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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 기간
그렇게 한두명씩 배가 차자 서서히 들어가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럼 다들 슬슬 들어가시죠. 내일은 쉬는 날이긴 하지만 혹시 모르니.”
“후우냐아아...”
미나르바 백작이 먼저 제안한 것을 시작으로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메인 디쉬를 다섯 그릇째나 비웠으니 내일이 휴일이란 변명도 이젠 통하지 않았다.
술에 취해 엎어진 소냐를 든 아르낙스가 사라지고 에블린도 그 뒤를 따랐다.
“하아...”
마지막으로 방에 올라간 발린이 한숨을 푹 쉬며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그 방 안에는 먼저 온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에블린은?”
“미리 귀띔해 뒀어요. 오늘 하루만 양보해 달라고. 소냐 양도 술에 취해서 곯아떨어지셨으니 오늘만큼은 정말 둘이라고요.”
말을 마친 레벤이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그녀는 파이오니어 왕국에서 봤던 네글리제 대신 펑퍼짐한 흰색 계열 잠옷 바지와 상의를 입고 있었다.
소냐의 기습공격에 시달리던 발린으로서는 그나마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차림이 아닐 수 없었다.
“정말 이래야겠냐?”
“책임지신다면서요?”
떨떠름한 안색의 발린에게 레벤은 짐짓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제 옆자리를 팡팡 쳤다.
이쯤되면 이미 피할 수 없게 된 셈이다. 발린은 없어진 줄 알았던 쑥스러움이 돋는 걸 느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니, 거래 자체의 테마가 다르잖냐.”
“뭐가 달라요?”
레벤의 물음에 발린은 간단히 답변했다.
“그야 양쪽이 가진 재화의 가치를 서로 따져서...”
“그러니까 첫키스의 대가로 비슷한 종류를 요청한 거죠. 안 그래요?”
논리정연한 대답에 발린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평소였다면 레벤의 틈을 어떻게든 파고들었겠으나, 지금은 술기운과 분위기가 그걸 허락지 않았다.
“...하아.”
발린은 천천히 옷을 벗으려 했다.
직접 본 건 아니나 남녀간의 정사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멀뚱멀뚱 쳐다보는 레벤에게 발린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대답했다.
“잠깐만요, 지금 뭐 하세요?”
“뭐 하긴. 같이 자 달라며.”
“...네? 푸핫! 아하하하핫!!!”
눈을 멀뚱히 떴던 레벤이 다음 순간 격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너무하잖아요. 그건!”
“그러니까 함부로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말을 마친 발린이 그대로 상반신을 뒤로 젖혔다.
털썩.
옆으로 같이 누운 레벤에게 그는 한 가지 궁금했던 걸 물었다.
“몸은 좀 어때?”
“제 몸이요? 그야...날아갈 것 같이 가볍죠. 보이는 것도 달라지고. 마치 개미에서 새로 변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개미에서 새로 변한다면 2차원에서 3차원으로 변한 거라는 뜻이다.
면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높이라는 새로운 무언가가 더해진 것이다.
소감을 들은 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9클래스의 벽을 뚫었을 때 동일한 느낌을 받은 적 있었다.
세계가 달리 보이고, 무심코 지나쳤던 진리들을 깨닫게 된다.
불가능하다 생각했던 것들이 연이어 가능하게 되고, 동시에 세상의 넓이를 새로이 체감하게 되는 경지.
레벤도 지금 그런 느낌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느낌이 좀 오세요?”
“알 것 같네.”
“그럼 한 번 설명해 보세요.”
갑작스러운 도전과제였으나 발린은 능숙하게 그 감각이 어떤지 설명했다.
이미 한 번 겪어본 것이니만큼 못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농담따먹기를 몇 번 한 뒤, 발린은 다시 한번 아까의 말을 꺼냈다.
“그래서 정말 몸엔 아무 이상 없고?”
“...네, 팔다리도 멀쩡하고. 어디 아픈 데도 없고 신성력도 잘 움직여요. 왜요?”
반복되는 질문에 레벤이 의아하다는 듯 물어왔다.
하기야 하루종일 멀쩡히 움직였는데 그런 질문을 두 번이나 받았으니 충분히 그럴 만 했다.
하지만 발린은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발린이 두 번이나 말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때 실-레논이 레벤을 향해 찔러넣던 손가락...그건 역시 단순한 공격이었나?’
4강전에서 방어마저 도외시하고 움직이던 실-레논.
그의 행동이 단순히 발악이라고 하기엔 석연찮은 점이 너무 컸다.
‘분명 몸에 무슨 짓을 했을 거라 예상했는데, 내 짐작이 틀렸나?’
“레벤. 잠시 등 좀 돌려 봐.”
“네? 네.”
레벤은 갑자기 딱딱해진 발린의 어조에 별다른 반발 없이 등을 대 보였다.
스아아악.
발린은 지체없이 등에 손을 대고 마나를 밀어넣었다.
