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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 기간
갑작스러운 물음에 회의장 내부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쏠렸다.
“으음.”
“...미안하오.”
발린이 모두의 허락을 받아 끼었다고는 하나, 그는 엄연히 타국의 귀족이란 신분의 외부인이다.
그 앞에서 얼굴 붉히고 싸우는 모습을 보였으니 이는 돌이킬 수 없는 수치였다.
상황을 깨달은 귀족들이 저마다 헛기침을 할 때였다. 발린이 무슨 소리냐는 듯 말을 이었다.
“아니, 여러분을 질책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저도 제 의견을 말씀드리고 싶은 거예요.”
“그, 그건...”
외국인이 제국의 귀족회의에서 발언하는 건 유래가 없는 일.
망설이는 귀족들 사이에서 랜돌프가 시원스레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당신도 선발대전의 출전자이니까요. 말씀해 보십시요.”
어렵게 가져온 주도권을 시원스레 넘기는 그!
양옆에 위치한 수하 귀족들의 눈길이 순식간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랜돌프 공.”
“이건...”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 중 두엇은 랜돌프를 말리려 했으나, 랜돌프는 차갑게 그들의 만류를 무시했다.
얼핏 보면 발린을 생각해 주거나 멍청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사실 거기엔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발린이 출전자라고는 하나, 실질적으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제국 내의 기반 세력도 없고, 그렇다고 깊은 심계와 귀신 같은 언변을 지닌 것도 아니다.
단순한 마법사의 말 한 마디, 얼마든지 꼬리를 물어 물어뜯을 수 있었다.
물론 거기에 앞서 필요한 게 물어뜯을 만한 꼬리, 즉 말 한 마디고 말이다.
‘드러내라. 너의 수를. 그 수에서 보이는 약점을 철저히 물어뜯어주마.’
랜돌프는 그렇게 독백하며 눈을 빛냈다.
“말해 보십시요. 직접 참가한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도 괜찮을 테니.”
“흠...”
“하기야, 뭐.”
랜돌프의 의견이 확고하자 양옆의 귀족들도 꼬리를 내렸다.
발언 주도권을 성급히 넘기는 건 마음에 들지 않으나, 감히 루덴스 공작가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나설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출전자들과 무인들을 대표해서 한 마디 하겠습니다. 선발대전을 다시 하자는 건 간단하게 말해서 이번 선발대전에 출전한 모든 출전자와 후보자를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허어?”
“으음!”
장내의 귀족들이 숨을 들이키는 와중, 랜돌프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출전한 모든 후보자와 출전자를 끌어들이는 초강수!
말은 좋지만, 그 책임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일깨워 줄 셈이다.
“여기 모인 여러분들도 모두 보셨겠지요. 논란이 된 준준결승전 마지막 라운드.”
“...”
다음 순간 장내의 분위기가 차갑게 변했다.
단순히 본 것뿐이 아니라 파괴력을 생생히 느꼈다.
그렇기에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온 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것이다.
인간을 초월한 두 사람간의 전투는 그만큼 치열했었다.
장내의 분위기가 얼어붙은 걸 확인한 발린은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그건 계략이나 음모, 부정 따위가 없는 순수한 한판승부였습니다. 다들 동의하시겠지요?”
“그건...우리야 보는 눈이 없으니까...”
귀족들은 어물쩡거리며 말을 피했다.
한 마디라도 잘못 말했다간 발린이나 랜돌프 둘 중 하나와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된다.
그런 위험부담만큼은 피하고 싶은 게 모두의 공통된 마음이었다.
“직접 본 사람으로서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레벤 대신관은 거기서 이겼고...상대방, 그 마족은 온 몸이 고깃덩어리가 된 데다 심장에 칼까지 박힌 채 사라졌습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사이 발린은 가볍게 말을 끝냈다.
“그 과정에서 부정이 없었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닙니까?”
공정한 과정에 따라 선발했으니 마족이든 뭐든 그거면 되지 않았느냐라는 말.
한 마디로 선발대전 경기엔 특별히 문제가 없으니 그대로 속행하자는 뜻이다.
