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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가 회귀함-90화 (90/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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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기

두 하녀가 풀어놓은 이야기보따리는 얼마 안 되지만, 발린은 얼추 그 내막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 전 부인이라는 사람이 그랬단 말이지?”

“네, 네에.”

하녀가 늘어놓은 이야기는 이랬다.

발린과 만나고 돌아온 라덴은 다시금 쌓인 민원에 공작부인을 만나러 갔고, 현장에 있었던 자신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상황을 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라덴은 말로 부인을 설득하려 했으나, 부인이 몇 마디를 하자마자 아무 말도 못하고 움츠렸다는 것이다.

뿌득.

거기까지 듣던 발린은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천천히 이야기를 하던 두 하녀가 기겁하며 몸을 움츠렸다.

그걸 본 발린은 애써 화를 진정시켰다. 이들은 그저 하녀일 뿐, 자신의 분노를 받을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마님께서는 관리인 분께 내 아버지가 루미놀 상단의 주인이신데 어딜 감히 내게 들이대냐며...망하고 싶냐고 윽박지르고...식기랑 음식을 같이 던지고...”

더 이상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라덴은 자신을 위해 그 모든 굴욕을 참은 것이다.

혹시나 공작부인 때문에 영지에 문제라도 생기면 자신의 명예에 누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알겠다. 잘 들었어. 이건 보수다.”

발린은 두 하녀에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금화 한 개씩을 건넸다.

생각보다 화가 나지 않은 듯한 모습에 하녀들은 머뭇거리며 금화를 챙겼다.

애시당초 1골드면 그녀들에게 있어서는 한 달 급여 그 이상이다.

그런 거금을 선뜻 주는 사람에게 경계심이 들 리 없었다.

“그럼 가 봐도 좋아. 내가 너무 오래 붙잡은 거 같은데 미안하게 됐다.”

“아, 아뇨...괜찮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두 하녀는 닦지 않은 접시가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황급히 접시들을 챙겨 사라졌다.

혼자 남은 발린은 분노라기보다는 다른 감정에 휩싸인 채 웃었다.

“이건...아예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 아닌가?”

발린에게 든 감정이란 다름아닌 경멸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살 길을 제 손으로 걷어찬 사람에 대한 경멸감이었다.

안 그래도 시민들의 민원이 많이들 온다 했으니, 이 참에 확실히 처리해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발린은 자리를 떠난 다음 그대로 별관 정문으로 향했다.

“누구냐!”

“니들 주인.”

한없이 건방진 말투에 별관 입구를 지키던 기사들은 헛숨과 함께 그대로 달려들었다.

막 그들의 검이 발린을 내리치려는 순간, 발린은 두 마법의 캐스팅을 읊었다.

“그리스, 바인딩.”

우당탕탕!

단숨에 미끄러진 기사들은 자세를 바로잡으려 했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 이게 무엇이냐!”

기사들은 깜짝 놀라 몸을 뒤틀었으나, 발린이 온 힘을 다해 쓴 바인딩이 풀릴 리 없었다.

그렇게 봉쇄된 게 무려 열 명이 넘는다.

위험했다. 이대로는 틀림없이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갑옷을 벗어 풀려나려 했으나 바인딩 마법은 맨몸마저도 다같이 땅에 붙여 버렸다.

끈끈해진 땅의 진흙이 그들을 옴짝달싹도 못하게 하자, 발린은 그제서야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야, 너희들. 글 읽을 줄 알지?”

“그야 당연한 것 아닌가! 여봐라! 이 놈을 어서!”

“읽어.”

꺼낸 것은 금박이 아닌, 완전히 금으로 만들어진 종이다.

마법적인 처리를 해서 만든 금종이, 이른바 골든 페이퍼라는 명칭의 작위 증명서였다.

그 내용물을 들여다보던 기사의 눈동자가 커졌다.

“서, 설마...이 증서의 내용이 맞다면 당신은!”

“이제 풀어주어도 되나?”

“모, 몰라뵀습니다! 자비를!”

발린은 기사들을 향해 피식 웃더니 손을 튕겼다.

마나를 공급해주지 않으니 바인딩은 금방 풀렸다.

일어난 기사들은 일제히 다시금 제 몸으로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췄다.

단지 경비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을 뿐, 아예 공작부인의 사병화까지는 되지 않은 듯했다.

