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막리지 막내아들-305화 (304/335)

305화 고구려 천하관 (4)

“잘 보시구려, 울지경덕 장군. 이게 장군께서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한 황제의 보답입니다.”

낙양성 옥에 갇힌 울지경덕은 저수량이 가져온 이치의 칙서를 읽고는 곧바로 눈을 감았다. 역적 울지경덕을 따르는 이들을 모두 참하라는 황명을 직접 두 눈으로 보자, 차마 낙양을 지키고 있는 수하들이 칼 한 번 뽑지 않고 투항한 일을 두고 비난할 수 없었다.

“낙양을 무혈로 얻었으니 개금의 아들이 이제 날 죽이겠구려. 이 나라에서도, 지금 고구려의 포로가 된 처지에서도 토사구팽은 토사구팽일 터이니 말이오. 이용을 다 했으니 이제 갈 사람은 가야겠지.”

“그것이 장군께서 바라시는 게 아니겠소?”

“등선이, 나이는 들었어도 내 속까지 읽으시는가?”

“사사롭게는 선제와의 약조도 있을 것이고, 또 장군의 공명을 위해서라도 나와 같이 조정을 배신한 역적보다는 토사구팽당한 충성스러운 신하가 더 낫지 않으시겠소? 그러는 편이 역사가 더 오래 기억을 해 줄 것이고.”

“그건 그렇구려. 내 명예를 지켜 주어 고맙소.”

울지경덕과 저수량은 밤새 옛 추억을 나누며 서로 작별을 고했고, 토번과 대몽국의 사신이 낙양 궁궐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이도종이 직접 대도로 그 목을 거두었다.

‘능연각공신의 목을 외인이나 천한 이에게 맡기지 않고 일부러 당나라 황족 출신인 이도종인 직접 치게 하도록 명하신 것도 다 주군의 계산된 일이로구나.’

뒷수습하려는 설인귀는 곧바로 막리지의 의도를 파악했다.

조정에서 버림을 받은 울지경덕이 제음에서 목숨을 걸고 충의로 싸우며 고구려의 포로가 되었으나, 도리어 역적이 되어 스스로 당의 황족인 강하왕을 찾아가 죽음을 택했다는 노랫가락이 낙양의 주요 통행로에서 울렸다. 이 소식을 들은 낙양의 백성들은 중원을 침략한 고구려가 아니라 당나라 조정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고구려가 중원의 주인이 되는 것이 당연해!”

“선제 때부터 내려온 충성스러운 신하들을 버리다니, 해도 해도 너무하는군.”

“등선 선생과 그 자식들이 괜히 장안을 떠나 막리지의 수하가 되었겠는가?”

“어쩐지, 선제의 신하들은 다 버리고 선제의 어여쁜 후궁만을 취할 때 미리 알아보았어야 했어.”

이처럼 당나라에 대한 낙양과 중원의 민심을 이반시키기 위한 막리지의 철저한 계산이 들어가 있었다.

울지경덕을 제음에서 죽이지 않고 낙양에서 처형함으로써 오히려 중원 정벌에 대한 여론이 정복지에서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고구려 편에 선 당나라 인사들에 대한 정당성이 세워지는 한편, 당나라 조정에 대한 적개심도 강해졌다.

“고구려가 참으로 새 천하의 주인이 되는 것이 맞는 것 같사옵니다.”

낙양 시내에서 울지경덕에 대한 노랫가락을 흘린 설인귀가 민심을 한바탕 살피며 그리 말했다.

선도해가 부채를 흔들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당나라에는 천하에 이름 있는 무장들이 모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태반이 고구려와 싸우다 죽었습니다. 이적, 계필하력, 계필사문, 정명진, 방효태, 울지경덕 등 천하가 알아주는 무인들이 모두 주군의 칼 아래 숨을 거두었으니 정국을 지배하던 당나라 태종의 신하들이 무 황후에게 진 것이 아니라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닙니까?”

“어허, 옆에 등선 선생이 계시는데 너무한 거 아닌가? 흐흐.”

옆에서 조용히 설인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던 저수량이 불편한 표정을 짓자 선도해가 웃으며 말을 끊었다.

설인귀가 저수량에게 사과했다.

“이거 송구하옵니다. 아주 잠깐이지만 요동에서 태종의 은혜를 입고 모신 적이 있는 몸임을 잠시 잊었습니다.”

“나도 더는 당의 신하라 할 수 없으니 장군이 송구할 것도 없소이다. 무 황후가 고구려와 주변국과의 전쟁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중소 지주층과 손을 잡고 당의 건국 이후 오랫동안 정국을 지배하던 무천진 관롱집단을 하나둘 숙청해 버린 것 또한 사실이니 말이오.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인하여 장안의 권력이 모두 야심 많은 여인의 손에 넘어가게 생겼습니다. 내 이런 사달이 날까 염려하여 그토록 고구려와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태종과 지금의 황제께 충언하였거늘.”

