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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막리지 막내아들-319화 (318/335)

319화 삼족오가 주작대로로 날아 (9)

“누가 보내서 왔다고요?”

내가 묻자 허경종이 좌우에 뒤따른 긴장한 사내들을 둘러보며 차례차례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쪽은 저의 사위 왕덕검이옵고, 저쪽은 이의부이옵니다. 황후께서 보내서 왔다 합니다.”

이거 누군가 했더니, 한마디로 당나라 초기 간신배들이 내 앞에 총집합했다는 의미였다. 희대의 간신이라면 허경종 한 노인이면 어떻게든 소화할까 싶었는데 중국의 간신배들이 이리 같이 몰려오다니.

일단은 이 자리에 저수량과 두 아들이 없다는 사실에 안심해야 했다. 그들이 이들의 얼굴을 보았다면 아마 지난번처럼 단칼에 목부터 치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들을 누가 보냈는지가 중요하긴 했다. 황후라면 훗날 측천무후가 되는 그 여인이 맞았다. 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들을 내게 보냈는지.

“삼군대장군께서 무엇 때문에 고심하고 있는지 아옵니다! 하나 모든 원흉은 장손무기와 황후 사이의 정치적인 갈등이 그 까닭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누구든 선택을 했어야만 했고요. 정치라는 것이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크흠.”

그때 눈치 빠른 노인 허경종이 잽싸게 내 생각을 추측하며 입을 나불거렸다. 상당히 설득적인 것이, 이길 만한 쪽에 붙어서 정권을 잡는 방식은 정치에 참여한 자라면 누구라도 그리하게 돼 있기 마련이다.

허경종의 혀가 바쁜 이유는 아마도 앞서 저수량이 내게 붙어 있었기에 그 자신과 사위 그리고 이의부를 변호하기 위한 이유일 터다.

“부디 막리지의 넓은 아량으로 저희 처지를 헤아려 주십시오!”

“부디 막리지의 넓은 아량으로 저희 처지를 헤아려 주십시오!”

허경종이 신호를 보내자마자 찰떡같이 알아들은 왕덕검과 이의부가 말에서 내려 나를 향해 부복하며 외쳤다. 생존 의식이 남다른 것은 허경종에게 손수 배운 모양들이다. 제 발로 항복하겠다는 데다 무장하지도 않은 이들을 무뢰배처럼 막 벨 수도 없고, 나로서도 참 난감한 상황이다.

“내 등선 선생에게 듣기로, 그대들만큼 장안에서 탐욕스러운 무리가 없다 들었소.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나라를 이리 망쳤다지요?”

내가 일부러 떠보듯 말하자 왕덕검과 이의부가 눈치를 보았고 허경종이 재차 침착하게 그들을 대표하여 입을 열었다.

“당의 운명이 이리 풍전등화(風前燈火)에 놓인 것에 저희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요. 하오나 거리의 개들도 제 영역을 지키기 위해 피 흘리며 싸웁니다. 피 흘려 싸우다 상황이 여의치 못하면 다른 마을에서 건너온 사냥꾼에게라도 몸을 의탁하고 싶은 게 짐승의 생존 본능이 아니겠습니까? 부디 이들을 가엾게 여겨 내치지만 말아 주십시오. 그리하시면 삼군대장군께서 천하를 다스리시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호, 자신들은 개로 비유하며 낮추시겠다? 허경종의 말이 달콤한 이유는 중원의 정복지를 다스리기 위해서 인재는 다다익선이었기 때문이다. 그 인재가 탐욕이 있건, 인성에 문제가 있건, 능력이 없건, 인재가 아예 없는 것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인재가 없고서는 이 광활한 땅을 통치하기란 불가능하니까.

“궁궐 문을 여시오. 그대들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내가 대명궁에 입궁하고서야 고민해 보겠소.”

정치 9단 허경종의 혀 놀림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알았기에, 당나라 황제와 한 장애물을 사이에 두고 쓸데없는 대화로 시간을 날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장안과 인접한 검남도와 서북의 농우도, 북쪽 관내도의 당군이 언제 몰려올지 알 수 없기도 하고 말이다. 그 전에 중국의 황제를 반드시 잡아 놓아야 했다.

적어도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 * *

장안성(長安城) 동북쪽 용수원(龍首原)에 위치한 대명궁. 당 왕조의 정치 중심지였으며, 동시대 세계적으로 가장 규모가 큰 궁전 건축군이며, 동서양 모두 망라하여 역사적으로도 건축이 상당히 큰 규모를 보여 주는 황제의 궁궐.

