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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류 사절단의 방문
왕실 무도회에 발린 일행이 도착한 것은 초저녁 즈음이었다.
삼삼오오 모여 떠들던 귀족들의 시선이 마차를 향해 모였다.
“몇 년 전에 두어 번 와본 것뿐인데, 잘 할 수 있을까요?”
“처음만 아니라면 금방 적응하게 돼. 괜찮아.”
마차 안에 있던 엘리아는 못내 불안한지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발린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에 손을 갖다댔다.
“하지 마세요. 어린애도 아니고.”
“어린애 맞잖아?”
“으윽.”
날카로운 지적에 엘리아의 말문이 막혔다.
우물쭈물대던 엘리아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러시는 발린 스승님도 알고 보면 저랑 세 살밖에 차이 안 나잖아요??”
“세 살? 예끼! 이놈! 장난도 정도껏 쳐야...지.”
무의식적으로 언성을 높이던 발린이 순간 제 입을 막았다.
회귀한 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가끔 말이 헛나오곤 한다.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옛날의 모습, 늙고 강인해진 그 모습으로 착각하고 마는 것이다.
“장난이요? 세 살 차이 맞지 않아요? 열다섯 살이라고 들었는데...”
“세 살 차이 맞다. 내가 긴장해서 말실수를 했구나.”
발린도 마찬가지로 긴장했다는 말을 듣자 엘리아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 웃음에 편승해 지금 상황을 넘기자,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리기 전, 발린은 엘리아에게 미리 준비해온 성물을 건넸다.
“엑, 목걸이랑 반지요? 저 이미 다른 거 차고 있는데.”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야. 대신관 한 명이 신성력을 듬뿍 담아 축복을 부여한 성물이다.”
“대신관 급 신성력이요?”
목걸이를 받아들던 엘리아가 화들짝 놀라 반문했다.
발린의 말대로라면 이 목걸이와 반지의 가치는 B급 아티팩트 중에서도 최상위 것들과 동일한 수준이었다.
“이런 걸 어째서...”
“혹시나 모르니 꼭 갖고 있어라. 그것만 있으면 매혹이나 환상 마법에 걸릴 일은 없을 거다.”
말을 마친 발린은 은으로 만든 반지와 목걸이를 직접 엘리아에게 걸어 주었다.
수수한 은제 장신구라 파티에 맞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준비가 끝나니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문을 열은 발린은 연회장의 정경을 한 눈에 담으며 말했다.
“왕궁 중앙 연회장인가.”
“우와, 엄청 커요! 마탑 로비보다 더 큰 거 같아!”
같이 내리던 엘리아가 입을 쩍 벌렸다. 반면 옆에서 내리던 발린은 그다지 동요하지 않았다.
전생에선 이보다 더 큰 연회장이나 성채도 수없이 많이 보아 왔다.
새삼 여기서 감탄할 이유가 없었다.
“혹시 저번에 왕성에 들르셨을 때 와본 적 있으세요?”
“아니...나도 처음이다. 다만 놀랄 이유가 없어서 말이지.”
겉으로는 태연한 모습이었으나, 사실 이 곳을 처음 보는 건 발린도 마찬가지였다.
‘꽤나...아름답군.’
커다랗게 솟아오른 탑 아래로 크리스탈이 둥글게 지붕이 되어 있다.
그 아래편엔 테라스마다 가지각색의 빛을 발하는 마나석이 있었는데, 덕분에 연회장은 무지갯빛 빛에 휘감겨 있었다.
그 모습은 수많은 명소들을 보며 눈이 높아진 발린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아름다웠다.
‘이런 곳이 오크들에게 불타 무너지다니.’
과거의 생에서 지키지 못했던 게 하나 더 늘었다.
그걸 지킬 수 있을지는 이번 생의 자신에게 달려 있었다.
발린은 발 밑에 숨쉬고 있을 괴물들을 떠올렸다.
설령 마법사들을 처치하더라도, 그만큼의 키메라들이 수도에 풀려나면 막심한 피해가 날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줄이는지가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숙제였다.
“루비 타워의 탑주님과 그 제자분께서 오셨소이다!”
“오오!!”
“일전에 시연회에서 한 번 봤었지요. 오랜만입니다!”
엘리아와 발린의 등장에 연회장의 귀족들 대다수가 우르르 모여들었다.
마탑의 탑주는 왕국 내 마법사들의 지도자이기도 하다.
그 권력은 어지간한 대귀족에 필적하며, 때에 따라서는 그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만한 인물이니만큼 사람들이 몰려드는 건 당연했다.
“환영...해주셔서 고마워요.”
“자아, 이쪽으로.”
“저 기억하십니까? 벤다인 전 탑주님과 같이 뵜었는데, 혹시...”
몰려드는 사람 한가운데서 안절부절 못하던 엘리아.
결국 발린이 서 있던 쪽으로 도움을 바라는 눈길을 향했다.
