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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확인
느닷없는 인기척에 발린은 조용히 주변을 경계했다.
‘누구지?’
“들어가도 돼요?”
“...마음대로 해.”
목소리를 들은 발린은 긴장을 풀며 눈을 감았다.
문 밖에서 고개를 내민 건 레벤이었던 것이다.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종종거리며 다가와 침대 옆에 앉았다.
차림새와 향료 냄새를 보아하니, 얼마 전까지 수련을 하다 씻자마자 여기로 온 것 같았다.
“몸 상태는 어때요?”
“네가 보기엔 어때 보이냐?”
레벤의 물음에 발린은 퉁명스레 대답했다.
당장 아파서 골골거리고 있는 게 보이는데 무슨 대답을 바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모습에 레벤은 한숨을 내쉬더니만, 갑자기 피식 웃으며 물었다.
“방금 질문은 사과할게요. 그래도 발린 공, 생명의 은인에게 너무한 거 아니예요?”
“생명의 은인이라니. 네가 뭘 했는데?”
발린의 물음에 레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되물었다.
“어라라, 그럼 그 동안 정말 한 번도 안 깨어나셨던 거예요?”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거야?”
“일 주일이요! 일 주일!”
레벤의 대답에 발린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만약 정말로 일주일이 흘렀다면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두어야 했다.
그는 목이 아픈 것도 아랑곳않고 급하게 말했다.
“켈록! 켈록! 말해 봐. 그동안 일이 어떻게 돌아간 건지.”
“뭐 이리 급하세요. 일단 이것부터 쭉 들이키고 말씀하세요.”
발린에게 레벤이 건넨 것은 크리스탈 그릇에 담긴 분홍빛 약물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발린에게 레벤이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감기에, 특히 열 내리는 데 좋은 약이에요. 한 그릇에 2골드가 넘으니 흘리지 말고 다 드세요.”
“...굉장히 써 보이는데.”
“어머, 설마요.”
쓴 걸 싫어하는 건 어른이나 아이나 똑같다.
그렇기에 약물의 맛을 본 발린은 당장 그릇을 내동댕이칠 뻔했다.
“이게 무슨 맛이야?! 오우거 간을 가져와도 이것보다는 맛있겠다!”
“그래도 몸에 좋은걸요. 설마 어린아이처럼 쓴 게 싫다고 떼쓰시는 건 아니시죠?”
레벤의 물음에 발린은 목까지 차오르는 욕지기를 억지로 밀어넣었다.
애시당초 쓴 것도 적당히 써야지, 저건 그야말로 인생의 모든 쓴맛을 한 데 뭉쳐놓은 것 같았다.
“다 마시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설명드릴게요. 어차피 발린 공도 아셔야 하니까. 그 전에 몸부터 챙기셔야죠.”
“...알았다.”
발린은 심호흡을 두어번 한 뒤 크리스탈 대접의 내용물을 단번에 들이켰다.
목구멍으로 넘어가고도 그 쓴맛이 느껴지는 듯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간신히 위액까지 도로 삼킨 발린에게 레벤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인시너레이트가 터진 뒤 몇 시간 동안 수도 전체가 계속 시끄러웠어요. 지하에서 난데없이 키메라들이 계속해서 기어나왔거든요.”
다크니스가 만들어둔 대공동은 완전히 붕괴되었으나, 미궁의 규모는 생각보다 훨씬 거대했다.
살아남은 키메라들은 붕괴를 피해 지상으로 도망쳤고, 곳곳에서 난동을 부린 덕에 수도에는 비상이 걸렸다.
“엄청났겠군.”
“동서남북은 물론 왕성에까지 나타났으니...네 맞아요.”
레벤의 말에 발린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왕성에까지 나타났다면 큰 소란이 맞았다.
문득 예전 지하미궁을 살필 때 보았던 키메라들의 수준이 떠올랐다.
하나같이 익스퍼트 중상급 이상, 그 아래로는 단 한 마리도 없었다.
‘그 정도 실력의 키메라들이 몇십 기씩 나타났다면 혼란도 이런 대혼란이 없었겠군.’
왕성은 사람으로 치자면 심장 같은 곳.
그런 곳에 키메라들이 나타났으니 그 여파는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구하는 게 좀 늦었어요. 인시너레이트가 터져나온 덴 싸움의 중심부라...제가 갔을 땐 발린 공이 쓰러져 있는 것만 보이더라고요.”
“그건 됐고, 마탑이나 다른 곳의 피해는?”
마탑을 걱정하는 모습에 레벤이 풋 웃더니 이내 특별히 큰 피해는 없었다고 대답했다.
