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막리지 막내아들-303화 (302/335)

303화 고구려 천하관 (2)

벌판 위에서 밤새 이어진 대규모 혈전 끝에는 수심 낮은 강을 뒤로하며 만신창이가 된 당 기병 수백과 피투성이 노인만이 헉헉거리며 고구려군을 향해 칼날을 내밀 뿐이었다.

강 근처에 적장이 있다는 보고에 내가 직접 가 보자 과연 학익진 돌격이 저지당하자마자 탄탄한 전선으로 진법을 진두지휘한 울지경덕이 버티고 있었다. 장사들을 이끌고 포위망을 거침없이 뚫은 옛 시절의 무장답게 제음 전투 막바지까지 당군을 지휘하는 험상궂은 노인네였다.

그저 노인이 아니라 삼기의 돌격을 불과 수백의 기병으로 몇 차례나 튕겨 낸 노맹장(老猛將)이라 칭해도 손색이 없지만 말이다.

“좌일마군총관으로 선제를 따라 요좌에 당도하였을 때는 고구려의 성이 높게 보이더니, 이제는 벌판에서 날뛰는 너희 나라 군사들조차 높게 보이는 날이 다 오는구나!”

울지경덕이 거친 숨을 여러 차례 몰아쉬며 내가 오는 모습을 보고는 고구려군을 제법 높게 평가해 주었다. 이미 결판이 났다는 것을 알고 말하는 중원의 백전노장이었다.

내가 왼손을 올리며 울지경덕을 치려는 아군을 멈춰 세웠고,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야 이 전장에선 이세민이 요동을 유린할 때 맞선 고구려군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이민족과 삼한군도 함께 고구려를 위해 싸우고 있으니까 그렇소.”

“동쪽의 오랑캐들이 모이고 모여 힘을 크게 키웠다는 거냐?”

“서쪽의 오랑캐들이 모이고 모여 힘을 크게 키운 것과 같은 이치지요. 큰 차이가 있다면 과거에는 당을 위해 싸운 거란 민족도 말갈 민족도, 타 민족들도 오늘은 우릴 위해 기꺼이 싸우고 있다는 거고요.”

오랑캐라는 단어부터 다소 격하게 말이 오고 갔지만 분리된 나라와 민족이 하나가 되었을 때는 경천동지할 저력이 만들어진다.

다른 것도 아닌, 바로 역사가 이를 증명했다.

50만, 100만 대군을 일으킨 중원의 통일 왕조는 말할 것도 없고, 초원을 통일한 돌궐, 몽골 제국, 금나라, 청나라, 거란족의 요나라, 토번 등 수없이 대륙을 위협하거나 아예 중국을 정복해 버린 왕조들조차 모두 자기 민족의 통일에서부터 제국의 역사를 열었다.

불완전한 삼국 통일로 알려진 신라조차 육지와 바다에서 들어오는 20만 당군을 상대로 삼한 땅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바다 건너 일본은 뒤늦게 통일을 하고서야 비로소 조선을 발판으로 중국을 넘보는 제국주의적 야심을 차츰 키우기 시작했다.

고구려 주도의 통일은 그 전후로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북방의 패자(霸者)로 군림하고 중원을 정복한 몽골계 종족, 말갈족, 거란족, 돌궐족 등을 복속시킨 기반 안에서 삼한을 합친 국력으로 이어진 셈이다.

나는 삼한의 잠재력과 북방 민족의 저력을 믿으며 10년에 걸쳐 식량을 증산하며 인구를 크게 늘렸고, 호패를 내리는 등 고구려인으로 동화시키며 그들과 함께 이 중원 한복판에 있는 광야인 제음 벌판에 이르게 되었다.

그 결과는 10년 뒤에 지금보다 더 큰 결실을 맺으며 나타날 전망이다.

한편 자신을 오랑캐라 칭한 것이 어지간히 불쾌했는지 한동안 입을 닫은 울지경덕을 향해 내가 마저 말을 이었다.

