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중원 속 고구려 (2)
“성 밖에 오랑캐들이 나타났다!”
“서토의 오랑캐들을 향해 쇠뇌를 발사하라!”
“임유관과 요서 일대를 집요하게 침탈하고 노략질한 오랑캐 두목 유인원이 저기 있다! 놈을 놓치지 마라!”
제6군 신라군과 더불어 등주에 기습적으로 상륙해 등주 관아와 동쪽 성벽을 점거한 걸걸중상, 걸사비우, 연근행이 상륙하기 전 미리 준비한 신라의 천보노와 포노를 설치해 노병과 궁수들에게 일제히 명을 내렸다.
이성산성과 국원성 공방전에서 포노를 앞세운 신라군의 수성에 상당히 고전을 한 고구려군은, 이번에는 신라군의 도움으로 역으로 포노와 같은 수성기를 등주 성벽에 배치하며 성으로 들어오려는 유인원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탱탱!
큰 소음 없이 여러 대의 화살이 성 밖으로 연달아 날아갔다.
쨍쨍!
뒤에서는 설인귀의 추격군이 꽹과리를 치는 소리가, 정면에서는 등주성에서 무소음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왔다.
“끄악!”
“아악!”
당군이 방패를 들거나 화살을 꺼내 미처 대응하기 전에 연달아 발사된 예리한 쇠뇌촉이 유인원군의 말들 몸통에 한 발, 두 발 연달아 명중했다.
히이잉!
쇠뇌촉에 몸통이 여기저기 파이자 고통에 신음하며 말들이 요동쳤고,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게 된 유인원군은 뒤따라오는 설인귀군의 화살 공격과 흑치상지군의 창날 공격에 무참히 쓰러졌다.
“이, 이놈들!”
이윽고 등주성 성벽에 등주자사의 목이 걸려 있음을 확인한 유인원이 악다구니를 썼다.
유인원은 아끼는 수하들을 내보내며 시간을 벌게 하면서 가까스로 등주까지 도주하는 데 성공했음에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더 이상 말을 몰 수가 없었다.
“헤헥.”
300~400리 길을 쉴 새 없이 달려온 터에 유인원을 포함한 당군이 탄 말이 극도로 지치면서 속도가 나지 않았고, 그에 반해 설인귀의 추격군은 계속해서 지치지 않는 말들로 갈아타면서 속도를 유지했다.
추격군은 여유롭게 입에 육포 한 점씩 씹고 있던 반면, 연신 등을 보인 데다 지친 말을 타고 허기까지 졌던 유인원군은 사기에서부터 이미 고구려군에 비해 크게 저하되어 있었다. 특히, 등주성에 돌아가 성이 고구려군의 수중에 넘어간 걸 본 뒤로는 완전히 압도당했다.
‘대체 얼마나 많은 군사를 상륙시켰길래 등주성이 이리 삽시간에 무너졌단 말인가! 내가 성을 비운 지 얼마나 됐다고!’
각기 좌우효위낭장인 유인원과 유인궤가 모두 출전해 성을 비웠다고는 하나, 등주성에 수비 병력으로 배치된 군사만 해도 족히 1만은 넘었다. 등주자사가 긴급 징병을 시행하여 성내의 사내들을 모두 무장시켰다면 족히 3만에 육박했을 터.
하지만 유인원은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버티지 못하고 속절없이 무너진 등주성을 보며 좌절했다.
“열 장군의 염려대로 진정 연남산이 왔단 말인가!”
요서에서 계필하력을, 임유관에서 이적 대총관과 영주총관 정명진을 죽인 삼기군의 깃발이 앞뒤로 보이자 유인원은 혀를 찼다.
“돌아갈 곳을 잃어 허둥대는 당군의 움직임을 보니 적장이 완전히 속아 넘어간 것 같습니다, 중상이 형님.”
“그런 것 같구나. 아직 서문과 남문은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여 신라군이 분전하고 있으니 말이다. 저들이 눈치챘다면 그곳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가려 했겠지.”
“동쪽의 설 장군을 치러 간 당의 장수가 필경 동문으로 도주할 것이니, 등주자사의 숨을 끊는 대로 이곳을 먼저 점령하라고 일러 주신 막리지의 선견이 아니겠습니까?”
두 말객의 대화에 연근행이 의기양양하게 끼어들었다.
“막리지께서 서쪽의 내주와 청주, 치주 방면 산동반도 내 당군의 원군들이 몰려올 곳을 막아 주신다면 오늘 밤 안으로 등주를 점령할 수도 있겠습니다!”
“설 장군께서 나서 주신다면 해가 지기 전에 점령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오.”