들어간 마나가 몇 번이나 몸을 헤집었으나 이상한 점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온통 느껴지는 신성력에 인상을 찌푸린 발린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드러누웠다.
“모르겠다. 직접 확인해도 별다른 이상은 없고, 너도 괜찮다니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아, 아까 그...”
레벤도 발린이 말하는 게 무엇인지 짐작했는지 말끝을 흐렸다.
확실히 실-레논의 반응엔 비정상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사악한 음모가 아니라는 게 느껴지긴 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어디 한 번 말 꺼낸 김에 확인해 볼까?’
누워 있던 발린은 눈을 감고 탐지 마법의 신호를 확인해 보았다.
특별한 소리는 나지 않았으나 자기가 건 마법이 어디에서 느껴지는지는 확인할 수 있었다.
장소를 확인하던 발린의 눈빛에 아리송함이 떠올랐다.
‘역시 루덴스 공작가인가. 한데 왜 그대로 있지? 나였다면 당장 남쪽으로 도망쳤을 텐데...?’
어차피 실-레논이 회복할 수 없는 건 확실했다.
유일한 가능성이라면 마왕의 힘을 비는 것인데, 그 마왕도 지금 시점에서는 봉인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그가 공작가에 계속 박혀 있는 건 확실히 의문을 가질 만한 일이다.
당장 전투력이 없는 시점에서 적과 한 곳에 있는다는 위험부담은 엄청나게 크다.
그걸 감수하고 황도에 있을 이유! 발린으로서는 레벤의 몸에 했던 처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웃챠!”
누워있던 발린의 옆으로 레벤이 같이 몸을 누였다.
팔을 양옆으로 넓히고 있었기에 그 위로 머리가 얹혀지는 게 생생히 느껴졌다.
“그럼 슬슬 자요.”
“정말 이걸로 되겠어?”
이불을 끌어올리던 발린은 못내 떨떠름한 어조로 물었다.
레벤이 요구한 것은 보상도, 성적인 하룻밤도 아니었다.
그녀가 원한 건 단지 같은 이불을 덮고 하룻밤 옆에서 자는 것.
첫키스를 빼앗아간 것 치고는 굉장히 가벼운 대가였다.
“정 의심스러우시면 마법사의 계약을 하시거나 문서를 작성해도 좋아요. 어때요?”
“...됐어.”
마법사의 계약이라면 발린과 엘리아 간에 맺었던 스크롤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스크롤을 만들 수도 없고,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자라. 할 게 많으니까.”
“할 거요? 대련?”
옆에 누운 레벤의 물음에 발린은 잊어버렸냐는 듯 대답했다.
“네가 말해놓고 그러면 어떻게 하냐? 내일 황도 한 바퀴 놀러 다니자며?”
“아...후후. 그래요.”
잠깐 멍한 표정을 짓던 레벤이 이내 싱긋 웃으며 이불을 끌어올렸다.
‘기억하고 있었네? 이 사람.’
등 뒤로 몸을 돌린 상태에서 지은 표정이기에 발린에게 들킬 리 없었다.
당장 자신과 같은 침대라는 것 때문에 긴장하고 있는 사람이니 더더욱 그랬다.
한편 발린은 조용히 다음 일정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차피 오늘이야 교황청에도 인파가 가득하고, 레벤과 같이 있으니만큼 침대를 떠나는 건 선택지에 없었다.
그렇다면 움직이는 건 내일 밤부터라는 말이 된다.
발린은 의지를 다졌다.
이제 수색대상이 안드로포스 외에도 한 명 더 생긴 만큼 마냥 수련에만 집중할 수 없게 된 상황이다.
‘여기서 실-레논은 물론, 잘만 하면 그 휘하 마족들을 모조리 도려낼 수도 있겠어. 그렇게만 되면 마족들의 세력이 크게 흔들릴 거야.’
실-레논은 파이오니어 왕국에서 없앴던 다크니스와는 비교도 안되는 거물이다.
마족의 공작이라고 하나, 실질적으로 그들의 위치는 군주에 가까운 입장.
세 군주 중 하나가 수뇌부와 함께 사라지면 필시 문제가 생길 것이 틀림없었다.
‘최고의 시나리오는 역시 내분이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고. 역시 미묘한 권력투쟁이 되려나.’
최선의 시나리오는 마왕의 부활 이전에 마족들을 전부 처치하는 것.
그렇게 되면 마왕의 봉인을 더욱 보강함으로서 미래 자체를 크게 뒤틀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설령 마왕이 부활한다 한들, 혼자인 그로서는 인간의 세계를 상대로 이길 수도 없을 것이고 말이다.
‘어느 쪽이든간에 예전보다 훨씬 희망이 있는 건 분명하군. 확실하게.’
발린은 오른팔에서 느껴지는 무게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지었다.
이미 미래는 가능과 불가능이 아닌, 최소한의 피해를 목표로 하는 시점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 사실이 그의 마음을 더없이 기쁘게 했다.
