 대신관만 옆에 붙이지 말아 주세요. 그 사람은 너무 무서우니까...”
권속들도 태반이 죽었겠다. 그녀에게 발린의 말을 거역할 깜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저리 말하는 걸 보면 레벤이 무섭긴 무서웠나 보다.
“...저어. 그리고 한 가지 더...”
“한 가지?”
순간 아일란이 머뭇거리는 어조로 발린을 불렀다. 그녀는 이어서 북서편 거리에서 느껴지는 이상징후에 대해 말했다.
“거기로 향한 권속들이나 동물들의 기척이 모조리 끊겼다고? 그게 사실이야?!”
“네, 그리고 동물들이 하수도 깊은 곳은 가지 않으려고 하더라고요. 강제로 보내는 순간 피를 뿜으며 죽기도 하고.”
“...그렇단 말이지.”
그동안 내내 죽을 쒔는데, 뱀파이어를 이용하니 하루만에 레-호트의 꼬리를 잡은 셈이다.
발린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강한 적이라도 쓰기에 따라 좋은 수단이 되는 걸 짐작한 것이다.
‘이거 꽤나 쓸모있는데. 이 참에 완벽히 수하로 만들어 봐? 황금혈의 뱀파이어이니만큼 황제의 명에도 면역이 있을 테고...기본적인 정신력도 약한 것 같으니...’
생각이 길어지려던 찰나, 발린은 휘휘 고개를 저었다.
기껏 찾아낸 단서다. 여기서 생각만 하다 놓칠 순 없었다.
“좋아, 그럼 너는 들어가고, 가면서 가능하다면 레벤을 불러 데려오도록 해.”
“...그, 그럼 제 목숨은?”
“지금은 살려두도록 하지. 뱀파이어.”
발린은 얼굴을 굳힌 채 대답했다.
그래도 처음 대할 때보다는 나은 편이다. 아일란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쓸쓸히 멀어지는 모습은 뭇 남성들의 심금을 울렸으나 발린에게 있어선 남의 일이었다.
아무리 겉모습이 아름다워도 독이 든 꽃에 끌릴 리 없으니 말이다.
“여하간에 문제가 있다면 확인해 봐야겠지. 먼저 가 볼까.”
혹여 레벤을 기다리다가 저들의 음모가 성사되기라도 하면 그것만큼 큰일도 없다.
발린은 제 실력을 발휘해 몸을 날렸다.
***
제국 북서편 거리는 대체로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자리다.
평소였다면 내일을 위해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찍 들어갔겠으나, 오늘만큼은 모두 축제를 즐기느라 번화가에 나가 있었다.
덕분에 지금의 거리에는 누구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거기까지라면 평범한 거리라 할 수 있겠으나, 이상한 점은 다른 감각도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는 점이다.
놀랍게도 이 주변은 검은 어둠으로 완전히 막혀 있었다.
소리도, 빛도 들어오지 않는 완전한 어둠, 그 안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건 짙푸른 오러블레이드 한 자루 뿐이었다.
투콰앙!
오러블레이드가 씌인 건 성인 장정만한 거검이다.
그것이 움직일 때마다 얼핏얼핏 주변이 비쳐 보였다.
푸른 검을 든 건 강직한 인상의 은발 남자다. 나이는 30대 초반쯤 되어 보였다.
한편 맞은편에 나타나는 건 검은 피부의 사람들이다.
오징어 먹물이라도 뒤집어쓴 듯한 모습이나, 그 주변으로 모이는 건 명백한 어둠의 마나였다.
“이번엔 제대로 작정을 하고 왔구나...! 내 공격을 이 정도까지 막아내다니!”
은발남자, 안드로포스는 마주선 형체들을 향해 이죽거렸다.
어차피 대답은 기대하지 않았다. 처음 저들의 습격을 받을 때부터 쭉 그래왔다.
하지만 이번에 작정하고 왔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서른 기가 넘는 검은 사람이 올 리 없었으니 말이다.
“결계까지 제대로 쳐 주다니, 이거 고마워서 몸둘 바를 모르겠군. 덕분에 마음껏 날뛸 수 있게 됬으니 말이다~!”
