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8 / 0264 ----------------------------------------------
2라운드, 그리고 정보조사.
눈앞의 남자, 아르낙스는 객관적으로 상당히 마음에 드는 녀석이었다.
자신을 골렘에만 의존하는 마법사로 단정지은 건 약간 화나는 일이지만 말이다.
‘기개도 있고,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도 어둠의 손길을 잡지 않는다는 걸 보면 의지도 굳건해. 케틸 공작이 후계자는 잘 키웠군.’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이 녀석은 대장벽에서 마왕군과 맞서 싸우다 죽을 운명이었다.
대장벽의 병사들이 하나같이 죽기 아까운 전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녀석은 특히 더했다.
“...소개는 시켜주도록 하지.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조건? 어디 말해 봐.”
목숨이 걸려 있음에도 거래조건을 다는 걸 보니 배짱도 두둑한 듯 싶었다.
호기심이 동한 발린은 씨익 웃으면서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러나 아르낙스가 내건 조건은 발린의 생각과는 약간 달랐다.
“소개시키기 전에, 우선 믿을 만한 레이안 교단 측의 고위 인사 한 명을 같이 데려오도록. 그 사람이 네 신원을 보증해준다면 그 때 약속을 이행하도록 하지.”
“레이안 교단의 고위 인사...?”
발린은 희희낙락한 웃음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으며 근엄하게 말했다.
다행히도 아르낙스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그래, 네 녀석이 어둠의 마나에 물들었거나, 마족들의 앞잡이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 때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나는 여기서 산산조각이 나도 네 놈을 도울 수 없어.”
“네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알 것 같군. 좋아.”
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가 교단의 고위 인사랑 친분이 있는 건 굉장히 드문 일.
그걸 저리 쉽게 수락하는 모습에 아르낙스는 한순간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둘은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갔다.
경기장이 가까워질수록 앵앵거리던 소리들이 점차 뚜렷이 들리기 시작했다.
“현재 골렘이 북서편 초원지대에 추락하였고,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러 마법사들이 움직이고 있으니 우선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웅성거림으로 가득찬 사이로 사회자가 어떻게든 사람들을 진정시키려 하고 있었다.
발린은 피식 웃으며 연무장 한가운데로 향했다.
“어, 엇! 발린! 발린입니다! 아르낙스도 보입니다! 양 출전자 나타났습니다!”
“오오!!”
“와아아아!!”
둘을 발견한 사회자가 허겁지겁 목소리를 높였다.
골렘과 함께 죽은 줄 알았던 둘이 나타난 것이다.
“어떻게...!”
“아, 아르낙스도 떠 있어!”
“플라이, 플라이 마법이다.”
지켜보고 있던 몇몇 출전자들이 동시에 상황을 추측했다.
스스로 공중에 떠 있는 발린, 그리고 마법으로 둥둥 뜬 채 같이 내려오는 중인 아르낙스.
누가 이겼는지 알아보는 건 쉬운 일이었다.
“웃차”
발린은 연무장 안에 발을 내딛은 뒤, 아르낙스를 연무장 밖에 살며시 내려놓으려 했다.
그 때 아르낙스가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 없다. 발린. 내가 졌다.”
아까 공중으로 올라갔을 때부터 승패는 이미 결정난 뒤였다.
아르낙스가 꺼낸 말은 단지 그걸 시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어...네. 이번 라운드. 발린 테오도르 후작의 승리..승리입니다!”
얼떨떨한 목소리로 승패를 말하는 사회자의 등 뒤로 병사들이 다가와 골렘에 대한 소식을 전했다.
숲 속에 떨어진 골렘이 현재 형태가 복구되고 있으며 특별한 부상은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럼 약속대로 선발대전이 끝난 후에.”
“...알았다.”
헤어지기 전 발린은 약속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우선은 황제선발대전에 집중하고, 다른 건 그 후로 미룰 생각이었다.
‘드래곤의 마법에 케틸 공작의 검술에...이거 선발대전이 끝나도 쉴 틈이 없겠군.’
해야 할 일은 그뿐만이 아니다. 엘리아의 성과도 점검해야 하고, 아티팩트 제작도 준비해야 했다.
하나만 해도 몇 년간 공을 들여야 할 일이 몇 개나 쌓이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골렘은 알아서 올 테니 그 쪽에 있는 병사들에게 헛고생 말라고 전해줄 수 있나요?”
