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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우는 어둠의 손길
다음 날, 발린은 남작성에 들어가자마자 솔다인 남작을 찾아 말을 꺼냈다.
"검술을 수련하는 시간을 조금 줄이려고 합니다. 여러모로 제게는 조금 벅차더군요. 힘들기도 하고, 집안 사정도 그렇고."
“시간을 줄이겠다고? 그럴 수가...뭣 때문인가? 자네에겐 소질이 충분히 보여! 이대로만 정진한다면 익스퍼트 상급 정도는 능히...”
남작은 연달아 혀를 차며 생각을 고치길 권유했다. 하지만 발린의 마음은 이미 단단히 굳어져 있었다.
더 이상 검에 시간을 쏟다간 정말 시기를 놓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왕군의 침노, 3년 후 그 서막을 열 공세가 시작되는 걸 아는 이상 다른 데 눈을 돌릴 순 없었다.
몇 번이고 설득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발린. 그 진중함엔 결국 남작도 고개를 저었다.
“정 원치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혹여라도 나중에 각오가 된다면 말만 하게나. 기다리고 있겠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들르고, 기초 수련은 게을리하지 말게나!”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미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솔다인 남작은 몇 번이고 혀를 찼다. 그 안엔 노력이나 의지가 아직 부족하다는 투덜거림도 가끔 섞여 있었다.
기사가 되기 위한 고된 수련을 견뎌낼 각오. 발린에게는 아직 그것이 부족했기에 지금 이러는 것이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미안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구.’
귀족, 혹은 그에 준하는 사람이 되는 건 당연히 거쳐야 할 수순이다. 허나 그 길을 오르는 건 검이 아니라 마법으로써다.
"후우.”
밖으로 걸어나온 발린은 지체없이 숲 속으로 향했다.
솔다인 남작의 의도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조만간 상급 기사라도 초빙해서 본격적으로 가르치려 했겠지.
그렇게 하여 제대로 된 기사로 육성시키면 그것은 고스란히 남작령의 전력이 된다. 솔다인 남작의 입장에서는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오는 셈이다.
속이 빤히 보이지만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다. 아무것도 없는 평민에서 신분 상승의 계기가 되니 말이다.
물론, 발린의 경우에는 완전히 경우가 달랐지만 말이다.
“ 오랜만이군. ”
마나 스팟에 도착한 발린은 그대로 자세를 잡았다. 충만한 마나가 그의 몸으로 들어와 형태를 만든다.
그것을 어떻게 운용하느냐는 본인의 자유.
검술로 단련된 몸은 지칠 줄 모르고 계속 마나를 빨아들였다.
제 길을 찾아 움직이며 서클들 사이를 자극하는 마나. 한참을 그렇게 있던 발린은 의외의 사실에 놀랐다.
‘ 이렇게 오래 마나를 흡입하는 게 가능했어? ’
집중력과는 별개로 마나 흡입은 상당한 체력을 필요로 한다.
온 몸의 근육을 자극시키는 행동이니만큼 어쩔 수 없는 일.
그렇기에 지금까지는 발린도 수행 도중 여러 번 휴식을 취해 왔었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그런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검술로 단련된 몸이 굳건히 정신을 받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효과가 있었군! 앞으로는 제자들에게 검술도 같이 가르쳐야겠어! ’
깨달음을 얻은 발린은 잔잔하게 놀라며 더욱 빠른 속도로 마나를 들이마셨다.
그동안 마법사들은 마법에만 집중했지, 육체의 힘을 키우는 덴 아무런 투자를 하지 않았다.
효율상의 문제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뿌리깊은 관념이 그 원인이었다.
‘ 마법사가 무예를 단련해서 어디다 써? 캐스팅을 할 시간도 없어! ’
‘ 어딜 봐도 비효율적이야! 암살자를 직접 막느니 차라리 기사들을 더 붙이고, 그 사이 강한 마법을 쓰는 게 낫지. ’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가장 많이 주장한 건 바로 전생의 발린 본인이었다.
스스로 이룬 경지가 워낙 높기에 마법만으로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직접 키워 온 제자들 모두가 그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다.
그렇기에 의심조차 품지 못한 마법사 수련법.
만약 회귀로 얻은 새 삶이 아니었다면.
검술 수련에 이런 효능이 있단 건 절대로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 ...그렇군. ’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수많은 깨달음.
그것들을 얻었으니만큼. 이번엔 전과는 확실히 다를 것이다.
그것이 육체적인 부분이 되었건, 정신적인 부분이 되었건 마찬가지였다.
발린은 저녁까지 한 번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마나를 흡수했다.
“ 후우. ”
검술 덕분에 얻은 이점까지 합하니 대단한 성과가 나왔다. 마나를 다루는 면에 있어서 한층 더 발전이 보인 것은 물론, 마나 서클들도 보다 탄탄해졌다.
전생에서도 이 정도의 성장세는 보인 적이 없었는데, 이대로만 가면 얼마나 빠른 성장을 이룰지 본인조차도 예상하기 어려웠다.
“ 좋아, 내일도 이렇게 마법과 검술 수련을 병행하자. ”
발린의 머릿속에선 이미 제자들을 육성할 계획표가 완성되고 있었다.
이건 자신뿐만 아니라, 그 뒤를 이을 제자들에게도 두고두고 도움이 될 발견이었다.
문무 양쪽에 재능이 보이는 자신과는 달리 평범한 제자들이니만큼, 고급 무예를 수련하는 건 어려운 일.
그러나 체력 단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기본적인 이득.
그것만 얻게 하여도 동년배의 마법사들과 큰 차이를 보일 것이다.
