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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만남
굳이 이 곳까지 올 것도 없이 다이아몬드 타워에서 탑주 급 마법사가 직접 나서면 그만이다.
펜잔스가 아니더라도, 다이아몬드 타워의 최상위 마법사들은 능히 소드마스터와 맞상대할 수 있는 실력을 자랑하니 말이다.
워릭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공식...지지가 아닙니다.”
“네?”
대답을 들은 발린의 머릿속에 든 감정은 하나, 당혹감이었다.
다이아몬드 타워의 마법사가 데려온 여인이 다이아몬드 타워의 후보가 아니면 도대체 무슨 관계란 말인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 동안 워릭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마탑에서는 탑주님께서 직접 나서시거나, 혹은 유바 공작님을 지지하는 두 가지 길 중에서 회의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하니 에블린 아가씨를 지지하는 건 애시당초 탑의 계획에 없다고 할 수 있지요.”
대답을 마저 들은 발린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이아몬드 타워의 마법사가 개인적인 행동으로 탑의지지 의사와 다른 사람을 지지하다니, 만약 남이 듣는다면 중벌을 면치 못할 일이었다.
“혹시 지금은 마탑에서 나오셨습니까?”
“아니요. 저는 다이아몬드 타워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에블린 님을 돕고 있습니다.”
설마했던 대답이 나오자 발린은 더 듣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가라앉는 배에 타고 싶지는 않습니다.”
칼 같은 거절에 워릭은 무어라 말하려다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무어라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마탑에 속해 있는 마법사로서 마탑과 다른 뜻을 세우다니. 가라앉는 배라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발린 님, 도와주십시오. 도움이 필요합니다. 실은 에블린님께서는...!”
“워릭 님과는 안면이 있지만 같이 불구덩이에 들어갈 만큼 깊은 우정을 맺지는 않은 것 같군요. 오늘 면담 즐거웠습니다.”
다만 도와달라는 말밖에 꺼낼 수 없었던 그였으나, 발린이 그런 말에 넘어갈 리 만무했다.
막 일어서려던 발린을 멈춰세운 건 그동안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에블린이었다.
“그만. 잘해 줬어요. 워릭. 이제 제가 나설게요.”
“아, 아가씨...”
그녀가 움직이자 워릭은 안절부절못하며 몸을 떨었다.
뜻밖의 모습에 발린은 잠깐이나마 그 쪽에 신경을 모았다.
‘단순히 외모로 워릭을 홀린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발린의 마음속에서 에블린에 대한 평가가 조금 더 위로 올라갔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에블린은 워릭에게 하던 말을 끝낸 뒤 발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남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는 자신의 모든 걸 먼저 드러낸 다음 손을 벌리는 게 도리입니다. 그걸 제 쪽에서 어기려 했던 점, 먼저 사과드립니다.”
“...”
그녀가 꺼낸 첫 수는 놀랍게도 솔직한 사과.
특별히 사과하거나 받을 일은 아니었지만, 막상 받는 입장이 됐으니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흥미롭군.’
발린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녀에게서는 위험의 냄새가 풍겼다.
섣불리 따라갔다가는 자신은 물론 루비 타워마저 모조리 불태워버릴 것처럼 진한 냄새였다.
하지만 발린은 이상하게도 계속해서 호기심이 생겨나는 걸 느꼈다.
정확히는 그녀가 숨기는 것. 워릭이 에블린을 따르는 이유가 궁금했다.
마탑의 마법사는 탑에 대한 소속감이 남다를밖에 없다.
그것마저 능가하고 워릭이 에블린을 섬기는 숨은 이유.
그것을 듣고 싶었다. 별다른 뜻은 없었다.
“일단 앉아 주시면 모든 걸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궁금하신 게 풀리신다면 마음대로 결정해주세요.”
그렇게 말한 에블린은 발린을 향해 천천히 진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워릭이 그녀를 따르는 이유, 그리고 자신이 황제가 되려는 이유도 말이다.
“우선 이것부터 말씀드려야겠군요. 제 가문을 잇는 혈통에 관해서입니다.”
“혈통?”
발린은 눈매를 가늘게 하며 덧붙였다.