“내 얼굴 봤지? 앞으로는 내게 칼을 들이대는 일이 없도록 해라. 아, 그리고 아까 오셨다던 관리인 분. 내 아버님이시니 그 분께도 나랑 동일하게. 아니, 더욱 깊이 예를 취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복창하는 십수명의 기사들을 뒤로 한 발린은 들어서면서 보이는 시종들에게 명했다.

“식당으로 안내해라. 공작부인이 지금 저녁 식사를 하고 있을 테니까.”

“예, 예!”

눈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았는데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 그리고 정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공작부인에게 미리 말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을 테니 그리 알도록.”

“며, 명심하겠습니다.”

발린이 덧붙이자 시종들은 몸을 떨며 대답했다.

그들이 몸을 떨어야 할 진정한 주인이 온 것이다.

안쪽으로 걷자 커다란 문이 나타났다.

문틈 사이로 구수한 냄새가 풍겨나오는 걸 보니 지금 저녁상을 차려놓은 것 같았다.

“열어라.”

“예!”

발린의 명령에 두 하인이 대답하려는 순간, 발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누군진 말하지 말고, 그냥 열어.”

시종들은 대답 대신 입을 다물고 문을 열어제꼈다.

후끈한 열기와 함께 식당 안의 광경이 모두에게 보여졌다.

기다란 직사각형의 테이블 위에 놓여진 수많은 음식.

거지반 고기로 이루어진 만찬의 끝에서 투실투실 살이 찐 중년여인이 이 편을 향해 눈을 돌리고 있었다.

“어머나? 누군진 모르겠지만 이렇게 무례하게 내 상에 들어오다니, 각오는 되어 있는 거겠죵~?”

그러나 발린의 시선을 끈 것은 만찬도, 중년여인도 아니었다.

그가 바라보는 곳은 중년여인을 받치는 등 뒤와 아래.

그 자리에 있는 가구였다.

“하아...하악...”

“으으...읏!”

단순한 가구가 아니라, 하녀들 십수 명을 모아 자세를 취하게 만든 인간 가구.

마족들이나 할 법한 유희를 취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 발린은 할 말을 잃었다.

“누구냐니까용~? 말을 하지 않으면 기사들을 불러 쫓아내겠어용!”

“...아까 전 쫓아낸 관리인을 기억하십니까?”

느닷없는 물음에 중년여인, 산토스 공작부인은 소시지 같은 손가락을 빨다가 외쳤다.

“아아! 아까 그 사람 말이죵? 감히 내게 시민들이 불편해하니 더 이상 보석이나 고급 요리재료를 강탈하지 말아달라고 하던 그 사람.”

말을 마친 공작부인은 입술을 가리고 웃으며 팔다리를 뻗었다.

피둥피둥한 살집이 돌멩이 맞은 물표면처럼 부들부들 떨렸으나 발린의 표정엔 미동도 없었다.

“그래요. 기억나용. 분명 주제를 깨닫도록 교육을 좀 해서 보냈었는데, 갑자기 그 천민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죵?”

말을 마친 공작부인은 자신이 죄를 시인했다는 것도 모른 채 호호홍 하고 웃어젖혔다.

그 앞에서 발린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분노를 억누르며 대답했다.

“제가 그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호홍? 그래요? 그 사람의 아들...좋아요. 앉아봐요. 지금부터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아주 중요한 걸 가르쳐 드릴 테니.”

허락이 떨어졌으니 더 이상 서 있을 필요도 없었다.

발린은 한 번 심호흡한 뒤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뒤따라온 시종들이 긴장하며 물러나는 가운데, 둘의 기이한 만찬이 시작되었다.

“그래용...이름이 뭐죵?”

“인바르, 인바르입니다.”

처음 이름을 묻는 공작부인에게 발린은 일전 마탑 입구에서 말했던 가명을 댔다.

공작부인은 별다른 의심없이 그 이름을 받아들였다.

포크가 움직일 때마다 식탁 위의 음식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럼 인바르, 여기 온 이유는 역시 라덴 씨 때문이겠죠?”

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공작부인에게서 홍홍거리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럼 마침 잘 됐네요. 원래대로라면 감히 천민이 귀족과 식사를 할 수는 없는 일. 허나 이번만큼은 제가 그 아비를 대신해 당신에게 아량을 베풀어 드리죠.”

말을 마친 공작부인은 발린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눈웃음을 보이며 물었다.

“인바르, 당신도 신분에 대해서는 잘 알 거예요. 평민과...귀족의 차이. 그렇죵?”

