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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벤의 비밀
루덴스 공작가는 카딤 연방제국에서 가장 커다란 가문 중 하나이며, 그 위세는 다른 귀족가문과 비교를 불허한다.
물론 금력을 바탕으로 하여 만든 세력이니만큼 다른 두 공작가에 비하면 어느 정도 손색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비교 대상이 워낙 커서이지,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감히 루덴스 공작가와 비벼볼 세력은 손에 꼽았다.
북방과의 교역을 독점하고 서쪽의 왕국들에도 손을 뻗친 금력의 위세란 그만큼 대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직접 그 저택을 본 발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주변의 저택들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강력한 인상을 주긴 했다.
높은 탑과 수려하게 꺾인 지붕들, 희고 검은 색을 적절히 이용한 건물은 저택이라기보단 예술작품 같은 느낌을 주었다.
허나 에이블 공작가를 본 입장이라 그런지 공작가의 저택이란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한낮에 와서 그런지 그렇게 경계해야 할 것도 없고 말이다.
“겉으로는 의심스럽긴 하지만...저기가 맞다니 맞는 거겠지.”
탐지 마법의 기척을 다시 한번 확인 발린이 눈을 부릅떴다.
역시나다. 몇 번을 확인해도 기척은 눈 앞에 있는 저택 안에서부터 나고 있었다.
게다가 저 스케일과 단단히 폐쇄된 정문까지. 모든 특징이 들어맞았다.
더 볼 것도 없었다. 발린은 저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쿵쿵쿵.
“계십니까?”
손으로 철문을 치자 육중한 쇳소리가 반겼다. 입구를 지키는 사람은 없었으나 발린은 문 두드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문에는 빗장까지 처진 데다가 방문을 사절한다는 팻말까지 붙여져 있다.
하지만 발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두들겼다. 그가 여기 온 것은 정중한 방문이 아닌 좀 더 거친 것을 위해서였다.
“...빗장이 보이지 않소이까? 본 공작가는 현재 누구의 출입도 허락지 않고 있소.”
몇 분 동안 쉴새없이 두들기자 결국 누군가 퉁명스레 대꾸하며 걸어나왔다.
옷이나 행동거지를 보면 단순한 문지기였으나, 발린은 남자의 팔다리를 보며 눈을 빛냈다.
펑퍼짐한 옷에 가려지긴 했으나 자세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익스퍼트...상급? 아니면 그 이상!’
겉보기엔 손색이 있으나 그 내용물은 역시나였다. 발린은 다가온 문지기에게 말했다.
“랜돌프 공을 만나러 왔습니다만, 문 좀 열어주시겠습니까?”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치고는 꽤나 건방지구만...일 없소.”
퉁명스럽게 대답한 문지기가 돌아서려는 찰나, 발린의 한 마디가 그를 멈춰세웠다.
“안 열어주신다면 부수고 들어가겠습니다.”
털썩.
문지기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등 뒤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눈치채서는 아니다.
단지 압도적인 기세에 제압당했기 때문일 뿐이다.
죽기 직전의 경험을 밥먹듯 하고 고강한 심신을 갖춘 그도 버티지 못할 기세!
이 정도의 능력을 가진 자라면 이 문을 부수는 것도 손짓 한 번이면 해결될 일일 터이다.
간신히 고개를 돌린 문지기에게 발린은 한 마디를 더했다.
“그냥 그 분께 전해주십시요. 발린이 왔다고 하면 알아들을 겁니다.”
“...알았소.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문지기가 저택 안쪽으로 사라지자 발린은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새벽까지 교황청에서 면담을 하고 나온 뒤 일어나 보니 지금이다.
아직 몸 곳곳이 찌푸둥하긴 했으나 더 이상 레벤의 상태를 미뤄둘 순 없었다.
‘열이 더 심해지다니, 아마 거기서 더 악화되면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지.’
그랜드마스터가 열이 올라 죽는다니, 전생이었다면 무슨 헛소리냐고 타박할 법한 상황이다.
문제는 지금 실제로 그렇게 될 것 같다는 점.
레벤을 괴롭히는 건 저주나 병 따위가 아니다.
외부 요인이었다면 감히 그랜드마스터의 능력과 면역체계를 뚫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마 그 상태의 레벤은 대역병이 도는 한가운데 두어도 멀쩡히 움직일걸?’
