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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전
그렇게 경기가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다.
승리는 역시나 발린의 손에 돌아갔다.
최종적으로 연무장에 남은 게 발린의 골렘이고, 소냐는 그 시점에서 의식을 잃은 상태였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8강 진출! 소냐가 가진 실력에 비하면 아쉬운 전적이었으나, 그 상대를 보았을 때 그녀는 충분히 분투한 셈이다.
출전자석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8강부터는 하루에 한 판씩 경기를 진행하니 오늘의 순서는 끝난 셈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것은 경기를 보는 관중들에 한정된 것이고, 승자인 발린은 본의 아니게 연무장으로 한 번 더 나서야 했다.
바로 연무장 한가운데서 4강전의 세 번째 출전자로 선포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출전자로서 후보 귀족과 나와 자신을 소개하고,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하면 되는 간단한 일.
허나 발린은 벌써부터 앞일을 예상하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분명 어떻게 골렘을 움직였고, 오러블레이드를 뽑아냈는지 끈질기게 캐묻겠지. 일이 아주 귀찮아지겠어...’
어차피 골렘 제어술을 선보일 때부터 폭발적인 반응이 나타날 것이라고는 직감하고 있었다.
다만 그 반응은 루비 타워와 자신에게 간접적으로 쏠려야지, 이런 데서 대답을 요구받아선 안 됐다.
귀찮은 일을 직감한 발린은 눈앞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연무장이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4강전 세 번째 출전자는 웰링턴 백작가의 출전자! 발린 테오도르 후작! 박수로 맞아주십시요! 여러분!”
“와아아아아아!!”
사회자의 선창에 모두가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며 박수를 쳤다.
순수한 축하뿐만 아니라 발린과 루비 타워에 연줄을 대려는 사람들로서는 더욱 필사적이었다.
전 세계의 정세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을 선보인 마법사!
그가 눈 앞에 있는 시점에서 작은 움직임도 철저히 신경써야 하는 건 이미 상식이었다.
“그리고 여기 이 쪽은 웰링턴 백작가의 현 계승자인 에블린 백작영애입니다!”
“와아아아!!”
앞서 발린을 부를 때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호응이 터졌다.
놀랄만한 양의 시선이 모였으나 에블린은 우물쭈물하긴 커녕 담담한 모습으로 같이 걸어나왔다.
일반인이 수십 명의 시선에도 당황하는 걸 생각하면 이는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황제를 목표로 한다더니...좋아, 그 정도면 나중에 추태부릴 일은 없겠어.’
지켜보던 발린이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다는 건 그만큼 심지가 강하다는 뜻이다.
발린은 그 점에 상당한 플러스 점수를 주었다.
심지가 강하다는 건 곧 남들에게 잘 휘둘리지 않는다는 뜻.
귀족들을 통솔해야 하는 연방제국 황제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자질 중 하나였다.
‘물론 본인이 멍청하면 오히려 독이 되긴 하지만...에블린이 그럴 것 같지는 않군.’
레벤이 미나르바 백작을 데려온 날부터 에블린은 항상 밤늦게까지 공부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본래부터 똑똑한 그녀가 노력까지 하니 지식은 마치 스펀지에 물을 뿌리듯 빠르게 스며들어갔다.
덕분에 발린도 그녀와 지속적으로 협력하는 데 망설임없이 ok사인을 할 수 있었다.
비록 드래곤의 마법을 노리고 계약하긴 했으나 그 이후의 문제도 충분히 생각해 봐야 할 상황.
그 점에서 카딤 제국의 황제와는 되도록이면 원만한 관계를 노리는 게 맞을 테니 말이다.
“흠흠! 그럼 소개를 마쳤으니, 잠시 소감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마법사 나으리들! 소리 크게 부탁드립니다요!”
“사운드 업!”
“에어 컴프레셔!”
기다렸다는 듯 몇몇 마법사들이 사회자에게 마법을 걸어 주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사회자가 왕이나 다름없었다.
그만이 출전자에게 말을 걸고 관중들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나으리, 나으리. 조만간 황제 폐하가 되실지도 모를 두 나으리! 부디 소감 한 마디만 말씀해 주십시요. 이 불쌍한 광대! 그걸 받지 못하면 여기 모인 나으리들 모두가 제 등짝을 치고 엉덩이를 걷어찰 것입니다요!”
