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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 도착
‘아무래도 엘리아와 이야기를 좀 나눠봐야겠어.’
식사를 마친 발린은 곧바로 여관방 안으로 올라갔다.
에블린도 그 뒤를 따랐다.
“그럼 연락을 해 볼까.”
침대에 걸터앉은 발린이 등을 기대며 배낭을 뒤적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블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연락용 수정 구슬은 챙겨온 적 없을 텐데...?’
황도까지 짐을 들고 온 에블린이니만큼 발린이 무슨 아티팩트를 가지고 왔는지 거의 다 알고 있었다.
분명 수많은 물건들을 챙겨오긴 했지만 그 중에 연락용으로 쓰는 수정구슬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발린은 그녀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구슬 대신 다른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그건?”
“이건...작년 겨울에 엘리아 탑주님께서 제안했고, 저랑 그분이 같이 만든 작품입니다.”
말을 마친 발린이 꺼낸 것은 크리스탈이 가운데에 박힌 형태의 검은색 가죽팔찌였다.
끈과 금속 고리를 보아하니 손목에 차는 것이었는데, 그걸 어떻게 쓸지 도대체 짐작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거...가죽이잖아요. 마나선을 새기기엔 부적합할 텐데요.”
“보통 가죽이라면 그렇지. 하지만 이건 아니거든.”
발린은 팔찌 위 크리스탈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도대체 뭐길래...앗?!”
궁금증어린 기색으로 묻던 에블린이 깜짝 놀라 물러섰다.
마나를 잔뜩 머금은 크리스탈이 빛을 내더니, 갑자기 얇고 투명한 직사각형 모양의 창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런 건 도대체...”
“여러 가지 마법을 섞어 만든 겁니다. 꽤나 힘든 작업이었지만 그래도 고생이 헛되지 않아 다행이지요.”
발린은 창을 향해 두어 번 손가락을 튕겼다. 툭툭. 충격이 닿은 푸른 창이 일렁이더니, 이내 그 위로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연락 받았어요. 무슨 일이예요? 발린 부탑주?”
“별다른 건 아니고, 그냥 황도에 도착해서 연락드리는 겁니다.”
푸른 창 안에 나타난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발린과 이야기를 나눴다.
옆에서 지켜보던 에블린은 혼이 빠진다는 게 무슨 기분인지 이 순간 생생히 느끼고 있었다.
“이...이게...어떻게 된 거예요? 이건 도대체...”
“새로 만든 아티팩트의 효과입니다. 저도 처음 이 안을 들었을 때 굉장히 놀랐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묻던 에블린에게 발린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푸른 창으로 이 모습을 보던 엘리아의 얼굴표정이 살며시 어두워졌다.
“할 말 있으면 빨리 말씀하세요. 저 업무 봐야 하니까요.”
“업무요? 아직 아침 업무 시간은 아닐 텐데.”
엘리아의 말에 고개를 갸웃한 발린이 조용히 창 밖을 보았다.
날이 밝기 전부터 움직인 덕택에 시간은 아침 9시를 조금 더 지나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아침 훈련과 식사를 마친 후 마나 호흡을 할 시간.
엘리아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얼굴을 푹 숙이며 덧붙였다.
“아, 아무튼 빨리 말씀하세요...”
“네. 우선 저희는 황도에 잘 도착했고, 여기는...”
발린이 간단히 자신들의 행적을 보고하는 사이, 옆에 있던 에블린은 놀란 눈으로 팔찌를 주시했다.
겉보기엔 흑색의 광택을 가진 가죽팔찌로 보일 뿐이나, 지금 발린은 그것을 이용해 루비 타워의 엘리아와 실시간으로 교신하고 있었다.
‘저것만 있으면 수정구슬 같이 무겁고 보관하기 어려운 걸 더 이상 들고 다니지 않아도 돼...!’
통신용 수정구슬은 동류의 B급 아티팩트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만치 비싼 가격을 자랑했다.
제작에 들어가는 마법들이 굉장히 고도의 마법임은 물론, 그 작업의 성공률마저도 굉장히 낮았기 때문이다.
유리 위에 마나선을 새겨 마법을 각인시키는 것은 금속을 다루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난이도를 자랑한다.
