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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벤의 비밀
“드래곤의 마법...? 미안하지만 아닌데?”
발린은 마나에 한 차례 더 힘을 주며 가까이 다가갔다.
이걸로 실-레논이 순순히 불 거라 생각진 않는다. 하지만 최소한의 위협 용도는 충분히 달성할 것이라 확신했다.
“...언령을 배운 게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역시나 실-레논의 반응이 격해진다. 순간 간신히 억누르던 폭주가 한 차례 몸을 진탕시켰다.
“언령으로 마나를 제어하는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것들을 동시에...! 커헉! 컥! 쿨럭!”
기침을 하는 실-레논의 입가에서 검게 죽은 피가 흘러나왔다. 지금도 폭주가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다.
제어력을 잃은 어둠의 마나는 이제 적의 공격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것을 어느 정도 막아 줄 드래곤하트는 발린이 칼로 찔러 망가뜨린 지 오래.
에테르까지 폭주에 합세했으니 사실상 살아있는 게 기적이었다.
정신이 흔들리는 실-레논을 향해 발린은 배에 힘을 주고 목소리를 냈다.
“말해! 레벤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지금 말하면 순순히 죽여 주마! 허나 그렇지 않는다면 살과 뼈를 분리하고, 네 몸 전부를 하나하나 남김없이 발라내어 우리의 병장기로 쓰겠다! 죽은 뒤에도 안식을 얻지 못하도록 영혼을 조각내어 시체에 박아넣고, 그것을 누대에 걸쳐 써 주마!”
마나가 가득 담긴 협박이 노호성처럼 방 안을 뒤흔들었다.
허나 더욱 무서운 건 그 내용! 육신은 모조리 병장기로 쓰고 영혼을 산산조각내어 제각기 깃들게 하겠다는 협박이다.
자신의 육신이 된 아티팩트에 영혼이 들어가면 그것은 그대로 거기에 묶여 고통받게 된다.
영혼은 본디 육신에 있어야 할 것, 그것을 피와 살 대신 병장기에 넣으니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렇게 고통받는 영혼은 계속해서 마나를 뿜어내게 되는데,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아티팩트의 능력을 더욱 늘려준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세리아가 가지고 있던 아티팩트.
5클래스 마법사를 죽이고 그 영혼을 구속시킨 아티팩트 덕분에 세리아는 불의 마법사 행세를 하 수 있었다.
하물며 드래곤의 영혼을, 그것도 산산이 조각내어 제각각의 물품 안에 집어넣는다?
안 그래도 조각난 영혼을 병장기에 넣는다면 그 고통은 얼마나 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게다가 그 대상은 무려 자신의 육신을 가공한 병기!
이는 영육 모두 안식은 커녕 사실상 영원히 고통받게 하겠다는 선포였다.
단순히 말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걸 할 의지도,능력도 있기에 그만큼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허, 크. 크하하하하하핫!!!”
방 안을 덮은 위세에 눈을 멀뚱히 뜨던 실-레논이 순간 미친 듯 웃었다.
방금의 위세는 마족에게서도 보지 못한 강렬한 위엄을 가지고 있었다.
그 힘은 이미 했던 각오를 순간 흔들어놓을 정도였다.
자-쿨카와 레-호트 외에 이런 느낌을 받은 건 천 년만의 일.
그런 인간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역시 레벤의 일 때문에 온 거냐? 인간 마법사?”
“그래.”
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실-레논의 몸을 압박하는 마나에 힘을 주었다.
실제적인 압력을 갖고 누르자 간신히 억누르던 어둠의 마나가 크게 요동쳤다.
“커헉!”
한 차례 더 튀어나온 검은피가 이불 위를 적셨으나 발린은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어차피 레벤의 증상에 대한 원인과 해결법만 들으면 더 이상 살려둘 필요 없는 녀석이다.
원래는 놈을 이용해 정,재계에 파고든 수하들까지 같이 없앨 작정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직접 얼굴을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어차피 다크니스와 같은 유니크한 특성의 수하들은 마족 내에서도 극히 드물다.
그런 녀석들을 굳이 욕심내는 것보다 그만큼의 S급 아티팩트를 만들어 장비하는 게 나았다.
“당장 말하지 않으면 내 협박을 실제로 행할 것이다.”
“...크흐, 협박에 응해도 마찬가지 아닌가? 인간 마법사? 네 녀석이 아까 뿜어낸 살기만으로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어.”
“...”
실-레논은 피를 토해내면서도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그 모습에 발린은 내색하지 않은 채 감탄했다.