눈매를 한 번 씰룩한 걸걸중상은 성 밖에서 유인원군을 일망타진하는 설인귀를 발견했다.
챙챙!
설인귀의 방천화극과 유인원의 철퇴가 충돌하며 묵직한 쇳소리가 울렸다.
과거 북방을 대표했던 민족인 선비족 출신 무인과 흉노계 출신 무인의 격렬한 일기토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노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오랑캐 설인귀야, 감히 선황의 은혜를 이리 배은망덕으로 갚아?”
몇 합을 겨룬 유인원의 고성에도 한때 당나라 유격병 출신이었던 설인귀는 나름 격식을 갖추며 말했다.
“정관천자(貞觀天子)이신 태종께서 당 왕조의 실질적인 창건자이셨고, 황제의 직함에 막북의 패자 돌궐의 가한직마저 귀속되어 천가한이 되셨으니, 천하의 무리가 따르는 것은 당연지사였소.”
원래 이런 성격은 아니었지만, 아랫사람은 제 주인의 행실을 닮아 간다고, 전장에서의 격식을 배운 설인귀였다. 그 덕분이지 잘 풀리지 않는 전장에서도 좀처럼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선황의 은혜를 배은망덕으로 갚는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게구나!”
“내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나를 귀히 여겨 주신 태종의 은혜는 크시나, 그 치세가 머지않아 막을 내림을 일러 준 이가 있으니 오늘날 내가 모시고 있는 대고구려의 막리지외다. 막리지의 포용심 역시 태종의 것과 비해도 작지가 않소이다. 그 혜안은 또 어찌 대단한지, 이제 태종께서는 아니 계시고 막리지께서는 장성하시어 천하에 큰 뜻을 펼칠 시기가 왔으니 내 선택이 옳은 것이 아니겠소?”
설인귀는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거의 확신하며 말하고 있었다.
-내게는, 세월이 있습니다.
천하를 통일하고 막북의 패자가 된 이세민조차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소년. 설인귀는 무패 신화를 쓰던 이세민에게 안시성에서 처절한 패배를 선사하고 자신의 앞에서 당당하게 세월이 있다고 외친 어린 소년의 재치와 매력에 흠뻑 빠지며 오늘에 이르렀다.
이미 완성된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며 출세하는 것보다 아직 미완이나 완성될 수 있는 지도자의 밑에서 함께 성장하고자 했던 설인귀는 장성의 관문을 뚫고 삼한을 평정하는 과정 속에서 그 가능성을 모두 확인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철퇴를 버린 유인원이 대도와 창날 끝부분이 뱀처럼 구부러져 있는 사모를 들고 설인귀와 스무 합을 넘게 겨루었다.
히잉. 그러나 곧 지친 말이 중심을 잃으며 휘청거리자 설인귀가 거침없이 속도를 내어 유인원의 팔을 찔렀고 말에서 떨어진 그의 목을 베었다.
와아아아!
유인원의 목이 떨어지자 성벽 안팎은 고구려·말갈·삼한 중원도 연합군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등주자사와 유인원의 목이 떨어졌다는 소문에, 아직 장악하지 못한 서문과 남문의 당군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기 시작했다.
한편 산동 습지에서 등주성 성벽과 내성, 해안가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지역은 2만에 달하는 당군과 유인원을 따르는 이민족 군사 수천의 시체로 가득했다.
* * *
등주성 방면에서 붉은 연과 푸른 연이 잇달아 오르자 계획대로 관아와 동쪽 성벽이 우리 군의 수중에 장악되었음을 확인했다.
‘늘 줄기차게 침략만 해 왔던 놈들이 수세에 몰리니 해안가를 어떻게 지키고 성을 어떻게 방어해야 하는지 까맣게도 잊었을 테지.’
백병전에 능한 당의 주력군이 성 밖으로 빠져나간 여파도 있겠으나 등주성 점령의 평을 하자면 정확히 그러했다.
등주성을 지키는 당군의 주력은 농사짓는 사람 혹은 뱃사람 출신이나 상인들이었다. 그것도 묘도군도와 장산군도, 요동만 해안가 일대를 집요하게 치고 빠지며 도발만 주로 걸어온 출신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런 그들도 좀처럼 제 땅을 지키거나 수성을 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상륙에 능한 부대의 공격을 받으니 목책 설치라는 해안가 방어에 대한 기본조차 이루어지지 못하고 공세를 허용하고 만 것이다.
요약하자면, 발해 무왕이 장문휴를 시켜 기습 상륙으로 산동의 등주자사 위문을 죽이고 당나라에게 처절한 패배를 안겨 주었던 일이 76년 먼저 일어나게 된 것뿐이었다.