“어쨌건간에, 밖은 그거 수습하느라 아직도 한창이예요. 지금이야 큰 건 거의 다 끝났고, 무너진 건물만 다시 만들면 되는 정도?”
“...알았다.”
이야기를 다 들은 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일이 일어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큰 문제 없이 수습된 모양이었다.
그 사이 고통이 어느정도 가셔 있었다.
약이 쓴 만큼 효과가 있었던 것 같았다.
발린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옆에 있던 레벤이 깜짝 놀라 발린을 제지했다.
“어디 가시려고요. 아직 더 쉬셔야 해요.”
“급한 일은 마무리짓고. 가서 사절단 건 뒷수습도 해야 하고 왕성에 올릴 보고서도 써야...으...음!!”
할 일을 나열하던 도중 갑자기 눈 앞이 흐릿해져 왔다.
아까 먹은 약에 생각이 미쳤을 땐 이미 침대에서 끝없는 잠 속으로 떨어지는 도중이었다.
털썩 쓰러진 발린을 지켜보던 레벤은 마른 수건을 꺼내 그의 몸을 구석구석 닦아내주었다.
“나 참, 몸 상태가 이런데 마탑으로 가겠다고요? 정말이지 말은 잘해.”
“레벤 님. 슬슬 업무에 복귀하셔야 하실 시간입니다.”
“잠깐만요!! 금방 갈 게요!”
문 밖을 향해 마주 외친 레벤이 처치를 계속했다.
다른 사람을 시킬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굳이 이걸 직접 하겠다고 자청했다.
레벤은 땀에 절은 옷을 갈아입히고 몸을 수건으로 샅샅이 닦아냈다.
남부끄러운 부분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으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던 걸 계속했다.
그것이 거대한 악을 소멸시킨 영웅에게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걸 말 안했구나.”
막 이불을 갈아준 레벤이 문득 생각난 듯 중얼거렸다.
혼란 속에서 그녀가 사절단 마법사들에게 했던 거짓말.
그것이 모두에게 정설로 인식되었다는 사실을 미처 꺼내지 못한 것이다.
잠깐 손가락을 턱에 얹었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살짝 양 옆으로 흔들었다.
“뭐, 괜찮겠지.”
지금 중요한 건 발린이 낫는 것, 그리고 그에 대한 법황청의 오해를 풀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
수도, 카디날 성에 지진이 일어난 지 8일이 지났다.
각계각층의 사람이 진화에 나섰지만 상황은 좀처럼 수습이 되지 않았다.
거대한 지진에 키메라의 출몰, 거기다 산토스 공작의 급사까지 더해지자 한동안은 공기마저도 우중충했다.
그래도 곳곳에서 조치가 이어진 덕에, 지금은 대부분 예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아암.”
루비 타워의 앞, 정문 앞에 서 있던 마법사가 찢어져라 하품을 해 댔다.
며칠동안 밤을 샌 듯, 그의 눈 아래로는 시꺼먼 다크서클이 자리하고 있었다.
옆자리에 있던 다른 마법사도 피곤한 건 마찬가지였다.
“얌마, 정신차려. 얼마 안 남았어. 조금만 더 경계 서면 들어가서 푹 잘 수 있다.”
“그거 아니었으면 나 벌써부터 쓰러졌을걸?”
시시덕거리며 농담을 주고받는 그들은 벌써 사흘 째 아침을 뜬눈으로 맞이하고 있었다.
엘리아가 수도의 복구에 적극적으로 나설 때 이들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마법사들이 수도 각 곳으로 움직였으며, 지금도 복구 작업에 힘을 쓰고 있었다.
“아오 씨! 도대체 눈이 안 뜨이네. 요즘 나 너무 열심히 산 것 같아. 먼저 간다야.”
“그래도 나는 기분 좋더라.”
투덜대던 마법사가 동료의 말에 눈을 가늘게 했다.
그러나 동료 마법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너 봤냐. 간단한 마법 하나 써서 물 좀 만들었을 뿐인데 우릴 마치 구세주처럼...”
“......”
어느덧 먼저 입을 열었던 마법사의 불평이 잦아들었다.
그걸 의식한 동료 마법사가 피식 웃었다.
“너도 그런 경험 있었지? 그래서 말로는 맨날 못해먹겠다 어쩐다 해도 이렇게 경계임무까지 자청한 거고.”
그의 말대로 눈앞의 마법사는 불평을 할지언정 항상 제 몫 이상의 작업을 해 왔다.
무어라 우물거리던 마법사는 결국 고개를 푹 숙이며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렸다.
