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막리지 막내아들-318화 (317/335)

318화 삼족오가 주작대로로 날아 (8)

“황후 폐하! 제발 저희를 좀 살려 주십시오!”

“장손무기와 그 아들놈이 저희 가문 모두를 쳐 죽이려고 안달이 났사옵니다. 저희 가문이 몰락하면 그다음은 필경 황후 폐하께 그 해가 임할 것입니다!”

이의부와 허경종의 사위인 왕덕검이 장손무기의 칼을 피해 급히 무 황후의 처소에 들자마자 애걸했다. 현무문으로 들어오는 친황후파. 장손무기를 무고하고 무 황후를 황후로 옹립하는 데 찬동한 무리가 하나둘 습격을 당하자, 두 인사는 목숨의 위기를 느끼며 서쪽 외각 구선문을 통해 궁에 숨어들어 무 황후를 찾았다.

“내가 당나라 천자의 황후인데 감히 어느 누가 내게 해를 입힌단 말이오?!”

두 사람의 말에 무 황후가 격양된 목소리로 신경질을 냈다. 저수량과 장손무기를 성공적으로 몰아냈다고 여긴 것이 엊그제 같았는데 고구려가 개입하면서 완전히 엉망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기껏 어린 핏덩이의 핏값을 뿌리며 얻은 황후 자리와 권력이 전쟁으로 인하여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동이 오랑캐 놈들이 이리 일을 그르치게 만들 줄이야! 어찌 이런 황당한 일이!’

지금 이 자리에 없는 허경종을 포함하여 이의부, 왕덕검만큼이나 큰 위기를 맞고 있는 이가 무 황후였다. 내치만으로는 권력을 유지하는 데 한계가 뚜렷했다.

선제의 후궁에서 현 황제의 황비가 된 전무후무한 무 황후는 권력에서 이기는 것이 전부라 믿었으나 강병 십수만을 거느리고 중원에 나타난 연개소문의 막내아들에 의해 일이 완전히 뒤틀렸다.

강하왕 이도종, 운주총관 손인사, 당대의 재상이자 초당사대가 저수량 등을 제 신하로 삼았고, 당나라 무장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노익장 울지경덕을 고구려에 투항한 반역자로 속이며 유언비어를 퍼뜨린 뒤에는 당나라 조정을 한바탕 뒤집었다.

비록 거짓 소문이었을지라도 이도종과 저수량으로 말미암아 민심과 군심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고, 선황 때의 주요 신하들이 줄줄이 고구려에 넘어갔다는 사실은 누구라도 고구려와 내통할 수 있다는 황제와 신하들 간의 심각한 신뢰 문제로 이어지고 말았다.

그로 인하여 황제는 누구도 믿지 못하며 좀처럼 군권을 맡기지 못했고, 정지절과 소정방이 패한 뒤에는 재정비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고구려 군사가 장안까지 밀고 들어오는데 어떠한 조취도 취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절박해진 황제는 다시 장손무기를 찾을 수밖에 없었던 반면, 무 황후는 정치적으로 큰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장손무기가 마침내 칼을 뽑아 들며 그 자신을 좌천시키는 데 일조한 관롱 집단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고 있었다.

왕덕검의 말대로 무 황후를 지지하는 인사들을 모두 쳐낸 뒤 마지막 표적은 뻔했다.

‘장손무기가 나를 죽이려 하겠군.’

결심을 마친 무 황후가 울상을 짓는 왕덕검에게 말을 걸었다.

“왕 공.”

“예. 황후 폐하.”

“내 은밀히 알아본바, 귀공의 장인이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들었소. 사실이오?”

“그, 그 일은 참으로 송구스럽습니다! 황후 폐하. 하오나 장인께서도 다른 선택지가…….”

“지금 나무라겠다는 것이 아니오. 장손무기의 칼을 피한 것이니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고.”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하시오면……?”

잠시 시선을 돌린 무 황후가 이내 왕덕검과 이의부를 번갈아 보았다.

“귀공들이 궁궐을 빠져나가 고구려와 연통을 시도해 볼 수 있겠습니까?”

무 황후에게 남은 유일한 정치적 노림수는 이제 당나라 전체를 위협할 수 있는 고구려뿐이었다.

‘고구려를, 연개소문과 그 막내아들을 내 편으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무 황후는 고구려와 외치에 모든 것을 걸 작정이었다.

