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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 개혁.
선명히 타오르는 불길, 그 너머에서 발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히 마법을 쓰는 걸 넘어, 마법진에 가득한 물의 마나를 전부 증발시켜 버린 것이다.
압도적으로 실력차이가 나지 않고서야 절대로 불가능한 일.
보통은 갓 입문했거나, 금방 정식 마법사가 된 제자를 훈계할 때나 하는 짓이다.
그걸 눈 앞에서 당한 클리든은 다리에 힘이 풀린 채 비틀거렸다.
“얼마 전에 5클래스의 벽을 뚫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담담하게 꺼내는 말 한 마디, 발린은 그것으로 완전히 쐐기를 박았다.
지켜보던 마법사들 사이에서 논란의 술렁거림이 일었다.
탑의 간부들이자, 클리든의 충실한 수하인 자들이 대다수.
그러나 이런 결과 앞에서는 아무리 그들이더라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아무리 천재라고는 하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원래 그들은 발린이 허둥대다 아무것도 못 하는 걸 지켜보는 관중의 역할이었다.
클리든이 여유만만히 쳐 놓은 함정, 어쩔 줄 몰라하다 스스로 무너지는 발린.
모든 게 끝나면 그 자리에서 불합격 판정을 내려주는 역할이었을 텐데.
정작 불합격해야 할 발린은 멀쩡히 서 있고, 앞장서서 분위기를 주도해야 할 클리든이 쓰러져 버렸다.
그 시각, 엘리아를 지켜보던 쪽에서도 탄성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탑주의 시험을 직접 감독하러 나온 것은 카론 에른스트 본인.
수많은 수련생들의 진급을 특유의 무표정으로 좌절시킨 거목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얼굴표정에도 봄이 찾아들고 있었다.
서서히 녹아 풀려가는 표정의 양옆으로 참관중이던 마법사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3클래스! 3클래스 땅의 마법이라니! 그 사이 진전을 보였단 말인가!”
“이거 루비 타워의 홍복이로세, 전대 탑주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쉿! 쉿!”
눈물을 보이던 한 노마법사를 다른 마법사가 급히 말린다.
화들짝 놀란 노마법사는 급히 눈물을 닦았으나, 기뻐하는 표정만큼은 어찌할 수 없었다.
“스톤 월!”
우르르륵!!
주문 영창에 맞춰 땅에서 솟구치는 돌벽.
어딜 봐도 완벽한 3클래스의 마법인 스톤 월이다.
정식으로 인정받은 땅의 마법사들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대지 계열의 마법.
그러나 엘리아가 이걸 쓰는 순간, 마법사들 사이에서 일제히 충격이 일었다.
두어 달 전까지 2클래스도 마스터하지 못했던 엘리아.
탑주임에도 정식 마법사의 기본조건인 3클래스를 넘지 못했기에.
곳곳에서 자격이 없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던 게 기존의 분위기였다.
업무 처리에서 진전을 보였다고는 하나, 여기서마저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못한다면 진지하게 탑주 사임을 논의했을 예정.
그런데 엘리아가 보란 듯이 이번 테스트에서 당당하게 3클래스에 올라서 버렸다.
정식 마법사로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자질을 모두에게 증명한 것이기도 하다.
착착 진행되고 있던 클리든의 계획이 난데없이 거대한 암초를 만난 셈.
놀란 사람들은 클리든과 그 수하들 외에도 많이 있었다.
지켜보고 있던 수련생들, 그들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감탄성만을 토해냈다.
두어 달 전, 처음 그녀의 수련을 지켜보며 비웃던 기억이 생생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똑같은 짓거리를 해 왔으니 그럴 수밖에.
한데 이렇게 결과로 증명해버리니, 수습 마법사들의 시선 자체가 달라졌다.
“...그 수련.”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한 수습 마법사가 입을 연다. 나이는 40대나 됐을까, 수염이 텁수룩하게 나 있는 중년이다.
“그 수련이 정말 효과가 있는 거야? 그것만 열심히 하면 3클래스에...”
“멍청한, 그럴 리가 있겠...냐...”
옆에 있던 동료가 핀잔을 주지만, 거기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순식간에 퍼져나가는 충격 사이로, 시험을 감독하던 카론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합격!”
“합격이다. 발린, 5클래스의 불의 마법사..된 걸 축하한다.”
기가 질린 표정으로 헉헉대는 클리든을 향해, 발린은 특유의 여유로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확실히, 부탑주님 말씀대로 쉬운 시험이더군요. 다음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 그 위로는 숨길 수 없는 열등감과 수치심이 드러나 있었다.
