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막리지 막내아들-328화 (327/335)

328화 새 천하: 고구려의 수성 (9)

선도해를 위한 만찬은 그를 위한 연회가 끝이 나고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세월이 흘러 선도해가 도성으로 돌아갈 의사를 표명하자 나는 만류하지 않았다.

“아버님께 돌아가시거든, 이곳을 통치하면서 제가 고구려를 위해 무엇을 하였고 또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모두 일러 주십시오.”

“저와 함께 도성으로 귀환하시어 직접 대막리지께 문안하고 말씀하시지요. 태왕 폐하는 물론이고 문무백관은 막리지께서 대막리지의 뒤를 이어 전권을 갖는다 하여도 어떠한 불만도 품지 못할 것입니다. 도성의 백성들도 막리지를 영웅이라 칭송하며 돌아오시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사온데 굳이 이 서국의 장안에 더 머물 필요가 있겠습니까?”

선도해가 말한 대로 고구려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는 금의환향은 일국의 장수로서 몇 번을 경험해도 달콤한 일이었다. 하물며 일천 년 원수인 중국 왕조를 끝장낸 뒤에 고국에서 받을 환영은 얼마나 크고 성대할지 예측할 수가 없다.

나를 따르는 고구려 말객들도 기다리는 일이겠으나 성대한 환영 한 번 받자고 수성이라는 더 중요한 일을 그르칠 수야 없었다.

“도성에서 이곳 장안까지 4천 리 길입니다. 제가 도성으로 돌아가면 필경 딴마음을 품는 자들이 나타나 대명궁을 들썩이며 권력을 잡고 고구려로부터 독립하고자 할 겁니다. 그리되면 지난 원정의 모든 고생은 수포로 돌아가는 겁니다. 제가 잠시라도 비울 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내가 자리를 비워도 고구려 천하가 유지된다는 보장이 설 때까지 한시도 방심할 수 없었다.

가뜩이나 이도종이 황위에 욕심을 보이는 이상, 이음과 이도종 사이의 권좌 쟁탈전은 앞으로 더욱 가중될 전망이다.

나는 그들의 권력 다툼에서 어느 쪽에 서야 할지 모르는 당나라 인사들을 포섭하여 고구려 편에 서게 해야 했다.

이도종은 내가 그를 지지하고 이음으로부터 선위를 받는 일에 동의했다고 착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은밀하게 이음을 도우면서 이도종 밑에 숨어 중원 왕조를 되살리려는 자들을 색출해 낼 작정이다.

암암리에 정지절과 이경업을 응원하며 발톱을 숨기고 있는 자들이 이도종에게 붙으려 한다는 기별을 받은 참이다.

‘이거 창업보다 수성이 더 신경 쓸 것이 많군. 이세민이 고민할 만도 해.’

창업은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이루는 것이나, 수성은 장기적인 통치 체제하에서 중간중간 반기를 들 만한 불씨를 찾아 제거해야 했다. 그야말로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 것이 수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 말씀하시니 뭐라 더 권할 수도 없겠군요. 또 사정도 그러하니 이해가 됩니다.”

말은 저리하면서도 선도해는 내심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때로는 가까이서, 때로는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나를 지켜보며 알게 모르게 정이라도 든 모양이다.

오늘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날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연이고 세월이니 더 그럴 터다.

사실 정이 든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게도 선도해는 배울 것이 많은 스승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그간 고구려의 외교고 내정이고 나 혼자 전적으로 감당하기에는 상당한 고초를 치렀을 테니까.

오히려 모내기법 실시는 들어서 이론만 아는 나보다도 저수지와 같은 관개시설을 직접 설치하고 보수해 본 실무 경험자인 선도해가 더 낫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설명한 적조 현상에 대한 이해력도 빨라서 해결하는 일에도 솔선수범했다.

그렇게 대당 원정군 10만 장병의 군량은 선도해가 힘쓴 모내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귀족 중심으로 이루어진 고대 삼국 지배 계층 가운데 그나마 내가 찾는 몇 없는 인재였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혹 대막리지께 다른 전할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슬슬 장안을 떠날 채비를 마친 선도해가 내가 개인적으로 연개소문에게 할 말이 있는지 물었다.