“장군의 수하들 가운데 수천은 이미 제음에서 빠져나가 낙양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고구려 오랑캐들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누군가는 전해야 할 것이 아니냐? 그것이 아니면 내가 왜 그들을 따라 도주하지 않았는가 그걸 묻고 싶은 거냐?”

“충분히 빠져나갈 수도 있었을 겁니다.”

“내 고희가 넘은 이 나이에 수하들을 버리고 꽁무니를 빼랴. 장수란 자고로 전장에서 죽어야 영예롭다는 것도 모르다니, 정녕 오랑캐 수령 개금의 아들이 맞구나!”

누가 체통에 신경 쓰는 이 아니랄까 봐 보통 자존심이 아니다.

내가 막 반박하려고 하자 옆에서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도종이 끼어들었다.

“그대로 도주하였다면, 고구려와 내통을 하였다 조정에서 모함을 받고 장손무기, 등선과 같이 토사구팽을 당할 것이 뻔하여 그런 게 아니겠소?”

“뭐라?!”

“십수 년도 전에 황실 종친인 내게 손찌검을 하여 선제께서 장군에게 한고조의 공신인 한신과 팽월의 목이 달아난 걸 두고 같은 경고를 하셨소이다! 하여 장군이 제음에 남은 까닭은 용맹하거나 제 군사들의 명예를 챙기고자 함이 아니요,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운 게지요. 그러므로 오늘날 장군이 하는 짓은 겨우 일신의 명예와 가문을 보존하고자 제 군사들의 목숨을 사지에 던지고 아끼지 않는 가장 위선적인 행위요!”

“가, 강하왕!”

이도종의 발언에 울지경덕이 속을 들킨 듯 이를 갈았고, 옆에서 그 얘기를 듣던 울지경덕 휘하 별동대들도 당황하기 시작했다. 모르긴 몰라도 낙양 최정예 기병들의 저항으로 인하여 고구려군의 피해가 다소 불어났다. 한 사람의 장사가 수십의 장정을 쓰러뜨리는 것도 가능한 장소가 바로 이와 같은 평지의 전장이었다.

“당장 무기를 버리거라! 누가 너희의 명예를 알겠느냐? 여길 보거라. 나는 선제께서 임하신 당 왕조의 재상이다. 그런데 지금 내 처지가 어떠하냐. 나라를 위해 충심으로 간언하였으나 끝내 버림을 받아 온 가문이 멸문을 당할 처지가 되었으니 내 인생이 헛되었다. 너희가 여기서 죽은들 너희는 패장들이요, 아무도 너희를 기억해 주지 않을 것이다. 너희 식솔들은 패장의 식솔들로 망국의 불명예를 뒤집어쓰는 것이니 그 또한 헛되도다. 보답하지 않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 말거라.”

뒤늦게 내게 합류한 저수량도 울지경덕을 따라 끝까지 저항하는 당군 무리를 꾸짖음으로 한 소리 거들었다. 그러자 울지경덕의 수하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차례차례 무기를 버리기 시작했고, 이 상황에 재차 이를 간 울지경덕만이 홀로 남아 단신으로 고구려군 넷을 베었으나 곧 지쳐서 무게중심을 잃었다.

“허어헉!”

이내 기진맥진하여 말에서 떨어진 그를 포위한 가야군 보병 수십의 창칼이 그의 몸을 동시에 겨누며 마침내 제음에서의 전투가 막을 내렸다. 셀 수 없는 많은 양의 명광개와, 병장기와 말 그리고 시체가 들판을 가득 메웠다.

“저 노인을 따르는 무리가 많으니 울지경덕을 당장 참해야 하오! 그래야 죽은 군사들의 한을 풀 수 있을 것이오, 막리지.”

“소인의 생각은 다르옵니다. 울지경덕을 참하되, 낙양에 입성하여 참하십시오. 그래야 큰 장애 없이 낙양을 얻을 것입니다.”