도와줄 법도 하건만, 발린은 일부러 엘리아의 눈길을 외면했다.
‘이런 건 스스로 깨우쳐야지. 그러지 못하면 평생 익숙해질 수 없어.’
성취가 눈에 보이는 검술이나 마법과는 달리, 언변이나 카리스마 등은 남이 도와주어선 결코 늘지 않는다.
스스로 깊은 심계를 가지고 움직여 남을 제 뜻대로 다루는 방법을 습득해야 한다.
지난 세월동안 발린이 사람들을 다루며 깨달은 방법이었다.
‘뭐, 그렇게 말해봤자 이미 나는 한 번 제대로 실패한 몸이지만 말이지.’
사람을 다루는 것.
용서와 징벌의 칼을 균형있게 다루는 것.
이것에 실패했기에 발린은 결국 회귀라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자신부터 하지 못하는 일을 엘리아에게 강요하다니, 그것도 웃긴 일이었다.
걸음을 옮기던 발린이 엘리아의 앞에 섰다.
그때까지도 귀족들의 등쌀에 시달리던 엘리아가 화색을 띄었다.
“이번 겨울에 저희 저택에 한 번 방문하시죠! 사슴 사냥철에 가면 그만입니다! 미리 준비를 해 둘 터이니 꼭...”
“탑주님께선 사슴을 좋아하십니다. 무의미한 사냥을 싫어하시기도 하고 말이죠.”
차가운 어조의 말과 함께 발린의 손목이 귀족의 어깨를 잡아챘다.
엘리아에게 조금이라도 연줄을 대려 버르적대던 십여 명의 사람들.
하나같이 대귀족 아닌 자가 없었다.
저마다 말 한 마디로 수천 명의 사병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가!
그런 자들 십여 명의 시선이 일제히 발린에게 와 박혔다.
이만한 귀족들이 모인 건 시연회 이후로 처음!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들 사이에 끼는 것만으로 갑갑해질 만한 압박감이 덮쳤다.
“탑주님께서 불편해하십니다. 다들 떨어지십쇼.”
“뭐야? 네놈이 뭔데 감히...! 내가 누군줄 알고...나 페를로스 후작이야! 이거 놓지 못해!”
“이런, 발린 공 아닌가. 오랜만이로군.”
처음 방해받은 귀족이 으르렁대던 도중 발린을 알아본 다른 귀족이 말을 받았다.
발린은 그 쪽으로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를 건넸다.
정체를 알게 되자 모여있던 귀족들의 안색이 일제히 급변했다.
발린이라면 엘리아 탑주와 함께 포섭해야 할 1순위의 마법사였다.
그런데 호감을 사긴 커녕 단단히 화를 불러일으켰으니, 이건 어떻게 봐도 페를로스 후작이라는 귀족의 실책이었다.
“그, 그게 말일세!”
“변명은 됐고, 엘리아 탑주님께선 요즘 일정이 많아 피곤하시니 되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그, 그랬나? 미안하군. 결례를 용서하시오. 탑주.”
꾸벅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귀족들, 그 뒤에 서 있던 발린의 귓가에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발린 님. 3층 일곱 번째 테라스로. 혼자만 오십시오.”
‘드디어...!’
마왕군인지 삼황자 측인진 모르겠지만, 마침내 놈들이 접촉해왔다.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발린은 지체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막 감사인사를 하려던 엘리아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멀어지는 발린의 뒷모습. 그게 왠지 모르게 벤다인의 마지막 모습과 겹쳐졌기 때문이다.
***
의문의 목소리가 말한 곳은 3층 7번째 테라스.
그 쪽으로 가던 발린은 인기척이 순식간에 없어졌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과연.’
미리 말을 해 뒀는지 주변엔 흔한 시종들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7번째 테라스로 다가간 발린은 커튼을 열어젖히며 입을 열었다.
“산토스 공작각하를 마탑의 마법사 발린이 뵙습니다.”
“예는 됐네. 이리 오게나.”
기다리고 있던 자는 산토스 공작 본인이었다.
마나 서치를 해 봐도 별다른 기척이 없는 걸로 보아선 정말로 혼자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았다.
‘무슨 속셈이지?’
발린은 마음을 날카롭게 가다듬으며 걸음을 옮겼다.
테라스는 꽤 넓었고, 덕분에 둘은 그럭저럭 간격을 두고 같이 창밖을 볼 수 있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마탑을 위해, 왕국을 위해 여러모로 힘쓰고 있다고 하던데.”
“별볼일 없는 것뿐입니다.”
“별볼일 없긴! 귀공이 만든 아티팩트를 사려고 수도의 귀족들이 전부 눈에 불을 키던 걸!”
발린은 살짝 고개를 까닥거려 공작의 칭찬에 답했다.