“...그야 그 편이 효율성 좋으니까 그런 거지 뭘 내가 언제 그런 거 신경썼다고...”
하지 않은 말이 많았으나, 두 마법사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내용을 알고 있었다.
놀랍게도 마탑의 다른 마법사들도 대다수가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 사람들 우리한테 분명 고맙다고 제대로 말했었지.’
‘야!! 나는 꽃반지까지 받았어!’
대부분이 어린 시절부터 탑에서 살아오며 마법을 연마해 온, 말하자면 외부와 접촉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 동안 그들은 수많은 양의 비평과 비난, 험담을 들어왔다.
심지어 마탑의 벽은 매일 마법사들의 눈물로 씻겨진다고 할 정도였다.
한데 이번 재해 당시 발빠른 구호 활동을 나서고, 그 후로도 쉼없이 복구 지원을 나서며 마법사들은 다른 세상을 체험했다.
바깥 세상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다.
연구에 몰두하던 그들에게는 신선한 자극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재해로 피해를 입은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자신들을 돕는 마법사들에게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평생 마법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온 시민들에게, 마법사는 신비한 힘을 쓰는 구세주 그 자체였다.
예로부터 칭찬은 마왕도 웃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 말이 지금 이들을 통해 실현되고 있었다.
마법사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복구 작업에 스스로 나섰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몸을 아끼지 않았다.
사절단으로 온 마법사들은 처음에 명령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으나, 곧 의심을 거두고 경탄의 시선을 보냈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남을 돕는다는 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무언가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몸은 챙기면서 나가야지. 나 원 참.”
“그러게 말이다...잠깐만, 저기 저 사람 이 쪽으로 오는 거 맞지?”
느지막하게 대화를 나누던 두 마법사가 동시에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곳에선 어떤 소년이 붉은빛 지팡이를 쥔 채 걸어오고 있었다.
얼핏 보면 마법사인 것처럼 보였으나 그가 입은 건 틀림없는 백색 신관복.
신관이라는 걸 눈치챈 두 마법사의 눈이 급격히 날카로워졌다.
‘저 녀석, 대신전에서 온 거 같은데?’
‘보아하니 갓 심부름나온 꼬맹이 같은데...어디 좀 놀려 볼까?’
두 마법사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둘 모두 그 의미를 이해했다.
소년이 정문 앞으로 오자 둘은 일제히 자신들의 지팡이로 문을 막았다.
“정지! 이 곳은 루비 타워다!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니 신분과 용무를 밝혀라!”
불호령을 내리던 마법사 한 명이 등 뒤의 동료에게 슬쩍 눈짓을 보냈다.
자신이 분위기를 잡고 있을 테니, 그 사이 뭔가 마법을 쓰라는 뜻이다.
마음이 통했던 것일까, 등 뒤의 마법사가 곧바로 캐스팅을 시작했다.
‘어리버리한 신관 녀석, 한 번 제대로 골탕좀 먹어 보라지!!’
그가 준비하는 마법은 잠시동안 한 곳의 마찰계수를 없애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그리스.
마법사의 머릿속엔 어느새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버둥대는 소년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신분과 용무요?”
“그래!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있겠지. 신분이 증명된 사람이 아니면 함부로 나다닐 수 없어!”
호령하던 마법사, 로든은 짐짓 엄한 분위기를 잡아가며 소년을 위협했다.
그러나 소년은 조금도 겁먹은 기색 없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뭐야. 어지간히 배짱있는 녀석일세?’
이렇게 되자 오히려 분위기를 잡던 로든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로든은 급히 등 뒤를 향해 눈짓했다.
뒤에서 주문을 외우던 마법사, 젠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리스의 스펠은 거의 다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남은 건 기회를 잡아서 넘어뜨리는 것 뿐이었다.
스으으으...
젠슨의 움직임에 따라 마나가 움직였다.
소년은 로든의 질문에 대답하며 그 흐름을 살폈다.
‘이것 봐라?’
흐름이 만들어내는 마법이 무엇인지 눈치채자 실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마나의 흐름은 분명 그리스 마법의 배열, 저걸로 자신을 넘어뜨릴 생각인 것 같았다.
‘날 골탕먹이려 드는군.’
소년의 정체는 다름아닌 치료를 마치고 일찍 나온 발린이었다.
약기운이 가시자마자 짐을 챙겨 마탑으로 돌아왔더니, 이런 장난을 당하게 된 것이다.
발린은 천천히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보니 자신은 대신전의 신관복을 입고 있었다.
마법사와 신관이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는 건 코흘리개마저도 아는 사실.
이제야 상황이 짐작된 발린이 히죽 웃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두 마법사 친구는 어떻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