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동쪽 끝에서 실크로드로 (2)
김인문이 막상 내가 가장 듣고자 하는 말을 꺼냈지만, 사람의 말이란 언제 또 바뀔지 모르는 것이기에 우선 그것의 진의부터 따져 보아야 했다.
“신라의 태자가 신라의 사직을 바치겠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지금 알고서 말하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김문영 장군에게 듣기로, 막리지께서는 이미 삼한을 평정하였다 태왕 폐하께 고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작금의 신라란 무엇입니까? 이미 고구려와 합한 부속국이 아닙니까?”
김문영과 벌써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면 김인문은 내가 정한 신라의 운명을 이미 알고 있을 심산이 높았다.
내 뜻을 알았다면 차기 신라의 지존이 될 김인문의 선택지는 최대 두 가지로 나뉜다.
천하통일을 천명한 고구려에 대항해 싸우느냐, 아니면 항복하여 사직을 내려놓느냐.
김인문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다시 움직였다.
“이곳에 유학 온 신라의 사대부들은 또 어떻습니까? 저마다 같은 말을 구사하는 자랑스러운 겨레가 중원을 도모하였다 입을 모아 칭찬하며 자신들을 신라인이라 여기기보다 삼한인 혹은 고구려인으로 불림을 받길 원하옵니다. 하물며 이 중원에서 막리지의 대업을 몸소 지켜본 저는 어떻겠습니까? 수많은 민족이 고구려에 복속한 지가 오래이며 신라의 사직은 더는 보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저도 압니다.”
대당 원정에서 나를 따라 중원에 머물며 한동안 고심이 많아 보인 김인문은 지금 내게 후자로 결론을 내렸다 주장하고 있었다.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으나 중국과 삼한을 오가며 많은 고민을 한 신라의 왕자. 그러한 역사에서 다른 생각들이 더해진 것이 작금의 김춘추의 둘째 아들일 것이다. 만일 지금의 말이 진심이라면 김인문은 어려운 결정을 한 것이 맞았다.
‘김인문이 여기까지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아선 현재 김춘추의 상태도 이해가 가는군.’
어떻게든 신라의 중흥을 이루고자 두 자식의 볼모도 감수한 김춘추라지만 막상 당나라가 유명무실한 나라가 되자 영영 희망이 사라졌다 여겼을 것이다.
그저 삼한의 지배자 정도였던 고구려가 당나라를 먹어 버렸으니 현상 유지조차 쉽지 않아진 김춘추로서는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을 테지.
잠시 차를 나누며 차후 신라인들에 대한 미래를 김인문과 논했다.
“처남이 그리 결심한 가장 연유가 신라인에게 중원 땅을 상속하고 싶어서라고요?”
내가 본심을 듣고 되묻자 김인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에. 이 넓은 세상에 나와 보고서야 깨달은 것이 많습니다. 대운하이고 비단길이고, 언제나 서라벌 상인들의 입으로만 들었던 역사적인 과업을 보았고 또 정치, 경제, 문화를 이어 준 옛 문물이 들어오는 무역로를 직접 두 눈으로 보게 되었으니까요. 서주나 제가 잠시 머무른 허창에도 서역에서 온 상인이 제법 많았습니다. 진귀한 품목 하며 마치 서라벌 고향에서 로마에서 왔다는 유리병을 처음 본 것 같았습니다.”
로만글라스라, 로마제국의 흔적이 고신라고분에서 출토된 것은 역시 우연이 아니었다. 한나라 시대 이전부터 운행된 실크로드의 영향이 대륙의 동쪽 끝 신라에까지 이르렀다는 의미일 테니까.
“진한, 변한에서 수장을 간, 거서간이라고 불렀다지요. 육상으로는 북방 민족과 교류하고 해상으로는 서남쪽의 아유타국과도 교류하였을 것이고요.”
나도 적당히 아는 역사 지식을 거론하자 김인문이 감탄했다.
“역시 잘 알고 계시군요! 아유타국이라면 김수로왕과 허씨의 시조인 허왕후의 이야기에서 나오지요.”
육상으로는 로마의 문물이 동쪽 끝 신라에 이르렀다면, 바다로는 서남 인도의 아요디아와 남인도의 문물이 한반도에 도입되었다.
김해에서 출토되는 유리는 인도에서 온 것이며, 즉 이미 현대를 기준으로 2천 년 전 육상과 바다의 실크로드를 통해 수만 리 길이 서로 왕래하고 있던 것이다.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이야기라면 나도 아는 것이 있었다. 본명은 허경옥으로 김수로왕과 혼인한 인도의 공주.
