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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만남
다음날 아침 페르난도의 예상대로 라덴은 멀쩡히 나아 있었다.
늙은 몸도 아닐뿐더러, 신관의 치료에 명약까지 다 썼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발린은 아침 식사를 별관에 차리도록 한 뒤 직접 라덴을 불러 안내했다.
같이 식사를 하며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심산이었다.
“여기는...”
“걱정하지 마세요. 어제 다 해결했어요.”
발린의 대답에 라덴은 얼굴에 수심을 띄우며 말했다.
“정말 괜찮은 게냐? 예전에 이 친구들에게 듣기로는...”
“괜찮아요. 제 영지를 좀먹는 사람들이니 제가 해결해야죠. 아버지, 그동안 심려 많으셨어요. 어제 미리 해결했어야 하는데...죄송합니다.”
“아니, 아니다. 나는 괜찮아.”
사과하는 발린에게 라덴은 두 손을 흔들며 웃어 보였다.
어제 일은 물리적인 상처도 있었지만 정신적인 충격도 결코 적지 않을 터.
그것을 감안하면 지금 라덴이 얼마나 굳센 정신으로 받쳤는지 알 수 있었다.
발린은 막 나온 훈제 닭고기를 크게 한 점 찢어 내밀었다.
특별히 기름지고 살이 부드러운 부위였다. 라덴은 닭고기를 직접 받아먹으며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버지.”
“응? 왜 그러냐?”
식사를 하던 도중 발린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또 일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제가 자주 찾아뵐게요.”
“허허, 그러냐. 고맙구나, 발린.”
진심어린 한 마디라는 것을 느꼈는지 라덴은 다시금 만족스런 웃음을 터뜨렸다.
접시가 거의 다 비워져갈 때쯤이었다. 쿠키를 집어들던 라덴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발린, 너 혹시 생기긴 했느냐?”
“네?”
뭐가 생겼단 말인가? 발린은 의아한 표정으로 라덴을 돌아보았다.
생기기야 작위도 직책도 생겼으니 많이 생기긴 했다만, 라덴이 말하는 건 그게 아닌 듯했다.
“뭐가요?”
“크크. 이것 말이다. 이거.”
말을 마친 라덴은 양손의 새끼손가락을 교차해 보였다.
무언가 은어를 뜻하는 것 같긴 한데, 처음 보는 발린으로서는 도무지 알 길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발린에게 라덴은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욘석아, 여자친구 말이다! 여자친구!”
“네?!”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에 발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마치 재판에 불려나와 죄를 추궁당하는 귀족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다 알고 있으니 슬슬 말해 보거라. 얼마 전 밀리아가 보내온 편지에 다 적혀 있더라.”
“미, 밀리아가요? 무슨 말을 했어요?! 걔가! 그건 그냥...!”
허둥지둥 두 팔을 휘젓는 발린에게서는 한순간이나마 그 나이대 또래아이의 모습이 엿보였다.
그게 퍽이나 마음에 들었는지 라덴은 다시금 목소리를 높여 껄껄 웃어젖혔다.
식사를 마친 둘은 제각기 할 일을 하기 위해 움직였다.
라덴은 백성들에게 공작부인과 그 아들의 추방 소식을 공포했으며, 그 사이 발린은 라블랑 시를 마저 돌았다.
“하아, 밀리아 녀석. 그걸 모조리 아빠한테 다 써서 보냈다 이거냐.”
잠깐 휴식을 위해 성벽에 기댄 발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그동안은 늘 아버지라고 부르다가 지금은 아빠라는 말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고 있었다.
결국 발린은 식사 도중 엘리아와 레벤에 대한 이야기를 고백해야 했다.
실제 특별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막상 라덴의 얼굴을 보며 말하자니 부끄러움이 절로 들었다.
“여자친구라니, 말도 안 되지. 말도 안 돼.”
자신은 마왕군의 위협으로부터 세계를 구하야 한다는 막중한 임무가 있었다.
설령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 하더라도 자신만의 감정에 휘둘릴 수는 없었다.
‘어제 일 같은 거야...큰일도 아니니까 별로 상관없지만 사랑은 얘기가 다르지.’
전 산토스 공작부인을 쫓아내는 것 정도야 별 거 아니기도 하면서 당연히 해야 할 행정처리이기도 했다.
큰 일 때문에 작은 정의를 밀쳐두는 건 어디까지나 정말 어쩔 수 없을 때의 이야기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랑은 아니다.