거기까지 생각하던 발린이 이내 한숨을 쉬었다.
고열의 원인은 그보다 훨씬 강력한 것, 바로 그녀 본인의 신성력이었다.
말하자면 자신의 검에 자신이 찔린 격. 그렇기에 한숨 자자마자 여기 온 것이다.
“...안 가고 기다리고 있었군. 갔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 더 기다리고 있자니 문지기가 나와 빗장을 풀기 시작했다.
발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대꾸했다.
“문이나 열어주십시요.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잠시 기다리게. 자물쇠가 많아서 여는 데 조금 오래 걸려.”
말을 마친 문지기가 열심히 손을 놀렸다. 그 사이 발린은 공작가 저택 안쪽의 기척을 살폈다.
창문이나 문 같은 건 전부 닫혀 있으나 특별히 강력한 어둠의 힘이 느껴지진 않았다.
‘기척을 감추고 숨어있는 건가...? 문지기 놈의 태도를 봐선 함정은 아닌 것 같다만.’
잠시 저택 안을 살피던 발린은 순간 풋 하고 웃었다.
어차피 함정이라 한들 놈들은 자신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무영창으로 써 대는 블링크와 텔레포트는 디스펠 한 번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둠의 마나로 결계를 친다 한들 축지법으로 도망가버리면 그만.
설령 레-호트나 자-쿨카와 같은 최강급의 강자가 와 있다 하더라도 도망이 가능한 건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것을 위해서는 혼자 움직여야 했다. 축지법은 고유 능력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다 됐소. 들어오시오.”
빗장을 해체한 문지기가 발린을 안으로 들였다. 바깥을 걸어다니던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 시선을 주었다.
준준결승전 마지막 경기 이후 굳게 닫힌 정문이 열린 건 지금이 처음이다.
사람들은 안으로 들어가는 발린을 보며 수군거렸다.
황궁에서 온 고관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공작가 측 사람이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저택 안으로 들어온 발린은 문지기의 안내에 따라 걸으며 양 옆을 살폈다.
적절한 자리에 배치된 정원수며 동상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긴장을 풀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저 사이마다 호위병이나 무사들이 잠복하고 있어야 했다.
저기밖에 숨을 데가 없을 뿐더러, 그럼으로서 저택과 주변 전체의 정보를 지속적으로 체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문을 완전히 닫아걸은 저택에서는 그런 건 쥐뿔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건물 안에서야 인기척이 조금 느껴지지만 공작가의 저택이라 보기엔 턱없이 부족한 수준.
의아한 표정을 짓던 발린에게 관리인이 퉁명스레 답했다.
“다 나갔소. 그 사건 이후로 싹 비었지. 덕분에 일만 늘었다만.”
“흠...”
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마족이 출전자로 나타난 가문에 누가 있고 싶겠는가.
저택 안으로 들어간 둘은 건물 깊숙한 곳의 한 내실로 향했다.
가는 동안 복도를 둘러보아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여깁니다. 랜돌프님께서 계신 곳입니다.”
“...여긴 집무실은 아닌 것 같은데?”
갈색 나무문을 앞에 둔 문지기의 말에 발린은 양미간 사이를 찌푸렸다.
문 너머로 나는 씁쓰레한 향은 틀림없는 약초 냄새다.
치료소나 신전의 전매특허라 해야 할 향이 나는 곳이 집무실일 리는 없었다.
약을 쓸 정도로 아픈 사람이 집무를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들어오시오.”
문지기가 대답하려는 순간 문 너머에서 무거운 한 마디가 들려왔다.
황궁 귀족회의에서 들었던 목소리에 발린은 눈을 크게 뜨고 끔벅거렸다.
‘이 목소리는...랜돌프잖아. 약초를 쓸 만한 병에 걸린 건 아닐 텐데?’
“그럼 문 열겠습니다. 주인님.”
발린이 의문을 증폭시키는 사이 문지기가 문을 열었다.
문 안에는 휘장이 쳐진 커다란 침대가 있었다. 탐지 마법의 반응을 느낀 발린이 안색을 굳혔다.
“...”
“문 닫겠습니다.”