공작은 기쁘다는 듯 히죽 웃더니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대부분 좋아하는 음식은 뭐냐? 마탑에서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있느냐 따위의 시답잖은 것들밖에 없었다.
특별히 음모를 꾸민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우호적인 관계를 조성하기 위한 작업 같은 느낌이었다.
발린은 99퍼센트의 진실에 1퍼센트의 거짓을 섞어 이야기했다.
“그래, 마법사의 유령에게 교습을 받았단 말이지. 정말이지 신이 도왔다고밖에 할 말이 없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덕분에 오크들의 습격을 격퇴할 수 있었으니까요.”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반응을 살펴도 딱히 동요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넌지시 마왕군에 대한 암시를 넣어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마왕군도,삼황자의 부름도 아닌 그냥 단순한 접촉이었나?’
실력있는 마법사에게 대귀족이 접촉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지금 이 경우도 그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발린은 천천히 긴장을 풀며 공작과 이야기를 나눴다.
“공작각하. 국왕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아, 그런가. 미안하네 발린 공. 이제 슬슬 가 봐야 할 것 같군.”
“아뇨. 저도 국왕폐하께 예를 갖춰야 하니 상관없습니다.”
메인 로비에서 올라온 수행원의 보고에 공작은 발린에게 양해를 구했다.
어차피 더 할 얘기도 없었던 터라 발린은 공작의 사과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일전에 마나를 훑었을 때도, 지금도 마나가 느껴지지 않아. 하지만...’
기본적인 마나량마저도 없는 몸은 확실히 경계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오늘 대화를 하는 동안 공작은 특별히 이상한 티를 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별다른 반응이 없다면, 이건 단순한 공작의 체질이나 특성일 수도 있었다.
‘남의 개인사를 함부로 파헤칠 수는 없지. 당장은 말이야.’
그대로 묻어둘 수는 없으니 추후 반드시 알아봐야 하는 건 맞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우선 적들을 처치하는 게 먼저다.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먼저 가던 공작이 돌아서서 눈을 찡긋했다.
“...?”
고개를 갸웃거리던 발린의 귓가로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밤 북서편 거주구에 있는 흰 돌고래 동상 광장으로 오게나. 긴히 할 얘기가 있네.”
“긴히 할 얘기라면...?”
“글세, 다른 귀족들도, 국왕폐하도 이야기하지 못하는.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해 두지.”
겉보기엔 후원자로서 조금 더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발린의 직감이 강렬히 경고하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던 대로, 놈들의 함정이 드디어 뻗친 것이라고 말이다.
발린은 미리 준비해 둔 아티팩트가 헛되지 않게 쓰일 걸 느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간은 언제까지...?”
“파티가 끝난 뒤라면 아무래도 좋지만, 너무 늦지는 말도록 하게,”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 순간, 아래쪽에서 시종들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공작은 대신 눈을 찡긋해 보이고선 그 편으로 향했다.
그 뒤에 있던 발린은 심호흡을 하며 긴장을 풀었다.
일단은 저 제안이 순수한 뜻에서인지, 아니면 다크니스라는 흑마법사의 흉계인지 확인해 보는 게 급선무였다.
발린은 마나를 있는 대로 쏟아넣어 바람의 정령 한 명을 소환했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의 존재감이 테라스 주변을 가득 메웠다.
-나를 부른 마법사가 그대로군.
머릿속으로 전해지는 의념에 발린은 화들짝 놀랐다.
의사표현을 할 줄 안다는 것은 정령들 중에서도 탑클래스급이라는 뜻.
그만한 힘이라면 능히 소드마스터나 대마법사들과도 자웅을 겨룰 수 있었다.
남들에게는 5클래스의 불의 마법사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의 본래 능력은 두 단계나 높은 7클래스.
그 마나를 모조리 쏟아부었으니 이 정도의 정령이 소환된 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하기야...강하면 강할수록 좋지. 그러라고 마나를 부어넣은 거니까.”
발린은 정령의 말에 대답하며 숨을 골랐다.
어차피 지금 정령에게 시킬 일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너는 지금 저기, 저 쪽의 돌고래 동상이 있는 광장으로 가서 그 곳을 봉쇄해라.”
-그것이면 되는가?
“아니, 그리고 조만간 내가 그 곳에 뭘 보낼 텐데, 그것이 거기 있는 어둠의 기운을 가진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때까지 쥐새끼 한 마리도 나가지 못하게 해”
-알겠다.
정령은 말을 마치자마자 순식간에 공중으로 사라졌다.
멀어져가는 바람의 기류를 바라보던 발린은 눈을 무도회장 안편으로 돌렸다.
우선 첫 번째 포석은 깔았다. 이제 그 곳으로 갈 ‘뱀파이어 무리’를 만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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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여기까지! 댓글들 관심있게 읽어보고 있는데, 제목이 안티라니 슬픈 일이군요. 저 이 제목 나름 정성들여 만들었단 말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