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5 / 0264 ----------------------------------------------
2라운드, 그리고 정보조사.
경계가 삼엄한 거대한 대저택, 성벽을 방불케하는 높은 담장 위로 무기를 쥔 몇 명의 남자들이 오가고 있었다.
남자들의 복식은 제각기 불규칙적이어서 얼핏 보면 강도떼처럼 보였다.
허나 그들은 하나같이 목에 어떤 문양이 새겨진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번개에 맞아 갈라지는 땅을 표현한 목걸이, 에이블 공작가의 문양이었다.
에이블 공작가의 문양은 저택 정문에도 굳건히 새겨져 있었다.
금으로 화려하게 박아놓은 것이 보기만 해도 공작가의 위세가 느껴질 정도.
발린은 그 문양을 보며 숨을 들이마셨다.
“후우...”
그가 첫째 날의 목표로 정한 곳은 바로 이 곳, 에이블 공작가였다.
본래는 황성과 더불어 침입하기 가장 어려운 장소 중 하나이나, 발린의 예상대로라면 지금은 오히려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 곳이 주인이 지금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지금 에이블 공작은 크라탄 자작가에 웅크리고 있겠지, 당연히 그 빈집을 가장 먼저 탐색하는 게 정답이겠고!’
다리에 힘을 준 발린이 땅을 박찼다.
스스슥.
경지에 이른 축지법이 발동되자 순식간에 담장이 가까워졌다.
은밀히 담장을 넘는 발린에게선 어지간한 프로 암살자 못지않은 몸놀림이 보였다.
미리 은신, 기척차단 등의 마법을 걸은 데다 잠행 능력까지 힘을 보탠 덕분이다.
‘어디 보자...’
담장을 넘은 발린은 공작가의 안쪽을 천천히 한 바퀴 훑었다.
우선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성채, 저 곳이 바로 에이블 공작가의 본성이다.
평상시 에이블 공작이 주로 머무르는 곳이며, 따라서 공작이 있다면 저기에 있을 확률이 굉장히 높았다.
시선을 돌리자 반듯하게 가꿔진 가도와 정원, 사이로 흐르는 실개천들이 보였다.
그러나 한 눈에 공작가 전체를 눈에 담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성채를 중심으로 일정 거리마다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있었는데, 그것들이 가림막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때는 미처 생각 못했는데, 이렇게 보니 확실히 어렵다는 게 느껴지는군.’
발린은 숨을 들이마셨다.
중앙의 성채는 물론, 정원 전체와 건물 곳곳에서 사람들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림자들은 제각기 최적의 위치에서 매복한 채 물샐틈없이 정원을 감시하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칼날 같은 살기가 온 몸에서 느껴졌다.
척 봐도 익스퍼트 상급 이상의 능력자들만 모여 있는 게 틀림없었다.
‘역시 주인 없는 빈집이라 해도 공작가는 공작가라 이건가, 생각보다 경계가 삼엄하잖아.’
발린은 그림자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저들은 에이블 공작가에 머무르고 있는 식객들.
사병이나 기사단과는 별개로 공작가가 보유한 또 하나의 전력이다.
‘예로부터 강자들을 받아들여 식객으로 삼는 전통 덕분이지. 평상시대로라면 칭송받아 마땅할 일이지만...지금은 칭찬하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시는데.’
제삼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박수치고 싶은 전통이나, 막상 이 입장이 되니 욕을 한 바가지 정도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기야 전생의 세계에서도 이거 끝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
전생에서 이 식객들의 대부분은 공작의 권속, 즉 노스트라 제국의 군대가 된다.
공작이 뱀파이어가 된 후부터, 식객들을 하나하나 물어 권속으로 만든 것이다.
그 수효는 무려 오천 명 이상!
오천 명이 넘는 뱀파이어 능력자들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에이블 공작의 지휘에 따라 움직인 그들은 순식간에 마탑과 교황청, 황궁의 모든 생명을 죽이고 사라졌다.
그걸로 끝인 줄 알았건만, 차후 전쟁에서 다시 모습을 보인 그들은 완전히 노스트라 제국의 정예부대로 탈바꿈해 있었다.
2황녀 아일란의 권속들과 합쳐진 그들은 단일 세력으로서는 마왕군 삼공작의 직속 정예부대에 필적하는 힘을 보였다.