이를 눈치챈 랜돌프가 한쪽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걸렸구나!’
다른 건 볼 것도 없었다.
마족이 끼어든 경기를 정당하다고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함정에 빠져 든 셈이니 말이다.
“그 과정 자체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는데 결과가 아무리 좋게 나온들 어떻게 그걸 인정하겠습니까.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게 당신들 무인들의 사고방식입니까?”
순식간에 스탠스를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한 랜돌프가 거세게 밀어붙였다.
다른 귀족들이 일제히 동의의 목소리를 낸 것은 물론이다.
“마족이 어디까지 손을 뻗쳤는지도 알 수 없는데 그게 무슨!!”
“궤변을 늘어놓지 마시오! 외국인 주제에!”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오는 반발 사이로 발린이 눈을 빛냈다.
“그럼 여러분의 말씀은 이번 황제선발대전의 과정이 전부 잘못되었다는 말씀이신지?”
“바로 그거요. 발린 공.”
다른 모두가 아우성치는 와중에도 랜돌프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게 승리의 열쇠다. 발린은 그렇게 직감하며 말을 이었다.
“그럼 그걸 직접 본 당신은 왜 그 사실을 은폐하려고 하는 거죠? 가족들까지 없애 가면서 말입니다.”
“뭣?!”
“...!!”
귀족들이 기겁하는 순간 랜돌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방금 발린이 말한 것은 실책 중에서도 굉장한 실책이자, 근거조차도 하나 없는 선동이었기 때문이다.
“제가 제 친족을 없애다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두 분은 몸이 안 좋으시기 때문에 공식석상에 모습을 안 비추실 뿐입니다.”
랜돌프는 눈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가문 내 경선이 끝난 후 노공작과 헤스피아는 공작가 심처에 갇혔다.
누구에게도 그 때 본 사실을 발설할 수 없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처리는 완벽했어. 그 분도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그럴 리가!’
실론의 결계는 완벽 그 자체였다. 둘의 상태를 알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정치공세로 사람을 몰아 가지 말아 주십시요.”
강하게 나선 것도 그것을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허나 발린의 다음 말을 들은 순간 그 생각은 산산이 부숴졌다.
“정치공세라뇨. 헤스피아 님과 만나서 살갑게 인사한 게 엊그제같은데. 그 때만 해도 건강하시기 짝이 없던 분이 갑자기 몸상태가 안 좋아 칩거하신다고요?”
“그, 그게 무슨.”
설마 정보가 새어갔나 하는 생각에 랜돌프의 말문이 어긋났다.
그 틈을 계속 후볐다면 토론은 바로 끝장났겠으나, 다행히 랜돌프에겐 그럭저럭 도움이 되는 우군이 아주 많았다.
“이 자는 지금 주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소!”
“아잔 공작이야 지금 공작가 안쪽에...!”
“후보자 귀족이 아파도 그 출전자는 모습을 비출 수 있는 법이죠. 한데 아잔 공작은 황도에서 한 번도 모습을 비추지 않던데요? 소드마스터 최상급의 무인이신 만큼 관중으로라도 구경하실 사람이 말이죠.”
발린의 말이 이어질수록 랜돌프는 자신이 궁지에 몰리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 계속 주장을 이어갈 경우 타겟은 자신이 될 터.
마족과 내통했다는 음모를 덮어쓴다면 아무리 루덴스 공작가라도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이다.
안색을 굳힌 채 있던 랜돌프가 입을 열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죠. 상대는 그랜드마스터였으니, 내부에서 최종 출전자를 선발할 때도 압도적으로 이겼을 테니까요.”
놀랍게도 그를 변호해준 것은 방금 전까지 자신을 성토하던 발린이었다.
병 주다 약 주는 듯한 모습에 랜돌프는 순간 눈을 치켜떴다.
‘뭐지? 설마 저렇게 말함으로서 선발대전이 정당하다는 것을 어필할 셈인가?’
지금 발린은 루덴스 공작가를 핀치에 몰아넣고 구원의 밧줄을 내밀고 있었다.
본래 인간은 절박해진 순간 뭐든지 잡게 되는 법. 랜돌프는 아마도 그것을 노린 듯했다.