그렇게 그 날의 시험이 성공리에 끝났다.
승급 시험에서 합격한 마법사들은 총원 육백여 명 중 대략 삼십여 명, 발린과 엘리아는 그 중에서도 나란히 특출난 성과를 보였다.
그 날 밤, 세이라는 자신의 개인실에서 은밀히 수정구슬 한 개를 꺼내들었다.
“후우.”
숨겨 뒀던 어둠의 마나를 불어넣자 번쩍이기 시작하는 수정구슬.
그 너머에서 희뿌연 그림자 여러 개가 급히 움직이더니, 얼마 후 젊은 청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지? 일전에 보고는 잘 받아둔 것 같은데?”
“위대하신 주인님, 삼황자 저하를 하찮은 권속인 세이라 벨린이 뵈옵니다.”
공손히 인사를 올리며 몸을 바닥에 밀착시키는 세이라. 최대한의 존경을 표시하는 뱀파이어들의 방법이었다.
수정구 너머의 목소리는 잠시 아무 말이 없더니, 이내 혀를 굴리며 인사를 받았다.
“그 인사 기꺼이 받아들이지, 나의 충성스러운 권속이여. 이제 말하라. 네가 보고 들은 것을.”
마법 아티팩트를 통해 흘러나오는 목소리건만, 놀랍게도 거기엔 듣는 사람들을 엎드리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세이라는 거듭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일전에 마왕군의 천인장 한 놈이 움직였다는 보고를 드린 적이 있사옵니다.”
“그래, 그랬지. 그런데?”
생각났다는 듯 어조를 높이는 목소리, 그것을 향해 세이라는 지금까지의 상황을 말했다.
“마왕군 천인장을 단신으로 없애고, 또한 오크 장군 케인후프와 그 부하들까지 물리친 소년 마법사가 있습니다. 그 소년이 오늘 5클래스의 경지를 모두의 앞에서 보였사옵나이다.”
“그래서.”
목소리에 흥미가 깃들기 시작했다. 세이라는 거기에 장작을 집어넣듯 마무리를 지었다.
“그 소년 마법사에게 매혹 마법을 걸어두었사오니, 이제 오셔서 그를 새로운 권속으로 삼으소서.”
“내가 직접 움직여야 할 만큼 큰 그릇인가?”
목소리가 건네는 물음, 그러나 이미 그는 어떻게 할지 결정한 듯 보였다.
15살의 나이에 5클래스의 마법을 부린다면, 그것은 이미 세계 전체를 통틀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큼의 천재성이다.
계승전을 이길 수 있는 최강의 패를 발견했는데, 어찌 직접 움직이지 않으랴. 이것은 다만 확인에 지나지 않았다.
세이라는 가볍게 긍정했고, 수정구의 건너편은 이에 응답하여 말했다.
“그렇다면 내 조만간 파이오니어 왕국에 연락을 넣어 가리라. 그 때까지 그릇의 행동을 제어하도록 하라.”
“예.”
자신에게 매혹 마법이 걸려있는 건 꿈에도 모르는 세이라였다.
그녀는 수정구 너머의 목소리, 제국의 3황자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또 조아렸다.
***
성취 테스트에 대한 소문은 얼마 후 마탑 밖까지 퍼졌다.
엘리아는 3클래스의 경지에 오름으로서 탑주의 자격에 맞는 사람임을 증명했다.
“전대 탑주의 손녀라...호랑이 밑에서 개가 나오지 않는다더니 ,과연.”
“국왕폐하의 안목이 의외로 딱 들어맞은 모양이군요.”
고개를 끄덕이던 귀족들의 눈을 번득 뜨이게 한 건 그 다음 소식이었다.
“그리고 탑주의 제자인 발린은 청출어람이란 말에 걸맞게 5클래스의 마법을 당당히 사용해 보였다고 합니다.”
“그 친구, 아직 열다섯밖에 안 된 사람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 정도의 성취라니, 이거 우리 왕국에서 전무후무한 대마법사가 탄생하겠구만.”
눈을 빛내던 귀족들, 그러나 그들은 얼마 후 탄식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이미 발린은 마탑에 등록된 몸, 함부로 건드리기에는 추후 이어질 마탑의 보복이 두려웠다.
어차피 두고 부릴 수 없다고 판단한 이상, 아무리 발린이 엄청난 업적을 이뤄도 그저 그림의 떡일 뿐.
대신 귀족들은 그의 가족에 대한 정보를 찾았다.
혹여라도 나중을 대비해 미리 잘 보여 두려는 전략.