적이긴 하지만 그 배짱은 확실히 보고 배울 구석이 있었다.
물론 배짱을 꺾어놓아야 레벤에 대한 걸 순순히 들을 수 있을 터.
감탄하는 것과 일은 별개다. 그렇기에 발린은 대답 대신 침묵을 지켰다. 실-레논이 먼저 입을 열기 전까지 말이다.
“레벤의 상태는 어떻지?”
“말할 마음이 생겼나?”
발린의 물음에 실-레논은 다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미 몇 번의 흔들림을 겪은 통에 그의 안색은 급격히 창백해져 있었다.
본래 심문을 할 때는 강과 유를 동시에 넣는 것이 기본.
발린은 그 지침에 따라 천천히 숨을 가라앉혔다.
“뭐, 됐어. 네가 왔다는 건 레벤에게 분명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겠지. 안 그런가?”
말을 마친 실-레논이 킬킬 웃었다.
다음 순간 발린은 더 이상 참지 않고 몸을 박찼다.
쿠당탕!
침대 위로 올라온 발린이 그대로 실-레논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자기보다 더 큰 체구를 한 실-레논이나, 마나 폭주가 진행되고 있는 이상 그는 단순한 일반인보다 못한 존재였다.
“큭! 크윽! 그거면...됐다. 역시...틀리지 않았어. 나는 역시...”
“단순 협박으론 안 되겠군.”
발린의 눈이 독하게 빛났다. 다음 순간 방 안을 가득 메우던 마나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스륵.
인위적으로 퍼뜨리던 압력을 거둔 것이다. 온 몸을 억누르던 마나가 갑자기 사라지자 실-레논은 검은피를 한 번 더 토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전조다. 다음 순간 발린은 체인 라이트닝을 실-레논의 온 몸으로 퍼뜨렸다.
보통 인간이라면 맞자마자 쇼크사할 만큼의 강력한 뇌전! 그것이 다발을 이루어 몸 안에 있는 어둠의 마나를 자극했다.
파직! 파직! 파지지직!
마나 폭주가 다시 시작되자 실-레논의 눈에 핏발이 섰다.
아마 의식이 아득해질 정도의 고통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의식을 잃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발린을 향해 충고까지 하는 여유로움을 보였다.
“내가 말할 것 같나? 인간. 지금 내가 겪고 있는 폭주의 고통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내 입을 열 것이라면 고통으로는 안 될 것이다. 다른 걸 가져오도록.”
“...”
발린은 대답 없이 번개를 불러일으키기만 했다.
카스트로도 처음엔 실-레논처럼 날서 있었으나, 오랜 시간을 두고 담금질하니 모든 걸 순순히 불었다.
아무리 상대가 삼공작인 실-레논이라고는 하나, 발린은 그마저도 충분히 담금질할 수 있다 믿었다.
하지만 그게 5분이 되고 10분이 되자 생각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옷이 푹 젖을 정도로 검은피를 쏟아냈음에도 실-레논은 입을 열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발린 쪽이 조바심나게 된다.
고통이 통하지 않는 데다 죽음의 공포도 초월한 자라니, 고문대상으로서는 최악의 난이도였다.
‘...무의미한 짓이군.’
발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맞은편의 눈빛을 살폈다.
어떤 동요도 없이 착 가라앉은 검은 눈은 지켜보면 볼수록 바다가 떠올랐다.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와 심연, 저 안에 흔들림을 불러일으키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수많은 마족과 인간을 심문하면서 그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리고 그 경우의 대상자들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고 말이다.
발린은 체인 라이트닝을 거둔 뒤 손에 힘을 뺐다.
몸이 가벼워지자 실-레논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포기한 거냐?”
“...”
발린은 대답 대신 침묵을 지켰다.
앞서 만난 적들이 가르쳐 준 교훈이 하나 있다.
바로 누구에게나 약점은 있다는 사실.
당장 카스트로와 삼황자에게는 오만이, 다크니스에게는 부주의가 약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 경우, 발린이 물고 늘어져야 하는 건 육체적인 고문이 아니었다.
“...정말 말하지 않을 것이라면 하는 수 없군.”
결국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는 발린, 실-레논은 가벼운 비웃음을 얼굴에 띄웠다.
무슨 수를 써도 자신의 입을 열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설령 마왕이 직접 오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레벤에게 한 것은...
“거기에 손을 빌리긴 싫었는데 어쩔 수 없지. 교황청에 가는 수밖에.”
“...뭐?”
침대에 누워 있던 실-레논이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겉으로는 아까와 한 점 차이없는 반응이었으나, 발린은 자신의 감각을 믿었다.