같은 주인을 모신 울지경덕의 죽음에 저수량은 스스로를 고구려인이나 삼한인이라 지칭하는 이들과 다르게 속히 그리 편하지 못했다.

* * *

-양동(羊同), 당항(党項) 및 여러 강족(姜族)의 땅을 모두 점령했으니 동쪽으로는 양주(涼州), 송주(松州), 무주(茂州), 휴주(巂州) 등지와 서로 접하였고 남쪽으로는 파라문(婆羅門: 인도)에 이르렀으며 서쪽으로 또한 구자, 소륵등 4개의 진을 점령했고, 북쪽으로 돌궐과 맞닿아, 땅이 만여 리에 이르니 한(漢), 위(魏) 이래 서융(西戎)의 번성함이 이와 같은 적이 없었다.

티베트 자치구의 4배에 이르는, 현 당나라보다 더 큰 영토를 자랑할 토번. 그 제국의 전성기를 선도할 가르친링과 아버지 세노라의 뒤를 이어 즉위할 대몽국 제2대 국왕이자, 후일 중국 왕조의 남조를 개창할 피라각의 조부가 될 라성염이 내 앞에 섰다.

낙양을 정벌하면서 언제고 주변국의 사신이 올 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리 대표급들이 올 것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고구려 막리지를 뵙소이다. 꽤 오래전 아버지와 영주를 찾았을 때 먼발치에서나마 뵈었던 것 같은데 나를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대몽국의 왕자인 라성염이라 합니다. 부왕께서 보내시어 왔습니다. 먼 남쪽에서 막리지의 활약상을 익히 들었나이다.”

이 시기, 약관이 조금 넘은 젊은 두 사람은 고구려가 중원을 다스리는 내 시대에 명실상부 천하 패권을 다툴 일국의 예비 지도자들이었다.

내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주변국의 사신이 언제고 올 것이라 여겼습니다만, 이리도 빨리 올 줄은 몰랐습니다. 물론 첸드로 공은 저도 기억합니다. 토번의 재상이신 가르통첸 공의 아드님이시지요? 얼마 전 토욕혼을 공략하는데 가장 먼저 계책을 짜고 군사들을 거닐고 쳐 큰 전공을 세웠다 들었습니다. 토욕혼의 왕성에도 가장 먼저 입성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요.”

내 칭찬에 건장한 체격의 가르친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큰 계책일 것도 없습니다. 내 계책이 중원의 명장 이세적과 울지경덕을 꺾을 정도라 여기지도 않고요. 내 이 낙양 궁궐까지 오면서 고구려군의 기강을 보니 가히 당의 정병 10만을 압도할 기세였소이다.”

사막과 고산 지대가 펼쳐진 지역에서 온 인물답게 진한 눈썹과 눈매를 보이는 가르친링은 과연 미래 토번 왕조 영토 확장의 일선에 선 그 기록대로 낙양을 찾자마자 우리 군의 기세부터 엿보았다.

마음 같아서야 어쩌면 고구려의 후환이 될 수 있는 저 가르친링을 여기에 잡아 두고 돌려보내고 싶지 않으나, 당 왕조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라도 미래 지식과 역사를 잠시 내려놓으며 참아야 했다.

“과찬이십니다. 당의 황제가 서북의 돌궐과 북쪽의 돌궐, 그리고 서녘의 토번에 힘을 쓰고 있으니 제가 고구려와 삼한의 용사들을 거느리고 큰 무리 없이 낙양까지 정벌한 것입니다.”

“이거 참, 그에 앞서 임유관에서의 승리와 제음에서의 대승이 있질 않았습니까? 그나저나 고구려는 막리지의 큰 용병술로 이 중원까지 힘으로 밀고 들어왔으면서 주변국의 관계는 조사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으응, 내가 주변국의 조사를 하지 않았다고?

그럴 리가 있나.

그때 가르친링이 콧방귀를 뀌며 옆에 선 대몽국의 왕자를 날 선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이리 원수를 옆에 세워 두시니 고구려가 정녕 우리 대토번국과 친선을 맺고 싶은지 의심이 듭니다. 크흠.”

“그것은 토번이 아니라 우리 대몽국이 할 말이외다! 걸핏하면 국경을 넘보아 재물이나 계집이나 요구하는 서쪽의 오랑캐가 토번의 간포가 아니오?”

“뭐요?!”

라성염의 반응에 가르친링이 언성을 높였다.

