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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 돌아오다.
수풀 사이로 나타나는 발린에게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순식간에 펼쳐지는 시야 너머로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름기가 좌르르 낀 것 같은 어조. 태생부터 타고 난 오만함. 틀림없는 루퍼스의 목소리였다.
“얼씨구? 우리 발린, 내가 그렇게 찾을 때는 없더니만, 이제 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고 나오는구나?”
동시에 양옆으로 퍼진 무리 사이에서 루퍼스가 건들대며 걸어나왔다.
귀족의 자제답게 한눈에 봐도 귀티가 번지르르하게 묻어 나온다. 놀랍게도 귀염상이라고는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모습은 분명 전생에서 보아왔던 썩어빠진 귀족들의 어린 시절. 그것을 판에 갖다 박은 듯한 모습이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첫인상부터가 짜증나니 말이 곱게 나갈 리 없다. 말끝을 올려붙이는 발린에게 루퍼스는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이 녀석이 감히!? 네가 기억을 못하면 내가 친히 알려주마!”
아직 어린아이라서 그런지 먼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술술 자초지종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발린은 속으로 피식피식 웃으며 루퍼스의 말을 경청했다.
사건의 발단은 전날 루퍼스가 세운 계획에서 비롯됐다.
검술 수업을 빼먹기 위해 핑계가 필요했던 그는 발린에게 점심 전까지 와서 도움을 요청하기.
짜증나는 검술 수업을 빼먹기 위한 제 나름의 비책이었다.
그런데 막상 오기로 했던 발린이 감감무소식으로 오지 않은 것이다.
빠질 핑곗거리가 없어진 루퍼스는 하는 수 없이 검술 수업을 끝까지 들었다.
이후의 일정이 몽땅 박살난 건 물론, 딴생각을 하느라 폼이 안 좋다고 꾸중까지 실컷 들어야 했고 말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루퍼스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자길 따르던 왈패들을 불러모아 발린의 집으로 향했다.
“으음.”
정황을 들은 발린은 짧은 신음성을 냈다. 말만 들으면 약속을 어긴 자신이 잘못한 게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부 내 탓이오 하고 사과하기도 뭣했다.
우선약속을 한 것은 산골 소년 발린이지, 대현자 발린이 아니었다.
게다가 저들이 손에 든 연장들, 하나같이 잘못 휘두르면 사람도 죽일 수 있는 것들이다.
여기서 우연히 마주치지 않았다면 저걸 들고 집까지 가서 사단을 벌였을 터.
건방져도 여간 건방진 녀석들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지? 무영창이 있으니 이런 녀석들이야 1클래스 마법만으로도 간단히 요리할 수 있는데.’
마법을 쓰겠다는 생각만으로 실제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건 엄청나게 큰 이점이었다.
마나가 있는 한 끝도 없이 나오는 매직 미사일.
저 녀석들을 혼쭐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잠깐 망설이던 발린은 이내 제 뜻을 굽혔다. 자신이 회귀자라는 건 가족에게도 숨겨야 할 비밀이다.
그런 걸 고작 이런 녀석들 때문에 퍼뜨릴 수는 없었다.
발린은 이성이 시키는 대로 즉각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죄송합니다. 루퍼스 님.”
“...하?"
선선히 튀어나온 사과에 루퍼스의 얼굴 살집이 꿈틀거렸다.
그가 아는 발린은 수십 대를 얻어맞아도 굽신거리지 않는 괴상한 꼬맹이었다.
지금껏 계속해서 이런저런 일로 괴롭힌 것도, 자신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그 태도가 불쾌했기 때문.
그런데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오니 오히려 이 쪽이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발린은 루퍼스의 모습에 개의치 않고 싹싹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동안 제 언행이 건방졌던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 없도록 충심을 다해 섬기겠습니다.”
“흐응. 믿어도 되는 거냐?”
“자비로운 아량으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절대 후회하실 일 없으실 겁니다. 믿어주십시오.”
그동안 대현자로서 지내오며 생긴 언변이 빛을 발했다.
