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막리지 막내아들-321화 (320/335)

321화 새 천하: 고구려의 수성 (2)

‘중국 고대의 중심지답게 어느 도시보다 가장 웅장하군.’

연개소문이 떠나고 수일 후, 보수 중인 장안의 민심을 살피고자 순찰 나온 내 기분은 정확히 그러했다.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인 시황제의 진나라를 전후로 13개 왕조의 수도이자 임시 수도인 후한과 서진을 빼면, 수와 당을 포함한 지난 11개 왕조의 고도(古都) 장안은 중국 고대사의 중심지라고 일컬어져도 과언이 아니었다.

중국 남방인과 북방인을 구분하는 문화적 경계선이자, 고대로는 관중과 파촉을 나누는 진령산맥이 도시와 평원을 둘러싸며 원형의 성벽처럼 형성돼 있었고, 서로는 황하, 북으로는 위수와 경수가 흐르며 100만 인구가 사용할 식수를 책임져 주었다.

수년 전 대자은사(大慈恩寺)에 세워진 대안탑(大雁塔) 하며, 고대 문화재가 내가 밟는 모든 곳에서 뚜렷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중국 역사상 최대 크기의 건축이라는 함원전을 가진 대명궁은 마필이 없으면 둘러보는 데만 해도 하루가 부족할 지경이었다.

어떻게 보아도 중국은 기마민족이 다스려야 할 나라이기는 했다. 이 광활한 땅을 마필 없이 다스리기란 시간이 부족하니.

“이쪽이 장안현이옵고, 저쪽이 만년현이옵니다.”

허경종이 순찰 중인 나를 위해 장안의 대표 시장을 소개했다.

황성의 정문인 주작문 앞으로 곧게 뻗은 주작대로를 경계로 동서 지역인 장안현과 만년현으로 나뉘었다.

장안현과 만년현에는 각각 동시(東市)와 서시(西市)라는 상업 전용 구역이 설치되었는데, 특히 서시는 비단길의 시발점이자 종점 역할을 해, 세계 각국의 상인들이 몰려드는 그런 곳이었다.

최근까지 당이 토번, 서돌궐, 고구려와의 계속된 전쟁 여파로 장안 시장에 들어오는 서역 상인들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지만, 머지않아 다시 각국에서 몰려오는 수많은 상인으로 인해 북적거리게 될 전망이다.

전쟁으로 인하여 교역이 일시 중지는 될지언정, 당대 최대 인구라 할 수 있는 5천만 인구의 중국 시장을 놓치고 싶어 하는 상단은 좀처럼 없을 테니까.

가까운 시일 안에 고구려와 삼한에서 건너올 상인들도 운하로를 통해 막대한 이문을 벌어들이며 이번 전쟁에서 소모한 고구려의 재정을 도로 채워 줄 터다.

또 날로 인구가 증가하는 고구려와 삼한의 잠재적인 시장 가치도 결코 뒤떨어진다고 할 수 없었다. 이는 당과 대적하는 동시에 뱃길로 개척한 교역의 성과가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고구려의 대당 정벌로 인하여 서역 아라비아 상인들이 장안과 낙양에 들러 운하로를 따라 탁군, 영주, 요동 등으로 들어올 것이며, 양자강 방면의 강남을 거쳐 고구려와 삼한으로 들어오는 상인도 점차 증가할 것이다.

“소금이 들어오고 운하를 다시 개통한다는 소식에 장안의 백성들이 삼군대장군을 칭송하옵니다. 물가가 안정되면 동시와 서시가 곧 다시 활기를 되찾을 겁니다.”

나를 위해 친히 안내하는 허경종도 같은 예상을 내비쳤다.

당을 치고자 고구려의 총력을 기울이며 거병한 이유가 고작 이치나 무측천을 사로잡거나 당을 멸하기 위한 것이 전부였다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원과 관중의 풍부한 물자, 교역과 자원에서 오는 자본을 얻고 고구려의 부국강병을 이루는 목표가 아니라면, 당나라 황제를 사로잡자마자 나도 연개소문을 따라 평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너무 많은 소금을 풀면 소금값이 폭락할 것이니 기존 장안의 소금 전매량을 아는 관원들과 상의하여 결정하도록 하라.”

“지금 전하라 하겠습니다, 막리지.”

나를 따라 함께 순찰 중인 옥소가 내 명을 이행하기 위해 급히 움직였다.

* * *

바람이 부는 날, 동쪽 관중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고지대 위 천막 안에서는 머지않아 토번의 실세가 될 두 사내가 열띤 담소를 이어 갔다.