소드 익스퍼트 상급 이상으로만 일만 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니, 어떤 왕국도 군대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르만도 3세...그 때는 당신이 미끼 역할을 해 줬었지. 걱정 마시오. 미끼 역할은 한 번으로 끝내게 할 테니!’
마음을 굳게 먹은 발린은 다시 한 번 정원 곳곳을 둘러보았다.
침착하게 살핀 덕분인지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던 틈이 몇 곳이나 보였다.
저 중에 진짜가 있을 확률은 거의 없었다.
감시자들의 수준상, 저렇게 보이게 만든 틈은 대부분 미끼 역할을 하기 때문.
발린은 눈을 한 번 빛내더니, 곧장 적들의 시선이 가득한 한복판으로 움직였다.
스아아악.
수많은 적들의 눈이 번득이는 사이를 지나는 사이, 뇌 속에서 새로운 메시지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잠행의 숙련치가 상승하였습니다.
- 잠행의 숙련치가 대폭 상승하였습니다.
- 잠행의 숙련치가 대폭 상승하였습니다.
- 일반 능력 잠행의 레벨이 2로 상승하였습니다.
‘뭐 이리 갑자기...’
엄청난 숙련치 상승에 발린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잠행의 수련에 소홀했다고는 하나, 이렇게 갑자기 숙련치가 오를 줄은 예상 못했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낮은 레벨의 상태에서 어려운 과제를 수행한 결과인 것 같은데, 차후 다른 고유 능력을 수련할 때 한 번 써먹어 봐야겠군.’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 사이 레벨이 오른 잠행은 한층 더 은밀하게 움직이는 걸 가능케 했다.
스아아악.
발을 움직일 때마다 일렁이던 공간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음?”
그 편을 유심히 지켜보던 식객 한 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무언가가 기척을 숨기고 지나가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그 기척이 실시간으로 사그라들어 버린 것이다.
“무슨 문제가 생겼나?”
“아니...아무것도.”
옆에서 들린 다른 식객의 말에 처음 식객은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단순한 신기루겠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 식객은 다시 자신이 맡은 영역을 향해 눈을 빛냈다.
이미 한 명의 침입자가 건물 안쪽으로 들어갔다는 것도 눈치채치 못하고 말이다.
***
안으로 들어갈수록 발린의 속도는 줄어들었다.
이미 시간은 자정을 지나 1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일 일정을 위해서는 빠르게 움직일 필요성이 있다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역시나...’
간신히 한 고비를 넘긴 발린은 어느 관엽수의 나뭇잎 속에서 숨을 돌렸다.
예상대로 성채에 가까워질수록 감시의 눈길이 보다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이는 숨어있는 식객들의 수준이 보다 높아진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식객들이 강해지는 건 예상했지만, 벌써부터 뱀파이어들이 끼어 있을 줄은 몰랐군.’
발린은 나뭇잎의 틈 너머로 보이는 맞은편의 그림자를 주시했다.
그 속에서 단도를 잡고 있는 복면의 남자, 제 딴엔 숨기느라 애쓴 모습이나 어둠의 마나와 피 냄새만큼은 지울 수 없었다.
‘혹시나 했더니만 역시나인가, 더러운 흡혈귀 놈들...!’
발린은 이를 갈았다.
뱀파이어들이 에이블 공작을 타락시킨 건 그러려니 하고 여겼다.
하지만 그 식객들에게마저 손길을 뻗은 걸 확인하니 기분이 더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네놈들이 뭔데! 네놈들이 뭔데!’
분노가 용솟음쳤다. 몸 안의 마나가 지금이라도 명령을 내려달라고 속삭였다.
주문을 외울 필요도 없다. 손을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
눈짓만 한 번 하면 8클래스의 마법들이 공작가 저택을 모조리 휩쓸어버릴 것이다.
그럴만한 고유능력도, 마나도 있다. 마음만 먹으면 저택 전체를 한순간에 지워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발린은 온 힘을 다해 자신의 분노를 억눌렀다.
여기에 뱀파이어들이 있는 건 분명하나, 뱀파이어가 아닌 인간도 꽤나 많았다. 그들마저 마법에 휩쓸리게 만든다면 당초의 의미가 퇴색될 뿐이었다.