“예! 물론입니다!”
시종들의 케어를 받던 발린은 골렘의 크기를 원상태로 되돌렸다.
얼마 후면 처음 생성됐을 때의 크기로 되돌아올 것이다.
출전자 좌석으로 올라온 발린에게 레벤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한 마디를 던졌다.
“정말이지, 그 용기만큼은 인정해줘야 할 것 같네요.”
“뭐가?”
발린의 반문에 레벤은 한숨을 내쉰 뒤 말을 이었다.
“그렇잖아요. 골렘 안에 스스로 파묻히는 마법사에다, 스스로 몸을 공중으로 띄워 추락시키다니. 그런 건 전쟁터에서도 안 쓸 도박수라고요.”
구구절절한 추궁엔 단 한 마디도 틀린 말이 없었다.
허나 발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기색을 띄며 대답했다.
“왜 그래? 다 계획대로 됐고, 이겼는데.”
“그런 것 치고는 초반에 꽤나 고전하시던데.”
정곡을 찌르는 말에 발린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아르낙스는 케틸 공작의 수제자라 칭할 만큼의 실력을 입증했다.
갓 소드마스터에 올랐음에도 그의 실력은 이미 테네스 후작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었던 것이다.
“케틸 공작이 제자는 잘 뒀어.”
“쿡쿡. 그렇게 말씀하시니 꼭 교황성하 같네요.”
레벤의 대답에 발린은 순간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당대 교황이 누군진 모르지만, 그게 무엇을 비유하는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일 년이 넘게 이 몸에 있었던 것 같은데 아직도 늙은이 말투가 남아있었다니, 이거 조심 좀 해야겠는걸...?’
생각을 마치던 발린의 눈이 관중석의 어느 한 부분에 꽂혔다.
술렁이며 이야기를 나누는 관중들 사이, 웬 꼬맹이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잠깐만...’
발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쪽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어딘지 소년의 모습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잠시동안 그러고 있던 발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소년의 정체는 발린이 모를래야 모를 수 없는 사람, 검왕 팔리아스였던 것이다.
‘저 녀석이 어째서 여기에...?’
팔리아스가 여기 있다는 건 안드로포스도 황도에 이미 도착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다 보기엔 어제까지 아무 소식도 없는 게 마음에 걸렸다.
“...후우.”
발린은 아무것도 할 수 없자 한숨을 쉬었다.
직접 팔리아스에게 가는 건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다.
출전자가 일반 관중석에 가는 건 엄히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변의 시선 때문에 정령을 붙일 수도 없다.
하지만 발린에게는 무영창이라는 아주 좋은 고유 능력이 있었다.
‘마나를 조금 멀리서 끌어와서...소환한 다음 붙여두면 되겠지.’
바람의 마나를 쓰는 게 지금 밝혀지면 좋을 게 없었다.
발린은 최대한 은밀히 바람의 정령을 소환한 뒤 팔리아스에게 붙게 했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팔리아스 녀석의 경지가 익스퍼트 하급 정도였나? 그렇다면 마나를 이 정도만 모아서...’
소환된 정령에게 정령사의 명령을 전달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경기장 하늘 위에 소환된 정령에게 바람의 마나를 모아 글씨를 만드는 정도.
일반 마법사들이야 번거롭다 하겠으나 발린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었다.
정령이 팔리아스에게 붙은 것을 확인한 발린은 눈을 빛냈다.
내일, 혹은 그 다음날 팔리아스, 그리고 안드로포스가 무엇을 하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정도 마음을 놓은 발린이 다음 경기에 집중하는 사이, 패배자인 아르낙스는 소냐랑 마주보고 있었다.
“그 놈 나쁘다냐! 실력이 안 되니 괴상한 걸 써서 이겼다냐! 마족이나 다름없다냐!”
“...”
옆에서 몇 번이나 투덜대는 소냐를 두고도 아르낙스는 아무 말이 없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면 고소공포증 때문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소냐는 아르낙스와 오랜 세월을 같이 지내왔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반응은 절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대장벽에서부터 숱한 공중전을 겪은 그에게 방금의 그것은 그다지 높은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왜 그러는 것이다냐?”