“푸하하하!!”
징징대는 사회자의 모습에 콜로세움 전방향에서 왁자한 웃음이 터졌다.
껄끄러울 수도 있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부드러워진 건 물론이다.
“뭐, 좋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죠?”
“그럼 여기 출전자 나으리부터, 간단하게 4강 소감 한 번만 말씀해 주십시요.”
말을 마친 사회자가 눈짓을 해 보인다.
아마도 이런 식으로 마법사들과 시종들을 조종한 모양이다.
속으로 감탄하던 순간 마법사들의 소리 증폭 마법이 이 편으로 오는 게 느껴졌다.
“흠.”
발린은 헛기침을 한 번 해 보았다. 역시나 콜로세움 전체에 목소리가 울렸다.
‘4강 소감이라...무엇을 말해야 할까.’
짧은 순간이지만 수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발린은 그 중 강한 인상을 줄 법한 것들은 모조리 잘라내었다.
‘이미 인상이야 4강에 올라온 시점에서 충분히 남긴 터, 굳이 도발적인 무언가를 덧붙일 필요는 없지.’
주목이야 선발대전에서 우승하는 순간 분에 넘치게 받게 될 것이다.
굳이 지금부터 욕심을 낼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럼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최대한의 이득을 볼 수 있을까?’
단순한 감사와 소감 발표는 최악의 선택이다.
아무것도 얻지 못할 뿐더러, 무엇도 대비하지 못한다.
발린은 자신이 가진 칭호들, 그리고 그것에서 뻗어갈 수 있는 방향을 생각해 보았다.
골렘 마스터로 명성을 날린 것은 이미 모두에게 알려져 있다.
루비 타워의 젊은 부탑주로서 장래가 기대되는 것도 마찬가지.
그렇다면 거기에 추가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발린의 시선이 순간 에블린에게 가 닿았다.
‘이것도 괜찮겠군.’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에블린은 추후 카딤 제국의 황제가 될 사람이었다.
카딤의 황제라면 인간 제일의 권력자다.
역사에서 권력자에게 미리 줄을 대 둔 사람들이 나중에 얼마나 많은 걸 누렸는지 떠올린 발린이 씨익 웃었다.
“루비 타워의 부탑주 발린입니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온 세계의 구성원 여러분.”
발린은 가벼운 인사로 할 말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나온 말은 상당히 충격적인 언사였다.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굉장히 힘들고 고단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지금도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을 정도예요.”
“으잉?!”
“뭐어!?”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던 관중들 사이에서 놀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허나 발린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점점 시끄러워지는 반응에도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는 여기서 포기한다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설령 제 모든 마나가 없어지고, 사지가 묶인 채 누군가 가슴팍에 검을 들이대도 말이죠.”
“...”
소란을 불러일으킨 것처럼 조용히 만드는 것도 발린이었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관중들은 이미 연무장 한가운데서 들려오는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유는 사실 별 거 없습니다. 제 후보자가 황제가 되어야 한다 믿기 때문일 뿐이지요.”
소박한 이유다. 듣고 있던 몇 명이 웃음을 머금었다.
“믿음은 곧 신념입니다. 저는 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선 죽음조차도 불사할 것이고, 그렇기에 이를 위해 제 후보자를 위해 움직일 겁니다. 그녀는 황제가 될 것이고. 카딤 제국에 역대 최고의 명군으로 기록될 겁니다. 그러한 역사를 만들기 위해 두 번만 더 이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와아아아!!!”
말을 마친 발린이 사회자를 향해 손짓했다.
요청대로 소감을 말했으니 이제 당신 차례라는 제스처였다.
사방에서 관중들이 환호성이 이어졌다. 그 대상엔 발린뿐만 아니라 에블린도 포함되어 있었다.
골렘 메이지가 지지하는 황제선발대전 후보자!
그 사실만으로도 에블린에 대한 시민들의 평가에 청신호가 켜진 셈이었다.
이를 눈치챈 에블린이 발린을 향해 놀란 표정을 해 보였다.
아무런 사전 논의도 없이 한 말이니 그럴 만도 했다.
발린은 대답 대신 윙크를 해 보였다.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며시 말이다.
‘나중에 적절한 보상 부탁드립니다. 차세대의 황제폐하.’
