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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확인
감히 자신이 어리다고 장난질을 치려 한 두 마법사.
그러나 발린은 즉각 자기 신분을 밝히는 대신, 영 동떨어진 대답을 했다.
“아, 저는 대신전 견습신관 인바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어른께서 한 가지 마탑에 소식을 전하라 하셔서...”
인바르, 발린을 거꾸로 뒤집은 이름이다.
간단하기 짝이 없는 트릭이었으나 피곤했던 마법사들은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전할 소식이 뭔데? 우리한테 말하면 안으로 전달해 주지.”
“하지만 이 소식은 높은 분께 전하라고 하시던데...”
“아니, 그럼 내가 높은 분이 아니라는 거냐? 나 이래봬도 4클래스 마스터야! 이 녀석이!”
발린이 말끝을 흐리자 로든이 언성을 높이며 인상을 썼다.
4클래스의 마스터라면 확실히 어디를 가든 자작급의 대접을 받을 만큼 수준있는 인물이다.
게다가 발린은 이 남자, 로든의 속성을 알고 있었다.
‘아마 번개의 마법을 연마하고 있었다던데, 그럼 확실히 그럴 만도 하지.’
번개 마법은 다른 네 속성에 비해 사용하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애시당초 자질 자체가 극히 드문 속성이기에, 발린은 로든의 자존심이 왜 나오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막 발린이 대답하려는 순간, 뒤에 있던 젠슨이 들릴락말락한 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그리스.”
순간 젠슨과 로든 모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이 버르장머리 없는 신관 녀석이 한바탕 뒹굴 것이고, 자신들은 그걸 보고 한껏 웃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껏 기대하던 두 마법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
로든은 젠슨에게 눈짓을 했다.
젠슨은 자기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분명 마법은 끝까지 제대로 시전됐는데 이상하게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둘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발린이 일부러 태연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왜 갑자기 그런 표정을...”
“아니...아무것도.”
말을 하면서도 젠슨은 믿기 어려운지 몇 번이고 제 손을 바라보았다.
피곤해서 그런가 생각해도 분명 정신도 말짱했고, 마나도 제대로 움직였었다.
서로 눈짓을 해대는 둘을 지켜보던 발린이 속으로 피식 웃었다.
‘당연하지, 그렇게 다 보이는 마법을 어느 누가 당해주겠냐?’
다른 마법사라면 한참동안 캐스팅을 해서 막아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발린에게는 사기급의 고유 능력인 무영창이 있었다.
클래스의 격차도 이쪽이 더 높으니 젠슨의 그리스를 디스펠로 푸는 건 어린애 손목 비틀 듯 쉬운 일이었다.
셋이 그렇게 있는 곳으로 마탑 안쪽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너희들, 수고했다. 사흘 밤낮으로 일하느라 고생했을 텐데, 오늘 하루는 아무것도 시키지 않을 테니 푹 자고 원껏 쉬어라.”
“앗, 샐리온 님!”
가까워진 사람을 본 두 마법사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샐리온은 칼 모텐슨의 뒤를 이어 심화마법교관이 된 사람으로서, 4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6클래스를 뚫어낸 천재였다.
또한 그는 발린의 열렬한 찬양자이기도 했다.
발린이 도입한 체력 단련 덕분에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 그 계기였다.
“뭐 하는가? 어서 들어가 쉬라니까...”
가까이 온 샐리온이 순간 말끝을 흐렸다.
로든과 젠슨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저, 그게 실은 여기 웬 꼬맹이 신관 녀석이 찾아와서 중요한 소식이 있다고...”
“그래서 지금 신전에서 온 게 맞는지 신분 확인 작업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두 마법사가 상황을 아룄으나 샐리온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의 시선은 신관복을 입은 발린에게 쏠려 있었다.
“저,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설마...”
“제 얼굴을 본 적이 있나요?”
발린의 물음에 샐리온은 눈물까지 그렁거리며 대답했다.
“그럼요! 그렇구만유! 제가 발린 님을 얼마나 존경했는데 설마 이런 데서 가까이 볼 줄은 몰랐구만유!”
“네?”
“샐리온 님, 그게 무슨...”
갑작스레 사투리가 나오는 건 샐리온이 감정을 주체 못했을 때의 특징이었다.
그게 지금 나오자 두 마법사는 화들짝 놀라 샐리온과 발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발린은 그들에게 미소를 지은 뒤 샐리온의 어깨를 툭툭 어루만져 주었다.
150cm 정도 될 법한 소년이 고릴라처럼 큰 장한을 토닥이는 모습은 굉장히 낯설었다.
