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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벤의 비밀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그대로 주저앉을 만한 위세였다. 허나 발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성기사들에게 향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데, 혹시 말 좀 전해주시겠어요?”
“후...”
맨 앞의 성기사는 대뜸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레벤 대신관님은 모든 만남을 거절하고 계시고, 다른 분들도 밤에는 휴식을 취하고 계신다. 밤이든 낮이든 마찬가지야. 알았으면 포기하고 돌아가도록.”
말을 마친 수문장 성기사의 표정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미 먼저 온 수많은 귀족들이 똑같은 청을 해 왔으니 그럴만도 했다.
‘아무래도 정말 급한 일 아니면 말 한 마디도 전해주지 않겠지.’
발린은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혹시 넴로드 대신관님께 지금 말 한 마디만 전해드릴 수 있나요?”
“무슨 말이던간에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돌아가라.”
점점 인상이 찌푸려지던 성기사를 보던 발린이 갑자기 무언가를 내밀었다.
“자요.”
“그러니까 뇌물 같은 건 안 통한다...끕?”
수많은 귀족들이 금은보화를 찔러 주려는 시도를 해 왔다.
이번에도 그런 것이라 생각한 성기사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발린이 내민 백금패는 틀림없는 교단 대신관의 것. 서임식 때 한 개씩 주문 제작되는만큼 틀림없었다.
“그, 그럼 당신...”
“발린이 할 얘기가 있다고 말하면 아마 얘기가 될 것 같은데. 부탁드립니다.”
말을 마친 발린은 가볍게 기지캐를 켜며 눈을 깜박거렸다.
시야가 가려졌다 보이는 걸 반복하는 사이 멀어지는 성기사의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십여 분 정도 지나자 사라졌던 성기사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나 서둘렀는지 갑옷 사이로 훈김이 뿜어져 나오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허억. 헉. 넴로드 대신관님께서 준비 되셨다고...들어오시라 말씀하셨습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발린은 가볍게 미소지으며 성기사가 돌려준 백금패를 받아들었다.
파이오니어 왕국에서 레벤이 처음 준 백금패였는데, 그동안 잊고 있다가 마침 꺼내온 것이다.
‘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 가져왔더니 역시 제대로 쓰는군.’
발린은 피식 웃으며 등 뒤를 훑었다.
굳게 닫혀있던 교황청 문이 열리는 모습에 시종들은 물론 귀족들까지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었다.
“누, 누구지?”
“글쎄...로브로 가려져서 잘 안 보이는데.”
귀족들은 꿀꺽 침을 삼켰다.
현재 교황청은 대부분의 귀족들을 문전박대할 만큼 강성했다.
낮에도 그럴진대 하물며 밤이야 아니겠는가!
그런데 저 소년은 밤에 교황청 안으로 당당하게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로브로 몸을 감싸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엄청난 거물이라는 건 확실했다.
“...”
잠이 깬 귀족들은 눈을 빛내며 입구를 지켜보았다.
추후 발린이 나오면 그때 청탁을 넣을 생각이었다.
한편 발린은 성기사의 안내를 받아 안쪽으로 향했다.
원래대로라면 말을 전해달라는 부탁도 통하지 않을 상황, 그러나 백금패를 가지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걸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해당 대신관의 신분을 대신해 움직인다는 뜻이다.
여기서 발린을 쫓아내면 대신관을 쫓아낸다는 뜻, 당연히 성기사들로서는 그렇게 움직일밖에 없었다.
물론 이것을 쓰는 데는 분명 큰 단점이 존재한다.
백금패를 사용하면서 모이는 시선이 첫째, 추후 이 사실이 레벤의 귀에 반드시 들어간다는 게 두 번째 단점이다.
그러나 발린은 이렇게 움직일밖에 없었다.
정당한 절차를 거쳐 교황과 넴로드 대신관을 만나는 방법은 이것 하나뿐이었으니 말이다.
“대신관님, 발린 공을 모셔왔습니다.”
“자네는 이만 돌아가 보게. 많이 뛰어다니던데 고생했네. 레이안 님께서도 그 정성 헛되이 보지 않을 걸세.”
넴로드 대신관은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깊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차림엔 한 점 흐트러짐도 없었다.