덕분에 솔다인 영지는 때아닌 귀족들의 방문으로 몸살을 앓았다.
이에 대한 불평이 낱낱이 적힌 종이 한 장. 발린은 피식 웃으며 그것을 접었다.
“기분 좋으신가 봐요?”
방을 정리하던 엘리아가 눈을 빛내며 물어왔다. 발린은 짧게 대답하며 종이를 집어넣었다.
“그냥, 뭐. 그렇지. 너는 어때?”
“저야 덕분에 늘상 좋죠. 조금 힘들긴 해도.”
요사이 엘리아의 안색은 구겨질 줄 몰랐다.
성취 테스트가 끝난 후, 발린과 엘리아는 마법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탑의 중진 마법사들은 이 놀라운 성취 앞에서 그저 감탄사만을 토했다.
비록 클리든의 눈빛이 무서워 수그렸다고는 하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의 흐름이 서서히 이 쪽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그들을 무시하고 비웃던 수습 마법사들은 이제 발린과 엘리아를 따라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실제적인 성과가 보이니 순식간에 180도 달라지는 태도.
개중 몇몇은 탑주실 문을 두드리며 발린의 가르침을 청하기도 했다.
“일전에 몰라봤던 건 정말 죄송합니다. 부디 그렇게 클래스를 올릴 수 있었던 비법을 저희에게도...!”
“탑주님 제자라고 깔본 것,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하지만 발린은 그들 대부분을 매몰차게 쫓아냈다.
무턱대고 제자를 받아 가르치는 건 전생에서의 이야기.
이제는 철저히 검증하고 검증하여, 절대적으로 충성만을 바칠 제자들만을 고르려는 의도다.
당장 저들만 해도 직접 눈으로 본 다음에야 찾아오지 않았는가.
더 이상 그런 자들을 위해 마법의 문을 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오늘도 그런 마법사들을 쫓아내고 쉬던 도중 받은 게 이 편지.
짜증 가득하던 마음이 모처럼 정화되는 시간이었다.
“가족분이 보내신 편지예요?”
“여동생.”
발린은 짤막하게 답하며 솔다인 영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오크 토벌군에 이은 귀족들의 연이은 방문으로 다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고 했다.
그 정도로 이목이 쏠렸다면 슬슬 그들의 안전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언제 귀족들 사이에 숨은 마왕군이 가족에게도 손을 뻗칠지 몰랐으니까.
‘좋은 호위가 있으면 좋을 텐데.’
못내 드는 아쉬움에 혀를 차던 발린은 탁상 위에 놓여있던 레드 에이어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지팡이의 두 조각이 빛을 내며 공중으로 떠오르고, 갈라진 부분 사이로 빛이 회로를 만든다.
몇 번 그걸 만지작거리던 발린은 이내 지끈거려오는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성을 토해냈다.
아티팩트는 만드는 것보다 고치는 게 훨씬 어렵다.
B급 아티팩트만 되어도 대마법사 여럿이 눈에 불을 켜고 일 년 이상을 보내야 수리가 가능한 정도.
하물며 그게 A급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하는 레드 에이어라면 그 기간은 얼마나 될는지.
아무리 발린이더라도 복잡한 마도 회로를 모조리 외우는 건 불가능했다.
“끄으응, 젠장.”
다른 사람이 없어 직접 한다고는 하지만, 사실 발린은 아티팩트 제작에 그다지 재능이 없었다.
잘 싸우는 사람이 무기를 잘 만드는 게 아닌 것과 마찬가지.
그 덕에 발린은 처음의 다짐이 무색하게 끙끙대고 있었다.
“이렇게 느려지면 곤란한데, 생각지도 못한 데서 장애물을 만났군.”
사실 레드 에이어는 전생에서 딱히 필요가 없었던 물건이었다.
그 때는 마왕군의 위협도 없었고, 최대한 빨리 마탑을 접수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여러모로 전생과는 달라진 걸 체감하던 발린은 한 번 더 몰려오는 두통에 고개를 숙였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머리통증이었다. 옛생각에 잠길 만도 했지만, 지금 그러기엔 너무 몸이 지쳤다.
“어쩔 수 없지. 천천히 하는 수밖에.”
성취 테스트를 통해 크게 한 방 먹였으니, 저 쪽도 바로 공격해 오지는 못 할 것이다.
그렇게 번 시간이 꽤 될 테니, 그 동안 천천히 복구하면 된다.
발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침대를 향해 움직였다. 그 과정을 전부 지켜보던 엘리아가 작업대로 다가갔다.
“저 이거 한 번 써 봐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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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