안드로포스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검의 마나를 모았다.
스팟!
검강, 발린과 맞서 싸울 때 내쏘았던 그것이 훨씬 강한 힘으로 발휘되었다.
정면으로 맞부딪히면 엄청난 파괴력을 감당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검은 형체들은 일제히 뭉쳐 자신들의 병장기를 내밀었다.
투쾅!
강렬한 마나의 폭발이 있은 후, 형체들은 멀쩡한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검은 무기가 일제히 방패로 변해 형체들을 지킨 것이다.
그랜드마스터의 경지가 내쏜 검강! 그 파괴력은 분명 천지를 뒤흔들만큼 엄청났다.
하지만 마주선 형체들도 그에 못지 않았다. 레-호트가 이번엔 작심하고 정예들을 내보낸 것이다.
혹시나하던 안드로포스의 얼굴이 그걸 확인하자마자 새하얗게 질렸다.
팔리아스를 보낸 뒤, 그는 단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쫓겨야 했다.
덕분에 현재 안드로포스의 컨디션은 최악! 사실상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걸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에 불과했다.
“크윽...!!”
이를 악무는 그 앞에서 형체들은 일제히 흑색 병장기를 겨눴다.
어둠으로 만들어진 병장기들은 시시각각 형태를 바꾼다.
단순히 형만 바뀌는 것도 성가신데, 그 강도와 위력까지 발군이니 저것만큼 골치아픈 게 없었다.
‘여기서 끝인가...!!’
안드로포스는 그렇게 되뇌이며 거검을 고쳐 잡았다.
그래도 자신 덕분에 선발대전이 끝날 때까지 발린은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그만큼 이 녀석들이 꾸미는 음모는 거대했다.
“팔리아스...녀석에게 더 가르침을 주지 못한 게 아쉽군.”
말을 마친 안드로포스가 땅에 발을 내리찍었다.
쿵!
다음 순간, 무언가를 감지한 형체들이 일제히 사방에서 공격해 들어갔다.
하지만 이미 안드로포스의 검법은 시작된 뒤였다.
기존의 무겁고 강인한 검류에 스며든 팔리아스의 균형이 절묘하게 형체를 이룬다.
다음 순간 그를 중심으로 보이지 않는 공간이 펼쳐졌다.
그랜드마스터가 되면서 만들어진 안드로포스만의 영역이다.
무거움의 힘이 고르게 퍼지면서 만들어진 공간, 굳이 이름붙인다면 검역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안에서 안드로포스의 검은 모든 시간과 공간을 점한다.
마법도, 신성력도, 어둠의 마나도. 심지어는 보다 강력한 힘의 검도 예외는 없다.
그것이 그랜드마스터가 된 그의 고유 능력이었다.
“...!!”
영역에 먼저 들어갔던 형체의 창날이 순간 수백 조각으로 썰렸다.
만약 곧바로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면 몸까지 같이 조각났을 것이다.
“...하압!”
우렁찬 노호성과 함께 일순 거대한 궤적이 형체들 사이를 그렸다.
안드로포스의 검역은 놀랍게도 형태의 변형 가능했다.
그것을 이용해 엄청나게 리치가 긴 횡베기를 선보인 것이다.
“!!!”
“...”
침묵하던 검은 형체 몇 구의 허리가 일제히 갈라졌다.
그것으로 끝. 저 형체들은 이제 어둠에 물든 단순한 시체다.
실로 무시무시한 위력이다. 그랜드마스터의 검기와 검강을 모조리 막아낸 형체도 이 검역만큼은 버텨내지 못했다.
하지만 모든 것엔 저마다 장단점이 있는 법. 검역의 경우엔 엄청난 양의 마나와 체력이 그 대가였다.
“...크흑!”
다음 검을 휘두르려던 안드로포스가 비틀거렸다.
천천히 쌓이던 피로가 결국 몸 전체를 잠식한 것이다.
“!!!”
빈틈을 감지한 흑색 형체들이 빛살처럼 쇄도했다.
사방이 어두운 가운데 그러니 마치 공간 전체가 안드로포스를 치는 것 같았다.