한참을 혼자 씩씩대던 소냐가 어느 정도 진정된 뒤 입을 열었다.
정작 가장 분노해야 할 아르낙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의문을 느낀 것이다.
“너는 분하지 않은 것이다냐? 스승님의 명예를 빛낼 기회가 사라진 것이다냐!”
“...아니야.”
멍하니 있던 아르낙스가 고개를 살며시 저으며 대답했다.
그는 머릿속으로 발린이 보여줬던 만류의 검을 떠올리고 있었다.
케틸 공작을 마주하는 듯한 느낌, 아니. 더 높은 곳의 묘리가 눈 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괜찮으냐?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것 같다냐.”
“어? 어! 응.”
아르낙스는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평소의 날카로운 감은 어디 갔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소냐가 눈매를 찌푸리며 충고했다.
“사랑에 빠지지는 말라냐. 그것 때문에 죽은 인간들 많이 봤다냐.”
“사랑?”
아르낙스가 정신을 차리고 물었으나, 이미 소냐는 로브를 두른 채 걸어나가고 있었다.
‘그런 녀석 따위, 내가 다시는 나오지도 못하게 혼쭐을 내주겠다냐.’
아티팩트를 끌고 나오는 것도, 거기에 승복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소냐는 걸어나가며 그런 녀석은 반드시 혼쭐을 내주겠다 다짐했다.
그날 저녁, 발린은 얼굴에 약간의 환상 마법을 건 채 레벤과 헤어졌다.
그냥 걷자니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 때문에 도무지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 내일 저녁에 그 쪽으로 찾아갈게요. 어느 곳에 묵고 계세요?”
“수도 서쪽 빈민가의 벌꿀집이란 간판이 달린 여관이야. 골목 안쪽에 있어서 찾아오기 힘들 테니 그 때 같이 가는 게 낫겠다.”
“벌꿀집...?”
레벤은 발린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굳이 거기까지 들어간 이유가 있나요? 빈민가라면 오히려 더욱 번거로울 텐데요.”
대신관으로서 빈민들을 폄하한다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레벤의 방금 말은 교황청의 대신관이 아닌 황제선발대전의 출전자로서 하는 말이었다.
치안이 안 좋으면 그만큼 습격의 위험도도 커질 수밖에 없다.
깨끗한 거리나 교황청을 두고 굳이 그 여관을 고집하는 이유.
그걸 물어오는 레벤에게 발린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가 와 보면 알게 될걸? 어째서 내가 굳이 그 여관을 택했는지.”
“거기 종업원이 이쁘구나. 이해했어요.”
시니컬한 농담에 발린은 입맛을 다시며 돌아섰다.
어차피 내일 와서 한 끼만 식사를 해도 무엇 때문에 거기 있는지 알 테니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둘이 헤어진 뒤 레벤은 성기사들과 함께 움직였다.
“레벤 님, 말씀해주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뭘?”
옆자리를 수행하던 성기사 한 명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아까 이야기하시던 발린 테오도르 후작, 그 뒤에 미행자가 있던 것 말입니다.”
“아, 그건 발린 공도 알고 있을 거예요. 슬쩍 모양새를 훑어봤는데 이미 마나를 움직이고 있더라고요.”
말을 마친 레벤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니까 우리 성기사 파르네씨는 좀 더 정진해 주세요. 제 수련상대가 될 수 있을 때까지.”
“예! 레벤 대신관님.”
레벤의 명령에 파르네라 불린 성기사는 목소리를 높이며 목례했다.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은 레벤은 마저 걸음을 옮기며 마음속에 일말의 걱정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것은 발린을 따라간 의문의 인기척에 대한 걱정이었다.
'어차피 발린 공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일 테니까.'
레벤은 삼황자를 상대할 때 보았던 발린의 힘을 떠올렸다.
무엇 때문에 그걸 비밀로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힘이라면 지금 따라붙은 미행인 정도야 가볍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아까 걱정시킨 게 괘씸하기도 하고.'
레벤은 다리의 통증을 숨기며 걸음을 옮겼다.
통증의 정체는 아까 전 발린이 골렘 속으로 스며들었을 때 직접 나서려는 본능을 억제하며 생긴 상처였다.
***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쁘신 조회, 혹시 가시는 길에 추천 하나만 놓아주고 가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