나보다도 한참이나 앞서 당나라를 정벌코자 큰 뜻을 품은 연개소문은 지금쯤 내게서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할까.

그런 생각에 나는 짧게 호흡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아버님께서는 태왕 폐하의 우편에 앉아 고구려를 다스리시고, 그 아들인 저는 중국 황제 위에 군림하여 이 관중을 잘 수성하겠다 전해 주십시오.”

연개소문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것.

중국 황제를 발밑에 두겠다는 연개소문의 오랜 꿈은 나로 인하여 실현이 되었다.

* * *

낙양 궁궐 안에는 고구려를 대표하는 무장 두 남녀가 황칠 갑주를 입은 채 서서 대면했다.

“장안에는 언제 가 보려고 여태 낙양에 계셨소?”

“대고구려의 막리지께서 어련히 잘 안 하실까. 나보다 수영이 네가 여태 장안에 들어가지 않은 게 이상하구나. 남산이가 세운 허수아비 천자의 즉위식에는 갈 줄 알았더니만.”

“당나라 오랑캐 원수들을 도륙하지 않았는데 내 뭐 볼 게 있어서 거길 들어가겠소? 여전히 황제 노릇 하는 이세민의 다른 아들놈과 여우 같은 늙은 오랑캐 신하들 사이에 뭐 볼 게 있다고.”

연수영은 양만춘을 향해 고구려 무장을 대표하여 불평했다. 고구려 깃발을 중원과 관중 곳곳에 꽂았으나 여전히 적지 않은 당나라 인사가 조정과 각 관청에 머물렀다.

낙양 관청에 머무는 그들의 얼굴과 언어만 들어도 칼집으로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당나라 인사들을 모조리 처형하면 행정이 마비가 된다. 이 낙양만 해도 그들이 없었다면 그냥 폐허로 만들고 요동으로 돌아가는 편이 나았을 게야.”

“차라리 그게 나았겠소!”

“수영이 네가 막리지 자리에 있다면 안 봐도 뻔하겠구나. 장안을 점령하고도 피로 얼룩진 살육이 그치지 않았을 테지.”

“지금 내가 아니라 남산이 편을 들겠다는 거요?”

연수영의 눈초리에 일순 당황한 양만춘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큼, 그 말은 아니고. 자고로 천하를 통치하자면 큰 그림을 보아야 하기에 그런 게다. 생각해 보거라, 수영이 네가 칼을 뽑아 중원에 온 까닭은 더는 요동 백성들이 고초를 겪지 않게 하기 위함이 아니냐?”

“여부가 있겠소.”

“그거라면 이미 목적은 달성한 게 아니냐? 한데 이미 투항한 적을 쫓아내고 처단한다면 너와 같이 고구려에 복수하겠다는 무리들이 이 땅을 중심으로 모일 게다.”

연수영은 요동만에서 당나라 수군의 기습 상륙으로 죽은 장병들과 백성들을 떠올리며 불만을 내뱉은 반면, 요동에서 요서로 영토가 확장되면서 여러 이민족을 통치해 본 양만춘은 다소 이성적이었다. 이 난세에 이민족 부족들 사이에 전쟁으로 칼부림 나 죽은 사연은 한 가구씩 누구라도 경험한 일이었다.

“내가 남산이와 같이 큰 그림을 보고 있지 않다 깔보는 거요?”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하구나. 머리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이걸 읽어 보거라.”

양만춘이 장안에서 옥소가 보내온 서간을 보이자 이내 읽기 시작한 연수영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고구려에서 오라버니의 어린 망나니 아들 밑에서 일평생 종노릇을 해야 할 것 같던 딸자식이 어언 고구려의 말객으로 수만의 군사를 이끌며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큰 뜻을 펼치고 있었다.

옥소의 서간 안에는 그간 장안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장수로서 행정 업무는 안 맞는다는 둥 칼이 더 익숙하다는 둥 연수영과는 사뭇 다른 불평이 나타났다.

“너를 닮은 그 아이가 남산이를 따라 늘 선봉에서 싸웠다. 팔과 어깨에 난 상처도 만만치 않다.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칼을 내려놓자꾸나. 중원에서 놓기 어렵다면 요동으로 돌아가자. 내가 함께하마.”