“흐읍!”
안드로포스는 온 힘을 다해 검역을 펼치려 했다.
그것이라면 몇 번이고 저들이 다가와도 막을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칠 대로 지친 몸은 그걸 허락지 않았다.
콰득!
팔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안드로포스는 순간 고개를 돌렸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끝도 없이 혹사당한 근육이 결국 한계를 맞이한 듯했다.
“...이런.”
안드로포스는 신음성을 내뱉으며 마나를 이용해 억지로 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간발의 차이로 오른팔이 어둠에 뚫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츠팟! 콰작!
“!!!”
어떻게든 목숨은 구했으나, 검은 형체는 여전히 수십 기가 넘게 남아 있다.
마지막을 직감한 안드로포스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끝인가...’
다행히 선발대전은 성공리에 끝났고, 팔리아스도 무사히 저들의 타겟에서 벗어났다.
이 다음은 은공, 발린이 알아서 해 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아...”
안드로포스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밤하늘마저도 어둠에 가려진 지금,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과거회상밖에 없었다.
소드마스터가 되기까지의 험난한 세월.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에 두려워하던 그. 그리고 발린이 보여준 검술이 순서대로 떠올랐다.
“은공, 덕분에 여한 하나 안 남기고 가오이다. 부디 꿈을 이루소서.”
그랜드마스터의 경지도 뚫었고, 진전을 물려줄 만한 제자도 가르쳐 보았다.
정말이지,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필요치 않았다.
그렇게 느낀 순간, 검은 형체들이 유리 깨지는 소리를 내며 돌격해 왔다.
최후의 일검을 휘두르려던 안드로포스가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저 형체들은 어떤 소리도 내지 않고 공격해 왔다.
한데 이제 와서 난데없이 유리 깨지는 소리라니?
그렇게 느낀 순간이다. 등 뒤에서 큼지막한 뇌전 다발이 마치 산사태처럼 검은 형체들을 휩쓸었다.
파지지직! 파지지지직!!
“!!!”
“!!!!!!”
번개의 힘은 신성력에 가장 근접했으면서도 압도적인 파괴력을 지닌 힘.
그걸 다발째로 우수수 얻어맞았으니 성할 리 없었다.
쿵. 털썩. 파스슥.
연신 쓰러지는 형체 뒤로 발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른손엔 찬란 빛으로 만들어진 검, 왼손엔 빛을 뿜어내는 무언가를 손에 쥔 채였다.
“으, 은공.”
“겨우 찾았군. 고생했습니다. 안드로포스. 덕분에 황제선발대전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어요.”
발린의 칭찬에 안드로포스는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도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그의 몸은 한계였다. 거기서 긴장을 푸니 더 배겨낼 수 있을 리 없었다.
털썩.
쓰러지는 안드로포스를 부축한 발린이 편안히 그를 눕혔다.
다음 순간, 늘어서 있던 형체들이 일제히 어둠이 되어 공격해 왔다.
“너희들...”
발린은 분노로 가득 찬 눈동자를 돌렸다.
바로 눈 앞까지 검은 칼날이 왔음에도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여기서 살아나갈 생각은 접어둬라. 너희 모두!”
다음 순간 발린의 손에 들린 드래곤하트가 빛을 발했다.
방금 전까지 기세등등하던 어둠도 그 앞에서는 한낱 먼지에 지나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의 마지막 편이예요.
오늘도 작품 후기까지 따라와주신 여러분께 무한한 감사를. 덕분에 열심히 연재하고 있습니다.
한데 조만간 반강제로 치과 진료가 잡히게 되었는데, 성실연재 하려면 더욱 노력해야겠군요.
아마 이번주 금요일이랑 다음주가 고비일 것 같은데, 그 때는 한 편이나 두 편으로 줄어들지 모른다는 점. 미리 사죄드리는 바입니다.
여하튼간에 오늘도 잘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도 이 후기에서 뵐수 있기를 빌며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 여담인데 원고료 쿠폰이 777장을 찍었더라고요, 행운의 표시인 것 같아서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어째 일은 불행이지만 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