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5 / 0264 ----------------------------------------------
퍼즐 맞추기
마족의 출현으로 뒤숭숭해진 황도에서 축제 분위기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거리엔 병사들이 삼삼오오 조를 짜 돌아다녔고, 조금이라도 수상한 시민은 어김없이 검문을 받아야 했다.
물론 꽤나 많은 반발이 있었으나 대다수는 강화된 검문에 순응했다.
마족의 등장이라는 것은 그만큼 커다란 사건이었다.
덕분에 레벤의 등장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꿀벌집도 그럭저럭 여유를 되찾고 있었다.
새로 생긴 단골손님 여럿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긴 했으나, 조용히 대화를 나눌 만한 여유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따라와. 우선은 방에 올라가서 얘기하자.”
하지만 발린은 안심하는 대신 팔리아스를 데리고 소냐의 방 쪽으로 향했다.
아무리 취했다고는 하나, 지금부터 들을 말은 거기서 떠들 만한 게 아니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방에 들어간 발린은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는 걸 확인한 뒤 문을 봉했다.
팔리아스의 얼굴은 일전 경기장에서 본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며칠 사이에 얼마나 변했겠느니마는, 지금의 황도는 그 사이에도 무슨 일을 당할 수 있을 만큼 험악했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우선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팔리아스.”
침대 구석에 걸터앉은 발린은 그렇게 말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말만큼은 티끌 하나도 섞이지 않은 진심이었다.
팔리아스는 발린과 함께 영웅 중에서도 가장 선두에 설 수 있었던 최강급의 검사다.
당장 만류의 검만 해도 팔리아스의 검법을 베이스로 하여 이루어져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만약 그가 마왕군이나 노스트라 제국의 손에 넘어간다?
최소한 삼공작급의 적이 하나 더 탄생하는 셈이다.
겨우 실-레논을 처치했는데 다시금 전력이 복구되다니, 그것만큼 끔찍한 일이 따로 없었다.
“마탑에서는 제때 출발했다고 했는데, 그동안 우리가 어디 있는지 몰랐던 거야?”
“아녜요. 에블린 누나. 황도에 도착한 건 첫 라운드가 시작될 즈음이었어요.”
팔리아스는 에블린의 말에 대답하며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풀어놓았다.
발린은 대화를 자신에게 돌리는 대신 팔짱을 끼고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어차피 황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물어볼 건 자신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주제로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이상 굳이 말을 돌릴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계속 여관에서 수련만 했어요. 가끔 스승님께서 돌아오셔서 부족한 점을 보완해 주시고, 새로운 과제나 가르침을 주시기도 하시고요.”
“흠...”
팔리아스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황도에 도착한 둘은 북쪽 시가지의 민가 하나를 빌렸고, 거기서 계속 검술 수련에만 열중했다는 것이다.
집을 빌린 안드로포스는 팔리아스에게 엄히 경고했다.
혹여 자신의 허락 없이 집 밖으로 나가면 그 순간 우리 둘의 사제관계는 깨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장난기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진지한 명령에 팔리아스는 겁을 잔뜩 집어먹은 채로 따랐다.
그가 스승의 명대로 집 안에서 수련에 몰두하는 동안 안드로포스는 하루종일 바깥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발린이 마지막으로 볼 때만 해도 안드로포스는 발린의 명 못지 않게 팔리아스를 애지중지했다.
그의 재능은 하늘이 내려 준 신골, 검술에 관련해서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게 팔리아스였다.
그야말로 최고의 재목! 자신의 검술을 거기에 새길 수 있다는 것은 스승으로서 최고의 행복 중 하나였다.
한데, 그 팔리아스마저 내팽개치고 하루종일 바깥을 나돌아다녔다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그렇게 느낀 발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블린도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양미간 사이를 좁히며 물었다.
“잠깐만, 안드로포스 공이 너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움직였단 말이야? 그 분께서 뭘 하셨는지 들은 건 없고?”
“저도 그건 모르겠어요. 몇 번 여쭤본 적은 있지만, 그 때마다 스승님께선 너는 알아선 안 된다고만 말씀하셨기에...”
“다른 특징은?”