카딤 연방제국은 그 이름답게 수많은 귀족들의 연합체라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 그곳의 황제가 되려는 이유로 혈통을 들다니, 고리타분하다면 고리타분하고 익숙하다면 익숙한 이유였다.
“예, 혈통입니다. 저와 저희 가문이 잇는 건 최초에 카딤 연방제국을 만들었던 다섯 왕국 중 한 곳의 왕통이니까요.”
“...그럼. 워릭 공이 당신을 따르는 이유도.”
“맞아요. 워릭은 대대로 저희 황통을 지켜오던 종속 가문의 후손. 가문의 일원으로서 책무를 다하기 위해 굳이 저를 찾아오신...고마운 분이십니다.”
말을 마친 에블린은 워릭을 향해 흘긋 시선을 주었다.
거기에는 숨길 수 없는 고마움이 깃들어 있었다.
이제야 상황이 이해가 간 발린이었다. 허나 그것만으로는 자신이 도와 줄 이유가 아무데도 없었다.
다섯 왕국이 합의하에 카딤 연방제국으로 다시 태어난 것은 칠백여년 전의 일이다.
그 후 칠백 년 동안 황제의 위는 이 선발대전을 통해 바뀌고 또 바뀌었다.
더 이상 왕족이니 피이니 하는 것은 카딤 제국에선 성립하지 않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다지 설득력이 있다고는 느껴지지 않는데...옛 영예라도 되찾을 생각이신지?”
퉁명스럽게 묻는 발린의 얼굴에서는 불쾌감이 넌지시 드러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결과는 뻔했다. 보고 있던 워릭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보시오. 발린...!”
“살기 위해서요. 이 선발대전에서 우승하지 못하면 저는 죽어요.”
생존, 가장 절박하면서도 근본적인 이유였다.
워릭은 물론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던 발린마저도 이 답변 앞에서는 잠시나마 놀랄밖에 없었다.
“생존이라...황제선발대전에서 떨어진다고 해서 목숨이 위험하시진 않을 텐데요. 혹시 빚이라도 지고 있는 겁니까?”
영락한 과거의 명문가가 빚을 지는 건 흔한 일이다.
아마 눈앞의 에블린도 그것 때문에 일확천금을 노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허나 에블린이 내놓은 답은 발린의 예상을 뛰어넘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발린 공, 얼마 전 마족을 없앴다고 들었어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저는 그들과 동류이거나, 혹은 다른 부류의 마족들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생면부지인 당신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것도 그것 때문이고요.”
마족이 있다는 말에 발린은 눈을 크게 떴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보십시오.”
카딤 제국에 어둠의 세력이 침투해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단지 수면 밑에 웅크린 놈들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을 뿐.
그렇기에 별다른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지금 그녀의 말 속에는 그들에 대한 단서가 담겨 있었다.
“저도 자세한 건 모르겠네요. 그저 그들이 무언가를 노리고 저를 공격해온다는 것 정도만...”
“흐음.”
말끝을 흐리는 에블린 앞에서 발린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말대로 마왕군이 에블린을 습격해 온다면, 그것은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틀림없었다.
단순히 황제선발대전에서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 움직이는 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굳이 에블린에게까지 암습을 해 올 이유가 없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놈들이 움직이는 건 훼방을 해야 할 것 같긴 한데.’
문제는 결국 신용이었다. 발린은 어지러워오는 머리를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그들이 마족이라는 것, 그리고 황제가 되지 못하면 당신이 죽는다는 건 어째서 사실이라고 단정짓는 거죠? 단순히 황제선발대전의 경쟁자를 없애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단순히 에블린의 말만 가지고는 믿음을 가질 수 없었다.
그렇다고 증거물을 들이대라 할 수도 없으니, 결국 발린이 해야 할 건 그녀의 진술을 통해 참거짓을 판별하는 것뿐이었다.
“증거물이라면 있습니다. 여기.”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발린은 깜짝 놀라 그 편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워릭이 무언가를 꺼내 손에 든 채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어둠의 마나...”
“암살자 중 한 놈의 몸에서 추출해낸 겁니다. 이 정도라면 납득이 가실까요?”
품이 넓은 로브 안엔 어둠의 마나가 담긴 유리병 외에도 여러 가지 물건들이 보였다.
하지만 유리병 안에 든 어둠의 마나만큼은 진짜였다.