사랑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그 범위 또한 육체와 정신 모두를 아우른다.
마왕을 무찌르고 악을 전부 몰아낸 이후라면 모를까, 그 전엔 최대한 자제해야 하는 게 바로 사랑이었다.
“사랑이라. 그런 건 젊은애들이나 실컷 하라지.”
성벽에 등을 기대고 있자니 찬 기운이 올라왔다.
발린은 불의 마나를 모아 몸을 데우며 생각했다.
자신은 이레귤러고, 이 세상에 본디 있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과연 사랑을 하고, 이 세상에 정착할 수 있을까?
이 아티팩트를 쓰게 만든 신이라면 그 대답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신을 믿지 않는 발린이나, 한 번쯤은 질문을 해 봐도 될지 모른다.
몇 번이고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이라면, 차라리 신에게 넘기는 게 편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레이안이라 하셨나? 내 사명을 다 마치면 거기에 대한 해답 주실 거요?”
발린은 푸른 겨울 하늘을 향해 질문을 던진 후 성으로 돌아갔다.
입구에 다다르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페르난도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단순히 주인을 반기는 것 치고는 허둥거리는 게 너무 심했다.
“무슨 일이야?”
“그, 수도에 발린 후작님을 찾는 손님분께서 와 계시답니다. 급한 일이니 연락받으시는 대로 돌아오라고...”
“급한 일? 손님?”
발린은 오기 전에 점검했던 사항들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았다.
마탑과 관련된 일은 모두 깔끔히 처리했고, 안드로포스와 팔리아스도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상태다.
외부 요인이 아니라면 급한 일이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알았다. 아버님께 보고드리고 바로 수도로 돌아갈 테니, 미리 마법사들을 보내어 텔레포트 마법진을 활성화시키도록.”
“예!”
명령을 받든 페르난도가 움직이는 사이, 발린은 라덴에게 가 이만 돌아가 봐야 한다고 말했다.
언제나 그렇듯 라덴은 자상한 목소리로 자신은 걱정하지 말라 말했다.
“어서 가 보거라. 손님이 기다리고 있다며? 늦겠구나.”
“예. 그럼 가보겠습니다.”
발린은 고개를 숙여보인 뒤 몸을 돌렸다.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손님에 대한 궁금증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누구지? 다른 나라의 마탑? 아니면 왕성? 그것도 아니면...’
속도를 최대한 내어 마차를 몬 덕분에 기다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텔레포트 마법진을 타고 돌아온 발린은 익숙한 얼굴들을 보자마자 입을 열었다.
“그래서, 누가 온 겁니까? 대체. 아직 영지 한 바퀴 다 둘러보지도 못했는데.”
모처럼만에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일찍 부르냐는, 약간의 질책을 담은 물음이었다.
마법사들은 죄송하다고 말한 뒤 기다리는 손님이 누군지에 대해서 대답했다.
“예, 현재 다이아몬드 타워에서 일전에 사절단으로 방문했었던 마법사 분께서 카딤 제국의 귀족가 영애를 데리고 와 계십니다.”
“...시작됐나.”
발린은 숨을 들이켰다.
긴장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조만간 닥쳐오리라고 예상했던 일이다.
카딤 제국의 귀족가에서 왔다면 틀림없이 황제선발대전에서 지원을 부탁하는 것일 터.
그렇다면 그에 맞게 응해주면 그만이었다.
‘어디 다이아몬드 타워에서 밀어주기로 선택한 귀족가의 면모를 볼까?’
발린은 예복을 걸쳐입은 뒤 마법사들에게 물었다.
“근데 탑주님께서는? 다이아몬드 타워에서 왔다면 당연히 탑주님 먼저 뵙는 게 맞는 거 아닌가요?”
“아니, 그게...”
대답하던 마법사가 순간 손을 들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보아하니 뭔가 말하기 꺼림칙한 게 있는 것 같았다.
발린은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마법사를 향했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는 모습에 따라붙은 마법사가 곤혹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그 손님분께서 탑주님이 아니라 굳이 발린 부탑주님을 콕 찍어 만나고 싶다고 하셨기에...엘리아 님께서도 승인하신 일입니다.”
“나를...굳이?”
대답을 들은 발린의 얼굴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좋지 않았다. 마탑이 아니라 자신을 지목했다는 것은 루비 타워가 아닌 발린 테오도르 한 사람을 원한다는 의미였으니까.