“고구려가 진정 장안성을 점령했단 말입니까? 가르친네 형님.”

“내 아는 당나라와 서역 상단으로부터 들은 얘기이니 참말일 게다, 첸드로. 설마설마했더니 고구려가 당나라 황궁마저 점령할 줄이야, 나도 놀랍게 여겼다.”

“우리가 비단길을 얻고자 할 때 고구려의 연남산은 당나라 전역을 수중에 넣고자 일을 도모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장안이 이리도 빨리 고구려의 수중에 넘어갈 리가 없습니다. 철저히 준비한 겁니다.”

가르친링은 중원의 낙양에 이어서 달포가 조금 지난 시점에 관중의 장안마저 점령해 버린 연남산의 활약에 혀를 내둘렀다. 장안은 당의 심장부로, 언제고 자신이 직접 토번의 강병을 거느리고 점령해 버리겠다 가슴에 꿈을 새겼으나, 연남산이 대신 이루어 버렸기에 허탈한 마음이 컸다.

“첸드로 네 말이 옳다. 하나 흥분하지 말거라. 당의 황제가 없는 이 기회에 아버지께서 서북의 농우도를 점령하실 계획이시다. 토번을 통하지 않고서는 고구려이고 당나라이고 비단길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실 요량이시란 말이다.”

“장안을 고구려에 빼앗겼다면 응당 비단길은 우리 토번이 먹어야지요. 내 언제고 가까운 시일 안에 장안의 연남산을 만나 비단길의 주인이 우리 토번임을 만천하에 널리 반포할 것입니다!”

서역 진출, 안서 4진, 당의 서역 경영을 통째로 집어삼킬 작정인 가르친링은 송곳니까지 드러내며 고구려가 중원 깊숙이 들어온 새 판도에서 서역 교역의 우위를 점하겠다는 생각을 밝혔다.

‘대명궁 전각에 우리 토번의 적토를 바를 것이야.’

그러나 가르친링은 한술 더 떠서 장안을 점령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

* * *

“죄인 당왕 이치와 요부 무조는 앞으로 나오시오!”

정갈히 관복을 입은 미림부의 외침에 고구려의 군선과 과하마를 타고 연개소문을 따라 평양에 들어온 이치 내외가 안학궁 중궁 방면에 자리를 만들고 나란히 선 태왕 일가를 향해 삼배를 올렸다.

“다, 당왕 이치라 하옵니다, 태왕 폐하.”

“죄인임을 자복하오니 부디 하해와 같은 아량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긴장한 두 남녀의 목소리가 중궁을 향해 울렸다. 평지성 수도이자 짝으로 산성 수도이기도 한 대성산성의 성세와 사나운 고구려 군사들을 만나며 한껏 겁에 질린 얼굴들이었다.

“당왕의 아비로 인하여 우리 고구려의 아픔이 무척이나 크오. 그대의 아비가 거병하여 육로와 수로로 백만 대군을 보낸 일로 요동의 산성과 요동만의 우리 백성들이 당한 고초가 얼마나 큰지 아시오?”

“송구하옵니다! 태왕 폐하.”

“그저 당왕의 아비만 탓할 수도 없지. 지난 10년간 황제 노릇을 하며 아비의 유언도 어기고 고구려의 국경을 넘으라 계속해서 군사를 보낸 이가 바로 당왕이니 말이오.”

“신이 잘못하였습니다. 이제부터 고구려의 신하임을 하늘을 두고 맹세하오니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시옵소서! 흐흑.”

보장태왕의 문책에 이치는 연신 고개를 조아렸고, 목숨을 애걸했다. 황태자 시절부터 좀처럼 장안 밖으로 나오지 않은 터라 장안을 떠나온 뒤로 늘 두려움이 가득했다.

“당의 왕비가 대범한 결단으로 궁궐 문을 열고 투항하였으니 우리 고구려 백성들 앞에 사죄하는 것으로 당왕의 목숨만은 구명하여 주시옵소서, 태왕 폐하.”

그때 연개소문이 무측천과 이치를 번갈아 보며 태왕에게 자비를 요청했다. 보장태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사죄하는 것보다 백성들에게 사죄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요! 내 대막리지의 말씀을 따르겠소. 여봐라,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가족을 잃거나 재산에 손해를 보거나 불구가 된 자들을 모두 불러오너라. 당왕 내외가 직접 그들에게 나아가 사죄할 것이다.”

