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9 / 0264 ----------------------------------------------
황제선발대전 개최!
발린은 기지개를 켜며 대답했다.
“첫 날이니까. 아마 며칠만 지나면 서류가 이만큼 쌓일걸?”
“안 그래도 많은데...그건 사양하고 싶네요.”
엘리아는 한숨을 쉬며 투덜거렸다.
굳이 보지 않아도 그녀의 주변자리 모습이 어떨지 짐작이 갔다.
“양 옆에 쌓인 서류가 이미 한가득인 거 같은데. 그렇지?”
발린의 지적에 엘리아는 화들짝 놀라 손을 저었다.
하지만 이미 그 얼굴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짐작가능한 일이었다.
“아뇨!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해서 어느 정도 줄였으니까! 정말 괜찮아요.”
“너무 혼자 모든 걸 떠맡으려 하지 마. 수장은 모든 걸 짊어지는 존재가 아니니까.”
발린은 피식 미소지으며 조언했다.
모든 걸 혼자 하는 사람은 결국 모두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
체험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예전부터 잘 알려진 격언 중 하나였다.
“나 말고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몇몇 만들어 두는 게 좋을 거야. 그 사람들이 추후 네 심복으로서 널 끝까지 보좌해 줄 사람들이니까.”
“...알겠어요.”
열성적인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아였다.
하지만 그 눈가에 깃든 피로는 아티팩트 너머로도 보일 만큼 뚜렷했다.
금방 끝내야겠다 생각한 발린이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래서, 이제 네 성취는 어떤지 들어볼까? 내가 가기 전에 말한 것들. 기억해?”
“네.”
엘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선발대전이 시작되기 전, 발린은 엘리아에게 다음 단계의 성취 목표와 그에 맞는 조언을 해 주었다.
첫째는 땅의 마법 4클래스에 이르기.
둘째는 매직메이커를 사용한 B급 아티팩트의 제작.
세 번째는 발린과 같이 만들고 있는 신형 아티팩트의 성능 보강이었다.
“세 가지 모두 신경쓰고 있지?”
“네, 업무가 바쁘긴 하지만 그래도 성취가 보이니까 더 열심히 하게 되네요.”
말을 마친 엘리아가 활짝 웃었다.
자신감있는 폼이 꽤나 많은 진전을 이룬 것 같았다.
“그래? 그럼 어디까지 수행했나 들어볼까.”
“우선 3클래스 마스터의 경지에는 도달했는데, 4클래스는 도무지 뚫을 수가 없어서 고민이예요.”
엘리아의 고민을 들은 발린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 그녀가 마주친 것은 흔히들 부르는 깨달음의 벽이었다.
세상 모두가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는 만큼, 엘리아가 저러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역시 그런가.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 건데 마나석들 바리바리 모아서 그걸로 뚫는 짓은 안 하리라 믿는다. 그건 몸에도 심히 안 좋을 뿐더러, 기껏 만들어도 다른 마법사의 것들보다 약하니까. 알겠어?”
“네. 스승님.”
혹시 몰라 발린은 엘리아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다시금 강조했다.
막힌 깨달음의 벽은 그에 맞는 각성을 이루어야 비로소 부숴진다.
단순히 마나를 부어넣는 것만으로는 뚫을 수 없이 평행선만 달리게 되는 것이다.
그 점을 지적한 발린에게 엘리아는 말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엘리아도 억지로 마나를 모아 만든 서클이 얼마나 불안정한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마탑의 탑주인 만큼 그에 관한 지식도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었던 덕분이다.
“그럼 두 번째. 매직메이커 이용은 어떻게 쓸 만하게 됐어?”
“저어...그게.”
엘리아는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뭐야, 무슨 문제가 있어?”
“네...”
“문제가 있다라...원인은 역시 네 마나량이겠지?”
말을 마친 발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처음 본다면 모를까, 이미 매직메이커를 숱히 써 온 만큼 원인은 뻔했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말씀드린 적도 없는데...”
“그야 뻔하지. 네 지금 마나량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아티팩트는 사용자의 마나를 받아 능력을 발현한다.
그런만큼 사용자의 마나가 드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엘리아의 클래스는 3클래스 마스터. 그 정도 수준의 마나로 매직메이커를 다루면 얼마 가지 못해 마나가 다 떨어질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나도 레드 에이어 수리할 때 겪어 보았으니 잘 알고 있지.’