황제선발대전의 구조를 아는 발린으로서는 되도록 피하고 싶은 구도였다.
하지만 이미 와서 기다리는 사람을 돌려보낼 수도 없는 노릇.
발린은 입맛을 다시며 접견실의 문을 열었다.
접견실은 몇 달 전에 봤던 풍경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다만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이 다를 뿐이었다.
수 달 전엔 각 탑의 사절단 대표가 있었다면, 지금은 낯익은 얼굴의 마법사와 처음 보는 여인 한 명이 다였다.
둘의 얼굴을 훑어본 발린의 눈이 은연중에 빛났다.
‘한 명은 내가 아는 얼굴이고, 그럼 저 여인이...’
“오셨습니까. 발린 공. 부탑주가 됐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돌아보던 마법사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흰 다이아몬드 타워의 로브 위로, 수 달 전에 보았던 젊은 청년의 얼굴이 보였다.
발린은 마주 인사하며 옆자리에 앉은 여인의 모습을 훑었다.
수수한 드레스를 입은 금발여인이었는데, 나이는 2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겉으로 드러난 건 그 정도였다. 하지만 좀 더 지켜보자 옷 속으로 보이는 단련된 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최소한 마나는 다룰 줄 안다는 건가. 직접 부딪혀보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마주 앉은 발린을 향해 눈을 뜬 금발여인이 조용히 자기소개를 했다.
“발린 공이시군요. 저는 웰링턴 백작가의 에블린이라고 해요. 에블린이라고 불러주세요.”
“나이가?”
“나이...열아홉입니다.”
에블린의 나이를 들은 발린은 잠깐 멈칫했다.
발육 상태나 분위기를 보아선 20대 초반 정도라 판단이 되었는데 예상보다 어렸던 것이다.
‘열아홉...갓 성년인가? 성년이라면...됐어.’
열아홉이라면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나이 카운트는 넘긴 셈이다.
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다행히 참가 가능하신 나이가 맞군요. 그게 궁금했습니다.”
“역시...알고 계시는군요. 제가 무엇 때문에 굳이 발린 부탑주님만을 불렀는지.”
발린은 침묵으로 긍정을 표했다.
모를 리가 없었다. 황제선발대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세계 최대의 무투대회를 말이다.
‘카딤 연방제국이기에 할 수 있는 무투대회지. 황제의 위를 상품으로 내건 대회라니.’
황제선발대전, 말 그대로 황제를 뽑는 무투대회였다.
현 황제가 죽으면 제국의 귀족들 사이에서 다음 황제를 뽑는데, 이 무투대회에서 우승한 귀족이 다음 대 황제가 되는 것이다.
물론 직접 나서 싸우지는 않는다. 대신 귀족들은 자신의 모든 능력을 한껏 써서 대신 싸워 줄 출전자를 구한다.
출전자가 최종적으로 우승을 하게 된다면 그와 계약한 귀족은 새 황제가 되어 카딤 연방제국을 통치한다.
작금의 시기는 베른 황제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
자연히 황제선발대전에 나서 싸워줄 출전자를 구하는 카딤 제국 귀족들의 움직임이 한창이었다.
그리고 보아하니 에블린이랴는 여인도 그것 때문에 자신을 찾아온 것 같았다.
발린은 짧은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역시 황제선발대전이겠죠...참가 조건은 전부 만족하시는지 모르겠군요.”
“건강에 특별히 이상 없는 귀족이고, 65세 이상도 아녜요. 성년이고. 조건은 다 맞췄잖아요? 문제없죠?”
황제를 뽑는 대회치고는 굉장히 간단한 출전 조건이었다.
모든 귀족들에게 기회를 주고, 최대한의 역량을 뽑아내어 출전자를 데려오라는 역대 황제들의 의도였으리라.
“그럼 역시 저희 마탑에 힘을 빌려 달라는 부탁입니까?”
“예. 발린 부탑주님. 워릭 님께서 당신이라면 가능할 것이라고 하더군요.”
워릭? 처음 듣는 이름에 발린은 눈을 돌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젊은 마법사가 손을 제 가슴팍에 올리며 말했다.
“제가 워릭입니다. 발린 부탑주.”
“...다이아몬드 타워에는 저보다 더 강한 마법사들이 많을 텐데요?”
발린은 일부러 에블린 대신 워릭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확히는 그가 입고 있는 다이아몬드 타워의 마법사 로브를 향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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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