이야기를 듣던 발린이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팔리아스는 잠깐 생각하다가 몇 가지를 더 말했다.
“가끔 돌아오실 때 옷에 얼룩 같은 게 묻어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그리고 검을 좀 많이 사 놓으시기도 하셨어요. 제가 본 것만 서른 자루가 넘는데, 순식간에 사라지더라고요. 아, 맞아. 잔상처도 조금 느신 걸 봤어요. 흉터라던가, 생채기 같은 거요.”
“으음...!”
거기까지 들은 발린은 낮게 신음성을 냈다.
얼룩이야 먼지나 때가 끼었다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랜드마스터라 해도 일상의 작은 흔적 하나하나까지 신경쓸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허나 다른 건 아무리 생각해도 싸움의 흔적이었다. 그것도 굉장히 격렬한 싸움의 흔적!
발린은 천천히 안드로포스의 행동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이미 팔리아스와 같이 지내며 그랜드마스터의 경지가 어떤지는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그가 어째서 그런 행동을 했는지도 얼추 짐작이 가능했다.
‘그랜드마스터의 오러를 감당할 수 있는 검은 최대한으로 잡아도 B급 이상 아티팩트, 일반 철검으로는 당연히 몇 분 안가서 터질 테지.’
안드로포스의 검은 한눈에 봐도 묵직함이 느껴질 정도의 거검.
기억이 희미하긴 하나, 그것도 분명 명검의 축에 드는 것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정도의 성능으로는 그랜드마스터의 오러를 버텨낼 수 없을 터.
아마 여분의 검을 그렇게 많이 산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인간은 계속해서 성장하지만 병장기는 그럴 수 없으니...어쩔 수 없는 일이지.’
거기까지라면 그냥 그러려니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채기와 잔상처가 생겼다는 건 이야기가 달랐다.
어느 정도 생각이 필요한 앞의 행동과는 달리, 그게 나타내는 결론은 간단명료했다.
그랜드마스터가 상처를 입을 정도의 강력한 적이 이 황도에 있다는 것!
하기야 실-레논과 노스트라의 황테자와 2황녀까지 여기 있을 정도다.
이 정도야 더 이상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럼 안드로포스는 실-레논의 수하들과 싸운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아퀴가 맞아떨어지긴 하지만...’
발린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에블린 님. 잠시만.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습니다.”
“네? 아, 네.”
여러 가지를 더 묻고 있던 에블린이 발린에게 대화의 턴을 넘겼다.
“팔리아스, 혹시 힘들거나 피곤하진 않지?”
“네. 괜찮습니다.”
안드로포스 밑에서 수행을 성실히 받은 덕일까, 팔리아스는 꾀죄죄한 몰골을 하고서도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적어도 피곤해서 대답을 잘못하진 않을 것 같군. 그렇게 판단한 발린이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그럼 몇 가지만 더 물으마. 우선 첫째로 안드로포스는 어째서 이제야 너를 보낸 거야? 그것도 너 혼자만.”
“더 이상은 감당할 수 없다고 하셨어요. 자세한 건 여기 편지에...”
“편지?”
깜짝 놀란 발린의 눈에 팔리아스가 들고 있던 종이가 보였다.
처음 인사할 때 양손에 꼭 쥐고 있던 바로 그 종이였다.
팔리아스는 그 종이를 내밀며 고개를 푹 숙였다.
“여기요. 안드로포스 스승님께서 꼭 발린 님께만 보여드리라고...그 다음은 발린 님께서 판단하실 거라 하셨어요.”
“...!!”
발린은 황급히 편지를 받아들었다. 안드로포스가 자신에게 남긴 편지!
이것이라면 지금껏 안드로포스가 보인 행동이 해명될지도 몰랐다.
‘우선은 어째서 합류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것부터!’
종이를 넘기자 단정한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발린은 한 글자도 허투루 살피지 않고 주욱 읽어내려갔다.
“어디 보자. 우선 말씀드릴 건 죄송합니다...”
첫 부분은 팔리아스를 자신에게 보낸 것에 대한 사과였다.
선발대전으로 신경쓸 게 많은 발린에게 폐를 더 끼치게 되어 이루 말할 수 없이 미안하다는 말.