직접 삼황자와 다크니스 모두를 본 발린인 만큼 그렇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확실히 마족이 그녀를 노리는 건가? 단순한 경쟁자 제거가 아니라...다른 이유로?!’
발린은 순간 자신이 어느새 에블린의 페이스에 홀려들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진정해야 했다. 이득과 손실을 따져서 거래를 끝내야 했다.
“정리...하겠습니다. 에블린 웰링턴 양.”
“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죄송합니다. 저는 당신을 도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몇 번을 생각해봐도 마찬가지였다. 마족에게 노림받는다는 건 알았지만, 그것이 그녀가 황제가 되는 걸 도와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차라리 그 동안에 다른 유능한 후보자를 지원하는 게 나았다.
어디까지나 발린의 목표는 카딤 제국의 혼란을 막는 것.
그걸 위해서는 꼭두각시인 크라탄이 아닌 다른 거대 권력가를 옥좌에 올리는 게 훨씬 편했다.
“바, 발린 공!”
“워릭 님이라 했었나, 그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으로 충고 하나만 드리자면 더 이상 가문의 책무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걸 추천...”
“거래를 해요. 우리.”
워릭에게 충고하며 돌아서던 발린의 몸이 잠깐이나마 멈칫했다.
아주 잠깐의 멈칫거림이었으나 에블린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약속드리죠. 마나의 맹세든, 무엇이든 해도 좋아요.”
“거래라...제가 만족할 만한 게 있기는 합니까?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설령 카딤의 황제 위를 주신다 하더라도 저는 그다지 흥미없습니다.”
발린은 차가운 어조로 말하며 돌아섰다.
실제로 출전자로서 에블린을 지지해 황제로 만든다 쳐도, 그것은 발린이 스스로 일구어낸 것이지 에블린이 노력한 게 아니다.
그것을 감안할 때 설령 황제의 옥좌를 받는다 하여도 발린에게 있어서는 이득이 될 수 없었다.
이를 정확히 지적한 발린이었으나, 이어지는 에블린의 거래조건에는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하나 더...있어요. 제가 황제가 되면 당신에게 드릴 수 있는 게.”
“미인계는 저에게 안 통합니다. 에블린 양. 당신이 아무리 아름답다고는 하나...”
“드래곤의 마법. 공간과 시간을 다루는 마법을요.”
“.....”
발린의 온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드래곤의 마법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온 몸이 마구 진동했다.
시간과 공간을 다룬다는 말이 대단해 보여서가 아니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는 건 목에 건 아티팩트, 그리고 레벤이 꺼냈던 말이었다.
신의 힘으로 시간과 공간을 되돌린다.
드래곤의 마법으로 공간과 시간을 다룬다.
주체만 다르지 똑같은 내용이었다.
“드래곤의...마법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카딤 황성에서 비밀리에 보관중인 드래곤의 마법입니다.”
발린은 어느샌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카딤 황성에 그런 게 감추어져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었던 것이다.
“선대에서 다음 대로, 그 다음대로 이어져 내려왔어요. 우리 다섯 왕가의 일원들만이 드래곤의 마법 일부가 담긴 유적을 열 수 있다고.”
“그 유적에 있는 마법이...거래의 대가군요.”
고개를 끄덕인 발린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한 가지를 더 물었다.
“한데 어째서 저입니까?”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지만, 이를 통해 생각보다 많은 걸 알아낼 수 있었다.
다른 것도 있었지만, 우선적으로는 그녀의 심계다.
마족을 없앴다는 사실과 소문에 대한 능력만으로 무작정 찾아온 것이라면.
절박하지만 용기있는 행보였다고 해 줄밖에 없었다.
하지만 만일 다른 동기가 있고, 그것이 발린의 의표를 찌른다면.
발린은 에블린을 생각보다 똑똑한 여자, 어쩌면 0.8레벤급의 여인으로 취급해 줄 생각도 있었다.
“저는 조만간 영락해서 사라지거나, 습격해 온 마족들에게 제압당해 끌려갈 운명이었을 겁니다. 실제로 이미 위협받는 중이기도 하고요.”
중도에 말을 끊은 에블린이 잠시 심호흡한 뒤 마저 이야기를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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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물이름 수정완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