태왕의 명이 반포되자마자 전국적으로 수많은 고구려 백성이 평양 인근으로 몰려왔다. 이번 대당 원정에 참전한 20만 장병의 식솔들뿐만 아니라 과거 이세민의 친정 때 피해를 입은 수만의 고구려인, 또 일부는 수나라 시절에 피해를 입은 백성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이치가 당나라를 대표하여 그들을 향해 태왕에게 사죄하는 것처럼 머리를 땅바닥에 댔다.

“고구려 백성들을 아프게 한 잘못을 오늘 사죄하리다!”

쿵쿵.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마가 바닥에 닿았으며 흙먼지가 가득 묻었다.

무려 보름간 매일같이 정오에 몰려든 고구려 백성들을 향해 무릎을 굽히며 사죄한 이치는 굴욕감과 패배감으로 밤을 지새웠다.

“내 이리 모욕을 당할 줄 알았다면 장손무기에게 목숨을 맡겼을 것입니다! 폐하.”

고구려와의 강화를 통해 장손무기 일파를 축출하고 당의 권력을 노리고 있던 무측천은 연일 이치를 따라다니며 마찬가지로 고구려 백성들에게 사죄를 하다가 어느 날 밤 이치를 향해 깊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권력의 최정상에 올라가 하루아침에 고구려의 왕족도 귀족도 아닌, 일반 백성들 앞에서 연일 허리를 숙이고 절을 올려야 하는 비참한 치욕을 경험해야 했다.

* * *

-선제의 6남이 옛 파촉 지방의 촉왕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제가 서한을 보내 장안으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당의 주인이 사라진 때에 저수량이 싸우지 않고 점령할 수 있다고 자신한 검남도 지방의 군주가 저수량의 서찰을 받고서 제 발로 나를 찾아왔다.

“촉왕 이음이라 하옵니다.”

이세민의 6남이자 수양제의 딸을 모친으로 둔 망나니 황자 이음이었다. 수양제의 외손자인 동복형 오왕 이각이 장손무기의 거짓 고변에 사사당할 때 함께 연루되어 파주(巴州)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촉왕(蜀王), 부릉왕(涪陵王)이라는 작위를 받으며 익주대도독의 지위를 누리고 있던 인물이었다.

문무의 재간이 뛰어난 동복형 오왕 이각과 다르게 매우 탐욕스러운 촉왕 이음은 중원 곳곳에 악평이 자자한 망나니였다.

‘그러니 이치가 사라진 장안의 임금 자리를 주겠다는 감언이설에 혹해서 이곳까지 날름 온 것이겠지.’

사냥을 좋아하고 관리를 구타하며 농민들의 농사를 방해하고는 비리까지 저지르는 이음이 이연, 이세민, 이치에 이어 당의 4번째 군주가 된다면 필경 이 땅에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민심은 자연스레 새 왕조의 통치를 원하기 마련이고, 고구려가 이를 대체할 수 있는 판이 깔리게 되는 셈이다.

내가 이음을 향해 반갑게 인사를 받았다.

“막리지 연남산이라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야말로 막리지를 뵈어 반갑습니다. 저 검남도 촌구석에서 막리지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낙양에 이어 이치 형님께서 계시는 장안까지 장악하시다니요! 이 장안을 군사로 점령하시는 분은 오직 아버님이신 태종께서 유일하다 여겼거늘, 네 살아생전에 다시 보게 되다니, 과연 동단의 천책상장이십니다! 흐흐.”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말로 어떤 사상과 가치관을 가진 인물인지 알 수 있다고 하였는데,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없는 망나니라는 인상은 제대로 내 머릿속에 박혔다.

오왕 이각의 동복동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을 유배시킨 이치나 장손무기와 같은 관롱 집단에 대한 불만은 있겠다 여겼는데 설마 장안이 고구려에 무너진 것에 대해서 저렇게 태평한 소릴 할 줄이야.

-짐승도 조련하면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철석도 제련하면 사각형의 도구가 된다. 하지만 이음은 짐승이나 철석만도 못한 놈이로구나!

괜히 아비 이세민으로부터 짐승만 한 취급을 받은 게 아니었다.

어쩐지 망나니라 첫인상부터 무언의 동질감이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으나 지금은 국익에 집중해야 했다.

“여기까지 나를 믿고 오셨으니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립니다. 이치는 출가해 비구니가 된 제 아비의 후궁을 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를 치지 말라는 아비의 유언마저 어기며 크나큰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이에 고구려가 당을 응징하고 이치의 죄를 만천하에 알리고자 그를 평양으로 압송하였으니 대명궁의 주인 자리는 비게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한데…….”

내 말뜻을 곧장 알아들으며 짧게 입을 연 당의 망나니가 이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왕이 될 상이란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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