양만춘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연수영을 향해 당과의 전쟁이 완전히 끝났음을 알렸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은 연수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를 닮기는, 선머슴 같은 게 당신을 더 닮았구만.”

* * *

선도해가 도성으로 귀환한 뒤로 나는 다른 형제들과 함께 고구려 치하의 중국 본토 장악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각기 개성이 다른 형제들이라, 제멋대로의 통치가 예상됐으나 결국에는 먼저 온 사람이 임자였다.

홍문관 서고의 내 손에는 연남건의 편지가 한가득했다.

-아우님께서 유주를 어찌 통치하면 좋을지 일러 주게나. 말이 통하는 고구려 백성과 삼한 백성은 적고 중원 백성은 많기도 할 뿐 아니라 해, 거란, 돌궐, 회홀 등 이곳에 거주하는 다른 이민족도 많으니 이들을 어찌 다스려야 할지 내 힘과 지식만으로는 역부족이야. 아우님께서 하라는 대로 무엇이든 할 터이니 나 좀 살려 주게. 저들이 나를 업신여기지는 않을까 염려되네.

고향과 동떨어진 낯선 하북 지방에 대해서 무지한 연남건은 다달이 내게 조언을 구하며 어떻게 통치를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물으면서, 내가 계획한 통치 체계를 화북 지방까지 확대하는 일에 전적으로 따라 주었다.

이미 예견된 일이기도 했으나 덕분에 연남건을 돕기 위해 그의 휘하로 보낸 관리는 모두 내가 세운 고구려 경당에서 배운 젊은 인사들로 채워졌다.

하북 지방의 태수가 연남건이라고는 해도 밑에서부터 임명된 모든 관리들은 내가 발탁한 인사들이 차지했기에 실상 관중에서부터 임유관에 이르는 방대한 중원의 지역을 내가 통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연남건이야 한때 요승 신성을 처단하면서 내가 진심을 보여 준 일도 있었고 나와 어머니도 같으니 진심으로 대한다면 크게 의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연개소문에게 대뜸 강남 지역을 다스리겠다며 장강 이남으로 내려간 연남생이었다. 성격적으로 독자적인 판단을 하는 통에 어디로 빠질지 모르는 통치자였으나 그 자존심 강한 큰형조차도 한 4개월쯤 지나자 홀로 낯선 땅을 통치하는 것이 버거웠는지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곳 하급 관리들과 재무를 관리하는 자들이 당나라 황제나 등선, 홍문관 학사의 명이 아니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내 말을 듣지 않겠다 하는구나. 원래라면 그들을 모두 참해야 하나 그리했다간 반란이 일어날까 두려우니 남산 아우님께서 나서 주시게. 내 말은 듣지 않아도 당나라 천자를 세운 아우님의 말은 듣지 않겠나.

연남생이 급히 보내온 연통대로 항주 출신인 저수량과 허경종의 무리가 꽉 잡고 있는 강남 지역에서 내 허락 없이는 외지인인 연남생 단독으로 온전한 통치를 이루기란 불가능했다.

나와 가장 거리가 먼 형제인 연남생을 중국 경제의 중심지를 다스리는 태수로 삼는 것에 내가 아무런 제지도 가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중국 어디로 가든, 중국의 심장부를 장악한 내 영향하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핏줄로 이어진 인연이니만큼 몸으로야 얼마든지 남생에게 굽힐 수 있으나 내가 원하는 것은 나를 바라보는 그의 마음이었다.

자고로 수성이란 가정부터 잘 다스려야 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몸과 마음을 닦은 후에 집안이 가지런해지고 그 후에야 나라가 다스려지고 그다음에 천하가 화평해진다는 말.

이것을 마음에 깊이 새긴 나는 강남 지방 소속 전령에게 명했다.

“남생이 형님에게 사람을 보내어 헌충 조카를 내게 보내도록 하시게 하라. 남산 형님을 대신해 그 아이에게 가르칠 것이 있다고 말이다.”

멸망의 단초가 된 형제 간의 골육상쟁으로 희생된 조카를 이번에는 내가 잘 품어 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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