그 문제만 아니었으면 아마 지팡이 복원이 몇 배는 더 빨라졌을 것이다.
“그건 어쩔 수 없어. 첫 번째 과제랑 긴밀히 연관된 부분이니 앞으로는 4클래스의 벽을 뚫는 데 집중하도록 해.”
“알았어요. 그리고 마지막 과제에 대해서 말인데요.”
마지막 세 번째 과제를 떠올린 발린의 얼굴이 죽상이 되었다.
레벤과 했던 약속이 다시금 기억나버린 탓이다.
“지금 이 아티팩트처럼 마나로 상태창? 같은 걸 투영하는 것까진 문제없이 성공했어요. 하지만...”
“하지만?”
발린은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거기에 응해 엘리아가 막힌 부분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봐도 이건 어쩔 수 없더라고요. 사용자의 정보를 인식해서 능력을 보여주는 거요.”
“역시 그런가.”
답답해하는 엘리아 앞에서 발린도 마찬가지로 작게나마 한숨을 쉬었다.
난항에 빠진 것은 상태창에 고유 정보를 어떻게 인식시키느냐 하는 문제였다.
아무리 발린이 온갖 지식을 얻고 경험에 해박하다 한들 이것만큼은 바로 해결할 수 없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해 내신 게 어디예요. 나머지는 제가 열심히 생각해 볼 테니 스승님께서는 선발대전에 집중해 주세요. 골렘까지 들고 가셨으니 꼭 우승하셔야 돼요. 아셨죠?!”
“그러마.”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엘리아에게 발린은 그윽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아무래도 뱀파이어 한두 마리를 산 채로 잡아야 뭔가 단서를 얻을 것 같은데.’
엘리아에겐 못할 말이었으나, 발린은 아티팩트의 완성을 위해서 마족이나 뱀파이어를 잡아 실험할 생각까지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물론 뱀파이어의 흡혈과 마족의 타락.
그걸 이용하면 아티팩트에 사용자의 능력 정보를 주입시킬 방법이 떠오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좋아. 그럼 엘리아.”
“네. 스승님.”
보고를 전부 들은 발린은 잠깐 숨을 고른 뒤 스승으로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우선 아까 말했듯 두 번째 과제는 결국 첫 번째랑 연관되어 있으니 이제부터는 조금씩만 하고. 세 번째 과제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천천히 해답을 생각해 봐. 나도 아이디어가 두어 개 정도 있으니 나중에 같이 연구해 보자.”
“...네!”
눈을 빛내는 엘리아에게 발린은 숨을 들이마신 뒤 말을 이었다.
“그리고 첫 번째. 4클래스의 경지에서 막혔다고 했지. 그럴 때는 말이다. 너무 마법 수련과 호흡에만 의존하지 말고...”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발린은 두 번 4클래스의 경지를 뚫은 경험이 있었다.
두 번 연속적으로 그것이 통한다면, 이는 단순한 속설이 아니라 경험에 기반한 이론이 된다.
발린이 가르치는 것은 바로 그 이론이었다.
“이렇게 해 보면 어느 정도 진전이 있을 거다. 그렇다고 너무 빨리 성과를 내려고 하지도 말고.”
“네. 스승님.”
엘리아는 발린과 세 살 차이로, 올해 열세 살이 된 아이다.
그 나이에 3클래스의 마스터라면 아무리 발린의 지도를 받았다 한들 굉장한 성장이었다.
단지 그 이상 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을 뿐이었다.
“좋아,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이만 자라. 내일 또 연락하마.”
“이것만 다 처리하고 잘게요. 고마워요. 발린 스승님.”
“뭘.”
아티팩트에 공급되는 마나를 끊자 엘리아의 모습이 치직거리다 사라졌다.
바깥을 흘긋 바라본 발린은 문 쪽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야기 다 끝났습니다. 이제 들어오셔도 됩니다.”
삐이걱.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리고 목욕을 마친 에블린이 들어왔다.
머리가 촉촉히 젖어 있는 그녀는 속옷에 네글리제 하나만 걸친 간소한 차림이었다.
“후우, 이제 좀 상쾌하네요. 고마워요. 발린.”
“뭐가 말입니까?”
갑자기 들려온 고맙다는 인사에 발린은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자 에블린은 씨익 웃으며 옆에 둥둥 떠 있는 불덩어리를 가리켰다.