하지만 그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다. 이를 깨달은 랜돌프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후...그렇소.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가 날 찾아왔을 때 승리를 확신했소이다. 아잔 공작을 단번에 없애고, 아버님께서 출전자로 내세우려던 정령을 소멸시켰을 때 도 마찬가지, 허나!”
갑자기 높아진 언성에 회의장 전체가 숨을 죽였다.
그 다음에 무엇이든 본론이 이어질 것이라 확신한 탓이다.
다음 순간 랜돌프는 앞에 있던 원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몸을 떨었다.
누가 봐도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늘상 무표정이던 사람이 처음으로 감정을 보인다는 점에서 설득력도 배가 되었다.
“그 녀석이 인간의 대적자인 마족이었을 줄 누가 알았겠소! 천 년 전 마왕과 함께 사라졌을 줄 알았는데! 이 세상에 나타나다니!...그것도 감히 본 공작가를...크으윽!”
말을 마치지도 못하는 그 앞에서 귀족들 대부분은 입을 굳게 닫았다.
아까 발린을 성토하던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하아.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화를 걷어낸 랜돌프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을 이었다.
“허나 이것만은 알아주십시요. 만약 마족이었다는 걸 알았다면 제가 그럴 일은 단언코 없었을 겁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나는 그의 능력을 보았으나 그가 마족이라는 건 전혀 몰랐다. 라는 얘기였다.
노공작과 헤스피아가 칩거중인 것도 사실은 마족의 저주 때문으로, 어쩔 수 없었다는 말.
거기까지 들은 발린은 눈에 힘을 주었다.
일반 사람이라면 단연코 자신과 마족 간의 연관성을 없애려 노력했겠으나, 랜돌프는 오히려 그 사실을 순순히 인정해버린 것이다.
그 덕분에 마족 건으로 추궁할 수 없게 됐을 뿐더러, 당초 목적이었던 선발대전의 리셋에도 힘이 실렸고 말이다.
“...”
이를 눈치챈 발린이 혀를 차며 물었다.
“그럼 역시 마족들이 이곳저곳에 부정행위를 일으킨 게 맞다 그거죠?”
“그렇소!”
“맞습니다. 비용은 사죄의 의미로 모조리 본가가 부담할 테니 그 점에 대해서는...”
말끝을 흐리는 랜돌프에게 발린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넘어왔다! 그렇게 확신한 랜돌프의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순간이었다.
“그럼 다시 하죠. 어쩔 수 없네요.”
“드디어 알아주셨군요.”
“단, 이번에는 교황청이 주관해서 하는 걸로요.”
“!!!!!”
마음 속으로 짓던 득의의 미소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교황청! 누구나 간단히 생각할 수 있지만, 의도적으로 꺼내지 않은 말이기도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여기 있는 고위 귀족들 모두가 황제파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교황청에 황제선발대전의 주관을 맡긴다고...?’
‘안 그래도 그랜드마스터의 출현 때문에 힘의 균형이 깨져가고 있는데?’
카딤 제국 귀족들의 주류 세력은 당연히 황제파이며, 이 현상은 작위가 높아질수록 가속화된다.
교황청의 세력이 강대하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종교의 영역.
현실은 세속의 영역이 가진 힘이 압도적으로 크고, 이는 그 본산이 있는 카딤 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 곳의 황제는 수십 년마다 한 번씩 뽑히는 선발제!
잘만 하면 다음 대 황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뭣하러 떡고물도 없는 교황청에 아부하겠느냔 말이다.
한데 이제 교황청이 황제선발대전을 주관하게 된단다.
늘상 싸워 왔던 반대파가 말이다.
‘안 돼.’
‘그건 절대로.’
다음 순간 모두의 머릿속엔 그 생각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알다시피 교황청은 마족을 철천지원수처럼 증오한다.
당연히 새로운 선발대전의 주관을 맡기면 그들은 이전 선발대전까지 모조리 파헤칠 터.
그 과정에서 자신들이 저질렀던 부정이 드러나면 이 곳에 있는 귀족들은 모조리 목이 잘릴 게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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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