‘그들의 힘이 더해지면 마왕군을 조금 더 수월하게 막을 수 있겠지. 더불어 그 다음에도 큰 활약을 펼칠 테고 말이야.’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건만, 발린은 분홍빛 상상을 하며 키득거렸다.
그렇게 마을에 거의 다 다다랐을 즈음, 넓게 뻗은 마나 사이로 무언가 이상한 게 느껴졌다.
주변을 자연스레 흐르는 마나와는 달리 이질적이기 그지없는 힘의 흐름.
허나 발린에게 있어선 더없이 익숙한 기운이었다.
보기만 해도 화가 치밀어오르고. 냄새를 맡으면 속이 뒤집히는 불구대천지 원수들의 기운.
‘설마, 설마! 드디어 이번 생에서도 놈들을 만나는구나!! ’
강렬한 어둠의 마나. 일반인은 보기만 해도 등골에 소름이 돋는 막강한 힘.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전생에서부터 그것과 싸워온 대현자의 감각을 피할 수는 없다.
하물며 지금 상대는 그 힘을 대놓고 마을에 뿌리고 있는 중이다.
보란 듯이 하는 도발, 그 메시지를 읽지 못한다면 바보 천치가 따로 없었다.
‘오냐, 어서 오너라! 마왕군 놈들아!’
전생의 생사대적이자 국가를 가리지 않고 뭉친 인류 연합의 주적.
부활한 마왕의 휘하에서 한껏 군세를 펼치던 악마들.
그 놈들의 수하가 지금 솔다인 남작령 아래의 마을에 있었다.
발린은 집으로 내려가던 걸음을 직각으로 틀어 마을로 향했다.
가끔 마주친 사람들이 인사를 건넸다. 표정을 굳힌 발린은 그들을 무시하고 지나쳤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으나, 발린은 개의치 않고 걸어갔다.
‘분명 놈은 이 마을 안에 있어! 어디냐! 이 자식! ’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기세는 더욱 커져만 갔다.
올 테면 오라는 듯, 미끼를 드리운 낚시꾼처럼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 잡히는 건 내가 아니야. 너다! ’
마을 안으로 들어오자 어둠의 마나가 코끝으로 닥쳐왔다.
순간 발린은 그 너머의 누군가가 움찔하는 걸 느꼈다.
저 쪽이 자신을 감지했다. 애초에 물러설 생각 따윈 없었지만 이젠 정말 돌이킬 수 없었다.
마을 전체를 덮고, 그 바깥까지 어둠의 마나를 퍼뜨릴 만한 강자!
이 정도라면 마왕군 내부에서도 상당히 높은 위치다.
마수걸이로는 나쁘지 않은 상대였다.
마을 중심으로 나온 발린의 시선이 한구석에 앉아있던 후드의 남자에게로 향했다.
짧게 깎은 머리와 호리호리한 몸.
전체적으로 샤프한 얼굴상에 또렷한 눈동자.
외형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미청년, 어둠의 마나는 그의 몸에서 뿜어져나오고 있었다.
앞에 마을 아이들을 모아놓고 있던 남자가 일어섰다.
발린은 눈매를 굳히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저, 저기 있어요.”
“저 애가 발린이란 녀석이 맞단 말이지. 이거 고맙구나. 덕분에 일이 쉬워졌어.”
마침 들려오는 마을 아이들의 목소리.
보아하니 저 쪽도 자신을 찾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한순간 발린의 마음 속에 의문 한 가지가 생겼다.
분명 자신은 소문이 나지 않게 최선을 다했다.
루퍼스와 그 부하들에게도 발설하면 죽인다는 엄포와 함께 마법으로 속임수까지 보여준 상태.
그런 철저한 관리 덕에 자신이 전생의 지식을 가지고 돌아온 자라는 건 가족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마왕군이 벌써 자신을 찾아오다니.
무언가 수단이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네가 발린이구나. 응? 소문을 듣고 왔는데. 맞지? ”
마을 아이들을 돌려보낸 청년의 물음.
발린은 기죽지 않고 청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 그렇습니다만, 당신은 누구죠? ”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를 드러내도 시원찮을 마왕군의 수하.
지금까지 참고 있는 것은 주변인의 시선 때문이었다.
“ 내 이름은 빌리 통스. 저기, 라돈 시 살고 있는 마법사란다”
대답하던 카스트로의 눈이 천천히 발린의 온 몸을 훑었다.
몇 번을 훑어봐도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마을 꼬마.
노스트라 제국놈에게서 나는 특유의 흡혈귀 냄새도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순수한 인간이라는 말이다.
열다섯도 안 될 나이에 스무 명 가량의 인간을 마법만으로 이기는 인간이 있다.
실제로 보지 않으면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자넬 찾은 건 얼마 전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어서인데...여긴 보는 눈이 좀 많군.”
“ 누구신진 모르겠지만, 잘못 찾아오신 겁니다. ”
말을 마치자마자 미련없이 몸을 돌리는 발린. 등 뒤에서 찬바람이 쌩쌩 불 것만 같은 태도이다.
방금 전까지 복수심을 불태우던 것과는 전혀 딴판인 모습이었다.
후드를 쓰고 있던 남자, 카스트로는 이에 쩝 소리를 냈다.
저 녀석은 흡혈귀가 아니라 진짜 사람이다. 그 말인즉슨 저 소년을 키운 세력이 있다는 말.
그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저 정도의 천재를 키워낸 곳이라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 그들의 위험도는 급상승한다.
초장에 없애두지 않는다면 차후 마왕군의 가장 큰 적이 될 터.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발린에게서 그 세력의 정보를 캐내야 했다.
천천히 마을을 빠져나가 숲으로 가는 발린, 그 뒤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은밀히 붙었다. 동시에 발린의 입술 사이로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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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봐주시면 좋겠네요. 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