성기사를 돌려보낸 그는 발린을 향해 눈을 크게 떠 보였다다.
“당신이 저를 다시 찾으실 줄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만...이 늦은 시간에 오실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습니다.”
발린은 넴로드 몰래 쓴웃음을 지었다.
여기 다시 오게 될 줄 몰랐던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더 이상 레벤의 상세를 미뤄 둘 수는 없었다.
그녀는 신성력을 갖춘 그랜드마스터. 그런 사람을 병 때문에 죽게 한다면 이는 지금까지의 이득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짓거리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럼 어디서 이야기할까요? 집무실에 다과와 음료를 들일까요? 아니면 바깥에서?”
“교황성하를 잠깐 만나뵙고 싶습니다.”
“...하긴, 발린 공께서는 그 분과 악연이 있으실 테니, 알았습니다. 가시죠.”
말을 마친 넴로드가 서슴없이 발길을 옮겼다.
당연히 거부할 줄 알았던 발린은 예상 외로 선뜻 승낙하는 모습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의외로 순순히 안내하는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무언가 꿍꿍이가 있긴 한 것 같은데...나야 뭐 좋지만.’
발린은 품 속에 든 드래곤 하트의 촉감을 느끼며 미소지었다.
이것이 있는 이상 설령 교황청 전체가 움직여도 탈출할 자신이 있었다.
가는 길은 생각보다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이미 몇 번 혼자 잠행한 경험 덕에 경치가 눈에 익은 것이다.
근원의 대성당, 익숙한 문 앞에 도착한 넴로드는 그 때처럼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교황성하. 대신관 넴로드입니다. 발린 테오도르 후작을 데리고 왔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어도 되겠습니까?”
“넴로드...? 들어오시게.”
교황은 의아한 눈빛으로 발린과 넴로드를 응시했다.
아닌 한밤중에 손님이라니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드르륵. 쿵.
발린은 문이 닫히자마자 입을 열었다.
“혹시 은밀한 곳을 빌려 이야기하고 싶은데, 가능하시겠습니까?”
“...”
순간 교황의 두 눈이 살며시 떨렸다.
보아하니 이 방 안의 비밀 계단과 지하의 성법진을 의식한 듯했다.
그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발린은 이미 성법진이 있는 건 물론 그 용도까지 꿰고 있었다.
“여기가 은밀한 곳입니다. 이래봬도 교황님께서 계신 곳이니만큼 건물 전체가 방음 처리가 되어 있으니까요.”
“믿어도 됩니까?”
“나도 사실 잘은 모르오. 이 친구가 그렇다니 그런 거겠지만.”
교황은 허허 웃으며 소파를 향해 손짓했다.
그 말에서 딱히 거짓말을 한다는 느낌은 오지 않았다.
자리에 앉은 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발린 쪽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마법사가 우리들에게 모르는 걸 구하다니, 이거 제 평생 처음 있는 일이구려.”
가볍게 웃은 교황이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우선 한 가지 받으셔야 할 게 있소이다.”
“받을 것?”
발린은 순간 눈매 깊은 곳에 살기를 담으며 되물었다.
이 곳은 교황청, 방음 처리까지 잘 되어 있다고 하니 교황이 자신을 해코지하기엔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혹여 성법을 써 공격해 오기 전에 발린은 미리 시뮬레이션을 마쳤다.
결과는 압승! 교황의 수준이 강력하다고는 하나, 쿨타임 없이 8클래스의 고위 마법을 난사해대는 발린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그 사실을 확인한 발린은 혹시 모를 넴로드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십시요.”
“그럼...염치 불구하고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말을 마친 교황이 고개를 푹 숙였다. 발린은 깜짝 놀라 그의 굽어진 등을 응시했다.
대뜸 사과라니, 뭣 때문에 저러는지 알 수 없을 뿐더러 불편하기까지 했다.
드래곤하트에 신성력을 불어넣던 그 때의 교황과 지금 교황이 자꾸 겹쳐 보인 탓이다.
두 사람이 동일인인 건 분명하다.
교황이란 직책도, 저 호호백발인 외모도 모두 다 똑같다.