왕들을 상대해오던 발린이다. 이런 애들 다루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순식간에 루퍼스를 구워삶는 도중, 옆에 있던 왈패 하나가 느글느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루퍼스 님, 이 녀석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한 번 믿어주자고?”
“그, 그럴까?”
마음이 동했는지 고개를 돌리는 루퍼스, 그러나 발린은 왈패의 말 속에 숨은 가시를 눈치챘다.
“그 대신 얘네 동생 있잖아. 한 번 더 이러면 얘뿐만이 아니라 동생이 대신 받는 걸로 말이야.”
“이야, 너 오랜만에 머리 좀 굴렸다?”
“크큭, 어? 이 녀석 갑자기 뭐 하냐? 야. 얼굴 펴. 얌마! 루퍼스 님 앞인데 어딜 감히...안 그래? 루퍼스 님. 이 녀석 애시당초 싹수가 글러먹은 놈인데, 제 피붙이라도 걸어 줘야 좀 말을 듣는 척이나마 하겠지.”
말을 마친 왈패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어제꼈다. 그 사이에 낀 루퍼스만이 눈을 굴리며 발린의 반응을 살필 뿐.
어쩔 줄 몰라하는 그의 등 뒤로 왈패 한 명이 손을 갖다댔다. 순간 루퍼스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 그래. 그 정도는 해 줘야 니 녀석이 말을 좀 듣겠지. 안 그래? 설마 한 배에서 태어난 가족이 걸려 있는데 농땡이피울 린 없을..테니!”
말을 끝낸 루퍼스는 일부러 세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주변에 있던 왈패들도 같이 따라 웃었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요구수준이지만, 발린이 거절해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어차피 힘과 지위 둘 다 이 편에 있으니, 무슨 짓을 하든 소용없었다. 그렇게 확신한 왈패들의 조롱이 거세졌다.
허나 발린은 주먹을 휘두르지도 엎드리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멍한 표정으로 루퍼스와 왈패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 ..... ”
“ 뭐, 뭐야! 그 표정은! ”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낀 왈패 한 명이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입을 연 건 그 한 명 뿐, 나머지 모두는 알 수 없는 불길함에 몸을 떨었다.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든 느낌.
인간이라면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공포가 꿈틀댄 것이다.
“...그렇군.”
한참만에 발린의 입이 열렸다.
왈패들의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일어난 거대한 분노, 그것은 아무리 마법사의 이성으로 내리누르려 해도 꺼지지 않았다.
분노야 많이 느껴봤다지만 이런 깊은 분노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다.
저들이 자신의 가족이라고는 해도 그것은 회귀 전에 살던 발린의 이야기.
지금 자신은 마왕군을 막기 위해 과거로 돌아온 대현자일 뿐.
다른 어떠한 관계도 아니니, 그저 가족인 척만 해 주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이 분노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자기가 잘못 생각한 모양이었다.
모든 것을 초월했다고 생각했건만, 지금 그는 분노 따위에 사로잡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분노는 마법사의 분노.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뜨거운 불같은 분노가 아니라, 차디차고 날카로운 얼음을 닮은 분노였다.
***
전생에서 분노는 마법의 극의를 위해 털어내야 할 감정 중 하나였다.
계산식에 감정의 변화가 개입하면 마법이 망가지는 건 한순간이다. 고위 마법에 있어 그런 트러블은 치명적이었다.
감정을 버린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은 마도의 진리를 탐구하는 대현자.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엔 세상이 너무나도 많은 것을 그에게 강요했다.
현자의 위엄과 마왕군에 맞서는 마법사로서의 힘. 둘 모두를 가지려면 다른 걸 가질 수 없었던 전생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입장이 달랐다. 감정을 버리고 움직인 전생, 성취를 이룰 순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실패했다.
이번에는 그 때와 다르게 움직여야 한다. 공정함과 자비를 버리고,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
저들보다 더 이기적이어야만이 세상을 지킬 수 있다. 이것은 그 행보의 시작이었다.
"죄송합니다. 루퍼스 님! 정말 열심히 할 테니 한번만 믿어주십시오. 가족만은 부디...“
겉으로는 아까 전과 다를 바 없는 사과, 그러나 왠지 모를 위화감이 있었다.
