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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방문
대답을 들은 펜잔스의 눈썹이 순간 저절로 꿈틀거렸다.
그가 제안한 것은 누구라도 혹할 만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세계 최고의 마법사라는 명예, 현존 최강의 마법사가 직접 내리는 가르침, 다이아몬드 타워의 막대한 재산까지.
마법사로서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당연히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했기에 이 거절에 대한 반응을 보이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거절...인가. 이보게.”
펜잔스는 입을 열어 발린을 바라보며 설득을 해 보려 했다.
그는 펜잔스가 인정한 미래의 신성, 장차 마법계는 물론 문명 전체에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허나 그 생각은 발린의 눈을 보는 순간 씻은 듯이 사라졌다.
발린은 이미 결심을 굳힌 듯한 모습이었다.
더 이상 설득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펜잔스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순히 실전 경험을 쌓는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는 게 아니길 바라네.”
펜잔스의 말에 깃든 걱정을 확인한 발린은 마주 웃어주며 답했다.
“걱정 마십시요. 저는 우승을 노리고 있습니다.”
패기넘치는 답변에 펜잔스는 허허 웃으면서도 여러모로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숨겨둔 수가 아무리 크다 해도 자신이 아는 적수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죽거나, 혹은 그 전에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겠지. 그 때 느끼길 바라네. 방금 자네가 차 버린 제안이 자네의 운명을 바꿀 기회였음을.’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들이키는 펜잔스였다.
용건이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난 펜잔스에게 발린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 그것과는 별개로 인사드립니다.루비 타워의 부탑주 발린, 다이아몬드 타워의 탑주 펜잔스님을 만나서 영광입니다.”
“흠?”
막 일어서려던 펜잔스의 눈길에 흥미가 돌았다.
아까까지의 둘이 출전자로서 이야기했다면, 이제부터는 루비 타워의 부탑주와 다이아몬드 타워의 탑주라는 직책으로서 이야기하는 셈이다.
“이쪽도 마찬가지네, 부탑주.”
“오늘은 날이 늦었기에 이만 가 보겠습니다만, 추후 만날 수 있다면 좋은 이야기 나눌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좋은 이야기라...그럴 때가 왔으면 좋겠군.”
펜잔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빌었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엔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겨났다.
‘에블린 백작영애는 도대체 무엇을 대가로 제시했길래 저 친구를 끌어들일 수 있었을까.’
다이아몬드 타워의 차세대 탑주라는 직책을 내던진 남자다.
아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최소한 그 이상의 무언가를 줘야 할 터.
펜잔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둘을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대충 예상가는군.’
위아래로 에블린을 훑어다본 펜잔스는 이내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발린은 이제 막 성에 눈을 뜰 만한 나이, 에블린 백작영애가 끌어들이기에는 손바닥 뒤집듯 쉬웠을 게 분명했다.
‘황제가 된 이후 혼인하여 공동 황제가 되는 조건인가. 발린 테오도르...여자에 홀린 대가가 얼마나 큰지 조만간 느끼게 될 걸세.’
“그럼 가보겠습니다. 조만간 다시 만나도록 하죠.”
“허허, 무운을 비네.”
둘이 나간 뒤 펜잔스는 워릭을 향해 나지막히 말했다.
“저 둘과 특별히 연관관계는 없는 것이 확실하겠지?”
“예! 탑주님. 예전에 사절단으로 파견됐을 때 대면한 후로는 한 번도 없습니다.”
군기가 바짝 든 워릭의 모습에 펜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네. 워릭.”
“예. 예?”
고개를 들어보이는 워릭에게 펜잔스는 사람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마 사절단으로 갔을 때 따로 귀띔을 한 모양인데, 덕분에 그 쪽도 우리를 믿는 것 같더군.”
“아. 아닙니다! 탑주님.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
펜잔스의 칭찬에 워릭은 몸 둘 바를 몰라했다.
에블린과 연관이 있는 걸 감추고자 했는데, 어쩌다 보니 펜잔스 탑주에게 호감을 사게 된 것이다.
“아닐세, 덕분에 흥미가 동하는 친구와 이야기해볼 수 있었어. 조만간 응당한 보상을 내려주도록 하지.”
실제로 펜잔스는 방금 전의 칭찬이 전혀 과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발린은 현재 마탑들 사이에서 폭풍의 핵 같은 존재.