하지만 행동에서 나타난 것은 확연히 달랐다. 그렇기에 발린은 의심어린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뭣 때문에 그러시는지 혹시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목에 걸린 그 성물 때문입니다. 발린 공께서도 들으셨겠지만, 그것은 본 교황청의 성물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입니다. 그것이 갑자기 사라졌다 발린 공에게서 나타났으니 저희 측에서도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지요.”
교황의 답변에 발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교황청은 일반 마법사 대 신관의 적대심 이상으로 발린을 미워했다.
로버트 대신관 대신 레벤이 온 것도 그 때문이었으니 알 만했다.
‘레벤이 이단심문관으로서 왕국에 왔었다니, 자칫하다간 큰일날 뻔했지.’
그 때의 일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당시 발린의 능력은 대략 5클래스 마스터 정도.
다섯 속성을 무영창으로 쓸 수 있다고는 하나, 소드 마스터가 상대라면 패배하는 게 당연지사였다.
‘그래도 덕분에 레벤의 다른 모습도 알아보았고, 삼황자를 처치하는 데도 큰 협력을 받았으니 결과적으론 좋게 풀린 거려나.’
그렇게 생각한 발린은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이단심문관을 보내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디예요.”
“...”
순간 교황과 넴로드 대신관이 동시에 움찔했다.
레벤이 이단심문관으로서 보내졌다는 사실을 발린이 아직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발린은 넴로드 대신관에게서 그것을 들은 때부터 절대 잊지 않고 있었다.
넴로드는 예전 일이니 별 상관없겠지 하고 말한 듯 싶으나, 듣는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다른 의미에서 다가왔기 때문이다.
“...흠흠.”
“여하튼간에, 앞으로는 더 이상 당신을 의심하지 않을 것 같소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교황이 몇 번 고개를 꾸벅대며 말을 이었다.
발린은 짐짓 다 잊어버린 척 가볍게 사과를 받아들였다.
물론 이것도 발린이 노린 바였다. 켕기는 게 있을수록 약점을 더 많이 드러내게 되는 법이다.
셋은 교황청의 움직임이나 성물에 관련된 이야기를 좀 더 나누었다,
주된 내용은 발린이 성물을 가지게 된 연유. 그리고 앞으로 교황청이 그에게 취할 행동의 방향성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미리 교황에게 켕기는 구석을 만들어 둔 덕분에 발린은 꽤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더 이상 교황청은 발린을 적대하는 일이 없을 것이며, 앞으로에 따라서 우호 관계까지 구축할 수 있는 발판도 생기게 된 것이다.
물론 지금부터 발린이 꺼낼 말 때문에 산산이 깨져나가겠지만 말이다.
“그럼 이제 본론을 꺼내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공.”
그럭저럭 분위기가 풀어진 덕에 집무실은 더 이상 처음처럼 딱딱하지 않았다.
때문에 발린은 긴장하지 않고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당신들에게 있어 레벤 대신관은 어떠한 존재이지요?”
단도직입적으로 핵심을 꿰뚫는 물음이다. 교황과 넴로드 둘 모두 한순간 얼굴이 굳었다.
하지만 여기서 꺾일 사람이라면 진작 황제파에게 무너져야 했을 것이다. 교황은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야 레벤 대신관이 대신관이지요. 개인적으로 본인에겐 친손녀 같은 아이요.”
“친손녀라...”
대답을 들은 발린의 입꼬리가 절로 휘어졌다.
증거는 없지만 그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지하실에서 본 괴상망측한 의식과 레벤 간엔 분명 어떤 관계가 있다고 말이다.
만약 짐작이 사실이라면 저들은 분명 이 말에 격렬히 반응할 것이다.
마치 미끼를 문 물고기처럼.
그렇게 생각한 발린이 일순 표정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그럼 당신은 친손녀 같은 아이의 몸을 조각조각 썰은 셈이군요. 이단을 없애라며 이리저리 굴린 건 덤이고 말입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들은 바로는 베스트지수가 2편 이후부터는 세시간에 한 번씩 올리는 게 훨씬 더 잘 오른다 하여...마지막 편은 새벽 네시가 지난 후에 올려야겠군요. 허허.
그럼 독자분들, 기다리지 마시고 내일 아침에 주무셨다 일어나신 뒤 마지막 한 편 보시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