보이지 않는 메시지를 읽은 에블린이 가볍게 몸을 떨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그녀에게 빚을 지워둔다는 작전은 성공인 듯했다.
“이야아...이거 출전자 나으리께서 저엉~말로 신념이 꿋꿋하신걸요!? 나으리! 나으리! 에블린 나으리. 도대체 무슨 보상을 약속하신 거예요? 설마 정말로 발린 나으리가 인품이랑 능력만 보고 저러지는 않을 것 같은데!?”
사회자는 눈을 빛내며 에블린과 거리를 좁혔다.
어느 귀족의 광대였는진 모르겠으나, 배짱과 입담 하나만큼은 확실히 탑클래스였다.
“나으리들, 나으리들. 이거 제 생각이 맞는 거지유? 그...높은 기사님들이 아가씨 한 명을 위해 움직이는! 맞아! 사랑! 그 사랑 맞는 거지유? 이야~!!! 요즘 시대에 이런 낭만이 또 어딨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황제가 되는 거잖습니까! 존경합니다, 나으리!”
청산유수처럼 쏟아지는 언변에 발린은 저도 모르게 허 소리를 내었다.
막말로 하자면 사회자의 말은 에블린이 발린을 몸으로 유혹했냐고 묻는 셈.
허나 사회자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대신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포장해 버렸다.
남녀간의 사랑은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이상, 거기다 기사와 레이디 비유까지 합쳐서 둘을 소설 속 주인공처럼 띄워주기까지 하니 화를 낼래야 낼 수도 없는 입장이다.
“이야아아!!”
“잘 어울려요!”
“휘이익! 휘익!”
사방에서 쏟아지는 환호에 에블린의 얼굴에 홍조가 피었다.
하지만 역시 그녀도 범상치 않은 사람이었다. 에블린은 능숙하게 관중들의 호응을 진정시키며 다음 화제로 질문을 넘겼다.
그 다음엔 흔한 질문들의 연속이었다.
에블린이 제국을 이끌어갈 방향성이나, 둘이 알게 된 연유 같은 것들 말이다.
발린과 에블린은 능숙하게 사회자의 질문에 대답해 나갔다.
비밀로 해야 할 것은 적당히 얼버무리고, 밝혀야 할 것은 마땅히 밝히면서 말이다.
골렘에 대한 질문도 역시 빠지지 않았다.
아마 사회자뿐만 아니라 관중석의 모든 권세가들이 궁금해하고 있을 것이다.
발린은 잠깐 생각한 뒤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제가 아니라 루비 타워의 모두와 이야기하지 않으면 공개할 수 없는 비밀입니다. 미안합니다.”
“아아, 굉장한 동료애입니다! 나 혼자 찾은 게 아니라 모두와 함께 발견해낸 것이다! 응당 그래야죠! 예에! 맞습니다요!”
사회자를 비롯한 관중들의 반응은 대체로 호평이었다.
강한 힘을 지녔음에도 독단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모습에 플러스 점수가 들어간 것이다.
“그럼 두 나으리, 몇 가지만 더 물어보겠습니다! 헤헤.”
헤실헤실 웃은 광대가 남은 질문들을 이어갔다.
앞서 말했던 게 차후의 계획이나 배경이었다면, 지금은 다른 출전자들과 선발대전 자체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발린은 특별히 자신의 의견을 표시하지 않았다.
특별한 목적이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이상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기는 게 나은 질문들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질문으로 에블린 나으리에게도 소감 한 마디 말씀드릴 기회를 드려야겠지요! 자! 말씀해 주세요!”
마지막 질문을 넘긴 발린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은 일 없이 무사히 인터뷰를 끝냈으니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린 것이다.
‘저녁에는 식사 후 대련, 그리고 교황청으로 가 드래곤 하트 수련인가...요사이는 밤을 새는 게 익숙해져서 큰일이야.’
교황청에 처음 잠입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발린은 하루에 세 시간 이상을 자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나름 멀쩡한 컨디션을 유지했던 건 역시 드래곤 하트의 힘이 컸다.
형용할 수 없이 강력한 에테르가 온 몸을 돌며 피로를 풀어 줬고, 덕분에 최소한의 잠만 자도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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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바쁘지 않으시다면 추천 한 장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