연수영이 동황하강의 길목을 틀어막으며 당의 수로를 압박하고 영주에서 출병한 연개소문과 양만춘이 탁군으로 진군할 때, 나는 최소한의 시간으로 산동을 장악한 뒤 대륙의 온 물자를 싣고 나르는 대운하를 끊어야 했다.
낙양-장안 직통으로 갈 수 있는 산동 반도의 서쪽 끝에서 다시 서쪽으로 400리 길에 있는 조주만 점령한다면, 천하의 물류를 내가 움켜쥘 수 있었다. 대륙의 강남 지방이라 할 수 있는 양자강 이남과 화북 일대, 동황하강을 따라 한곳으로 모이는 곳이 바로 낙양에서 동쪽 600리 길에 있는 조주였다.
당나라 경제의 핵심부인 조주를 점령해야만 대운하를 틀어쥐며 대륙을 다스릴 수 있었다.
“상륙하라!”
본대를 거느리고 경계가 허술해진 내주 상륙에 성공한 나는 신속하게 당의 해안 초계를 무력화한 뒤 서쪽의 넓은 평야 지대로 진군했다.
이치가 서돌궐을 평정하기로 작정한 이상, 당의 주력은 서쪽 전선과 장안, 낙양에 집중돼 있었다. 그리고 북으로는 동돌궐을 견제하고자 막북에 치중하는 사이, 나는 유유히 산동 평원을 제7군, 제8군, 제9군 보급부대까지 도합 8만 5천의 병력으로 뒤덮어 대군의 위세를 떨쳤다.
“산동의 내주, 청주, 치주, 덕주, 체주, 기주 지역의 군사가 유인궤의 징집 명에 따라 모두 탁군으로 출병하였습니다.”
정탐선을 거느리고 앞서 내주에 상륙하여 내주 서편 청주 인근까지 척후를 보낸 검모잠이 내게 보고했다.
내가 막리지에 오르기 한 해 전에 삼한 지역 가야부 욕살이자 태대형에 오른 그였다.
“그 수가 얼마나 됩니까? 태대형.”
“족히 6만은 될 것입니다, 막리지.”
당나라 면적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산동 반도의 징발만으로 6만이나 되는 군사를 하루아침에 모아 올려 보낼 수 있는 국력은 가히 부러울 수준이었다.
누구는 고구려에서건, 삼한 땅에서건 최소 몇 년은 빡세게 준비해야 동원 가능한 군사 규모이니 말이다.
“낙심하실 일은 아닙니다. 인근 6만의 군사가 일거에 빠져나갔다면 현 산동은 무주공산 같은 땅이 되었을 테니까요.”
심사숙고하는 내게 검모잠이 그런 위로를 해 주었다.
“저들이 우릴 오랑캐라 업신여기어 우리도 저들을 오랑캐라 부르고 있으나 당은 큰 나랍니다. 강남에서 군사가 올라올 수도 있고, 산동의 소식이 장안에 들어가는 대로 이치가 곧바로 대응할 수도 있습니다.”
“변수가 많다는 게로군요.”
내 고민이 검모잠에게 전달되었고, 나는 때마침 내 곁에 도착한 당나라 황족에게 확인차 물었다.
“이정, 이적, 정지절과 더불어 이세민과 함께 천하를 주유한 울지경덕이 10만 군사와 함께 낙양을 지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강하왕.”
“그렇습니다. 울지경덕은 비록 칠순이 넘는 노장으로 장손무기와 더불어 제게 큰 모욕을 준 자이기도 하지만, 선황과 함께 천하를 통일해 당 왕조를 창업한 주역 중의 주역입니다.”
나는 연수영과 헤어지고 내주에 상륙하기 하루 전 왕건위가 데려온 이도종으로부터 얻은 당나라의 지리와 지형, 이세민의 유산인 당나라 무장들에 대한 정보를 재차 정리하며 대당 정벌의 마지막 점검을 마무리했다.
내가 공들여 준비시킨 강하왕 이도종은 내 곁에서 당나라를 반으로 쪼개며 점령지 대륙의 민심을 안정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 * *
“연남산이 이윽고 일을 치렀구나.”
“옛 조선이니 제 나라의 땅을 되찾겠다는 명분도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우리도 슬슬 다시 준비해야겠구나, 아들아.”
“소자가 선봉에 설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이번에야말로 토욕혼을 완전히 멸하여 장안으로 가는 길목을 확보하겠습니다! 아버지.”
당나라를 정벌하겠다는 연남산의 출사표가 북방의 초원을 거쳐 토번에 이르렀다.
연남산을 기억해 둔 가르친링은 이상하게도 고구려에 뒤처지고 싶지 않았다.