읽던 발린으로서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당장 안드로포스가 미리 합류하기만 했어도 고민거리가 절반으로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사과라니, 화도 나지만 한편으로는 피식하는 웃음도 배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편지 내용을 읽는 사이 그 웃음은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거기엔 안드로포스가 처음부터 만난 적들, 그리고 그가 황도에서 무슨 일을 해 왔는지가 적혀 있었다.
“어둠의 마나를 쓰는 적들...”
발린은 꿀꺽 침을 삼켰다.
이미 실-레논을 직접 본 덕에 어둠의 마나를 쓰는 적이라 해도 별로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황도에 온 다음부터의 일들.
안드로포스는 황도의 곳곳에서 음모를 꾸미는 적들을 격파했는데, 그 중 어떤 적들에게선 공통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덧붙이고 있었다.
‘북쪽 무인 가문들의 저택이나 기사단 병영 등지에서도, 서편의 은행가나 정보 길드의 배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항상 한 명 이상씩은 온 몸이 회색으로 변한 적들이 보였는데, 그들의 무력은 어찌된 게 개개인이 소드마스터 상급을 능가했습...’
“왜 그런다냐? 글씨를 모르니 알 수 없다냐...”
옆에 다가왔던 소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편으로 고개를 돌린 발린의 눈동자가 빛났다.
소냐의 경지가 소드마스터 최상급이라고는 하나, 그건 그녀가 묘인족인 데다 케틸 공작에게 가르침을 받아서 그렇다.
그렇다면 그녀와 안드로포스가 일대일로 붙는다면 어떨까?
발린은 둘 모두와 싸워 본 경험이 있었고, 그걸 통해 시뮬레이션을 할 수 있었다.
그 결과는 당연히 백전백패! 소냐가 생채기나 자국 하나 정도는 낼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이상은 불가능했다.
‘흉터와...생채기들...’
그 의미를 다시금 되새긴 발린이 꿀꺽 침을 삼켰다.
안드로포스가 편지에 쓴 게 맞다면, 그 회색의 인간들은 전부 소드마스터 최상급의 인물이라는 말이었다.
‘실-레논에게 그만한 수하들이 있었나?’
아니다. 단연코 아니다. 발린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만한 수하가 없다는 건 아니다. 실-레논은 드래곤으로서 엄청난 군세를 거느렸고, 그 안엔 소드마스터 최상급의 마족들도 꽤나 있었다.
하지만 그 녀석들은 대장벽 남쪽에 있지, 황제선발대전이 벌어지는 여기에 있을 리 없었다.
실-레논의 주력은 수없이 많은 종의 괴수들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발린은 그 회색 형체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마족들을 없애 왔지만, 그 회색 인간들만큼은 절대로 잊을 수 없었다.
‘레-호트! 레-호트의 인형들이다! 그 자가 인형들을 보낸 거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 황도는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위기에 처한 셈이다.
레-호트의 주된 능력은 타인을 어둠에 잠식시켜 인형으로 만드는 것.
그렇게 된 인형들은 고스란히 레-호트의 하수인이 된다.
뱀파이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영혼까지 산산조각낸다는 점에서 한층 더 악랄한 수단이었다.
권속과 달리 레-호트의 인형들은 일정 거리 이상으로 나갈 수 없다.
그렇기에 그 인형들이 황도에서 발견되었다면, 이는 레-호트가 이 곳에 이미 와 있다는 뜻이었다.
실-레논이 지금 저 꼴이라 망정이지, 만약 그가 멀쩡했다면 발린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놈들을 이기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도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 한 번 끝까지 읽어볼까?’
거기까지 생각한 발린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진정했다.
세상은 넓고 마족의 수는 끝도 없이 많다.
그 중 레-호트처럼 인형을 부리는 마족이 있을지도 몰랐다.
확실하지 않은 것에 무턱대고 그렇다는 말을 해 버리는 순간 함정에 걸리는 것이다.
이는 그런 식으로 수많은 적을 낚아 본 발린이 몸에 체득한 교훈 중 하나였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편은 잠시 후에 올라올 예정이오니, 그 사이 추천 하나만 넣어주시고 쉬고 계시면 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