이미 알고 있는 대로 당나라는 몽사조를 지원하여 토번을 견제하고자 했다. 이세민 통치 시기의 몽사조의 추장이자 당나라 수령대장군이었던 장낙진이 현 대몽국의 왕인 몽 고조 세노라의 장인이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여기 있는 라성염은 당나라 수령대장군의 외손이자 한동안 토번과 적대적인 관계를 이어 가는 인물이 되는 셈이다.

두 사람이 내 앞에서 격돌할 것 같은 분위기에 내가 끼어들었다.

“우선 대몽국의 사신께 묻겠소. 대몽국은 육조(六詔) 가운데 유일하게 당나라의 세력권에 속하여 있으며 친당 정책으로 당으로부터 얻는 지원도 적지 않았다 들었소. 그런 대몽국이 어찌 우리 고구려와 외교를 맺고자 이 먼 곳까지 온 것이오?”

“나는 대몽국의 왕자로서 보급품의 운송과 몽국 상단을 통솔하고 있소. 당의 운하가 막혔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소금과 곡식의 양이 반으로 줄었으니 이 시급함에 급히 알아본바, 고구려가 운하를 장악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소이다.”

“우리 토번은 얼마 전부터 당에서 얻는 소금이 반의반으로 줄었고 또 값은 배로 올랐으니 비단길을 확보한 것이 오히려 손해가 되고 말았습니다.”

가르친링과 라성염이 당군의 눈을 피해 상단으로 위장하여 낙양까지 들어온 사정을 저마다 토로했다.

야채, 식초, 장도 없는 토번과 남조가 소금 수급이 어려워진다면 당과 외교를 이어 나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나저나 이 시기에 토번과 남조국의 주요 다음 세대가 방문한 이유는 역시나 운하 차단에 있었다. 일국의 다음 후계자쯤 되면 경제권이야 이미 그들의 수중에 있을 터인데 교역으로 얻는 전략 물자가 하루아침에 절반으로 줄어들었으니 그 사정을 직접 알아보고자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였다.

“준비해 놓았습니다, 막리지.”

내가 눈짓하자 선도해가 저수량이 미리 작성해 둔 중원의 지도를 두 사신이 볼 수 있게 탁자에 펼쳐 보였다. 정확히는 중원의 지도가 아니라 수 양제가 건설한 운하로였다.

그것을 보고 당황한 두 사신을 향해 내가 말했다.

“이것은 운하로입니다. 한때의 당의 것이었으나 오늘날은 우리 고구려의 것이 되었습니다. 낙양에서 탁군-영주-요동으로 가는 영제거도, 양자강-강남으로 가는 통제거도 모두 말입니다. 화북, 화중, 화남 일대가 모두 연결된 대운하를 우리 고구려가 쥐고 있으니 토번과 대몽국이 이후 당과의 친선을 이어 간다 해도 얻을 것은 많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토번과 대몽국은 틀림없이 당과 외교를 이어 가는 한편, 고구려와도 끄나풀 외교를 맺어 이익을 얻을 생각이었겠지만 장안을 노리는 고구려 입장에서 두 나라의 행보는 중요했다.

“그러니까 막리지께서는 당과 단절하란 말입니까?”

“저, 정말 그런 말입니까?!”

가르친링과 라성염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물었고, 나는 한동안 당과의 단절로 토번과 대몽국이 얻을 이득을 설명했다.

* * *

“장안에서 폭동이 일어났다고요?”

“이연과 이세민 시대 때 천하에 보급된 화폐 개원통보 한 움큼을 가지고도 일가족이 사흘 먹을 식량도 사질 못하니 폭동이 일어나질 않고 배기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식량값이 폭등하였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고구려군이 등주를 점령한 지 만 석 달 만에 열방의 식량값은 폭등했다. 그도 그럴 게 이 중원을 중심으로 고구려, 당, 삼한, 토번, 양 동궐, 왜 등 족히 100만도 넘는 숫자가 움직이며 내륙과 바다를 가리지 않고 사방에서 크고 작은 전쟁을 치렀다. 엄청난 양의 물자가 전장에서 계속해서 소모되고 있었다.

“태대사자는 수군을 거닐고 수로를 막아 운하로를 차단하였고, 대모달은 요동의 기병과 거란의 용병들을 앞세워 장안과 낙양 사이의 통행로를 끊어 곡식을 노획하거나 장안과 인접한 경지를 불태우니 당의 민심은 나날이 흉흉해질 뿐입니다.”

선도해가 당의 고립을 전해 주는 낭보였으나, 나는 그보다도 전날 설인귀가 전해 온 소식에 더 집중했다.

“정지절, 소정방, 임아상, 소사업을 필두로 20만이 넘는 당군이 곧 이곳으로 몰려올 것입니다! 주군.”

연개소문이 중원으로 초대한 돌궐 가한을 황하 부근의 오르도스 고원에서 격퇴시킨 당군이 장안에 집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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