* * *

“아, 아버지! 큰일입니다. 고구려 놈들이 성내에 들이닥쳤습니다!”

“뭐야? 밤새 고구려 놈들이 몰려왔다는 서문과 남문을 중심으로 철저히 군사를 배치해 두었는데 대체 어느 쪽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냐?”

“동문입니다! 호수 방면에 있는 작은 성문으로 들이닥쳤습니다.”

“도, 동문이라고?!”

“수만의 군세가 일제히 들이닥치니 성문이 돌파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미 성문이 차례차례 모두 돌파당하고 있습니다! 아버님.”

현 시각 장안성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하는 장손충의 말에 장손무기가 할 말을 잃었다. 고구려의 주력이 기병인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리도 빨리 성문을 열어 버릴 줄은 몰랐다.

반대파들의 숙청에 집중하는 사이, 공성전이 벌어진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으나 삼한에서 험준한 산성 위를 오르내리며 수백 년간 치열한 공성전을 치러 온 삼한의 장병들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당한 것이었다.

와아아아!

산동반도와 중원을 포함하는 하남도, 용교가 설치된 회남도 그리고 관중의 산남도까지 밀고 들어오며 나타난 고구려군은, 마치 당 태종이 수나라를 통치하고자 유민과 동반자들을 모아 20만 군세를 일으켜 장안을 순식간에 함락했던 적과 같은 위세였다.

“당장 황제 폐하께 가야겠다! 폐하께서는 지금 어디 계시느냐?”

“단봉문에 가 계십니다!”

“함원전이나 선정전이 아니고 어찌하여 정문에 가 계신 것이냐?”

“시종들에게 묻기로 폐하께서 꿈자리가 좋지 않으시어 잠을 이루지 못하여 나가셨다고…….”

“이런 한심한!”

장손충을 지나친 장손무기의 발이 급히 움직였다.

* * *

장안은 다른 성보다 규모가 큰 성인 만큼 10만 강병이 성문을 열었다고 해서 끝까지 방심해서는 안 됐다.

요동의 천리장성이나 과거 삼한의 여러 산성 공방전을 생각해 볼 때, 성내 거주민들이 단합하여 버티기에 들어가면 수천의 군사와 수천의 성주민일지라도 그 의지에 따라 10배, 20배의 적군을 상대로 튕겨 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당대 제일의 규모를 자랑하는 당나라의 도성이라면 그 어느 성보다 가장 많은 성 주민이 밀집해 있을 터다.

말 그대로 수만의 당군과 100만에 가까운 주민들이 고구려군에 대항해 저항을 한다고 치면, 성문을 열었어도 아군에게도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일은 불 보듯 뻔했다.

“으아악!”

“어서 도망쳐!”

“우리 집 재산은 들고 가야지!”

하지만 우려했던 내 예상과 다르게 장안의 백성들은 외부의 침략에 저항한다는 그런 투철한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서역에서 건너오는 비단길 상인들의 동방 종착지이자 중국 전체의 물산이 집중되는 가장 부유하며 가장 상업이 활성한 도성답게 백성들은 오로지 자신의 자산을 지키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었다.

‘대운하 차단과 소금 문제로 민심이 뒤숭숭해질 만큼 뒤숭숭해졌다는 것인가.’

그보다도 다민족들이 섞여 있는 통에, 연대가 그리 좋지 못할 것이라는 추측이다. 애국심이 있거나 단합이 잘되는 민족이었다면 거란이고, 미래의 말갈인 여진족이고, 만주족이고 또 초원을 휩쓰는 몽골족이고, 소수의 기마민족에게 족히 수십 배가 넘는 인구와 비옥한 토지를 소유한 중원의 왕조가 먹힐 리가 없었다.

애초에 싸울 의지가 있었다면 수성 준비도 철저히 진행되고, 군사가 비어 있는 성벽도 주민들의 머릿수로 채워졌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안 이세민은 장안에서 일찌감치 돌궐의 힐리가한과 싸우는 것을 포기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작은 안시성에서 단합된 고구려인들의 강렬한 저항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쳐라!”

“저항하는 놈들은 모두 베어라!”

내가 성내로 진입해 주작대로에 들어설 무렵, 시내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당나라의 수도이자 100만에 근접하는 인구의 대도시가 동쪽에서 온 고구려군의 습격을 받아 무너지고 있으니, 고구려인으로서는 감개무량한 일이기도 했으나, 당나라인으로서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로, 저마다 몸을 숨기기 일쑤였다.