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분제에 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당장 그도 몇 달 전 후작의 작위를 받기 전까지는 마탑에 소속된 평민 마법사였으니 말이다.

“아니용. 당신은 몰라용.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고 있지 못해용.”

그러나 공작부인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부정했다.

“그것은 격이예요. 당신이 생각하는 단순한 호칭이나 직위 따위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평생 올라오거나 할 수 없는 격!”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공작부인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발린은 마법 수련을 통해 쌓은 평정심을 이용해 무표정으로 공작부인의 말을 들었다.

“이렇게까지 말했으면 무슨 말을 더 할지도 예상하시겠죵? 당신의 부친, 그 관리인은 감히 격의 차이를 넘어 제게 무례를 저질렀고, 저는 거기에 대해 높은 격의 귀족으로서 당연한 징벌을 내린 것이예용.”

그 말을 마친 공작부인이 다섯 번째 접시를 옆으로 치웠다.

발린은 그녀의 놀라운 먹성 하나에만큼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과연 온 몸에 찐 저 피둥피둥한 살집이 어울릴 만한 여자였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공작부인의 연설이 끝나가고 있었다.

“저는 전 산토스 공작부인 피오나, 제게 그런 말을 하려면 이 땅의 주인인 발린 테오도르 후작님 정도가 아니면 안 된단 말이예용. 그 사실을 몰랐으니 그렇게 얻어맞아도 싸죵.”

“흐응, 그렇습니까.”

그녀는 후작 본인이 바로 앞에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함부로 말을 할 리 없었다.

물론 듣는 입장인 발린으로서는 그저 웃음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원래는 스스로 깨닫기를 바래야 하나, 당신의 용모가 그만한 가치를 지녔기에 이렇게 직접 조언해주는 것이니 당신의 부친에게도 반드시 주지시키도록 하세용! 여하튼 이 일은 수도에 계신 후작님 본인에게도 편지를 통해 알릴 터이니 적절한 처신 생각해 두시라고 하시죵!”

발린은 피식 웃었다.

연설을 마친 공작부인의 표정이 순간 확 구겨졌다.

응당 감사를 표하며 엎드리고 기어나가야 할 ‘평민 관리인의 평민 아들’ 따위가 감히 비웃음을 흘린 것이다.

아무리 그가 마음에 드는 얼굴과 체형을 가졌다 해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막 그녀가 입을 열려는 순간, 이번에는 발린이 먼저 말을 시작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감히 평민 따위가...뭐요?”

눈만 끔벅거리던 공작부인에게 발린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편지 보낼 필요 없단 말입니다. 방금 잘 들었으니까.”

“.....뭐예용?”

잠시간의 침묵이 지나간 뒤 공작부인이 눈을 떨며 말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신 흔들리는 눈동자를 한 채로 말이다.

아쉽지만, 발린은 그녀에게 한 줌의 자비도 베풀어 줄 생각이 없었다.

“그 후작, 발린 테오도르. 나거든.”

마법사의 분노는 차갑다. 그것이 밖으로 튀어나오자 식당은 난방을 가득 하고 있음에도 오한이 들 것만 같은 추위로 뒤덮였다.

“다, 단순한 거짓말이예용! 그런 수작을 부린다고 제가 겁먹을 줄 알았다면...”

“후작님! 후작님!”

피오나 공작부인이 애써 태연한 척을 하는 순간, 식당 입구 쪽에서부터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린과 공작부인 둘 모두에게 익숙한 목소리였다.

공작부인은 시선을 돌려 옛날부터 자신이 다루던 산토스 공작의 집사를 발견했다.

“페르...난도? 이 무례한 자가...”

“후작님! 멈추십시요! 알아봤습니다! 에에이, 비켜라! 어서!”

페르난도는 얼굴이 시뻘개진 채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발린이 명령한 직후 계속 뛴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옷깃마저 모조리 풀어진 모습이었다.

“그래서, 내 아버지께서 그렇게 다치신 이유가 정확히 뭐지?”

헐떡이며 들어온 페르난도에게 발린은 일말의 휴식도 주지 않고 대답을 요구했다.

숨을 돌린 페르난도는 대답을 위해 시선을 위로 올렸다.

기사들에게 제압당한 공작부인, 방 안을 뒤덮은 싸늘한 분위기. 그리고 거기에 방점을 찍는 발린의 차디찬 눈길.

그는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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