‘안 돼. 아직은. 아직은 안 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드래곤의 마법을 얻기 위해서는 여기서 소란을 일으키지 않아야 했다.
공작가 한 곳이 증발하는 건 엄청난 중대사건, 당연히 황제선발대전은 무기한 연기되거나 혹은 완전히 중단될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에블린과의 약속은 물론, 드래곤의 마법에 대한 것도 진행되지 않게 된다.
눈앞의 분노에 사로잡혀 대계를 그르칠 수는 없었다.
숨을 고른 발린은 애써 자신의 분노를 가라앉혔다.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좀 더 끌어들인 뒤, 확실히 해서 잡아야 한다!’
깨달음을 얻고 강해진 만큼 분노도 강해졌다.
때문에 발린은 분노를 가라앉히는 데 꽤나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스윽.
상황을 살핀 그는 조심스럽게 본성 성채 쪽으로 움직였다.
겉을 지키는 자들이 뱀파이어라는 건 확인했으나, 그것만으로는 성과라 하기에 약간 미비한 감이 있었다.
‘우선은 이 곳에 누가 있는지,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걸 주 목표로 하자.’
목표를 정한 순간 어느새 발린은 성채의 난간 위에 있었다.
수 미터 간격으로 번득이는 눈길이 있었으나 누구도 발린을 눈치챈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공간을 접는다는 특별한 이동방식 덕분에 투명화와 기척차단만으로도 완벽한 은신이 완성된 것이다.
그 결과 현재 발린의 움직임은 소드마스터 암살자를 방불케 했다.
그 상태로 몇 번 더 움직이자 발린은 어느새 성 내부에 들어와 있었다.
성 안쪽은 고요했으나, 그것은 편안한 밤이 아닌 폭풍전야에 가까웠다.
발린은 조용히 주변 복도를 주시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이하게도 성 안쪽은 바깥에 비해서 한결 감시의 눈빛이 줄어 있었다.
마치 감시의 눈이 있어서는 안 될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몇 개의 모퉁이를 돌던 발린은 한 가지 문제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본성 안쪽이 어떻게 생겼지? 구조를 아예 모르니 움직이기가 불편하군.’
에이블 공작성은 카딤 제국의 세 공작가문 중 한 곳의 중심.
당연히 그 규모도 웬만한 귀족 가문과는 격이 달랐다.
카디날 성보다도 훨씬 복잡한 구조에 발린은 이곳저곳을 헤매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치겠군, 여긴 아까 왔던 곳이잖아.’
얼마 전 지나쳤던 길목에 다시 온 발린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짚었다.
조바심이 났으나 참아야 했다.
바깥보다 감시의 기척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해도, 언제 어디서 적들의 눈길이 발린을 감지할지 몰랐다.
‘하는 수 없지, 마나를 퍼뜨려서 그 파장으로 성의 구조를 파악하자.’
마나를 벽 안에 퍼뜨리면 그 파장이 금세 성 안의 구조를 목걸이가 띄운 능력창처럼 보여 줄 것이다.
마냥 막무가내로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 이 상황에선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입맛을 다신 발린은 마나를 손 안에 모았다.
순간 등 뒤에서 스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
시기적절하게 바깥에서 누군가가 움직이며 인기척을 낸 것이다.
순간 발린은 재빨리 마나를 흩어버렸다.
마나의 파장은 자신뿐만 아니라 적도 읽을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여기서 그걸 펼친다는 건 성채 위에서 감시중인 뱀파이어들에게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리는 거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이런...내가 하마터면 큰일날 짓을 할 뻔했군.’
아무래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조바심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다시금 진정한 발린은 마나를 퍼뜨리는 것 외의 다른 해결방법을 생각했다.
허나 탐지마법도 정령 소환도 전부 마나가 움직이는 행위. 적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마나가 움직이지 않는 다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한참 고민하던 도중, 모퉁이 너머에서 주홍색 불빛과 함께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하녀! 이 곳에서 일하는 고용인이구나!’
눈을 빛낸 발린은 그대로 구석에 몸을 붙였다.
두근. 두근.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점점 더 크게 쿵쾅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불빛의 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답은 에이블 공작가였습니다.
세 편째 올린 다음에 에이블 공작가와 그냥 공작가의 답변을 취합해서 딱지 추첨을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