흥안문, 건복문, 단봉문, 망선문, 연정문으로 남쪽에만 수십 미터 높이에 달하는 견고한 성문이 무려 5개나 세워져 있어 삼국의 웬만한 산성보다도 큰 규모로 장안성 내에 특별 설치된 작은 성이라고도 부를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궁내 거처하는 내관들과 황실 호위병, 성문을 지키는 군사를 더하면 대명궁을 지키는 병력만도 족히 1만에 달했다. 장안성의 성문을 열었다고 안심하기가 일렀던 것은 성안의 성 대명궁의 규모 때문이기도 했다.

온 천하의 재물이 사방에서 가득 모이기도 한 곳이 바로 저 궁궐이니 얼마간 버티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그사이에 대명궁을 점령하지 못하면 14만 병력과 수만의 조랑말을 끌고 온 고구려군의 식량 문제가 크게 대두될 것이다.

원정 전투를 치르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말들이 먹는 식수와 마초의 양이 상당한 부분이다.

그나마 작은 조랑말들은 일반 군마보다 덜 먹기에 부대로 편성해 올 수 있었지만 지금 내가 타고 있는 건실한 군마를 기준으로 잡는다면 군마 1필이 성인 장정의 5배에서 최대 13배에 달하는 칼로리를 섭취한다.

또 물은 얼마나 마시는가, 좀만 달리면 20, 30리터의 물을 마셔야 한다. 사람 20인분의 식수를 말 1필이 마시니 훈련 및 양성하는 비용을 제하고도 유지하는 비용이 만만치가 않다.

장안성을 돌파하고도 궁궐 문을 서둘러 열지 못하면 이런 유지비로 인하여 아군이 먼저 퇴각해야 할 판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장안의 민심을 포기할 각오로 큰 약탈을 벌이든가.

이런 이유로 낙양에서 달포 정도 머물면서 진득하게 재정비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대명궁의 어느 성문부터 열어야 하나 고민하려는 때에 궁 안에서 알아서 찾아온 이들이 허경종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왕덕검과 이의부였다. 제 발로 성문을 열어 주겠다기에 산기와 선기 양 기로 하여금 그들의 길 안내를 받으며 나는 남쪽에 설치된 5개의 성문이 모두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

드르륵. 이의부의 수하가 연 건복문을 통해 진입한 양기의 군사와 말갈군이 이후 무장한 당군을 제압하며 성문을 하나하나 열기 시작했고, 나와 본대는 정문인 단봉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 입궁했다.

“이랴. 이랴.”

단봉문 뒤로 황제가 행차하는 어교가 길게 늘어져 있었고 나와 군사들은 그 길을 따라 함원전이 보이는 전각까지 행군을 멈추지 않았다.

“설 장군께서는 이리로 오십시오! 역적 장손무기가 황제를 배알하기 위해 자신전에서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지금 가겠소!”

“어서 가자!”

설인귀와 옥소가 이의부의 음성을 쫓아 장손무기의 무리를 제압하려 이동하였고, 걸걸중상과 흑수돌은 아직 무장을 해제하지 않은 황궁 호위대와 전각 곳곳에서 칼과 창을 든 내관들을 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생해가 이끄는 말갈군 3천에 앞서간 왕덕검이 구선문을 열면, 북쪽의 현무문 방면으로 들어오려는 백가제해군, 신라군, 거란군이 밀고 들어와 남북으로 대명궁을 완벽하게 수중에 넣을 수 있게 된다.

대명궁 점령에 대한 거의 모든 군사적인 조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함원전 앞에서 나를 환영하며 기다리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대명궁 내에서 가장 화려하게 치장한 여인.

“어서 오십시오. 고구려의 막리지 삼군대장군을 뵙사옵니다.”

나를 반기는 이 여인은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여황제로 이름을 남긴 무측천이었다.

허경종, 왕덕검, 이의부에 따르면 정적인 장손무기를 숙청하기 위해 그녀는 기꺼이 당나라의 심장부를 노리는 고구려 군사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궁궐 문을 열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앞서 장안성의 성문이 열렸기에 뒤늦게 태세를 전환한 결정이라고도 볼 수 있었지만, 그보다는 본인의 생사로 인하여 결정한 것이 더 커 보였다.