“다 죽어가니 귀도 먹은 건가? 되도록이면 여기서 끝내려 했건만, 결국 교황청에 신세를 지게 되다니...”
마법사로서 교황청에 가는 건 그야말로 자존심이고 뭐고 모조리 집어던지는 짓거리다.
이는 비단 마법사들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두가. 심지어 마족들마저도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흥, 교황청의 인간 따위가 녀석의 증상을 치유할 수 있다 생각하는 거냐? 너도 레벤의 정체에 대해서는 알고 나서 여기 왔을 텐데?”
“그야 알고 있다. 그래서 확신할 수 있게 됐지. 교황청에게 손을 내미는 건 마지막 수단이었는데, 내가 졌다. 실-레논.”
말을 마친 발린이 그대로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실-레논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계획했던 대로 말이다.
“크, 하하하. 해 볼 테면 해 봐라. 뭘 어떻게 할 건지 궁금하구...”
“인간으로 만들 거다. 드래곤하트를 떼고 신성력도 뽑아내어서 인간으로 만들 거라고.”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발린은 자신의 생각이 완벽히 적중했음을 직감했다.
“...심장을 뽑아낸다고? 그것이...”
“내 마법이라면 가능해. 설령 그 중에 죽는다면 그것도 그녀의 운명이겠지.”
차갑기 짝이 없는 어조! 거기에선 레벤을 길가의 돌멩이 여기듯하는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실-레논이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발린은 방을 빠져나왔다.
쿵.
문을 닫은 발린의 표정이 그제서야 일그러졌다.
분명 직감은 이 길이 맞다고 말하고 있었으나, 마법사로서의 이성과 계산은 당장에라도 문을 열라고 격렬히 요구해 왔다.
하지만 이미 갈림길은 지나친 지 오래, 발린은 자신이 선택한 길이 맞기를 바라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결심을 끝낸 것처럼 당당하게 걸어야 했다. 상대는 드래곤. 바퀴벌레가 카페트를 기어가는 소리조차도 감지하는 괴물이다.
‘살 떨리는 소리, 침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소리. 망설이는 인기척. 단 하나라도 보이면 안 된다!’
긴장을 하기 위해선 몸에 힘을 주어야 한다. 허나 발린은 그 반대의 행동을 취했다.
일부러 어깨를 푹 숙이고 팔을 늘어뜨렸다. 배의 힘을 푼 다음 최대한 깊고 넓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가기 싫지만 어쩔 수 없다는 티를 일부러 내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어처구니없는 짓이다.
일부러 적 앞에서 그런 태도를 보이다니, 다 잡은 사냥감을 능욕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터.
하지만 발린은 계속 자신의 직감에 힘을 실어주었다.
불안감이 들 수록 더욱 완벽한 연기에 몰두했다.
마치 금방이라도 교황청을 향해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길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몇 걸음을 걷고 모퉁이를 돌았으나 기다리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발린은 숨을 들이마셨다.
“이야기는 다 끝내셨습니까?”
눈앞에는 랜돌프가 기다리고 있다. 정문까지 직접 안내해주겠다는 뜻이다.
순간 온 몸의 힘이 탁 풀렸다.
이번에는 정말로 헛짚은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던 도중이었다.
“...잠깐만.”
갑자기 랜돌프의 시선이 발린의 옆을 향했다. 정확히는 방금 그가 나온 저택의 안쪽 계단참 방향이다.
그 곳에서 들리는 불규칙적인 발걸음 소리에 발린은 남몰래 입꼬리를 올렸다.
“...실론 님?”
“데려와. 저 마법사. 내가 할 말이 있다고 해. 그래. 네놈. 들어와라. 지금 당장!”
랜돌프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고개를 돌린 발린은 자신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자마자 표정을 지웠다.
아래층까지 따라온 실-레논의 옷에는 검은피가 한가득 묻어 있었다.
안 그래도 버티기 힘든데 체인 라이트닝까지 받아들였으니 지금 그의 상태는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그럼에도 계단까지 내려왔다는 것은 그만큼 발린의 행동이 그에게 간과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역시나.’
발린은 속으로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할 말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방금 생겼다. 네놈이 이겼어. 인간 마법사여. 들어오도록 해.”
말을 마친 실-레논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발린을 노려보았다.
심연 속에 이는 풍랑을 확인한 발린은 주저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째 감기기운이 있어서 오늘은 여기까지 연재해야 하나 싶긴 한데.
그래도 아직 모르는 일이니 추천과 응원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아, 그리고 저 게이 아니예요...여캐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