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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식
다음 날 황궁은 날이 밝기도 전부터 전 인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갓 들어온 말단 하녀부터 선대 황제를 보좌하던 시종장까지 누구도 예외는 보이지 않았다.
부엌은 전날밤부터 불이 켜진 채 사람들이 들락거렸고, 병사들은 항상 데리고 다니던 여유를 모조리 집어던졌다.
남은 생 동안 제국을 이끌어갈 새 황제의 즉위식! 평생에 한 번 있을까말까한 국가의 중대사다.
다른 땐 몰라도 이 순간만큼은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었다.
모두가 열심히 노력한 덕일까, 다행히 황제 즉위식은 예정대로 준비되었다.
이 순간을 위해 한 달에 걸친 선발대전이 진행된 만큼 그 스케일은 지금까지 본 것 중 최고로 컸다.
날이 밝자 귀족들이 하나둘씩 황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파벌끼리 모여 제국의 미래에 대해 떠들었다.
이번 선발대전에서 변수가 워낙 많아진 만큼 의견 교류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이로써 제국도 다시 움직이는 건가.”
“앞으로 많이 바빠지겠습니다. 워낙 대단한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서 말이죠.”
말을 마친 한 귀족이 슬쩍 홀 전체를 훑었다.
이미 연회장의 1층은 물론 2,3층까지 수많은 인영으로 가득했다.
인원의 구성엔 카딤 제국은 물론 타국의 귀족들도 드물지 않게 보였다.
새로운 황제를 보고 평하는 것은 외교에 반드시 필요한 만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귀족이 찾던 중요인물, 발린과 레벤 등을 비롯한 최고급 vip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나도 날이 밝자마자 등청해서 찾아봤는데 역시 허탕만 쳤어. 중요한 인물이니만큼 쉽게 모습을 나타내진 않겠다는 것이겠지.”
“으음.”
옆에 다가온 다른 이의 말에 해당 귀족은 짧게 신음성을 냈다.
하기야 그런 인물들은 지금 제각기 플랜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폭풍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
그 위치까지 거저 오르진 않았을 테니, 아마 자신들로서는 상상도 못할 그림을 그리고 있으리라.
귀족은 알지 못했다. 그 vip중 한 명인 발린이 제 방에서 난처한 기색을 띄고 있음을 말이다.
“하룻밤 사이에 권속이 전부 사라졌다고?”
“...예, 예.”
아일란은 지친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하룻밤내내 묶여 있었음에도 외모엔 별다른 흠이 생기지 않았다.
적어도 남들 눈 앞에 내놓을 수는 있는 모습.
하지만 발린이 중요하게 여기는 건 그게 아니었다.
“그게 말이 돼? 네 권속들, 기존에 데려온 놈들에 공작가의 식객까지 있다며, 그 인원이면 양도 질도 어지간한 군대 급인데...”
발린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 생각해 둔 대로 권속들을 풀려 했는데, 그 사이 아일란의 답변이 달라진 탓이다.
“하지만 사실이예요. 저택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진 모르겠지만...거기 있던 권속들의 생명반응이 아예 끊겨 버렸다구요.”
“...으음.”
상식적으로 그 정도나 되는 양과 질의 권속들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는 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일란은 몇 번이고 추궁해도 같은 말을 했다.
실험 재료로 쓰겠다는 협박에도 그러는 걸 보면 무언가 있는 건 틀림없었다.
‘설마 레-호트가 먼저 그 곳을 잠식한 건가?’
고민하던 발린은 문득 거기에 생각이 미쳤다.
확실히 가능성없는 이야긴 아니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하면 역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는 가설이었다.
레-호트가 움직였다면 당장 어둠의 마나가 황도 전체에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젯밤은 물론 오늘까지 그런 걸 느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론은 두 가지다. 레-호트 외의 다른 누군가가 밤 사이 저택의 권속들을 쳤거나, 아일란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
‘우선 저택 안을 확인해봐야겠군. 즉위식까진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괜찮겠지.’
생각을 마친 발린은 즉시 레벤에게 아일란을 맡겼다.
지금 상황에서 아일란을 관리할 수 있는 건 그녀뿐이이니 하는 수 없었다.