“...추우니까 좀 더 가까이 와 줘요.”
“어?”
“어서요.”
갑작스레 들려온 레벤의 말에 멈칫한 것도 잠시, 이내 몸 안으로 파고드는 푹신한 감촉에 발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가까이 붙지 마라.”
“설마 다른 의미로 같이 주무시기라도 하시려고요?”
말끝에 웃음을 붙이는 그녀였으나, 발린은 이미 술기운을 어느 정도 없앤 뒤였다.
“아니, 아까 대련한답시고 움직이느라 땀 냄새가 남아서 말이지.”
“...!!!”
제 꾀에 제가 당한 레벤이 말없이 몸을 붙여 왔다.
확실히 몸이 아까 전보다 뜨거운 것 같았다.
발린은 농담을 잇는 대신 왼팔을 들어 레벤을 몸에 붙여 주었다.
***
아쉬워해야 할지, 좋아해야 할지 모를 일이지만, 다음날 발린은 약속했던 대로 황도 관광을 가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레벤이 가벼운 몸살 기운을 보였던 것이다.
덕분에 같이 잤던 발린은 온 몸이 축축하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야 했다.
“세상에, 그랜드마스터가 몸살감기에 걸린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는데.”
“히히, 미안해요.”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내두르는 발린, 레벤은 마찬가지로 가볍게 웃을밖에 없었다.
익스퍼트 상급만 되어도 어지간한 질병에는 극한의 면역력을 갖추고 있다.
소드 마스터의 아랫경지도 그럴진대, 인간을 초월한 경지에 이른 사람이 감기에 걸리는 건 정말 뜻밖의 사태였던 것이다.
황도를 놀러다니는 대신 발린은 옆자리에 앉아 레벤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그녀가 걱정된다기보다는 그랜드마스터의 신체에 대한 호기심 해소가 주목적이었다.
“미열 말고 다른 건 없고? 토기라던가 콧물, 기침, 가래는?”
“그런 거 없어요. 그냥 기운도 조금 없고 어지럽고...조금 으슬으슬하네요.”
레벤의 답변은 흔한 몸살감기 환자의 그것과 완전히 동일했다.
혹여 다른 무언가가 있을까 걱정하던 발린도 증상을 다 듣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됐네. 조만간 약을 주문해 올 테니까 오늘은 그거 먹고 푹 쉬어.”
“후후, 고마워요.”
레벤은 어제와 별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감사를 표했다.
물론 그 뒤에 붙은 농담까지 빼먹지 않고 말이다.
“오늘 밤도 같이 자 주시면 안 돼요? 덕분에 어제는 정말 따뜻했었는데.”
“그러다 여기 사람들 다 감기 걸릴라. 누워 있어.”
“...하아.”
한숨쉬는 레벤을 뒤로한 발린은 방을 나선 뒤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별달리 안 아픈 것 같아 안도감이 든 것이다.
한편 상황을 들은 다른 사람들도 하나같이 레벤을 걱정해 왔다.
아르낙스와 미나르바 공, 에블린은 심심한 위로를 보냈다.
“어제 너무 움직이셨나 봅니다. 각성 후유증인 것 같은데, 무리하시지 말고 나을 때까지 누워 계십시요.”
“힘내게. 나 때문에 아픈 것 같아 미안하구먼.”
“선발대전 때까진 꼭 일어나세요.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부전승하고 싶진 않으니까!”
레벤은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미소로 셋 모두에게 웃어 보였다.
허나 아무리 그녀라도 소냐의 한 마디에는 안색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감기다냐? 그럴 때 정말 좋은 게 하나 있는데. 너무 멀어서 아쉽다냐.”
“좋은 거요? 그게 뭔데요?”
“이블 아이의 눈알이다냐! 거기다 데몬의 심장 으깬 걸 섞어서 한 대접 쭉 들이키면 감기 따윈 아무리 독해도 하룻밤만에 낫는다냐!”
“......”
과연 대장벽이라 해야 할까, 여러모로 기상천외한 민간요법이 아닐 수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아르낙스는 기겁하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닙니다! 물론 가끔 의약품이 부족해서 그걸 쓰기도 합니다만...! 저건 소냐만 그런 겁니다!”
아무리 항변해도 대장벽에 대한 이미지는 이미 어쩔 수 없었다.
지금까지 어둠 속에서 정보를 얻었다면, 이번엔 빛 속에서 조사를 마치려는 심산이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어제 편수를 수정하느라 여기까지 연재하겠습니다.
항시 코멘트로 해 주시는 여러가지 지적, 조언란 잘 보고 있습니다.
덕분에 1화의 수많은 비난에도 제가 코멘트란을 닫지 않고, 삭제하지 않는 것이기도 해요.
오늘도 작품후기란에서 뵙는 독자분들, 여기까지 따라오시고. 같이 글 봐 주시고. 같이 글을 만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