‘마치 민비가 목숨을 구걸하고자 청나라군을 끌어들여 정적 흥선대원군을 끌고 가는 모양새가 아닌가. 고구려군이 중국의 궁궐에서 그 역할을 하려는가.’

저마다 병장기와 갑옷에 피를 묻히며 들어온 고구려군을 향해 미소를 짓는 무측천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권력과 묵숨이 뭐길래 제 나라의 궁궐 문을 열어 외세의 군세를 받아들인단 말인가.

나는 그런 속사정을 잠시 접어 두고 웃으며 무측천의 인사를 받았다.

“당의 황후께서 우리를 환대해 주어 고맙소. 담소를 나누고 싶으나 우리는 고구려를 넘보는 당의 반적들을 처단하기 위해 이곳에 왔음을 알아주시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제가 안내하겠사오니 저를 따라오시지요.”

저마다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는 뒤의 궁인들과 내관들과 달리, 무측천은 태연한 표정으로 나를 위해 궁궐 안내를 해 주겠다 이야기했다. 저런 괴이한 행동이어야 제 자식들을 다 제쳐 놓고 황위에 오르는구나 싶었다.

“화, 황후!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황후 폐하! 대체 무슨 생각으로 오랑캐들을 궁궐 안으로 끌어들였단 말입니까?!”

고구려 군졸들 사이에서 끌려온 이치와 장손무기가 무측천과 나를 번갈아 보며 기겁했다.

“이놈들, 이거 놔라!”

“아, 아버님! 으아악!”

이의부와 왕덕검에 의해 바닥에 패대기쳐진 장손무기와 그 아들 장손충이 흙먼지를 풍겼다.

나는 장손무기를 알아보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10년 전에 비해 크게 달라진 인상은 아니었다.

“참으로 오랜만이오. 이세민과 함께 요동성과 안시성에서 본 게 엊그제 같았는데 이리 다시 보게 되는구려.”

“요망한 개금의 아들놈! 내 요동성에서 겁 없이 찾아온 너를 선제의 앞에서 죽이라 청하지 않은 것이 천추의 한이니라!”

장손무기는 을지문덕의 사항계(詐降計)를 본받아 요동성을 함락하고 승리에 심취한 이세민에게 거짓 항복을 한 나를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

“그 악연이 오늘에서야 끝나는구려.”

짧게 작별 인사를 나눈 뒤 내가 등을 돌리자 누군가 장손무기 부자를 가리키며 외쳤다.

“뭣들 하느냐? 어서 역적들을 처형하라!”

장손무기와 장손충을 가리켜 처형을 명한 사람은 뜻밖에도 무측천이었다. 그 광경에 설인귀와 옥소가 황당하다는 듯 내 눈치를 보았고,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모른 척했다.

이세민으로 하여금 같은 피가 흐르는 형제 이건성, 이원길을 죽이도록 부추기고, 황제가 된 이세민의 측근에서 모사 역할을 톡톡히 하며 이후에는 이세민의 3남 오각을 죽이고, 이치를 황제에 옹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당나라의 두뇌를 처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손무기가 살아 있다면, 필경 장손무기를 중심으로 당을 다시 일으키고자 하는 관롱 집단이 모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처단하면 장손무기의 명성과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를 적대하는 중원의 무리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걸 무측천이 직접 도맡아 주겠다는데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서걱.

무측천의 명에 이의부가 직접 장손무기 부자의 숨을 끊었고, 그것을 가까이서 목격하며 장손무기의 피가 뺨에 한가득 튀긴 이치가 두려움에 벌벌 떨며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 * *

연개소문이 주작대로를 따라 입성하자 그를 마중하는 10만 장병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

주작대로를 가득 메운 삼족오 깃발이 펄럭임에, 연개소문이 오른팔을 위로 뻗었다. 일순 천지가 고요해지자 연개소문이 크게 외쳤다.

“중원과 관중의 주인은 이제 고구려이니라!”

와아아아!

장병들의 뜨거운 함성 속에 짧게 소감을 남긴 연개소문은 막내아들이 점거한 당나라 황궁 방면으로 말 머리를 돌렸다.

* * *

“오랑캐들이 황제 폐하를 인질 삼아 우리의 도성에서 도적 노릇을 하고 있는데 당의 용사들은 어디서 무엇을 한단 말이냐!”

진왕 18학사 가운데 허경종과 더불어 유일하게 살아남은 우지녕이 4만의 동반자들을 한데 모아 장안을 되찾을 모의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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