황궁을 나선 발린은 그대로 공작가 저택으로 향했다.
기이하게도 저택의 겉모습은 멀쩡한 그대로였다.
‘어라?’
어둠의 마나도, 핏자국도 없이 빗장걸린 저택. 안편의 인기척이 없다는 게 이상하다면 이상한 점이었다.
의아함을 느낀 발린은 저택 안으로 들어갔고, 곧 놀라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이건!”
담장 안의 정원에는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흔적들이 가득했다.
흔적을 살피던 발린은 이내 그것이 창날의 흔적이라는 걸 눈치챘다.
‘에이블 공작...!’
정황을 깨달은 발린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중앙 성채로 향했다.
역시나 그 곳엔 발린의 추측을 확인시켜줄 시체가 있었다.
“역시나.”
지하 연무장의 구울들은 역시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조리 온 몸이 갈려 뼛조각과 미라로 되돌아간 것이다.
발린은 천천히 벽과 바닥의 흔적들을 셌다.
눈에 뜨인 것은 다섯, 아니면 여섯 개 정도의 패인 자국이다.
그 이상은 분별할 수 없었으나, 오차는 대략 두어 개 정도.
장내의 크기는 거의 성 하나만큼 크다. 이 정도가 가득 찰 정도면 최소한 이천 마리 정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을 여덟 번의 창질로 끝낸 셈이다. 에이블 공작의 무위가 얼마나 대단할지 얼추 짐작이 갔다.
“...으음.”
이만한 능력자가 뱀파이어의 편에서 벗어났다면 틀림없이 엄청난 성과다.
허나 막상 그걸 일구어낸 발린의 표정은 그리 편치 않았다.
설마 벌써부터 이렇게 극단적인 행동을 보일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한 것이다.
‘게다가...’
발린은 문득 루덴스 공작가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실-레논, 정확히는 그 곳에 있었던 마왕군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 때 자신은 에이블 공작에게 마왕군의 협력자라고 소개했다.
그렇다면 추후 공작이 마왕군을 향해 움직일지도 몰랐다.
“다른 때야 상관없다지만, 지금 상황에 그렇게 되면 조금 곤란한데...”
발린은 난감한 기분에 입맛을 다셨다.
어차피 그는 이미 뱀파이어, 그것도 먹음직스러운 황금혈의 뱀파이어다.
뱀파이어는 마왕군의 철천지 원수, 거기엔 공작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당연히 마왕군에게 무턱대고 가 봤자 죽음을 면치 못할 게 뻔했다. 그걸 예상하고 그렇게 말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레-호트가 황도에 온 이상 그리 간단히 대처할 수 없었다.
발린이 아는 레-호트라면 틀림없이 공작을 그냥 없애지 않을 것이다.
소냐에 버금가는 좋은 재료가 손에 들어왔는데, 안 쓸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여러모로 곤란하게 됐는걸...”
다른 곳을 모두 둘러본 발린은 미련없이 저택을 빠져나왔다.
확인할 건 전부 확인했으니 더 있다가 오해를 살 이유가 없었다.
‘즉위식도 참가해야 하고, 이제 돌아가야 하니 안드로포스도 데려와야겠다.’
선발대전이 끝났으니 며칠만 더 지나면 레-호트가 끼어들 여지도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안드로포스는 아마 스스로 이 편에 합류할 것이다.
하지만 발린은 그 때까지 넋놓고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당장 드래곤의 마법에 대한 탐구부터 시작해서 할 게 태산이었다. 레-호트의 인형들에 대한 위험성도 있는 만큼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 했다.
“즉위식은 오늘 밤까지 파티가 이어진댔지...”
발린은 황궁 지하에서 확인했던 복도를 생각했다.
굳이 그녀가 시종들에게 이야기를 들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
해가 중천을 넘어가자 슬슬 거물급 귀족들이 자리에 보이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새로운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는 자리였다.
허나 그 이면에서는 수없이 많은 귀족들이 보다 많은 걸 얻어가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가장 큰 먹잇감은 역시 선발대전을 통해 드러난 잠룡들.
개중에서도 가장 먹음직스러운 게 발린이었다.