그런 사람과 선을 대놓았다는 건 충분히 치하받을 만한 일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그럼 가 보겠네. 생각할 게 조금 많아서 말이지.”
말을 마친 펜잔스는 허리를 굽히는 워릭을 뒤로한 채 탑주실로 향했다.
황제선발대전이 눈앞으로 다가온 지금, 출전자로서 분석해야 할 상대들은 차고도 넘쳤다.
한편 여관에 돌아온 둘은 한숨을 내쉬며 저녁식사를 주문했다.
“아직 저녁 안 드셨어요?”
“일이 워낙 바빠서, 레모네이드 두 잔이랑 차 한 잔밖에 못 마셨습니다.”
발린은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정리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른 건 치차하더라도, 배를 채울 시간도 없이 움직인 덕에 온 몸에 힘이 쫙 빠졌다.
힘을 쭉 빼고 있으려니 종업원 소년이 낑낑대며 음식이 가득 담긴 쟁반을 들고 왔다.
“여기! 오늘의 추천 저녁인 칠면조 통구이와 딸기 파이입니다요! 맛있게 드십시요!”
“이거 더할 나위 없는 성찬이군.”
요리들을 훑어본 발린이 피식 웃으며 한 마디 했다.
메뉴가 단촐하다고는 하나 하루종일 움직여 지친 둘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는 성찬이었다.
발린이 돈을 건네려 주머니를 뒤지자 순간 종업원 소년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뇨! 그...돈은 주실 필요 없으십니다! 이건 저희 주방장님께서 드리는 서비스라고.”
“뭐? 서비스? 우리가 누군 줄 알고?”
살짝 어조를 높여 묻자 소년은 뒷머리를 벅벅 긁어대며 대답했다.
“그야...황제선발대전에 나가시는 분이란 건 알 것 같으니까요. 이건 거기서 열심히 하시라고 저희 어머니...아니 주방장님께서 드리는 서비스예요.”
눈도 못 마주치며 고개를 숙이는 소년에게 발린은 싱긋 웃어 주었다.
단순히 숙박공간을 빌렸을 뿐인데 이런 서비스까지 받을 줄은 솔직히 예상외였다.
“잘 먹을게. 여기 음식 맛있더라. 어머님께 고맙다고 전해 드려.”
“가, 감사합니다!”
웃는 발린 대신 에블린이 대답하자 소년은 주근깨 가득한 얼굴 전체가 발갛게 물든 채 물러났다.
“그나저나, 에블린 님, 거기서 뭣 좀 챙겨 드시지 그러셨습니까.”
“아뇨...점심이야 워릭 공이 가져다 줬는데, 저녁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더라고요.”
음식을 권하며 하는 말에 에블린은 대답과 함께 손으로 긴 턱수염을 쓸어내리는 흉내를 내 보였다.
그 의미를 이해한 발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핫! 그, 그만!”
“그뿐인지 아세요? 문 밖에도 마법사들이 착착 늘어서기 시작하는데, 그게 이렇게. 이렇게...”
그렇게 시작된 에블린의 마탑 이야기는 식탁 위의 칠면조가 뼈를 드러낼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
발린은 적절히 웃어주는 한편 에블린의 말을 주도면밀히 분석했다.
‘일단 특별히 말실수를 했다거나 하는 건 없어 보이는데...그래도 역시 불안하단 말이야.’
펜잔스는 마법 실력과 화술 둘 모두를 갖춘 만능형 인간이다.
특별히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제스처를 통해 무언가가 새어나갔을 수도 있었다
‘기억을 읽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쩔 수 없지.’
고개를 흔들던 발린에게 배를 채운 에블린이 질문을 던졌다.
“제 얘기는 이렇게 끝인데, 발린 님께선 어떠셨나요?”
“저 말씀입니까? 저는...”
발린은 오면서 정리한 오늘의 성과를 떠올렸다.
에블린의 보호를 맡긴 건 물론, 교황청이 가진 출전자들에 대한 정보도 얻어낼 수 있었다.
당초 목표로 삼았던 것들은 전부 얻은 셈.
하지만 정작 발린 본인의 기분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궁금증을 해결하러 간 곳에서 새로운 궁금증이 추가됐기 때문이다.
‘넴로드 대신관이라 했었나? 망할 자식...’