‘허경옥으로 인하여 대한민국 경상남도 김해시와 인도 아요디아시와 자매결연을 하였다던가. 실제 인도 사람들의 언어 중 하나에서 한국어와 똑같은 의미와 발음으로 ‘아빠’, ‘엄마’라고 부르는 것도 그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겠군.’
지금도 놀라운 일이지만 장안을 방문한 인도 상인들의 대화를 들어 보면 이따금 고개가 절로 돌아갈 때가 있다.
-지금 들었어?
-어어, 저 서역에서 온 외국인이 우리말을 하는데?
그리고 그것은 나와 같이 그들의 말을 들은 고구려 사람과 삼한인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내가 있는 이 시기로부터도 최소 6백 년 전부터 로마는 물론 남아시아, 동남아시아와 교류하고 있던 한반도였다. 동남아의 흑치국까지 뻗은 백제의 해상 담로가 세워지는 것도 무리인 시대가 아니었다.
-소장은 흑치국에서 난 이 이름을 만천하에 널리 알리고자 합니다.
삼기군을 따라 삼한군을 이끌고 실크로드로 향한 흑치상지는 자신만의 사명을 가슴에 새기며 출전했다.
북방, 로마, 인도, 필리핀, 중원, 관중을 아우르는 넓은 세계를 나와 함께 경험한 이들은 하나같이 역사를 뛰어넘는 무언가로 변화하고 있었다.
잠시 옛 역사와 변화하는 이 시대 역사를 상고하며 진지한 표정을 지을 무렵, 내 모습을 보고 어딘가 착각한 김인문이 급히 입을 열었다.
“저는 언제고 신라의 왕이 될 겁니다. 한데 신라의 백성들이 신라가 아니라 삼한이나 고구려의 백성으로 불리길 원한다면 제가 왕이 되는 일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하여 제가 보위에 오르면 막리지께 이 한 몸 의탁하고자 합니다. 제가 오늘 거짓을 말하고 있거든 대군을 보내어 신라를 치십시오.”
김인문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리 말했다.
나는 씩 웃으며 동의의 의미로 김인문의 어깨를 토닥였다.
과연 내가 미리 점찍었던 동방의 인재였다.
* * *
김인문이 등주 항구를 통해 김춘추를 보고자 삼한으로 건너간 사이 장안에는 서쪽에서부터 낭보가 전해졌다.
“서쪽 돌궐의 가한 아사나하로의 수급이옵니다!”
“원정군은 서쪽 돌궐을 따르는 부족들을 계속해서 토벌 중에 있으며 조만간 치안이 안정되는 대로 다시 보고를 드리겠다 합니다.”
토벌군이 장안을 떠난 지 수 주 만에 사발라가한의 수급과 서돌궐의 멸망 소식이 장안 대명궁에 이르렀다.
“……!”
“……!”
“……!”
이미 소정방의 손에 반쯤 박살 난 유목민족을 무너뜨린 셈이었지만 줄곧 당쟁만 벌이며 내 눈치를 덜 보고자 한 이음과 이도종를 따르는 당나라 무리들은 장안 조정 안에서 상당히 충격을 먹은 표정들을 지었다.
여태 모른 체했겠지만 삼한을 일통하고 중원을 지배하며 서쪽을 평정한 내 이름 석 자가 그들 머리에 제대로 각인된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여태 마음껏 당쟁을 일삼으며 서로를 대적하고 내 눈치를 안 보려고 한 행태에 넘어갔던 이유는 서돌궐을 멸하고 외교와 당근책으로 주변 이민족들을 복속시킨 뒤에 확실한 힘의 논리로 고구려가 중원을 통치하고 있음을 인식시키고자 함이었다.
그 의도대로 돌궐이나 토번과 같은 강력한 이민족들과의 문제가 나와 고구려로 말미암아 말끔히 해소되자 평소보다 더 조심스러워진 대명궁 조정 분위기였다.
“차, 참으로 감축드리오! 이거 막리지와 우리 연합군을 위해 연회라도 성대히 열어야겠소.”
“그러시지요! 막리지. 아사나하로는 감히 우리와의 신의를 끊고 배반한 오랑캐 수령입니다. 그런 오랑캐 무리들을 소탕하였으니 오늘 밤 축하연이라도 열어야 할 겁니다.”