포박한 울지경덕을 두고 두 당나라 출신 이도종과 저수량의 의견이 갈렸다. 전투를 치른 군사들의 반응이야 응당 당군의 극심한 저항으로 인하여 적지 않은 피를 보았으니 울지경덕과 무기를 버린 그 수하들의 목을 모조리 베어 버리라는 분위기가 강했으나 나는 저수량의 말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울지경덕을 낙양에 입성하여 참하라니요? 어찌하여 그렇게 해야 낙양을 쉬이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등선 선생.”

“강하왕의 말씀대로 울지경덕 장군은 한때 크게 천하에 이름을 알리었고 오늘날도 당나라 무장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텁습니다. 그를 여기서 참한다면 천하의 무인들이 나라를 지키고자 싸운 그의 충의에 감동하여 고구려를 대적해 들고일어날 것이고, 오히려 울지경덕과 그 수하들이 삼군대장군의 은혜에 감읍하여 투항하였다는 소문을 흘린다면 낙양의 군사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기꺼이 성문을 열고 투항할 것입니다.”

그 말 뒤에 선도해가 넌지시 고개를 끄덕이며 저수량의 의견에 동조하는 눈짓을 하였고, 저수량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이도종이야 한때 자신을 패고 다닌 일로 울지경덕에 대한 악감정이 남아 있기도 할 테지만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할 성격은 아니었다.

장안이라는 큰 고비 앞에서 낙양의 고비를 무난하게 넘을 수 있는 계책이 필요했다. 당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저수량의 정략적인 조언은 나나 선도해가 보아도 그럴듯했다.

결심을 마친 내가 삼기의 장군들과 검모잠, 연근행, 김인문, 부여융, 흑치상지, 지수신 등 모든 제장들을 소집하여 말했다.

“능연각 공신 좌일마군총관 울지경덕을 따르는 천하의 용장들이 무기를 버리고 강하왕, 등선 선생과 같이 고구려에 투항하여 나 연남산을 따르겠다 하였소. 하여 울지경덕에 대한 처우는 낙양의 궁궐에서 정하려 하니 제음에서 얻은 노획품들을 골고루 나누어 주어 군사들이 불만을 가지지 않도록 잘 타일러 주시오.”

* * *

“그, 그게 무슨 말이오?! 대패라니, 울지경덕 장군이 패하였다?!”

제음 벌판에서의 대패 소식이 울지경덕 휘하 부대총관 왕문도를 통해 대명궁에 전해졌다.

“수, 수십만 대군입니다. 개금의 아들이 수십만 대군을 일으켜 장안으로 오고 있사옵니다! 황제 폐하.”

“수십만이라니? 등주와 내주에 나타난 고구려군이 4만이다, 6만이다, 9만이다 하는 소문은 들었어도 수십만이라는 소문은 내 듣지를 못하였거늘!”

“10만 기병이 저들의 말 수에 압도를 당하였으니, 이는 수십만 대군임이 틀림이 없사옵니다.”

제음 벌판에서 처참하게 패한 나머지 큰 충격에 빠진 왕문도는 도리어 황제 앞에서 고구려군의 수를 과장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학의 날개가 형편없이 잘려 나간 통에 비슷한 군세가 기병 1인당 일곱, 여덟 마리 과하마를 데리고 다니는 고구려 기병 수에 압도를 당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오르도스 고원에 나가 있는 의정 장군을 속히 불러오도록 하십시오. 모든 군사를 모아야 할 때입니다!”

소정방이 심각한 표정으로 어좌에 앉아 있는 이치를 향해 의견을 말했고, 이에 놀란 이치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짓하며 다급한 상황을 표현했다.

“당장 정지절 장군을 불러 오라! 모든 군사를 장안에 집결시킬 것이오! 비단 1만 필과 담비 가죽 2천 장, 장안의 미인 3백을 보내는 것으로 토번의 가르통첸이 장안과 안서 4진을 노리지 않는다는 약조를 하였으니 짐이 더는 서쪽을 염려하지 않겠소.”