등 뒤로 나무문이 닫히자, 침대 옆자리에 있던 랜돌프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왔군요. 당신.”
“황궁에서 보고 처음 보는 거네요. 오랜만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욕을 내뱉고 싶었으나 발린은 애써 예의를 갖춰 주었다.
그 모습에 흥미를 느낀 랜돌프가 눈을 크게 뜬 순간 휘장 안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미안하지만 랜돌프, 자리를 조금 비켜주겠나? 저 친구는 자네가 아니라 나를 찾아온 것 같아서 말이야.”
“...알겠습니다.”
실-레논의 말에 랜돌프는 순순히 응했다.
하지만 발린은 그 눈에 깃든 호기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랜돌프에게 있어 발린은 외국에서 갑자기 등장한 차세대 유망주 정도의 인물.
골렘을 쓰는 건 대단하지만, 그것과 실-레논이 반응을 보인 건 별개의 일이었다.
흑마법 지파의 최종병기와 전도유망한 마법사의 관계.
굳이 그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궁금해할 법한 일이었다.
쿵.
문이 닫히자 발린은 거침없이 다가가 침대의 휘장을 걷었다.
휘장 너머에 있는 건 초록머리의 20대 청년이다. 하지만 추적마법이 걸린 이상 겉모습을 바꾸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드디어...드디어 다시 대면하는군. 인류의 대적! 마왕군의 삼공작!’
발린은 남자의 모습을 보며 이를 갈았다.
원래는 이 녀석을 이용해서 나머지 놈들까지 일망타진하려 했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레벤의 상세가 급변함에 따라 포기한 지 오래.
그렇다면 적어도 시체라도 제대로 챙기는 게 나았다.
‘다 알아낸 다음엔...가죽은 당연히 뜯어내야 하고. 몸 안에 깃든 어둠의 마나는 교황청에게 차근차근 정화를 부탁해야겠다. 그 성법진이라면 드래곤의 몸 안에 있는 어둠의 마나도 정화가능할 테니...’
“다 잡은 고기를 어떻게 해체할지 보는 듯한 눈빛이로군. 마법사.”
정곡을 찌르는 실-레논의 말에 발린은 생각을 정리하고 마주보았다.
발린이 여기 온 것은 어디까지나 레벤의 열 때문이다. 시체를 처리하는 건 둘째 문제였다.
“마족 삼공작이 이렇게 된 꼴을 보니 새롭군.”
처음으로 발린이 말한 것은 솔직한 감상이었다.
실-레논은 한때 영웅들이 목숨을 걸고 처치했던 놈이다.
그 녀석이 시한부 상태로 죽어가는 걸 보고 있자니 증오와 함께 여러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들었다.
“...알고 있으리라 생각은 했다만, 역시나인가.”
의외로 실-레논은 순순히 자신의 정체를 인정했다.
어차피 그랜드마스터라는 걸 드러낸 이상 들키는 건 시간문제이니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다.
“한데 솔직히 놀랐어. 나는 교황청에서 먼저 사람이 올 줄 알았건만, 설마 신관과는 상극인 마법사가 가장 먼저 나를 방문할 줄이야.”
“그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무슨 이유로 왔는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둘만 남자 발린은 최소한의 존댓말마저 집어던진 채 마나를 끌어올렸다.
다섯 마나서클이 각 속성의 마나를 한껏 받았다. 죽일 각오로 뿜어낸 마나는 서클의 움직임 속에서 크기를 불렸다.
순식간에 뜨겁고 차가운 기운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세상 누구도 알지 못하는 멀티 서클의 힘! 그것을 처음으로 보인 것이다.
허나 실-레논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속성의 힘을 동시에 쓰는 건 분명 놀라운 일이나, 그것만으로는 공포를 끌어내기에 부족했다.
“다섯 속성의 마법을 전부 쓰는 거야 나도 가능한 일이다. 허나 용케 드래곤의 마법까지 접근했구나. 인간 마법사여.”
그는 마왕군의 삼공작 중 한 명. 지금은 한없이 무력하다고 하나 이 정도 술수에 놀랄 만한 인물은 절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속성의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는 건 언령을 이용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마나 서클이 여러 개 있지 않는 이상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설령 그 대상이 만물의 조종인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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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 폐가 되지 않는다면 추천 한 번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