허경종이 급히 탈출해 항복하는 등 당의 내부에 심각한 결함이 나타난 덕분이 컸다. 또 그 덕분에 의외로 싱겁게 성문을 열기는 했다. 큰 공성전을 준비하려고 야심 차게 준비한 투석기는 만 하루도 더 써 보지를 못했으니 말이다.

‘장안 수성을 완전히 포기한 것이 아닌가.’

새로 개축된 장안성은 제대로 된 수성을 하려면 지키는 군사가 9만은 족히 있어야 동서남북 12개의 성문을 넉넉히 지킬 수 있는 구조였다. 오히려 지형을 끼고 세워진 개축 전인 수당 이전의 장안성이 더 방어하기가 견고한 성이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일단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방어해야 할 지점이 많아지니까.

그러니 지금의 장안은 지세를 활용조차 하지 못하고 몇 가지 틈을 노리는 것만으로 내성으로 돌파할 수가 있었다.

이세민이 왜 그렇게 시급하게 성을 빠져나와 힐리가한과 협상을 맺어야만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저희 홍기군은 서문으로 가 보겠습니다! 막리지.”

“우리 말갈군은 남문의 당군을 진압하겠습니다! 막리지.”

“우리 백가제해군과 신라군은 주작대로를 돌아가 현무문을 봉쇄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거란군도 그 뒤를 쫓겠소이다!”

성내로 진입한 뒤에 진압 작전은 비교적 간단했다.

최우선 순위는 퇴로를 차단하고 성 내 뿔뿔이 흩어져 배치된 당군을 도륙하는 것.

한곳에 집결한 적군보다 훨씬 수월하게 진압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 오랑캐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오는 것이냐?!”

고구려의 깃발이 장안성 곳곳에 침투하고 궁궐로 가는 모든 길목을 차단하며 몰아붙일 무렵, 궁 안 깊숙한 곳에나 들어가서야 볼 수 있을 것이라 여긴 당나라 3대 황제 이치가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나름 예를 차리며 이치에게 인사했다.

“당나라의 군주께서 어찌 이곳까지 행차하셨소? 이리도 빨리 전쟁을 진두지휘하시니 내 고구려의 장수로서 몸 둘 바를 모르겠소.”

“네놈이 짐의 천하를 쪼갠 개금의 아들이로구나! 이 흉악한 오랑캐 놈아!”

얼굴에 격양의 빛이 만연한 이치에 비해 나는 한층 여유로웠다. 과거 임유관을 돌파하고 수성하고자 했을 적과 비교해서도 이 장안성 공략은 수월했다.

마치 청나라가 장성의 관문을 돌파함으로써 중국 전체를 얻은 것처럼 첫 시작이 가장 어려웠을 뿐, 중원을 누비며 날로 강성해지는 고구려는 어언 관중의 심장부에 이르렀다.

“명만 내려주십시오! 주군.”

“소장이 직접 궁궐 문을 열고 당나라 수괴를 막리지께 바치겠사옵니다!”

“오늘만큼은 제가 나서고 싶사옵니다. 요동을 밤낮 쉬지 않고 지켜 주신 아버지와 어머니 생각만 하면 이 모든 원흉을 제가 처단하고 싶습니다.”

산기, 선기 양 기의 군사를 총지휘하는 설인귀, 걸걸중상, 옥소가 단봉문 앞에서 내 명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간 쌓인 당나라와의 악연을 떠올리는 그들이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짧게는 당 왕조와의 10여 년 악연, 수나라를 포함하면 반세기, 한나라로 거슬러 올라가면 800년을 넘게 이어 온 중원 왕조와의 오랜 악연을 이 유구한 역사의 장안에서 끝맺으려 한다.

“삼군대장군! 삼군대장군!”

결단을 내리기 직전에 내게 달려온 이는 허경종이었다. 그 뒤에는 처음 보는 당나라 인사 두 사람이 뒤따랐다.

* * *

“이제 슬슬 입성하셔도 되겠습니다, 대막리지. 막리지께서 사로잡은 당나라 황제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선도해가 장안성 성벽 위에 하나둘 걸리는 삼족오 깃발을 보며 연개소문을 재촉했다.

연개소문이 자리에서 흑당 대추차 한 모금을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조금 더 기다림세. 주작대로까지 우리 깃발로 꽉 찰 때까지 말일세.”

연개소문은 무척이나 오랜만에 전장에서 여유를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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