이치가 그리 선포하는 그때에, 허경종으로부터 귀띔을 받은 무 황후가 나섰다.

“황제 폐하, 아무래도 울지경덕이 배신을 한 듯싶사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황후.”

“울지경덕을 따르는 장사 6백이 연남산에게 투항을 하였다 합니다. 연남산이 이끄는 오랑캐 군사 숫자는 울지경덕이 이끄는 우리 군사와 비슷한 10만이요, 10만과 10만이 평평한 들판에서 충돌하였는데 저들은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낙양으로 진군해 오고 있습니다. 내통이 없이는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무 황후의 말에 이치가 노기로 가득 찬 낯빛으로 왕문도를 노려보았다.

“네놈이 울지경덕과 모의하여 배신하고 짐을 능멸하였구나!”

“아니옵니다!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황제 폐하.”

“역적 울지경덕과 왕문도, 그 수하들과 연루된 자를 모조리 잡아들여 참하라!”

그날 밤 장안과 낙양을 중심으로 피바람이 몰아쳤다.

* * *

‘낙양에 당도하였을 무렵에는 삼한에서 내가 편제한 원정군의 절반을 잃을 수 있다.’

첫술에 등주를 점령한 뒤 내가 내주에 이르렀을 때의 아군의 피해 현황을 보고받으며 든 예상은 정확히 그러했다.

운이 좋으면 절반이고, 서돌궐로 떠난 소정방군의 이동 시기와 중원 내 방위 병력의 저항, 연개소문과 양만춘, 연수영의 상황에 따라 그 이상의 피해도 감수해야 했다.

그리고 10만 당 기병을 포진한 울지경덕과 제음에서의 격돌을 앞두고서는 내 첫 예상이 빗나가지 않을 것이라 거의 확신하기도 했다.

“고맙습니다. 대모달께서 조금이라도 늦게 당도하셨다면 아군도 많은 피해를 입었을 겁니다. 고구려, 삼한, 거란을 합하여 1만 6천이 죽고 1만에 가까운 병력이 심한 부상을 당하여 더는 함께할 수 없으나 여전히 10만이 진군할 수 있습니다. 남북의 운하로가 만나는 대운하의 종착지 낙양을 점령하고 대막리지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음에서 완벽하게 승리를 굳힐 수 있게 만든 공로로 양만춘을 빼놓을 수 없었다. 양만춘도 10년 전과 다르게 나이가 많이 들어 보였지만 비장한 표정은 여전했다.

“내가 없어도 이겼겠지만, 낙양까지는 무리였겠구나.”

“대모달과 태대사자의 도움이 없었다면 제음에서의 큰 승리는 없었습니다.”

“너희도 들었느냐? 고구려의 막리지께서 너희의 공로를 칭찬하셨느니라. 하하하.”

양만춘이 뜬금없이 요동의 군사들과 거란의 용병들을 향해 웃으며 나를 자랑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들의 환호를 받으며 본대를 이끌고 강을 넘어 유유히 낙양으로 진군했다.

“그나저나 이 넓은 땅에 마름쇠나 쇠못, 철 조각 한 점도 떨어져 있지 않구나.”

수성의 달인인 양만춘의 말대로 산동반도에서부터 이곳까지 당의 요새 가운데 어떠한 장애물도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한 고비 한 고비마다 요새와 마름쇠 지뢰가 있었던 신라와 백제에 비해서는 훨씬 쉽게 이 먼 낙양까지 진군해 온 것이다.

이는 아마도 거대한 통일 왕조 안에서, 그것도 장기간 평화를 유지해 온 중원에서 애초에 함정을 파 놔야 빠지는 것은 적군이 아니라 그 땅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일 터다.

그러나 그 덕분에 내가 당나라 황제의 얼굴을 보기까지 시일만 더 단축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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