그 모든 과정, 기술과 인내 모두를 한계까지 쏟아붓는 극고의 노력 끝에 완성된 수정구슬은 성 한 채는 우스울 정도의 가격이 시세로 책정되었다.
‘하지만...통신용 수정구슬은...’
에블린의 생각은 이내 수정구슬이 가진 문제점에 닿았다.
우선 수정구슬은 무게도 엄청나게 나가는 데다, 양 손으로 안아들어야 할 만큼 부피도 만만찮았다.
게다가 재료의 한계 때문에 조금만 잘못하면 산산조각나는 일마저도 비일비재하니, 안 좋은 면이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 발린이 쓰고 있는 아티팩트는 그 단점을 모조리 개선한 모습이었다.
‘무게도 가볍고, 쓸 수 있을 때 쓸 수 있는 데다가 깨뜨릴 염려도 없어! 저런 자그마한 크리스탈 조각이라면 떨어뜨릴 일 자체가 없으니까!’
에블린은 놀라움으로 몸을 떨었다.
물론 레드 에이어를 복구하는 데 일조하고, 인피니티 실드를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발린의 실력은 입증된 바 있었다.
하지만 막상 발린이 만들어낸 새 아티팩트를 가까이서 보니 그 실력이 피부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녀가 느낀 것은 엄청난 희열이었다. 이 사람이라면 된다는,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에서 오는 희열 말이다.
에블린이 몸을 떠는 사이, 발린은 엘리아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면서 있었던 건 대충 이런데, 그 쪽에서는 별다른 문제 없는 거죠?”
“특별히 큰일은 없어요. 가시기 전에 어지간한 건 전부 끝내놓고 가셨으니까요.”
엘리아의 답변에 발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던 엘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아, 한 가지. 아래 클래스의 마법사들이 황제선발대전의 결과를 놓고 하는 도박에 빠져들어서 조금 번거롭긴 하지만요.”
“아하하핫.”
발린은 머쓱한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도박은 마탑 내의 규율이 엄히 금하는 범죄 중 하나, 들키면 엄한 중징계로 그 죄를 벌한다.
그럼에도 도박 열풍이 부는 걸 보면 황제선발대전의 인기가 어떤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지. 온종일 마법만 연구하고, 남는 시간에 무술까지 연마하려면 얼마나 지루하겠어? 이 와중에 그런 게 터졌으니...”
“그래서 적당히 룰을 좀 만들어서 그 안에서만 하라고 시켰어요. 그러니까 조금 줄어들더라고요.”
“흐음...”
엘리아의 보고를 들은 발린은 손가락을 턱에 댄 채 입맛을 다셨다.
확실히 무작정 금지하는 것보단 어느 정도의 자유를 허락하는 게 훨씬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활줄을 항상 팽팽히 두면 금방 못 써먹게 되지만, 적당히 느슨하게 풀어 둔다면 오랜 세월이 흘러도 멀쩡한 것과 똑같은 이치다.
“그래서, 탑주님도 하신 겁니까?”
“...읏!”
발린의 농담에 정곡을 찔렸는지 엘리아가 신음성을 냈다.
“...발린 부탑주님이 이긴다는 데 걸었어요. 규율 위반할 만큼 건 것도 아니니 상관없잖아요. 뭐.”
“파하하핫!”
볼을 부풀리며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에 발린은 결국 참지 못하고 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렇게 루비 타워에 대한 이야기가 일단락된 뒤, 발린은 다른 마탑의 동향을 전해듣기 시작했다.
“다들 제각기 다른 귀족들을 지원한다는 말이지...”
“마탑들뿐만이 아녜요. 각국에서 수많은 기인이사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다고요.”
엘리아는 못내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우물쭈물댔다.
각지에서 수많은 강자들이 무기를 뽑아들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 시대의 기인이사들이라...글쎄, 잘 모르겠는걸?’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던 발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애시당초 그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마왕군과의 전쟁 이후 나타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시대의 영웅들에 대한 정보는 거의 백지상태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역시 어느 정도는 정보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불의의 일격을 맞을 수도 있을 테니.’
아는 것이 힘이다. 마법사들에게 그것만큼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말도 별로 없었다.