종일 서로 으르렁대기만 하던 이음과 이도종은 어전에서 처음으로 나를 향하여 입을 맞추었다. 그들 권력의 생사가 내 손아귀에 달려 있음을 본능적으로 눈치챈 것이다.
“이제 아무런 방해 없이 비단길 교역에 크게 활로가 열리겠습니다.”
“백성의 활로를 개척하신 막리지께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하고자 합니다.”
허경종과 얼마 전 복귀한 저수량도 이 순간만큼은 서로 논쟁을 삼가고 비단길 무역로 확보에 찬사를 보냈다. 저들이 함께 기뻐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했다.
이 시대 중국의 권력자들답게 비단길에서 얻은 사치품들의 가장 큰 혜택을 받은 자들이 황족 다음으로 관롱 집단일 테니까.
“진귀한 물건들 가운데 품질 좋은 것만 골라 막리지께 먼저 바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흐흐.”
특히나 허경종은 재물을 탐하는 노인네답게 입이 찢어져라 웃고만 있었다.
부귀영화를 위해서라면 나라도 기꺼이 팔아먹을 간신배 영감. 저런 자가 이 조정에 남아 있는 한 고구려를 넘볼 중국 왕조란 다시는 부활하지 못할 것이다.
* * *
“내 아들 녀석들이 중원을 잘 다스리고 있는지나 모르겠군.”
“막리지께서 어련히 잘하시지 않겠습니까? 당나라의 관롱 귀족들마저 꽉 잡고 계십니다. 후후.”
자신 있게 말하는 선도해의 대답에도 연개소문은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막내아들이 평양과 인접한 삼한을 통치할 때도 멀다고 여긴 연개소문이었으나 이제는 그보다 수천 리 길에 떨어진 아들들의 소식을 들으려면 한 주는 목이 빠져라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가 기상이 악화되는 날에는 보름 넘게 기다려야 할 때도 있었다.
“남생이와 남건이도 서국의 수천 리 일대를 다스리고 있거늘 너무 막내 놈만 편애해 말하는 게 아닌가?”
“이미 소식을 전해 들으시지 않으셨나이까. 당 권력의 핵심부와 관롱 집단, 화폐, 군사, 대운하, 비단길, 교역로를 모두 쥔 막리지의 명이 아니라면 다른 두 분 공자께서는 어는 것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으시다고요.”
연개소문이 탁자를 톡톡 쳤다.
“남산이 이 녀석이 완전히 제 형들을 부리고 있겠구만.”
“권력이라는 것은 그리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대막리지께서 제일 잘 아시질 않습니까? 어중간한 힘의 균형이라면 작은 다툼으로 큰 화가 미칠 겁니다.”
“어설픈 나눔보다 차라리 한 놈에게 몰아주어야 한다?”
연개소문이 듣기에 선도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 어설픈 균형에서 이세민은 제 형을 죽이고 보위를 차지하였고, 연개소문은 자신을 죽이려 한 태왕의 목숨을 거두었다.
만일 이런 참담한 일이 제 식구 간에 일어날 바에야 형제간의 우애를 논했던 막내아들이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는 편이 더 나았다.
“그보다 오늘 패강에 들어온 품목들을 보셨습니까? 서역에서 비단길과 대운하를 거쳐 평양으로 들어온 물건들인데 금사로 비치는 유리병의 색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내 집무실에 있는 로마의 유리병과도 비슷하구만. 남산이 덕분에 앞으로 이런 귀한 물건들이 평양에 가득 들어오겠어.”
“고구려가 장차 부유해질 일이니 참으로 기쁜 소식이 아닙니까? 한데 어찌 기뻐 보이지 않으십니다.”
“자네가 돌려보내지 말라 한 김춘추의 장남 말일세.”
“법민 왕자를 말씀하십니까?”
“제 아비의 상태만 보고 곧바로 돌아오겠다 태왕 폐하를 매일 찾아오고 있어. 제 아비를 위해 저리 밤낮으로 열심인 놈을 굳이 볼모처럼 이곳에 잡아 두어야겠는가?”
“대막리지께서 어찌 그리 마음 약한 말씀을 하십니까? 김춘추에게 한 번 속았으면 됐지, 두 번 속으시렵니까?”
선도해의 말에 연개소문이 버럭 화를 냈다.
“그러다 내가 쓰러졌다는 소식에 남산이 놈이 오지 않으면 어쩌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