하지만 마법사들이 충격을 받은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발린이라면 엘리아 탑주님의 직속 제자잖아!’
‘15세에 5클래스를 마스터하고, 아티팩트계의 역사를 다시 썼다는 그...!’
발린의 위명은 루비 타워의 모든 마법사들이 알고 있었다.
감히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떠올리자, 두 마법사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발린은 샐리온과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위명은 잘 들었습니다. 중상이시기에 대신전에서 치료받고 있다고 들었을 땐 얼마나 걱정했었는지...”
“모두에게 걱정을 끼쳤군요. 직책도 없는 일개 마법사로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게면쩍게 뒷머리를 긁적이던 발린에게 샐리온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홱홱 내저었다.
“무슨 소립니까! 발린 님께서 안 계시면 우리 마탑은...우리 마탑은...! 으흐윽...”
“괜찮습니다. 이제 괜찮아요.”
용모가 무색하게 울음을 터뜨리는 마법사를 달래던 발린은 로든과 젠슨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두 마법사의 기분이 어떠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한데 그건 웬 신관복이십니까? 흰 게 마치 다이아몬드 타워 로브처럼 보여 잘 어울리십니다. 허허.”
“아침에 서둘러 나오느라 그렇게 됐네요. 그나저나 샐리온 님.”
발린의 부름에 샐리온은 순식간에 부동자세를 취하며 답했다.
그 모습에 허허 웃던 발린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차, 그러고 보니 여기 두 분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는데.”
“아이고, 감히 발린 님을 몰라보다니. 엄히 주의시키겠습니다!”
황급히 고갤 숙이는 샐리온의 등 뒤, 로든과 젠슨은 그야말로 사신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발린을 향했다.
탑주의 직전제자에 그동안 이룬 업적까지 거를 타선이 없는 사람.
비록 아무런 직책이 없다 하더라도 이 탑에서 탑주 다음이 발린이라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찍혔으니 이제 틀림없이 응징이 떨어질거란 생각에 저렇게 변한 것이다.
벌벌 떨고 있던 둘을 훑어본 발린은 피식 웃으며 예상 밖의 말을 꺼냈다.
“아까 봤는데 굉장히 훌륭한 탑의 인재더군요. 앞으로 더욱 신경 써서 키우면 장차 루비 타워를 이어갈 굳건한 기둥이 되겠어요.”
“...네?”
먼저 고개숙이던 샐리온은 물론, 로든과 젠슨 둘도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당연히 지하감옥에 갇히거나 마나호흡을 금지당하는 중한 벌을 받게 될 거라 확신한 둘이었다.
그런데 발린은 벌 대신 오히려 상을 내리라고 말하고 있었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두 분.”
“네!!”
“예!!”
큰 소리로 대답하는 로든과 젠슨, 아까 전과는 영 태도가 딴판이었다.
발린은 그들에게 싱긋 웃어주며 말을 이었다.
“다만 한 가지, 그리스 마법의 배열이 조금 어색한 것 같던데. 그 부분은 약간 커브를 도는 식으로 변수를 넣어주면 상대방이 훨씬 막기 어려워 할 겁니다.”
“!!!”
두 마법사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발린이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챈 것이다.
상황을 모르는 샐리온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셋을 번갈아 쳐다봤다.
“네? 갑자기 그리스 마법이 왜...”
“참! 그리고 이렇게 커브를 굴리는 방식은 다른 마법에도 써서 위력을 증폭시킬 수 있으니, 그 점에 대해서는 여러분께서 연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세 마법사는 놀라는 것조차 잊은 채 머리를 조아렸다.
방금 발린이 내린 것은 단순한 조언 같지만 실은 엄청난 깨달음이었다.
벌을 받을 줄 알았는데 그런 조언을 들으니 두 마법사는 진심으로 발린에게 존경심을 표했다.
‘이럴 수가...실력만 대단한 게 아니야. 감히 우리들을 용서하고, 거기다 이런 깨달음까지...!!!’
‘진정한 인격자시다. 평생 섬길 만한 큰 분이셨어!!’
어찌나 감격했는지 고개를 든 로든과 젠슨의 눈가가 불그스름했다.
그 모습을 보던 발린은 문득 장난기가 돋았다.
‘잠깐만, 이 녀석들 아무 대가도 안 치르고 넘어가게 할 순 없지. 사람 몰라본 벌은 받아야 하지 않겠어?’
샐리온이 발린을 안으로 들이려던 찰나, 발린이 살며시 발걸음을 멈췄다.