살짝 손을 들어 엘리아의 말을 막은 발린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우리 왕국에서는 저 말고 아무도 안 움직입니까? 왕성에서 뭔가 움직임을 취했을 텐데?”
발린의 물음에 엘리아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게도 우리 왕국에서는 출전자가 없더라고요. 왕성에서도 조용하고...그래서 발린 부탑주님만 참가하게 된 거 같아요.”
“흠...파이오니어에 그렇게 사람이 없었나?”
생각보다 저조한 반응에 발린은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에 엘리아는 어쩔 수 없다는 뉘앙스로 답했다.
“그런가 봐요. 왕국 최강의 무력인 테네스 후작은 자택에서 계속 칩거중이고, 그렇다고 다른 소드마스터가 왕실에 있는 것도 아니니 어쩔 수 없다 생각한 거겠죠.”
그녀의 말을 듣던 발린은 왠지 모르게 뭔가 켕기는 느낌이 들었다.
알면서도 막지 않은 입장으로서의 죄책감이랄까, 같은 것 말이다.
물론 100% 테네스 후작의 잘못인 건 틀림없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그가 치뤄야 했던 대가가 엄청나게 잔혹한 것임은 사실이었다.
“하하, 그거 유감이군요, 네.”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하던 발린에게 엘리아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왕국의 귀족 분들도 꽤나 많이 발린 님을 응원하고 계셔요. 아셨죠? 꼭 이겨야 돼요!”
“왕국 귀족들이? 그거 정말 잘 된 일이군요.”
생각지도 못한 반사 효과에 발린은 무릎을 탁 쳤다.
테네스 후작을 쳐 냈다 하더라도 수하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이권을 미끼로 끌어들이는 것에도 한계가 있어 고민했는데, 덕분에 꽤나 많은 고생을 생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어요.”
“네? 말씀하십시오.”
가볍게 웃던 엘리아가 마침 기억났다는 듯 가볍게 덧붙였다.
허나 그 내용을 들은 발린은 가볍게 있을 수 없었다.
“안드로포스 님께서 팔리아스를 데리고 그 쪽으로 출발하셨어요. 조만간 발린 님과 합류하실 것 같으니 미리 알아두고 계세요.”
“어? 안드로포스 공이? 어째서?! 팔리아스는 또 왜 데리고 오는 거야!”
깜짝 놀라 일어서는 발린에게 엘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은공을 지켜야 한다나 보아요. 거기다 팔리아스에게 고수들의 전투를 구경시켜준다나 뭐라나...”
“아아.”
발린은 그제서야 안드로포스가 팔리아스를 데리고 움직인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다.
높은 경지를 이루는 덴 재능과 노력뿐 아니라 한 가지 더 필요한 게 있다.
바로 경험! 경험이 갖춰져서 삼각형을 이룰 때 비로소 진정 높은 경지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확실히 출전자들의 대결을 지켜보는 것은 간접적으로나마 경험을 쌓는 좋은 방법일 수 있겠군.’
황제선발대전은 온 세계의 절대강자들이 모이는 대회.
팔리아스라면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성취를 이룰 게 분명했다.
못내 한 가지 불안한 것은 안드로포스의 성격.
그랜드마스터인 그를 제어하기 위해선 발린의 명령밖에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차라리 약하다면 모를까, 지금의 안드로포스가 진심으로 움직인다면 펜잔스와 에이블 두 사람이 협공을 해도 일 분 안에 승부가 끝날걸?’
발린은 기어코 진한 한숨을 내쉬었다.
폭탄을 끌어안고 있다는 불안감만 제외하면 사실 안드로포스가 오는 건 그렇게 나쁜 일이 아니었다.
에블린의 호위를 맡길 수 있는 건 물론이고, 여차하면 마왕군이나 노스트라 제국과 싸울 때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삼황자 때는 없었지만, 이번에는 얘기가 다르지. 큭큭.’
생각을 마친 발린은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엘리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이제부터 좀 돌아다녀야 하니까 이만 끊겠습니다.”
“후, 알았어요. 대회 시작은 언제부터예요?”
“온 게 5일 정도 전이니, 이제 사흘 정도 남았군요.”
앞으로 사흘이다.
사흘 후면 수백 명의 귀족과 출전자가 모인 황제선발대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긴장하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몸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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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3번째 편은 금방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