“축하하오! 발린 공! 예전에 귀족회의에서부터 남달리 눈이 빛나더니만, 역시는 역시나군! 내 공이 이길 줄 진작부터 예상했소이다!”
통통한 살집의 중년귀족이 십년지기 친구처럼 살갑게 말을 붙여왔다.
귀족회의 당시엔 랜돌프의 편에 서서 열심히 반대 의견을 냈던 친구다.
‘내 기억에 남아 있을 정도면 어지간히 심하게 말했나 보군.’
그 때 모인 귀족들은 거의 삼십여 명 가까이 되는 대인원이다.
주로 의견을 낸 랜돌프도 아닌데 이 정도라는 건 그만큼 많은 말을 했다는 이야기.
자연히 그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가볍게 미소지은 발린이 입을 연 순간, 중년 귀족이 어엇 소리와 함께 밀려났다.
“발린 테오도르 후작?”
대신 자리를 차지한 것은 척 보기에도 힘 좀 쓸 것 같은 거한이다.
“우웃. 이보시오! 내가 먼저 이야기를 나누는 중 아니오!”
“당신이 무예에 대해 잘 안다면 얘기에 끼워주도록 하지.”
“히, 히익!”
날카롭게 풍겨나오는 예기에 중년귀족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공작이든 평민이든간에 마나를 수련하지 않은 이상 무력이 보잘것없는 건 똑같다.
그러니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무관 앞에서 일반 귀족들은 약해질밖에 없었다.
“발린 공,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그 검은 도대체 무엇이오? 대결해달란 말은 하지 않을 테니 그것만 답해 주시오!”
“본인도 마찬가지요. 각고의 노력 끝에 얻은 깨달음이겠으나 부디 약간이라도...”
한 명을 시작으로 우후죽순처럼 모여드는 무인들.
하나같이 발린의 에테르 소드를 보고 감명받은 사람들이다.
오러블레이드가 아닌 다른 것으로 오러블레이드급 위력을 낼 수 있다!
그 가능성을 직접 보여준 발린이니만큼 무인들은 절박하기 짝이 없었다.
“그건...”
발린은 살며시 말끝을 흐렸다.
순수한 검술이라면 약간이나마 단서를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에테르 소드는 말 그대로 마법의 영역.
그 묘리를 설명해준다고 해도 이들이 해낼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초식동물에게 아무리 육식을 강요한다 한들 고기를 먹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곧이곧대로 설명해 봐야 제대로 들을 사람도 아니고, 어차피 별 관계도 없으니 대충 둘러대자.’
생각을 마친 발린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건 스승님께서 가르쳐 주신 비전 중 하나라서...죄송합니다.”
“역시 그런가...! 하긴 그 정도의 강도를 지닌 힘이니 어쩔 수 없겠지.”
의외로 무인들은 순순히 납득했다.
줘도 받지 못한다는 사실, 그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아...”
벌써 일곱 번째 인파다. 간신히 무인들을 쫓아낸 발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육체와 정신 모두 경지를 이루었으나, 이 피로는 그와 관계없이 몰아쳤다.
화술이나 제왕학 등을 배우면 해결될 일이나, 그런 데 관심이 있었다면 이미 황제의 위에 앉았을 것이다.
다행히 체력을 키워 뒀기 망정이지, 전생의 세계였다면 이쯤 해서 구석진 의자를 찾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이젠 다 옛 추억이네. 참 내. 시간이 뭐 이리 빠른지.’
발린은 젊은 시절의 자신이 보이는 착각에 한동안 구석자리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둔 그림자 속에서 웅크린 자신이 보이는 느낌.
피식 웃던 발린의 눈매가 순간 흔들렸다.
‘어...?’
놀랍게도 그 모습이 지금과 그다지 차이가 없었던 탓이다.
흠칫 놀랐던 발린은 이내 안정을 찾았다. 저건 옛날의 자신이자 현재의 자신이다.
회귀를 했으니 당연히 모습이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래도 옛 기억 때문에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잠시 잊어버렸던 것 같았다.
‘그렇지, 나는 회귀를 했고. 이렇게...’
발린은 새삼 목에 걸린 브로치의 감촉을 무겁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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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편은 잠시 후 올라갈 예정이오니, 잠시 쉬시는 동안 추천 한 번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