같이 들어가려던 셋이 의아한 눈길을 보내던 찰나, 발린이 슬쩍 말을 꺼냈다.
“샐리온 님, 그러고 보니 지금 아직 아침 수련시간이 아닌지?”
“아...예. 그렇지요.”
질문을 들은 샐리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수도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에 비상 체제로 들어가긴 했지만, 원래대로라면 지금은 분명 아침수련 시간이 맞았다.
그걸 확인한 발린이 슬쩍 말끝을 올리며 덧붙였다.
“마침 연마해야 할 과제도 있겠다, 이 수식대로 하루에 천 번 캐스팅 연습을 시키는 건 어떻겠습니까??”
“천 번!!!”
횟수를 들은 두 마법사가 기겁하며 내뱉었다.
말이 천 번이지, 거기에 드는 시간과 노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캐스팅에 드는 마나도 무시할 수 없었다.
간단한 마법을 연습한다 하여도 몇십 번 하다보면 마나가 고갈되는 게 현실.
당연히 중간에 마나호흡을 하는 것까지 끼워서 생각해야 했다.
로든과 젠슨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까와는 또 다른 의미로 공포에 물든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도록 시키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쇼.”
“그럼, 철저한 관리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해야 할 일이 있어 이만.”
용건을 마친 발린이 들어가자, 샐리온은 으스스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로든과 젠슨을 향해 돌아섰다.
“방금 말씀 들었지? 오후 수련시간에 보자꾸나. 얘들아.”
“히, 히이이이익!!”
두 마법사는 동시에 죽는 소리를 내었다.
그 날 로든과 젠슨은 교훈 한 가지를 깨우쳤다.
상대가 누구든, 어떻게 보이든 함부로 얕잡아보지 말자는 게 그것이었다.
***
***
안으로 들어온 발린은 옷을 갈아입자마자 탑주실로 향했다.
업무가 엄청나게 쌓였을 테니 가만있을 수 없었다.
문을 살짝 두드리자 그 안에서 엘리아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네, 들어오세요.”
애써 목소리에 힘을 주지만 생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게 뻔히 느껴졌다.
발린은 대답 대신 천천히 문을 열었다.
널찍한 탑주실 안에는 서류더미가 가득했다.
처리된 서류도 있었고, 아직 결재란이 공백인 서류도 꽤나 보였다.
그러나 발린은 대신 엘리아의 모양새에 주목했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에 눈 아래 진 다크서클이 인상적이었다.
‘보니까 일 터진 때부터 씻지도 않고 이랬군. 어휴.’
발린은 엘리아의 등 뒤 한구석을 문득 살폈다.
나름 구색을 갖췄지만 처량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잠자리가 보였다.
병사나 쓸 법한 군용침낭과 베개.
어린 여자아이가 쓸 만하다라고는 거짓말로도 말못할 것 같았다.
“거기 놓고 가요. 이것만 다 하고 한 번 볼 테니까.”
어찌나 바쁜지 그녀는 들어온 사람이 누군지도 보지 않았다.
서류에 집중하는 폼이 꼭 예전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았다.
발린은 가까이 다가가 그녀가 처리하는 업무를 살폈다.
지진으로 생긴 충격 때문에 무너진 수도의 경관을 복구하는 데 관련된 업무였다.
그동안 해 온 것중에는 꽤나 간단한 편에 속했지만, 엘리아는 몇 번이고 손톱을 물어뜯으며 재검토를 하고 있었다.
“이건 아니야. 조금 더 효율적으로. 조금만 더 완벽하게.”
가까이 와 있던 발린이 혀를 찼다. 드리워진 그림자에 고개를 들던 엘리아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너무 작은 것까지 집중할 필요 없어. 중요한 건 전체적인 진행속도다. 속도와 디테일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보도록 해.”
그 앞에서 시니컬하게 조언을 마친 발린은 짐짓 멀쩡한 척 기지개를 켜 보였다.
순간 엘리아의 입이 열렸다.
“왜 그랬어요?”
“응? 뭐가.”
고개를 마주친 발린이 묻자 엘리아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왜 제게 아무 말도 안했냐고요. 그런 위험한 일을 혼자 처리하러 가면서!”
“그야...”
“아무리 스승님께서 생각이 있다 해도, 표면적으로는 제가 발린 스승님의 스승이라고요! 그 정도는 가르쳐줄 수 있잖아요! 그래야 맞춰주기라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왜 말도 안 하고...왜!!!”
감정이 북받친 엘리아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 작품 후기 ============================
네, 발린은 대인배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