생각하다 보니 왠지 모를 불쾌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알려주려면 끝까지 알려줄 것이지, 이리저리 이상한 말만 하다 중요한 때 도망치면 어쩌라는 거야?’
무서운 이야기를 듣다 중간에 끊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발린은 옆에 놓인 물 한잔을 마신 뒤 답했다.
“글쎄, 절반의 성공이라고 해야 할까 싶습니다.”
“절반의 성공이요? 그럼...”
대답을 들은 에블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걱정 마십시요. 출전자들에 대한 정보랑 보호자 모두 구해 뒀으니까.”
“아!...그럼 목표는 다 이룬 거 아닌가요?”
“글쎄.”
발린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 뒤 남은 칠면조 고기를 뜯었다.
시간이 좀 지나서인지 고기는 처음 뜯을 때보다 약간 더 질겼다.
그 질긴 맛이 계속해서 넴로드 대신관의 한마디를 떠올리게 했다.
‘애매하군.’
더 씹자니 질기고, 그렇다고 뱉자니 육즙이 신경쓰이는 상황.
넴로드에게서 들은 말이 딱 그런 위치였다.
“됐으니까 이만 자죠. 내일부터 시작일까진 분석하느라 바쁠 거 같으니.”
고기를 꿀꺽 삼킨 발린은 에블린을 2층으로 보내며 자신도 그 뒤를 따랐다.
그 다음 날은 마나 호흡과 검술을 병행하며 상대방에 대한 대책을 세웠다.
레벤이 건네 준 정보에는 생각보다 많은 게 들어 있었다.
이를 분석하고 전략을 짜 주는 것은 에블린의 몫, 그걸 받아들여 응용하는 게 발린이 해야 할 일이었다.
“케틸 공작이 안 온다면 아마 그 사람들은 공작 밑에서 검술을 배운 사람인 것 같아요. 실전으로 다져진 만큼 무섭긴 하겠지만...발린 님이라면 쉽게 처리하실 것 같네요.”
말을 마친 에블린이 피식 웃었다.
아무리 상대가 소드마스터라 한들 베기가 소용없는 적은 처음 상대할 테니 말이다.
“그랬으면 좋겠는데...그렇게 쉽지는 않겠죠.”
탐탁찮은 어조로 대답한 발린은 머릿속으로 강적들과의 전투를 시뮬레이팅해 보았다.
소드마스터나 대마법사 정도 되는 사람들이면 골렘의 약점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골렘이 강력하고 희귀한 아티팩트라고는 하나, 그 방법과 약점만은 암암리에 각국의 고위 귀족들은 전부 다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주문서...’
아무리 진흙에 물과 땅의 마나를 많이 우겨넣는다 한들, 쓰지 않는 이상 그것은 단지 질 좋은 진흙덩어리일 뿐이다.
진흙덩어리를 무적의 거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골렘 주문서.
이것이 파괴된다면 골렘은 한순간에 원래의 진흙덩이로 돌아갈 테고...
‘나도 적잖은 타격을 입겠지.’
발린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영혼을 움직여 골렘을 제어하는 만큼, 골렘이 파괴된다면 본신에도 타격이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만큼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철저히 대비해 두어야 했다.
“그리고 파르난 백작가의 출전자라는 모험가...이 사람은 망치를 주무기로 쓴다고 하니 골렘으로는 상대하기 힘들지 않을까요?”
“망치? 맨손만 아니면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발린은 에블린의 걱정에 피식 웃었다.
둔기나 주먹 등 충격파가 통했다면 골렘은 진작 B급 아티팩트 수준으로 격하되어야 했을 것이다.
“어차피 때려봤자 바다를 친 것처럼 쑥 들어가기만 할 테고, 실질적인 타격력은 제로에 가까울 테니까요.”
“제로...”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떠올리던 에블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바다를 보았거나, 아니면 강물 또는 호수의 예시를 떠올린 듯 했다.
“하지만 만약 정말 위험한 상대가 나온다면...직접 나설 수밖에.”
발린은 머릿속으로 당장 떠오르는 몇몇의 모습을 정리했다.
골렘의 주문서가 약점이라는 것을 알고, 동시에 그걸 타격할 만한 능력이 되는 자들.
원래는 단 한 명도 만나기 힘들어야 정상이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열 명 가까이나 되었다.
아무래도 드래곤의 마법을 얻기 위한 길은 생각보다 험난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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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