“이거요. 요 녀석이 계속 목욕물을 따뜻하게 데워 준 덕분에 쭈욱 따뜻하게 목욕할 수 있었거든요. 덕분에 좋았어요.”
“아하...별 거 아닙니다. 그냥 저 대신 호위 역할이나 좀 하라고 보낸 거죠. 암살자가 안 온 걸 보아하니 녀석이 역할을 제대로 했나 보군요.”
말을 마친 발린에게 불의 정령은 한 일을 자랑하기라도 하려는 듯 몸집을 키웠다.
새끼손가락만하던 녀석이 순식간에 사과 정도의 크기가 되자 에블린은 살짝 놀라다 쿡쿡 웃었다.
“귀여워요. 얘.”
“마음에 드시면 앞으로 자주 불러드리겠습니다.”
발린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활활 타오르던 불의 정령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럼 제 차례이니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내일도 혹시 모르니 성기사단과 바로 합류하십시요.”
“알겠어요.”
에블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씻으러 욕실로 향한 발린은 아직 한가득 남은 훈김에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의 목욕인가.”
물의 정령으로 몸을 씻는 게 일상이어서 그런지 직접 목욕하는 건 영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뜨거운 물에 온 몸을 담그는 쾌감만큼은 역시 양보할 수 없었다.
“후아...”
온 몸의 근육이 풀리는 느낌에 발린은 눈을 감고 미소를 지었다.
몸이 편해지니 저절로 마음도 휴식의 때를 얻을 수 있었다.
“전생에서 즐긴 노천온천이 떠오르는군, 거긴 여기보다 몇 배는 더 좋은 것 같았는데.”
마왕군과의 싸움 도중엔 자신을 비롯한 영웅들이 유격전을 펼칠 때도 있었다.
기습을 위해 산을 타거나, 지하를 이용해 적진의 뒤로 돌아가 강력한 마법으로 진영을 붕괴시키는 방식이다.
움직이던 도중 몇 번 노천온천에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아프던 뼈나 쑤시던 근육 등이 싹 낫는 효능을 보였다.
“음. 음...온천 좋지.”
욕탕에서 몸을 눕힌 발린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일부러 생각하지 않아도 어느새 나중의 걱정들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우선 마음에 걸리는 곳은 세 군데인가.’
발린이 경계하는 세 곳 중 두 곳은 루덴스,에이블 양대 공작가.
둘 모두 누구라도 알 만한 거대 가문이자 이번 대회 최강의 우승후보들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가문, 크라탄 자작가는 조금 달랐다.,
그저 겉보기로는 인기 좀 있는 자작 가문에 지나지 않을 뿐인 곳.
하지만 전생의 기억을 가진 발린의 눈을 피할 순 없었다.
‘금발의 창수...그 사람의 경지를 한 번 보고 나서 확실히 결정하자, 그 전엔 안 돼.’
크라탄의 뒤에 노스트라 제국이 있는 게 맞다면, 그들은 이번 황제선발대전을 절대 놓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황제를 매혹시키는 것보다 이미 앞잡이가 된 인물을 황제로 즉위시키는 게 훨씬 쉽고 빠르다. 게다가 삼황자가 죽었으니만큼 놈들도 이번 대회에 전력을 쏟아붓고 있겠지.’
삼황자의 실패는 제국의 세력이 꺾였다는 걸 뜻하기도 하나, 동시에 경쟁자가 줄어들었다는 의미도 있었다.
‘황위 계승전이 지금도 진행중이라면 남은 놈은 둘, 바로 옆의 녀석만 제거하면 내가 황제다라는 생각에 정신이 없을 테지. 그 틈을 노린다!’
노스트라 제국의 약점을 노리는 발린, 그러나 그는 또 다른 상대도 잊지 않고 있었다.
뱀파이어들에 정신이 팔려 마왕군을 잊는 우를 범한다면 전생보다 더 쓰라린 패배를 맞이할 테니 말이다.
‘가급적이면 둘이 부딪히게 조작하는 게 최상이지만...이번에는 쉽지 않겠지.’
파이오니어 왕국의 수도에서는 계획과 운이 맞아떨어진 덕에 삼황자와 다크니스 간 싸움을 붙일 수 있었다.
그게 성공했음에도 불구, 발린은 삼황자를 제거하는 데 전력을 쏟아야 했기도 하고 말이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의 마지막 편은 얼마 후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