그 이유를 한참 생각하던 루퍼스가 순간 눈을 빛냈다.
오랜 생각 끝에 드디어 발린이 어째서 저러는지 촉이 온 것이다.
그가 내린 결론이란 이랬다.
‘오옳지, 발린 이 녀석도 제 아버지랑 여동생만 건드려주면 별수없군 그래?'
가족에게 해가 가니 더 이상 세상만사에 무관심할 수 없게 됐구나!
이렇게 생각한 루퍼스는 드디어 발린의 약점을 발견했다며 남몰래 쾌재를 불렀다.
물론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나, 그게 아니고서야 지금 보이는 저 비굴한 모습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루퍼스가 확신을 가진 순간, 발린이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끌끌, 제가 못나서 그런 것이니 이번만은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약속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
더없이 정중한 사과, 늙은이 말투가 조금 묻어 있는 걸 빼면 완벽하기 짝이 없었다.
누가 갑의 위치에 있는지 확인한 루퍼스가 불안감을 진정시키며 외쳤다.
"제길, 이대로는 못 받아줘! 너 때문에 이 루퍼스님의 귀한 하루 일정이 말짱 다 엎어졌단 말이다! 귀족의 시간은 너 따위 평민의 시간이랑 값어치가 다른 거 몰라?"
“그럼 어떻게...?"
"그야 내 시간을 충당하는 보상을 해 주거나, 그만큼 네 녀석이 몸으로 굴러 줘야지. “
루퍼스가 득의양양하게 소리쳤다.
이번에 발린 녀석의 약점을 알아냈으니, 그것으로 계속해서 괴롭히려는 심산이었다.
발린은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감춘 채로 혀를 찼다.
지방 영주의 외동아들이기에 되도록 건들지 않으려 했건만, 이건 해도해도 도가 지나쳤다.
게다가 양옆의 부하들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듯한 미숙함까지.
저 녀석만 제압한다고 한들 그 부하 왈패들이 아버지와 밀리아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적당히 곯려 주기만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치근덕댈 줄이야. 아무래도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처리해야겠군.’
만약 이대로 넘어간다면 계속해서 자신과 가족에게 추근덕댈 게 틀림없다.
그건 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대현자로서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화가 나는 건 둘째치고, 장차 걸을 행보에도 큰 방해가 될 터.
더 이상 수작질을 부리기 전에 깨끗이 입을 다물게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 때가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기왕 행한다면 일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온 힘을 기울여야 했다.
준비할 게 많아지겠군. 남몰래 웃은 발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 담보로 이건 어떠신지요?"
"담보? 뭔데?"
"예. 담보입니다. "
발린은 심호흡을 한 뒤 말을 이었다.
“자세한 건 저희들끼리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이건 어디까지나 저와 루퍼스 님 간의 일.”
잠시 말을 멈춘 발린은 사방을 둘러싼 왈패들에게 흘긋 시선을 주었다.
이죽거리는 표정을 볼 때마다 금방이라도 사단을 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대현자의 이성이 아직 때가 아니라는 걸 일깨웠다.
“루퍼스 님, 잠시 둘만 있게 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둘만 있게? 흠, 뭐 좋아.”
루퍼스는 잠깐 생각하더니 양옆을 흘긋 보았다. 왈패들은 그 때마다 짐짓 싱글싱글 웃으며 태연한 척을 해 보였다.
절로 땀이 솟구치는 루퍼스의 이마, 그걸 지켜보던 발린은 침착하게 새 무게추를 얹었다.
“나중에 남작님이 되실 분께서 남의 눈치를 보시는 건 아니시겠죠? 뜻대로 결정하십시오.”
“크읏! 좋아, 어디 네 녀석의 담보인지 뭔지 들어보도록 하지. 야! 니네들은 여기서 기다려.”
“기다...려?”
예상한 것과는 다른 말이 나왔는지 왈패들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그러나 루퍼스는 의견을 바꾸지 않았다. 남작가의 권력에 대항하기 뭣했는지, 왈패들은 발린에게만 눈을 부라리며 슬쩍 물러났다.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는 사이, 발린은 누구도 모르게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